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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이승구

by 【고동엽】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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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승구



"새로운 십자가 신학"이란 독일 튜빙겐 대학교 개신교 신학부의 유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과 게르하르트 융엘(Gerhart Juengel)이 발전시키고 있는 신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신학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입장이 루터가 말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xis)을 20세기의 정황 가운데서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을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동일시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입장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입증될 수 있다. 나는 이 논문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몰트만과 융엘의 입장을 검토하여 그들의 입장이 어떻게 루터도 그 한 대표자로 서 있다고 생각되는 고전적인 입장과 다른지를 보이려고 한다.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이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고전적 관점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 명제 자체가 고전적 관점과의 관련 가운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주장자들이 이 명제를 쓸 때의 의미가 고전적 관점의 의미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본 논문의 본문 중에서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좀더 분명하게 최소한 경륜적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며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관점은 경륜적 과정이 없이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일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를 드러내어 보기로 하자.

1. 기본적 진술

<명제>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

이 명제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명제이다. 칼 라너가 이 명제를 가장 먼저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사용하였고, 몰트만과 융엘 등이 이를 적극적으로 동감하면서 인용하고 이로부터 그들 나름의 이해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이 명제에 부여한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은 이 명제를 우리가 위에서 고전적 관점이라고 언급한 것에 가깝게 제시하는 듯도 보인다. 라너는 어거스틴 등으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이를 주창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기 전달 가운데서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하나님이 그 만남의 삼위일체적 성격 안에서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시면 은혜와 영광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참으로 그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려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고 하면서 위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1) 더구나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도 하고 따라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를 선행하며 그 기초가 된다고도 하므로 그가 전통적 입장을 현대에 맞도록 제시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이 명제의 의미는 그 내용상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고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므로, 그 둘은 그 내용상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진술하는 명제로 이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몰트만이나 융엘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거의 고전적 관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식의 순서에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하며,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한다.2)

하나의 유일한 신적인 삼위일체가 있고,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을 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가 아니라, 그가 계신 그대로(as he is in himself) 역사에 나타나실 수 있으실 뿐이다. 그는 구원 역사에서 나타나신 대로 그 자신 안에 계시다.3)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과 모순될 수 없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찬미의 진술들과 상응할 수밖에 없다.4)

영원하신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영원에서 이 아들과 함께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로서 성부이시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동시에 영원하신 아들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한다.5)

창조함은 받지 아니하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오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오는 그 사람을 목적으로 한다.6)

그는 또한 영원히 낳아지신 아들(eternally begotten Son)이시기도 하시다. 그리고 그런 분으로서 그는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같으시다.7)

그러나 위의 인용문들이 주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글을 잘 분석해 보면 그들은 고전적 관점을 반복하고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몰트만은 자신이 자신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구별을 포기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도 하다.8) 또한 1973년도에 발표된 그의 한 논문에서도 몰트만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만일 삼위일체론이 십자가상의 사건으로부터 전개된다면 '하나님 그 자신'(Gott an sich)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Gott fuer uns)의 구별뿐만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와 시대 경륜적 삼위일체간의 구별도 폐기되는 것 같다...... 하느님은 우리와 삼중적으로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우리와 맺는 이러한 삼중적(자유로운 값없는) 관계는 단지 내재적 삼위일체의 모형이나 유비가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 그 자체이다."9)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의 글을 잘 읽어보면 몰트만과 융엘은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명제를 사용하면서 이를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사실은 같은 것을 지칭하나 경륜적 삼위일체는 역사 과정 내에서의 하나님이 자기 드러냄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그것의 송영적 의미를 드러내어 내는 형이상학적 요약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듯하다. 즉,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 의하면 영원에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 이미 있어서 그것이 시간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적 자기 계시를 보면서 우리가 논리상 하나님 내의 삼위일체적 구조를 상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마지막에 가서야 있을 수 있으나 예배 중의 송영적 언급으로 미리 하나님께 대해서 이를 언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과 융엘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된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경륜적 삼위일체가 존재론적 삼위일체로 언급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몰트만과 융엘의 진술을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그들의 주장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몰트만의 이해

1972년에 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몰트만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십자가와만 연관해서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다.10)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삼위일체론의 내용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라고 한다(p. 241=p. 253). 그는 심지어 "삼위일체론적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이란 개념이 의미하는 바를 십자가로부터 전개시켜 나간다(p. 247=p. 260)고까지 말하면서 신개념의 혁명을 요청하는 것이다(p. 152=p. 162). 몰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균열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으며 자기 자신과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융합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일치하셨으며 자기 자신과 상응하였기 때문이다(p. 244=p. 257).

