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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자유주의 신학과 탈 보수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by 【고동엽】 2021. 11. 5.
한상화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목차
I. 서론
II. 탈 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의 개관
III. George Lindbeck의 신학방법론
IV. 탈 보수주의 신학(Postconservative Theology)의 개관
V. Stanley Grenz의 복음주의 신학의 개정
VI. 결론: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

I. 서론

본 논문은 최근에 미국 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탈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과 탈보수주의 신학(postconservative theology)에 대한 신학 방법론을 고찰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함께 앞으로 복음주의 신학이 나가야할 방향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본 논문의 논지는 탈자유주의 신학은 상대주의(relativism) 인식론의 틀을 극복할 수 없고, 이를 따르는 탈보수주의 신학은 참된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양분화 된 현 신학계의 상황을 극복하려는 양자의 노력에 대해서는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하여 환영하지만 그러한 양분화 된 상황이 토대주의(foundationalism) 사고의 산물이라는 논지에 대해서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 결국 현재 복음주의 신학의 나갈 방향은 근대적 객체주의(modern objectivism)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postmodern relativism)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유신론적(a Christian theistic) 실재론과 인식론에 입각한 방법론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II. 탈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의 개관

탈자유주의는 미국의 예일신학부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운동으로서 근대 기독교의 문화적 수용에 역행하여, 오히려 종교가 문화-언어적 틀을 제공한다고 보고 기독교 전통의 특수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신학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나 클리포드 게르츠(Clifford Geertz)와 같은 사상가들의 언어 및 문화분석에 영향을 받았고, 대표적인 신학자들로는 한스 프라이(Hans Frei), 폴 홀머(Paul Holmer), 데이빗 켈시(David Kelsey), 죠지 린드벡(George Lindbeck), 윌리엄 플라쳐(William Placher), 스텐리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등이 있다.


윌리엄 플라쳐는 미국의 최근 주류신학의 경향을 탈자유주의(postliberalism)와 수정주의(revisionism)의 양대 부류로 분류하여, 수정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을 수정, 발전, 계승하여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보편적 관심 및 경험과 관련시켜 그것의 공적인 의미(public theology)를 밝히려는 시도로 보고, 데이빗 트레이시(David Tracy)나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n) 등을 그 대표자로 꼽았다. 이에 반하여 탈자유주의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경험에 대해 회의를 품고 각 종교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기독교의 독특한 정체성을 성서의 나래티브에서 찾으려고 하는 입장이다.


탈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사람들의 주요한 주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근대주의가 전제했던 보편적 이성(universal reason)이나 "종교적 경험(religious experience)" 등에 대해 회의하면서 근대주의의 전체주의적 시도(totalizing projects)들을 반대한다. 이러한 점에서 탈자유주의는 포스트모던 신학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윌리엄 플라쳐는 이 사상의 주안점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했다:


1. 성경 해석의 주요한 범주로 나래티브에 우선성을 둔다.
2 인간 경험의 세계보다 성경의 나래티브에 의해 형성된 세계에다 해석학적 우선성을 둔다
3. 경험보다 언어에 우선성을 둔다.


이와 같은 강조점들로 인해 탈자유주의 신학은 때로 나래티브 신학(narrative theology)이라고도 불리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원리로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19세기 근대주의 성경 해석이론들을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근대주의 성경 해석 이론들은 성경에서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나 윤리적 원리 또는 초월적 진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에 성경을 성경 외적인 세계에 껴 맞추는 해석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성경본문의 우선성과 독특성은 사라지고 성경은 이상한 책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프라이는 성경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는 나래티브에 주목하여 그 독특한 세계에 흡수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성경의 나래티브를 비나래티브적으로 해석할 때 그 의미는 왜곡된다고 보았다.


