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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by 【고동엽】 2021. 11. 16.
시민 전쟁과 올리버 크롬웰의 활약


로드(Laud) 대주교는 1638년에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도서와 의식서를 장로교도들인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화약고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았다! 에딘버러의 세인트 자일스(St. Giles) 교회의 유명한 사건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흰 성의(聖衣)를 입고 거드름을 부리면서 한 사제장이 기도서를 읽으려고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분개한 제니 게데스(Jenny Geddes)라는 여성도가 자기가 앉았던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집어던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 되먹지 못한 건방진 인간아! 네가 내 귀에 미사를 들려주려고 하느냐?" 제니의 모범은 그토록 증오하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을 다른 사람들도 분연히 저지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1638년 찰스는 스코틀랜드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군대는 참패를 당하여 1639년에 휴전을 맺었다.


의회와 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런던에서 왕권과 교황권을 반대하는 시위는 금방 진압되었다. 왕은 의회에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애썼다. 그는 1642년 무장한 무리들을 데리고 의회의 지도자인 존 핌과 4명의 다른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하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하였다. 5명의지도자들은 이미 귀띔을 받았기 때문에 탬즈 강의 거룻배를 타고 도망친 뒤 도시에 잠적하였다. 이러한 왕의 행위는 그에 대한 반대를 더 일으키게 하였다. 혁명의 기운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찰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런던을 부득불 떠나야 했다. 1642년 5월에 그는 잉글랜드 요크(York) 시에 자신의 본부를 세웠다.
1642년 10월, 첫 번째 시민전쟁이 에쥐힐(Edgehill)에서 일어났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처음에는 왕정파(왕당원)와 의회파(원두당) 사이에 세력이 엇비슷한 듯 하였다. 그래서 군사적인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고 의회가 스코틀랜드와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조인하였다.


1644년 1월에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국경을 넘었고, 같은 해 7월에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에서 왕정파와 접전이 되어 스코틀랜드와 요크셔[Yorkshirer, 토마스 패어팩스 (Thomas Fairfax)경이 거느림]와 이스턴 어소시에이션[The Eastern Association,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과 맨체스터 (Manchester) 백작이 거느림]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역할과 성공이 드러나서 그의 군사적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고 '철기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승리는 계속되지 못하였다. 의회 지도자들 중에서, 특히 에섹스 백작처럼 유약하고 단호하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의회는 결단력있고 한층 더 투철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꼈다. 더 나은 장군들과 군대 재조직 없이는 승전을 거둘 수 없었다. 크롬웰은 적을 공격하지 않고 퇴각한 맨체스터 백작을 나무랐다. 맨체스터 백작의 답변은 만약 의회파가 왕정파에게 질 경우 어떤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만약 우리가 왕을 아흔아홉번 이기고서도 그와 그의 후손이 여전히 왕위에 앉아 있으면 우리도 여전히 그의 백성이 되오. 그러나 왕이 우리를 단 한 번만 이겨도 우리 목이 떨어지고 우리 후손들도 망하게 될 것이오."


1645년 군대는 새롭게 재편성되었다. 총사령관은 토마스 패어팩스 경이었는데 그는 불과 33세였다. 그의 기병대 장군은 크롬웰이었다. 이때부터 시민전쟁은 크롬웰의 군기 확립과 전략에 의해 결정적인 승리를 바뀌었다. 맥콜리 경은 올리버 크롬웰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의 자유를 위해 헌신했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기병대를 그런 정신을 가진 자들로 채웠다. 그는 군인들에게 잉글랜드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기율을 적용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지적, 도덕적 측면을 개발하여 용맹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로 변화시켰다.


한편 패어팩스는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이해심이 적고 결단력이 부족하였다. 그는 명칭만 총사령관이었지 실질적인 대장은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은 자신의 기병대를 조직한 것처럼 전군을 동일한 원칙에서 편성하였다. 크롬웰 군대가 다른 군대와 다른 점은 엄격한 도덕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군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열렬한 왕정파들도 크롬웰의 군대에서는 맹세를 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노름을 하는 것을 볼 수 없고 또한 장기간의 군사 장악 기간에도 시민들의 재산이나 여자들이 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크롬웰의 기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자기 군인들을 전쟁터로 데려갔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승리를 위해 언제 공격해야 할지 알았다. 크롬웰은 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는 백전 백승의 장군이었다.
그는 사관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에 능하였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가장 위대한 장군들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사람이다. 로마 카톨릭 저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Antonia Praser)는 그녀의 전기에서 크롬웰을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행해야 할 일을 달성하는 것과 그 일을 완전하게 처리하는 것은 규모에 상관없이 탁월한 능력이다. 이 점에서 크롬웰은 당연히 유명 인사의 명단에 올라갈 자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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