즉,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부터 소외시키시고 스스로에게 다시 상응시키시는 분으로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이와 동시에 아들의 내어줌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성령이며 이 성령은 하나님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며 버림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죽은 자들마저 살게 한다(p. 244=p. 257).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나타난다. 이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나타났다는 의미나, 십자가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성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다음 진술은 그가 그 이상의 함의를 그 십자가 신학에 두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 준다. "신앙은 그가 경험한 해방을 통하여 십자가의 사건을 아들의 사랑과 아버지의 아픔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사건,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건으로 이해한다"(p. 249=p. 262). 이처럼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 사건이 경륜적 삼위일체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 십자가 사건 자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건"인 것이다. 아니 보큠의 해석을 따라서 표현하자면 "십자가 사건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경륜적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삼위일체이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11) 따라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내적 삶"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삼위일체성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일어난 사랑의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p. 249=p. 262).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기도 한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하여 인격들 상호간에 일어난 관계의 사건으로 해석하였으며. 이 사건에 있어서 인격들은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그 자신들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였다"(p. 245=p. 258). 그러므로 삼위의 인격의 구성도 십자가 사건에서 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몰트만은 자신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미리 그 자신[하나님 자신]속에, 신성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p. 245=p. 258).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먼저 있고 후에 경륜적 삼위일체가 드러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수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2) 보큠이 말하듯이 좀더 조심하면서 말하자면, "몰트만은『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는 명확히 이것을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된다는 말은] 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그가 말하는 것과 모순되거나 조화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13) 사실 이런 뜻에서 몰트만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적 사유의 출발점이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내적 삼위일체성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한다"고 본다(p. 245=p. 269)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성은 사랑과 해방의 역사인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위한 사건을 의미하는 삼위일체성은 삼위일체론적 완성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성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한다>...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론적 사고에 의하면 버림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버림받음을 통하여 <신적인 역사>에로 이미 통합되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삶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고통을 당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고통을 받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p. 255=pp. 269-70).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역사적 과정이 하나님의 역사로서 그의 삼위일체론적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1980년에 나온『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몰트만은 비슷한 논의를 하고 있다.14) 그러나 그는 이 책에서 훨씬 더 자신을 조절하면서 진술하여 나간다. 먼저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어의를 정확히 설명한 후에 이 구별이 과연 필요한가를 물으면서 그는 이 구별이 "하나님의 자유와 그의 은혜를 안전하게" 하며, 따라서 "[이 구별은] 하나님의 구원적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논리적으로 필요한 전제이다"고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p. 151=p. 186). 그러나 그 바로 뒤에 그는 바르트를 따르는 신학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흥미로운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즉, 만일 자유와 필연성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방금 말한 바와 같이 결론 내려야 하겠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는 어떤 외적이거나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사랑하시도록 강요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이 구별이 필요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말하기를 "구원을 전달하시는 사랑이 없이 단지 그 스스로만 계시는 내재적 삼위일체 개념은 신개념에 자의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적 개념의 파기를 의미한다"고 한다(p. 151=p. 186). 그래서 몰트만은 그 둘을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는 것으로, 서로에게로 연합해 들어가는 것으로"(The two rather form a continuity and merge into one another) 보려고 한다(p. 152=p. 186). 그래서 단지 교회의 송영에서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선포적 신학과 실천 신학의 대상은 경륜적 삼위일체이고, 송영적 신학의 내용은 내재적 삼위일체이다"고 한다(p. 152=p. 187).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경륜적 삼위일체가 먼저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하기를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경험의 총괄 개념을 뜻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인식은 내재적 삼위일체 보다 선행한다"(pp. 152-53=p. 187)고 하며, "죽임 당한 어린양 없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영광은 애초부터 생각 될 수 없다"(p. 159=p. 194)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륜적 삼위일체가 먼저 생각될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은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그것을 구성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계시하기만 할 뿐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에게 작용한다"(p. 160=p. 195)고 말한다. 물론 그는 헤겔처럼 역사의 과정이 하나님의 자기 전개라고 하지 않으며 애써서 자신과 헤겔의 입장을 구별하려고 하고 있다(p. 166=p. 202). 그러나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수난(God's passion)으로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임을 그는 강하게 말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오직 구원의 역사와 경험이 완성 될 때에야, 즉 세상의 역사가 고쳐 질 때에야 내재적 삼위일체가 완성된다는 것이 된다(p. 161=p. 196). 이렇게 볼 때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루는 과정이든지, 적어도 내재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15)