폴 홀머(Paul Holmer)는 그의 『신앙의 문법』(Grammar of Faith)이라는 책에서 기독교는 기독교인의 언어게임의 규칙을 제공하는 중심 문법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언어게임이나 문법은 신학에 의해 외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파라다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임무는 성경 본문내의 규칙들을 구분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데이빗 켈시(David Kelsey)는 성경의 권위는 그것이 신앙공동체 속에서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보존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권위 있는 본문으로 사용되는 사실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견해를 더 발전시켜 스텐리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하나의 나래티브가 참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공동체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그것은 곧 예수의 진리성은 그의 이야기가 형성하는 공동체의 종류에 의해 입증된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탈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티모디 R. 필립스와 데니스 L. 오크홈은 탈자유주의 신학은 최근의 고백적 기독교의(confessional Christianity) 발흥의 중심에 있다고 보고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과 몇 가지 공통되는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양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특수성, 성경의 규범성과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강조한다고 했다. 특별히 복음주의 진영내의 로져 올슨(Roger Olson), 스텐리 그랜츠(Stanley Grenz)와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과 같은 탈보수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자들은 탈자유주의 신학과 강한 병행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탈자유주의 신학이 성서 세계 속에서 교회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찾고, 성서 본문 내재적 신학을 추구하는 점은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면모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가지는 상대주의의 위험성과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약화시키는 면모는 보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었다.


칼 헨리는 한스 프라이와의 논쟁에서, 프라이가 성경의 조화로운 통일성과 독특성을 강조한 것은 적절하지만 성경의 나래티브들과 역사적 사실들과의 연관성을 약화시킨 것은 정통신학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프라이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성에다 해석학적 우선성을 두는 것은 근대주의의 영향이라고 보고 헨리의 명제주의 접근도 그러한 근대주의 산물은 아니냐고 반문하며 보다 더 포용적인 정통주의를(generous orthodox) 촉구했다.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말하기를, 복음주의 입장에서 볼 때, 포스트리버럴 신학에 대한 가장 큰 우려는 성경해석과 신학적 논의를 객관적 실재에 관련시키지 않고 단순히 본문 내재적인 문제와 공동체의 신앙 규범에 대한 논의로만 본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탈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 린드벡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III. 죠지 린드벡의 신학방법론
죠지 린드벡은 그의 『교리의 본성』이라는 책에서 포스트리버럴 신학의 방법론적인 근간을 체계적으로 기술했다. 그의 책의 부제는 "포스트리버럴 시대의 종교와 신학"인데, 이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제시하는 그의 접근법이다. 또한 그는 종교와 교리에 관한 이론들은 상호 의존적이라고 하며 종래의 잘못된 종교관은 잘못된 교리 이해를 초래했다고 하며 기존의 두 가지 종교 이론, 즉 종교에 대한 인지적 측면을 강조하는 접근과(cognitive approach) 경험적 표현의 측면을 강조하는 접근을(experiential-expressive approach)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서 자신의 문화 언어적 종교 이론을(cultural-linguistic approach) 제시한다.


종교에 대한 인지적 접근은 종교와 교리를 객관적 실재를 기술하는 명제들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하나의 교리가 참이면 영원히 참이고 그 교리와 상반되는 가르침과는 화해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린드벡은 여기에 복음주의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두 번째로 종교에 대한 경험적 표현의 접근 방식은 자유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방식으로서 교리들을 어떤 초월적인 종교적 경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본다. 이러한 접근에 의하면 불교나 기독교나 표현 방식에 있어서 다를 뿐이지 어떠한 초월적인 종교적인 경험에 있어서는 같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린드벡은 이러한 두 가지 종래의 접근방식을 넘어서서 보다 최근의 문화와 언어 이론에 입각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 언어적 종교 이론이다.


