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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천 목사 준비중

광야의 잔치! (요 6:4-11)

by 【고동엽】 2022. 1. 24.

광야의 잔치! (요 6:4-11)

 


오늘 읽은 말씀은 소위 오병 이어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병 이라는 말은 떡이 다섯 덩이라는 말이고, 이어라는 말은 물고기가 두 마리라는 말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도시락을 싸 왔는데 그 도시락 내용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광야에서는 뜻밖에도 대단히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엉터리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병 이어로 어떻게 오천 명을 먹이고 또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그런 이야기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엄연히 성경속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사복음서가 모두 증거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 같은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풍성한 감정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지하 자원은 자꾸만 고갈되어 가고 있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이때에 무엇인가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황당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이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현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전 공학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연구가 바로 이 오병 이어의 기적을 오늘에도 다시 한번 재현해 보려고 하는 연구입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는 벼 한 이삭에 80개 내지는 120개의 벼알이 달렸었는데 이 유전 공학에서는 벼 한 이삭에 500개 내지는 1,000개씩 벼알이 열리도록 만들어 보려고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쌀 한 톨을 감자만하게 만들어 내려고도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도시락을 싸 갈 때는 쌀 두 톨씩만 가지고 가면 점심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꿈만이 아닙니다. 머지 않아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보십시오. 옛날에는 사과 하나가 아주 조그만했습니다. 별로 맛도 없었고, 볼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연구 결과 개량종이 나와서 과일이 얼마나 크고, 빛깔도 좋고 맛이 있습니까? 그리고 사철 먹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지금과 같이 연구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는 사과 하나를 수박만하게 크게 만들어 놓을 날도 아마 올 것입니다. 이것만이 앞으로 자원이 고갈되고 인구가 증가해서 먹을 것이 부족할 때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부터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오병 이어의 기적을 오늘에 다시 재연해 보겠다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1. 첫째는 그곳이 빈 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그곳을 "빈 들(마 14:5 ; 눅 9:12)"이라고 했고, 마가복음에서는 "한적한 곳(막 6:32)"이라고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그곳을 "산(요 6:3)"이라고 했습니다. 사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그곳은 분명 광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광야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인적이 없고, 인가도 없는 삭박한 곳입니다. 그곳에 지금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때는 저녁 때입니다. 이 청중들은 지금 점심도 굶은 상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빌립에게 지시하셨습니다. 12제자들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빌립이냐 하면, 빌립이 바로 그 지역 벳세다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지리와 환경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어디를 가면 집이 있고, 상점이 있고, 무엇을 살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들 가운데서 빌립에게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나서 생각을 합니다. "이곳은 내가 잘 아는 곳인데, 가까운 곳에 먹을 것도 없고, 집도 없는데,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다고 해도 갑자기 오천 명이 먹을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혹시 살 수 있다고 해도 돈이 200데나리온이 넘게 필요한데 그 많은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빌립이 실패를 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디 가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사 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데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물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곳에서는 먹을 것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빌립에게 먹을 것을 구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빌립을 시험해 보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람들이 왜 어천 명씩이나 점심도 굶은 채 광야에 모여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뭔가 본 것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그렇게 많이 모여든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표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표적입니까? 며칠 전에 이 군중들은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5:5). 또 죽어 가는 어린 아이를 고쳐서 살려 내는 것도 직접 목격을 했습니다(4:51).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것도 직접 목격을 했습니다(2:8). 그래서 오늘은 어떤 기적이 있을까 보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점심도 굶은 채 광야에 모여들은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기적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직접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여기서도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실 것이라고 믿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와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의 대답은 비관적이었습니다. 어저 기적이 오늘도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여기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하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여기서 실패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 매사를 인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인간적으로만 생각을 한다면 빌립의 생각은 백 번 옳은 대답입니다.
그곳은 광야입니다. 산입니다. 돈도 없지만 있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은 오천 명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장정들의 숫자입니다.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을 포함하면 2만 명도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사란들을 다 배불리 먹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솔직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곳이 그런 곳인 줄 모르고 먹을 것을 구해 보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때로 실패하게 하고, 실망하게도 합니가. 여러분, 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한번 내다보십시오. 그 미래가 희망적입니까? 아니면 소망적입니까? 순 인간적으로 앞을 내다보면 백 번을 보아도 희망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중동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가 앞으로 30여 년 사용하면 고갈된다고 합니다. 석유가 없어지면 가스도 없어집니다. 이미 석탄은 바닥이 났습니다.
거기다 인구는 대책 없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늘어 가다가는 앞으로 10여 년만 지나면 세계 인구가 80억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인구만도 10년 후에는 6천만, 남북한 인구를 합하여 1억이나 될텐데 그러면 그때는 뭘 먹고 살 것입니까? 계산대로라면 10년 후에는 식량 부족으로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인심은 갈수록 삭막해집니다. 도적은 극성을 부리고, 살인은 다반사이고, 세계 도처에서 사고, 지진, 홍수, 가뭄, 전쟁으로 고통이 그치질 않습니다. 자연은 황폐화되어 가고 있고, 물은 썩어 가고 있고, 대기는 오염으로 파괴되어 지구는 점점 온난화되어 더워진다고 합니다. 장래 어디에 소망이 있고, 어디에 희망이 있습니까? 순 인간적으로 앞을 보면 미래에는 불가능뿐입니다. 절망뿐입니다.
빌립의 대답은 맞습니다. 그곳은 광야입니다. 보이는 것은 모두 벌판이고, 돌이고, 황량한 들뿐입니다. 어디 가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구합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 세상을 그냥 내벼려 두신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인간적으로 미래를 생각하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을 내버려 두신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지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대책을 다 세워 놓고 계십니다. 여기 광야에 사람들이 오천 명이나 모여 있지만 그들이 예수께 온 이상은 그곳이 빈 들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이라 할지라도 결코 굶주리지 않습니다.
빌립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가능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오기만 하면 굶주림이 없고, 예수께서 함께 계시기만 하면 그곳이 빈들이 아니라 더한 첩첩 산중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없다고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100명씩, 50명씩 떼를 지어 앉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호시김 어린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다만 보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데 왜 저러시나, 나누어 줄 것도 없는데 앉히기만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제자들은 사람들을 나누어 앉히면서도 걱정스런 마음으로 예수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하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관심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 굶주린 오천명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비된 것을 나누어 주어서 배불리 먹게 하는 일이 관심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지금 이곳은 빈들인데, 무엇을, 어떻게 주려고 저러시나 하는 근심 어린 마음뿐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의중을 미리 알았다고 해 보십시오. 그리고 어제 38년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엊그제 죽어 가던 어린 아이가 살아나고,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듯이 오늘도 그런 기적이 또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신이 나서 사람들을 돌아다니면서 앉혔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의중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근심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앉히느라고 수고를 했습니다.


