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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제사 (창 4:1-12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3.

<마음의 제사> 창4:1-12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궁금해지는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면, 두 사람의 제물 사이에는 분명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보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물이 더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진다는 설명을 내놓았지만 성경적으로 설득력이 약합니다. 한 가지 수긍할만한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한 데에서 사람들은 가인이 그의 농사의 수확물 중 특별히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수확물의 일부를 드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한 4절에서 사람들은 아벨이 정성으로 제물을 드렸음을 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저 "양의 첫 새끼"라고 했지만 원문의 뜻은 아벨이 그의 "양 무리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와 달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성과 겸손의 제사였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바로 아벨의 제물에 함께한 그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인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라고 할 수 없었고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 3절 말씀이 가인이 제물로 드린 것이 꼭 첫 번째 소산이 아니라거나 가장 좋은 곡식이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에 비해 더 나은 제사였다는 사실은 히11:4에 의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가인은 의로운 자라 할 수 없었던 데에 반해 아벨은 의로운 자로 여겨졌음도 또한 알게 됩니다. 요일3:12은 가인이 악한 자였음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그리고 잠21:27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따라서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가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설령 가인이 드린 제사와 아벨이 드린 제사 사이에서 제물들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의 차이가 없었다 하드라도, 그 제사를 드리는 가인의 마음과 아벨의 마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의 제사였는가 악한 자의 제사였는가 하는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었다고 미루어 보게 됩니다. 가인의 그러한 인간적 면모를 우리는 그 이후의 그의 일련의 언행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했습니다. "몹시 분하여" 한 것은 극도로 격앙된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며 종종 살인으로 나아가기 쉬운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안색이 변하니" 한 것을 많은 번역성경들은 "얼굴을 떨군 것"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7절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신 하나님의 물으심과 잘 연결될 수 있는 번역입니다. 가인이 왜 안색이 변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그가 믿음도 없이 제물을 드렸음을 하나님께서 아신 것 때문에 안색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이 탄로난 사실 때문에 안색이 변했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6-7절에 보면 그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7절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신 하나님의 물으심은 가인의 믿음 없이 드린 제사와 그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로 인한 그의 분노에 대한 질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것은 네가 바르게 제물을 드리지 않았음을 네가 잘 알기 때문이 아니냐?"






어떤 번역들에서는 이 부분을 "네가 옳은 것을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이 제물을 드린 일도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데 대한 그의 반응도 문제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인이 크게 분노하여 안색이 변하거나 얼굴을 들지 않고 "이제 나는 저 아벨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며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행하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시고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고백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회개와 변화된 행위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신 것은 앞선 비신앙적 태도뿐만 아니라 뒤따라올지 모르는 범죄행위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언제나 죄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하신 말씀에서 "엎드려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단숨에 덮칠 수 있도록 잔뜩 몸을 낮추고"웅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신 말씀 가운데 "죄가 너를 원한다"는 것은 힘을 모아 순식간에 달려들려고 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죄가 언제나 덮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기회를 주지 않도록 잘 다스리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몹시 분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들로 나가 아우를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우려대로 죄는 순식간에 그에게 덮쳤고, 그는 거침없이 그의 아우에게 덮친 것입니다.






가인의 범죄성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증스러움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더 크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그의 죄를 자복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한 것입니다. 우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대답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입니다. 그 다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한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답하기를 거부하고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더 노골적인 불평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레25:47-49에 보면 이런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즉 누가 곤경에 처할 때 그를 그 곤경에서 구해줄 책임이 첫째로는 그와 이촌지간인 형제에게 있고, 그 다음은 삼촌에게 있으며, 그 다음은 사촌형제에게 있고, 그 다음에는 다른 친척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연히 자기에게 있는 일차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아우 아벨의 생업은 양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은 조금 바꾸어 보면 "내가 양 지키는 자의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입니다. 그 말 뒤에는 "지키는 것 잘 하는 사람이 자기도 잘 지키면 될 것 아닙니까?"라는 불평이 숨어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해 빈정거리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 그 말 밑바닥에는 "양 지키는 사람 제물만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키시지 왜 받지도 않으신 제물을 드린 나더러 지키라 하십니까?"라는 항변이 깔려있다고도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결과입니다. 그들의 범죄는 자신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땀 흘리며 일해야 하고 산고를 겪어야 하며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도 친 형제 사이에서도 질투와 살인까지 저지르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파괴는 곧바로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의 파괴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한 번 시작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죄는 계속되고 더 증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바를 상기시키실 때 그들의 죄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하기까지 했습니다.






셋째는, 가인의 불신앙과 범죄행위와 불손함 앞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으나 인간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분해할 때 찾아가셔서 달래기도 하셨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셨으며, 또 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도 주셨습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였을 때에도 그를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 물으시며 그들의 죄를 상기시키셨던 것처럼 가인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가인에게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할 표를 주시며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창4:14-15).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의 중심을 가인의 범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죄지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과 은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우리는 이것을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단순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동산으로부터 쫓겨난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녀를 낳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하신 말씀,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서 거두지 않으셨다는 은혜의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범죄한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유지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믿음으로 바르게 드려진 아벨의 제물만 받으심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바른 신앙의 관계를 지키기를 원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끊임없는 범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의 중심인 우리의 예배 또한 진정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몸은 예배당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악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와 예배로부터 이어지는 우리의 모든 삶이 참된 믿음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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