그의 문화 언어 이론은 종교를 언어와 흡사한 것으로 보고 언어가 포함하고 있는 삶의 형태와(forms of life) 문화들과 유사하게 취급한다. 즉 종교는 실재를 구성하는 언어와 삶을 사는 방식에 대한 상용어(idiom)를 제공하고 교회의 교리는 바로 이러한 언어의 규칙(rule)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종교는 경험에 선행하는 문화 언어적인 틀이기 때문에 모든 경험과 인식이 이 틀에 의존한다. 또한 교리는 경험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개념적인 틀을 제공한다. 그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교리들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어떤 진리 주장들은 받아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거부할지를 정하는 규범을 제시하는 권위를 가지지만 이러한 권위가 바로 그 교리 내용자체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을 방해하고 금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교리들의 내용자체보다 그것의 기능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의미 있는 논의자체를 가능케 하는 틀의 기능을 범주적 적합성(categorial adequacy)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범주적 진리는(categorial truth) 구체적인 명제들의 진위를 규정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범주적 적합성은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실재인지를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화 언어적 틀의 기능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또한 그는 체계내적인 진리(intrasystematic truth)와 존재론적 진리(ontological truth)를 구분하여, 체계내적인 진리는 정합적인(coherence) 진리 개념이고, 존재론적 진리는 대응적인(correspondence) 진리 개념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에 대해 필요조건(necessary condition)이지만 충분조건(sufficient condition)은 아니라고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린드벡의 주장을 말하면, 하나의 명제가 존재론적으로 진리라고 결정되기 위해서는 체계내적인 진리여야 하는 동시에 그 명제가 속해 있는 체계가 범주적으로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을 보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덴마크는 햄릿의 고향이다"라는 명제는 세익스피어 극의 정황에서는 체계내적으로 참이나, 이 극이 실재의 역사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범주적 적합성) 존재론적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성격의 명제가 아니다. 또한 "예수는 주시다"라는 명제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희생적인 고난을 통해 된 것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의 체계 속에서 볼 때, 십자군 전쟁 때 이교도들을 죽이기 위해 사용되었을 경우는 체계내적인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이야기들에 의해 형성된 삶의 형태와 세계관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와 뜻에 부합될 때 비로소 체계내적인 참인 동시에 존재론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린드벡이 사용하는 진리관은 단순한 인지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행위와 정황(context) 또는 명제의 사용의 의도 등 보다 복합적인 이해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보다 깊이 숙고하여 참고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특별히 신앙 고백적 진술들이 사용되는 실천적 정황과의 정합성을 강조하는 그의 체계 내적인 진리(intrasystematic truth) 개념은 보다 일관적인 신앙과 행위를 위해 보수주의 신학이 받아들여야 하는 중요한 통찰력이라고 본다. 반면에 린드벡의 진리 개념이 일상적인 실재관에 근거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를 내릴 수 있겠으나,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유신론적 실재관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진리관은 문화 언어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고 평가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린드벡이 체계내적인 진리를 강조하면서 교리들의 실재내용의 진 위 보다 그것들의 사회학적 기능에만 주위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대주의 인식론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린드벡의 견해에 의하면 각각의 종교는 서로 같은 표준으로 비교할 수 없는 (incommensurable) 틀을 가지고 있기에 종교간의 대화도 각각의 다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잘못된 것은 제국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태도이고, 더 나아가 한 입장이 다른 입장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심지어 그에 의하면, 참된 기독교의 원리는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라 각 종교에 충실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면모는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린드벡의 교리에 대한 견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규칙이론(rule theory)인데, 그것에 의하면, 교리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의 믿음과 행위와 관련된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서 반성적이고 2차적인(second-order propositions) 진술들이라는 것이다. 1차적인 진술들은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고백, 기도, 찬양 등으로서 신자들의 신앙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진술들이고, 이러한 신앙의 내용들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교리들은 2차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이차적인 교리들에 대한 논의와 설명과 방어라고 본다. 그리하여 신학은 하나의 신앙 고백 공동체 내에서 행해지는 것이지만 신학의 형식은 고백적인 울타리를 넘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교리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신앙의 문법을 표현해 놓은 것으로 교리가 없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린드벡의 규칙이론은 탈자유주의 뿐 아니라 탈보수주의 신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현시대의 신학이해를 대표하고 있다.