3. 융엘의 이해

이 문제에 대한 융엘의 견해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God's history with man)를 다룬다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그것을 요약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역사성(God's historicity)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의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16) 이때 하나님의 역사라는 말로써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가 일어난다고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오심"(God's coming to man)을 지칭한다.

이렇게 말할 때 융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동일시 하셨는데, 바로 이 동일시에서 하나님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하고(p. 364), 여기서 하나님의 하나님에 대한 구별(differentiation)이 일어난다는 것이다(p. 363). 즉, 부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다른 이와 동일시하되, 그가 예수의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에서 자신을 만나신다는 것이다(p. 368). 그런데 이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참된 구별이 가능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버리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버림을 받는 아들 하나님의 구별이 십자가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예수의 죽음에서 그는[하나님은] 자신을 그 안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without being disunited in himself)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 만나신다"고 한다(p. 368, 융엘 자신의 강조).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이 성부와 성자의 구별과 만남에서 성부와 성자가 하나가 되게 하는 성령 하나님이시기도 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의 통일성 가운데서 삼중의 방식으로 구별되신다고 한다. 즉, 성령으로 서로 연관되는 성부와 성자의 만남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 방식이 드러나는 것이다(p. 368).

이와 같이 융엘은 부활의 선포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는다. 마치 십자가를 떠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듯이 여기는 십자가에로의 집중이 그의 신학적 사유에 나타난다. 이런 뜻에서 융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은 예수와 동일시 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정의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p. 364). 그리고 모든 기독교적 신지식은 하나님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사람에게로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p. 383).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에서 정의된 하나님은 사랑이신 분(the one who is love, p. 164)이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심(the total self-surrender)이요, 자기 내어줌 자체의 사건(the event of self-surrender)이고, 사랑이라고 한다(pp. 368-69). 즉, 융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신 것이다(p. 368). 이는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p. 369), 하나님 자체를 절대적으로 무사(無私)한 본질로 더 잘 이해되는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규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흔히 대조되어 제시되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가 전혀 그렇게 대조되어 제시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넘쳐흐르는 사랑으로 이해하는 문맥에서 그는 우리가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명제로 제시한 라너의 명제("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를 무조건적인 찬동을 표시하면서 인용하고 있다(pp. 369-70).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과 죽음에서 발생하므로 이 명제는 옳다"(p. 370).

하나님 자신이 발생한다(God himself takes place)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제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규정하는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어떤 고정된 본질과 실존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계시되거나 드러나게 된다고 융엘은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신성 자체의 사건이라는 것이다(p. 372). 이런 식의 말을 하고서 바로 융엘은 덧붙여 말하기를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한다(p. 372).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명제로써 융엘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도 십자가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융엘은 자신의 이런 이해가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루터의 기독론과 헤겔의 철학에서 배운 새로운 신학임을 인정하고 있다(p. 373).