3.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으면서도 앞으로도 그 은혜로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어둡습니다. 항상 날마다 마음을 조이며 조마조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빌립을 위시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의중을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그날 신나게 일을 했겠습니까? 오늘도 어제처럼 기적이 또 일어난다고 믿었더라면 그날 제자들은 얼마나 신이 나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앉혔겠습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의 눈에는 어제의 그 기적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고작 해야 메마른 광야만 보였을 뿐, 어제처럼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 "불가능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시험에 낙제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 준비해 놓고 계신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고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에서 자꾸만 불가능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4. 빌립이 왜 그렇게 실패를 했습니까?

 

거기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이 바로 그곳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바로 그 지역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곳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빌립으로 하여금 너무 쉽게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곳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들은 뭘 좀 안다는 것이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들이 지식이 조금 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영적인 안목을 깊이 있게 갖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조금 모르면 알려고 노력이라도 할텐데 그리고 귀라도 기울여 볼텐데, 그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한번 들어보려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손해를 볼 때가 있습니다.
빌립이 그곳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나가서 먹을 것을 찾아보는 수고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그곳을 좀 "안다는 것 때문에" 그런 수고도 해보지 않고 쉽게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설픈 지식을 가진 사람이 신앙 생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안다는 것이 때로는 장벽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오병 이어의 기적 속에는 이 같은 사연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빌립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이 실패는 빌립의 실패가 아니고 바로 나의 실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좀더 깊이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좀더 깊이 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야 보다 깊은 데 있는 보화를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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