맥그라스는 린드벡의 이론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비판했는데, 그 첫째는 그의 진리관이 존재론적 진리관을 약화 시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교리들에 대해 체계 내적으로만 논의했지 어떤 객관적인 실재를 다루는 체계 외적인 측면은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 교리는 단순히 기독교 공동체의 언어의 규칙을 제공하는 제 2 차적 진술일 뿐 아니라 실재를 지칭하는 제 1차적 언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의 교리들은 신앙의 내용을 지적으로 표현해 놓은 진리 주장(truth-claim)들로서 그것의 진위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린드벡이 교리의 사회학적 기능에 대해 좋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고는 하나 기독교의 역사적 교리들의 진위에 대한 핵심적인 논의를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리의 본성을 바로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둘째로, 맥그라스의 비판에 의하면, 린드벡의 체계 속에서는 왜 성경에서 출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린드벡은 종교적인 공동체의 중심에는 항상 정경이 존재하고 이러한 정경이 공동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현상학적인 분석에서 출발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경우에는 성경이 그러한 정경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출발하고 있을 뿐이지 왜 불경이나 코란보다 성경이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사회학적 분석은 성경의 권위는 공동체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기독교의 정경론 자체와 모순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셋째로 린드벡의 체계에 의하면,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적합지 않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단지 기독교 공동체의 창시자로서의 권위라기 보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 역사적 기독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린드벡의 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의 문화 언어적 전통의 기원에 대해 공리처럼 주어진 것으로 단순히 전제하고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그의 체계는 고립된 윤리(a ghetto ethic), 신앙주의(fideism) 또는 부족주의(tribalism)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그의 문화언어이론은 교리의 규범성과 기독교의 특수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의 상대주의 인식론적 틀로 말미암아 참된 성경적 신학의 방법론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복음주의 신학 내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비토대주의 신학 방법론을(antifoundational evangelical theology)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니 이를 포스트모던 복음주의(postmodern evangelical theology) 또는 탈보수주의 복음주의(postconservative theology)라고 부른다.

III. 탈보수주의 신학의 개관

탈보수주의 신학은 북미 복음주의 내의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데, 복음주의의 주요신념을 모두 가지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보다 개방적인 신학조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 전통에 서면서도 기존의 자유주의 신학 방법론을 넘어서려는 탈자유주의 신학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탈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은 대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신학 모두 근대 정신에 사로 잡혀서 생겨난 산물로 보고, 근대정신은 이미 그 수명이 다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새로운 신학의 장을 맞이하여서는 이러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이들은 또한 정통개혁주의 신학이 근거하고 있는 상식 실재론을(common sense realism) 거부하고 새로운 포스트모던 시각들을 가지고 신학을 하려고 한다.


그 하나의 예는 풀러 신학교에 낸시 머피인데 그녀는 콰인의 전체주의 인식론(holistic epistemology)과 린드벡의 이론 등을 검토하고 나서 그것들의 상대주의를 한 단계 극복하며 발전하여 나오는 라카토스(Lakatos)나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 (Alasdair McIntyre)의 역사적 전체론에(historicist holism) 근거한 포스트모던 복음주의, 비토대주의(nonfoundationalist) 신학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녀에 의하면, 이 이론은 하나의 전통은 항상 어떤 권위 있는 텍스트로 출발하여 형성되는데 다른 전통들에 의해 제기된 모순들이나 문제들에 직면하여 대응해 가는 과정 속에서 형성, 진보되어 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전통들의 상호 만남과 도전 대응의 과정 속에서 전통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모든 전통은 전통 내 기준에 의해서만 판단된다는 상대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또한 탈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성령의 영감에 의해 형성된 사실적인 나래티브(realistic narrative)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게 보면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신적인 나래티브(divine narrative)로 이해한다. 또한 그들 중에는 개방적 신론을(open view of God) 가르치는 자들도 있고, 또한 자연과 은혜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펴기도 한다. 자연세계를 타락한 세계로 보며 본향을 향해 가는 기존의 기독교 영성에 반대하여 자연세계는 마지막 구속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과 동역자로 이러한 구속을 이루어 간다는 생태 신학적인 영성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기독교 구원의 배타성을 부정하고 포괄주의를(inclusivism) 가르치기도 하나 다원주의는(pluralism) 부정한다. 또한 그들은 기독론에 있어서도 양자론적 이해를 펴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관계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들은 칼세돈 교리의 중심의도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신성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보며 이러한 범위 내에서 새로운 설명들을 시도하는 것을 환영한다. 한마디로 탈보수주의 신학자들의 사고 경향은 보수신학의 진리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과 승리주의(triumphalism)에 반발하여 보다 온건하고 겸허한 자세를 추구한다.