이렇게 융엘이 십자가에서 발견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 그리고 사람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역사(history of God)를 요약적으로 진술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성(God's historicity)이 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하나님의 역사성을 융엘은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본다. 이 하나님의 역사성을 잘 요약하는 명제가 "하나님의 존재는 생성 중에 있다"(God's being is in coming)는 명제이다. 융엘은 이 진술이 "하나님의 존재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로 오는 (또는 자기 자신이 되는) 사건"임을 함의한다고 말한다(p. 380). "하나님은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로 오신다(자기 자신이 되신다)"는 것이다(Ibid.).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시니, 그가 자기 자신의 절대적 기원이시다. 그가 그 자신의 목적이시다. 여기서 융엘은 성자를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그 자신의 매개이기도 하시다. 즉,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오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남아 계신다"(p. 381).

그러므로 융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으로 오는 그 과정이 중요하며, 여기서 삼위일체의 삼위일체 됨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오심을 융엘은 하나님에게의 독특한 존재론적인 진술이라고 말하여, 헤겔의 절대 정신의 역사 내에서의 자기 전개와 구별하고는 있으나, 그 구별에도 불구하고 그 유사성과 특히 그 생성 과정에의 중시는 융엘의 이해가 고전적인 이해와는 현격하게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삼위일체적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풍성하게 한다고 본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말하면 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최종적, 종말론적 실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로서, 우리가 송영 중에 언급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역사의 종국에 가서야 완성될 삼위일체에 대한 선취적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중시하는 관점의 논리적 결과는 몰트만에게 융엘에 많이 의존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김균진 교수의 다음 진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특성이다:17)

1.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십자가의 사건 이전에 하나님의 어떤 영원한 내적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 사건에 있을 뿐이다. 이 사건을 떠난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생각될 수 없으며, 만일 생각될 경우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2. 따라서 내재적 삼위일체성과 경륜적 삼위일체성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 되심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경륜적 삼위일체 되심을 말하며 이 경륜적 삼위일체성이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을 말한다...

3. 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떠난 하나님의 영원한 내적 본질이란 것도 생각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내적 본질, 영원한 존재는 먼저 십자가의 사건에 있을 뿐이다...

4. 십자가의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은 바로 그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활동하셨다면 이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신 존재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인용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김균진 교수도 몰트만과 융엘에 근거하여 경륜적 삼위일체를 중시하며, 영원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삼위일체적 사건에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심지어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구분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다음의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구분은 결국 어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 해소되는 것을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양자는 상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형성한다."18) 이 마지막 문장이 몰트만 등의 의견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위에서 행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 대한 관찰과 평가가 참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4. 결론

이 글에서 우리는 소위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을 정리해 보았다.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어떤 점에서 보면 모호하여 여러 해석의 여지를 주고 있으나,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해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풍성해진다고 하며, 최대한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경륜적 삼위일체가 역사의 과정에서 다 드러날 때에야 참으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종말론적 개념, 또는 종말론적 개념에 대한 예배 중에서의 송영적 선취라고 말한다.

우리가 고전적 관점에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본대로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다.19) 그런데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은 인식 근거를 인식 근거 이상의 것으로 여겨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입장은 이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비판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루터도 삼위일체론에 잇어서는 고전적 관점에 충실하였다. 이에 비해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삼위일체론은 고전적 관점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
1) Karl Rahner,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ans. William V. Dych (New York: Crossroad, 1989), p. 135.

2) Moltmann, Trinity and the Kingdom of God, pp. 152-53=p. 187(한역의 면수임).

3) Ibid., p. 153=p. 188.

4) Ibid., p. 154=p. 188.

5) Juengel, p. 382.

6) Ibid., p. 384.

7) Ibid., p. 383.

8) Moltmann, Trinity and the Kingdom of God, p. 160=p. 195.

9) Moltmann, "Gesichtspunkte der Kreuzestheologie heute," Evangelische Theologie. 33 (1973), S. 362f., Poehlmann, p. 157에서 재인용.

10)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2nd edition; Munich: Christian Kaiser Verlag, 1973). E.T. The Crucified God,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den (London: SCM, 1974). 1972년 독일어 판으로부터의 한역, 김균진 역,『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이하 몇 문단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면수만을 본문 중에 삽입하는 것으로 한다. 앞의 면수는 영역 판의 면수이고, = 이후의 면수는 한역 판의 면수이다.