탈보수주의 신학자들로는 여러 사람들이 있으나 William J. Abraham, Rodney Clapp, Stanley Grenz, Rebecca M. Groothuis, Henry H. Knight III, J. Richard Middleton, Nancy Murphy, Clark Pinnock, Miroslove Volf, Brian J. Walsh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에릭슨은 Bernard Ramm, James McClendon도 이 그룹에 포함시킨다. 최근 영국에서 『탈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책을 출판해 작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데이브 톰린슨(Dave Tomlinson)도 이 그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톰린슨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상황은 복음주의의 주요한 전제들을 지키면서도 그것의 한계들을 넘어는 신학을 요구한다고 하며, 특별히 복음주의 신학의 율법주의적, 도덕주의적, 또는 합리주의적 경향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맞는 탈복음주의 신학(post-evangelical theology)을 부르짖었다. 그는 실제로 런던의 선술집(pub)에서 주중저녁에 모여 성경공부와 예배를 보는 그런 교회를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특별히 스텐리 그랜츠의 신학방법론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는 그가 복음주의 내에서 영향력 있는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의 신학 방법론이 린드벡의 문화 언어적 접근과 기본적인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학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봄으로서 현재 복음주의 신학의 나갈 방향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IV. 스텐리 J. 그랜츠의 복음주의 신학의 개정

스텐리 J. 그랜츠는 탈보수주의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로서 매우 많은 저술과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중 그의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은 그가 추구하는 복음주의 신학의 개정(revisioning of evangelical theology)을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eschatological community)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구체화 시켜 놓은 조직 신학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복음주의 신학의 개정』이라는 책은 과거의 상식 실재론(common sense realism)에 입각하여 명제적 계시관(propositional revelation)을 가지고 신학을 했던 정통 개혁주의 신학(Turretin, Charles Hodge 등)과 Carl Henry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이면서, 복음주의 정체성을 영성과 체험에 두고, 포스트모던 한 새로운 상황에 맞도록 복음주의 신학을 개정하자는 논지를 가지고 쓰여졌다. 이러한 그의 신학 이해를 바탕으로 나온 상기한 교리서의 앞부분에도 그가 생각하는 신학의 본성과 신학 방법론 등에 대해 분명하게 잘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신학 이해를 좀 더 넓은 근대와 탈근대주의의 사상적 배경 속에서 반추하여 자세하게 소개하여 놓은 책은 John R. Franke와 함께 집필 한『토대주의를 넘어서: 포스트모던 상황에서의 신학』(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이다.

여기에서도 Charles Hodge나 Carl Henry, 또는 Wayne Grudem같은 사람들의 신학은 합리주의 접근(rationalist approach)의 신학이라고 취급되며 이것은 근대주의의 산물이라고 평가된다. 이들은 모두 성경을 신학의 자료로 보면서,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의 내용에서 원리를 밝혀내고 그것들을 조직화하는 작업이라고 보며 신학의 명제들을 사실(facts)들을 기술하는 1차적 명제들로 본다고 했다.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여 이 책에서는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 삶 그리고 실천 등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구성적인 반성(constructive reflection)작업으로서 지속적이며(ongoing), 2차적이며(second-order), 상황적인(contextual) 학문이다." "기독교 신학의 임무는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야 하는 신앙 공동체를 돕기 위해, 기독교 신념의 모자이크 체계를(Christian belief-mosaic) 성경의 규범에 맞게(biblically normed), 또한 역사적인 지식에 따라(historically informed), 그리고 문화적으로 적합한(culturally relevant) 모델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해석작업이 그렇듯이 신학도 어떠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기초를 두고(grounded)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 이편에서는 신학의 완성이란 없고 신학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학의 이런 정황적인(contextual) 본성은 또한 그것의 이차적인(second-order) 본성과 관련되는데, 이것은 바로 신학은 신앙공동체의 이야기들, 상징들, 실천 등에 대한 해석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랜츠에 의하면, 신학적 진술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1차적 언어들과 엄밀히 구분되어져야 하고 실제로 그러한 진술들이나 교리들은 공동체 내의 이야기(서사, narrative)들이나 정경적인 가르침들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보다 가볍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리는 성경의 이야기들의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들을 증거하고 조명하는데 도구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 공동체가 헌신한 신앙대로 살도록 도와주고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신학의 정의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점은, 린드벡의 교리와 신학의 이해와 유사하게도 다음의 세 가지 점이다. 첫째는 교리와 신학의 주요 자료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 보기보다는 공동체의 신앙과 삶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신학의 작업을 성경의 나래티브와 엄밀하게 구분하면서 이차적인 진술로 본다는 것이다. 셋째는 둘 다 공통적으로 근대주의의 보편적 이성 및 공통의 종교적 경험을 비판하고 모든 지식과 해석의 사회적, 역사적 조건성을 강조한다.


또한 그랜츠는 바른 복음주의 신학은 근대주의의 토대주의(foundationalism)를 벗어나서 비토대주의 신학(nonfoundational theology)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의 토대주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나 로크의 감각자료(sense data)등의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찾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지식의 체계를 쌓으려 하는 입장으로서, 이러한 근대주의의 토대주의 인식론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학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나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석은 낸시 머피의 분석과도 같다. 자유주의는 종교적 경험을 그 토대로 삼고, 보수주의는 성경을 그 토대로 삼아 신학을 해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포스트모던 상황은 이러한 근대주의의 토대주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비토대주의 신학을 요구하고 그러한 신학은 하나의 절대적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다양한 자료(sources)들을 가지고 대화적으로(conversational) 하는 신학이라고 한다. 또한 그 특성상 어떤 보편적인 논의일 수가 없고 지역적(local)이고 구체적(specific)이여야 한다. 즉 신학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보는 것이다.


그랜츠와 프랭키가 말하는 포스트모던 기독교 신학은 특별히 세 가지 자료(sources)를 가지는데, 그 첫째는 성령에 의해서 도구로 사용되는 성경(Scripture)이고, 그 다음에는 전통(Tradition)과 문화(Culture)이다. 하나의 신학이 기독교 신학이기 위해서는 성경의 규범에 적합해야 하는데, 이 성경은 성령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는 도구이기에 기독교 공동체에서 정경으로서 권위를 갖게 된다. 그랜츠에게 있어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성령과 성경의 밀접한 관계성으로 그의 조직신학서에서도 성경론은 성령론의 일부로 다루어져 있다. 또한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세계-창조(a world-creating)의 사역을 하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같이 성령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 공동체의 세계를 창조하신다.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 일정한 공동체의 특정한 세계관이 구성되는 과정을 그랜츠는 피터 버거의 사회학적으로 구성되는 의미 질서 체계로서의 실재세계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동체에 규범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성경이외에도 성경 해석의 역사의 궤적(trajectory)인 전통도 신학의 또 하나의 자료가 된다. 이 부분은 로마 카톨릭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과거의 개신교 신학에서 간과되어 왔으나, 신앙 공동체의 역사적 발자취로서 연속성과 변화를 담지 하고 있는 전통은 성경 해석의 상황(hermeneutical context)을 제공해 주는 없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의 자료가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랜츠는 기존의 복음주의 신학의 명제적 접근(propositional, 또는 concordance)이 가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문화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며 신학이 뿌리내리고 있는 문화에 대한 깊은 숙고가 요구된다고 역설한다. 신학의 자료들에 대해 기술한 후 그는 신학의 중심 주제(motifs)들에 대해 다루는데, 그 구조적인 주제(structural motif)는 삼위일체론이고, 통합적(integral)인 주제는 공동체이고, 방향 제시(orienting)적인 주제는 종말론이라고 했다.