11) Richard Bauckham, "Juergen Moltmann," in One God in Trinity: An Analysis of the Primary Dogma of Christianity, eds. Peter Toon and James D. Spiceland (Westchester, lllinois: Cornerstone Books, 1980), p. 120.

12) 리차드 보큠은『희망의 신학』이후『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쓰여질 때까지의 기간동안 "몰트만은 하나님이 예수의 역사 안에서 삼위일체가 되는 것으로(becoming)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보큠 자신의 강조). 또한 덧붙여 말하기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을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회피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성 문제로부터 이는 또 다시 나타나게 된다. 몰트만은 성부와 성자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예수의 역사에서, 특히 십자가에서 발생하는(happens) 관계로 이해하기를 아주 소망하고 있으며, 이 발생이 단순히 초시간적 진리의 반영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한다"(Bauckham, pp. 116f., his own emphasis). 이는『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찰에서도 확증될 수 있는 옳은 주장이라고 판단된다. 보큠도『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도 이를 말한다(pp. 120f.).

13) Bauckham, p. 121. 보큠은 몰트만이『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는 좀더 전통에 가깝게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된다(p. 96)고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몰트만의 표현의 변화를 주목한다. 그러나 다음에 살필 (보큠은 다루지 않았던)『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는 초기의 강조점이 또 다시 나타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4) Moltmann, Trinitaet und Reich Gottes (Muenchen: Christian Kaiser Verlag, 1980). E.T. The Trinity and the Kingdom: the Doctrine of God, trans, Margaret Kohl (London: SCM, 1981). 독어 판으로부터의 한역, 김 균진 역,『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이하 몇 문단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면수만을 본문 중에 삽입하는 것으로 한다. 앞의 면수는 영역 판의 면수이고, = 이후의 면수는 한역 판의 면수이다.

15) 몰트만에게 있어서 최소한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과 관련하여 특히 좋은 지적으로 Bauckham, pp. 128, 129를 보라. 이런 점에서 보든지 또한 몰트만에게 삼위일체론의 전반적인 정향에서 볼 때 김광식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과연 견지될 수 있으려는지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위르겐 몰트만이 바르트와 라너에 반대하여 내세운 삼위일체론은 결국 신니케아파[그는 이로써 카파도기아 교부들을 의미한다]의 삼위일체론을 재론한 데 불과하다"(『조직신학(1)』, p. 186).

16) Juengel, pp. 246-47. 이 절에서 융엘로 부터의 인용은 그 영역 판의 면 수를 본문 중에 삽입하는 것으로 하기로 한다.

17) 김균진, "형이상학적 유신론과 십자가의 역사-유신론에 대한 근대 무신론의 비판 및 십자가 사건과 삼위일체론의 관계", in 『헤겔철학과 현대신학』 pp. 274f.

18) 김균진, "삼위일체론", in『헤겔과 바르트』(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p. 264, n. 38. 이 주장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 두 문헌을 제시하고 있다: W. Kasper, "Revolution im Gottesverstaendnis", in Diskussion ueber "Der gekeuzigte Gott", ed, M. Welker (Muenchen, 1979), pp. 140ff.; J, Moltmann, Trinitaet und Reich Gottes, p. 177. 어떤 면에서 보면 그의『기독교조직신학Ⅰ』(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4)에서는 이 문제가 좀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술되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그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초월적 근거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의 현실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하는가 하면(p. 248), 조금 말을 바꾸어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에 근거되어 있고 이것을 계시하는 동시에 이것의 역사적 삶이다"고 말하기도 한다(p. 249). 그러나 그 바로 뒤에 나타나는 이 진술의 의미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려면 우리를 구원하셔야 하며, 그 구원 역사가 하나님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시사를 주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 안에 예정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 자체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삶을 형성한다"(p. 249). 또한 그는 곳곳에서 그가 몰트만 등을 따라 전통적이고 고전적 관점을 비판하고 수정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함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cf. pp. 248, 255f.).

19)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 3 장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을 참조하라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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