그랜츠의 포스트모던 비토대주의 신학 방법론에 대해 몇 가지 작은 평가를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가 신학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제시하고 주요 주제들에 대해 그 위치를 나름대로 설정한 것은 이미 과거에도 웨슬레 신학 전통에 존재했던 사중 원리(quadrilateral principles: Scripture, Reason, Tradition Experience)나 체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그 자체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근대주의에서 탈근대주의로 변하여 간 상황에 맞추어 신학도 포스트모던 한 신학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접근법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접근은 예전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에 반대하여 근대주의에 맞게 새롭게 신학을 하려 했던 구 자유주의에서도 그대로 찾아 볼 수 있는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신학 방법론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말씀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달리 말씀이 기준이 되고 규범이 되어야 하고, 말씀을 상황에 맞추려하기 보다는 상황을 말씀의 빛 가운데서 조명해 보고자 하는 접근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근대주의적이기를 추구해서도 안되고 포스트모던적이기를 추구해서도 안되며 항상 보다 성경적이기를 추구해야 한다. 신학자들이 자의식적으로 그렇게 추구한다 할 지라도 신학자의 역사적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항상 재고되어야 할 텐데, 시대적인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잘못 적용하면 말씀의 본질이 변형된 잘못 된 신학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둘째로 그랜츠는 비토대주의 신학의 모델로 판넨베르그나 린드벡의 신학을 꼽고 있는데 전자의 종말론적이면서도 정합적인 진리관과 후자의 문화 언어적인 종교관과 교리관이 적합한 모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린드벡의 문화 언어적인 종교관이 가지는 상대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자신도 신학에 대한 공동체적인 접근이 보편적 진리 주장을 하는데 어려움을 제기한다고 인정하며 또한 공동체적 비토대주의 신학은 다양한 신학적 파라다임이 공존하는 다 문화적 상황(multi-cultural context)에서 어떻게 진위를 가려 낼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을 의식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말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종교의 전통 내의 해석적 틀에 대해서만 논의하는데 만족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 놓고선 이러한 질문은 도움이 되지 않고(unhelpful) 적합하지 않다고(improper) 회피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문제를 어떻게 비토대주의 신학방법론이 세계에 대한 진술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환원하여 지식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답해 버린다. 즉 다시 말해서 세계는 언어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고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공동체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지식을 공유하고 정체성을 형성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랜츠가 상대주의 논리의 악순환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셋째로 그랜츠는 낸시 머피와 함께 신학계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분열이 토대주의 인식론 때문이라고 보고 비토대주의 인식론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평가가 과연 옳은 것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근대의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신학이 근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신학의 근저에 있는 신앙적 차이에 대해서도 모두 근대적 토대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이분화 된 신학계는 신앙적 체험의 차이가 보다 근본적인 요인이고 이에 따라 나오는 말씀과 상황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차이라고 본다. 단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그 간격을 좁혀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랜츠는 칼 헨리의 신학에 대해서도 포스트리버럴 들과 함께 과도한 근대주의에 노출되어 있다고 비방하지만, 밀라드 에릭슨은 칼 헨리 신학에서 근대주의 요소들도 발견하지만 일상적인 근대주의의 기준으로 평가해 볼 때 칼 헨리는 근대주의자가 아니라는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볼 때, 그랜츠의 신학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성경에 충실하고 기독교의 역사적인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지만 그 방법론적인 틀과 인식론과 실재관 등에 있어서는 포스트모던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복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IV. 결론: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

지금까지 본 연구를 통해 탈자유주의 신학과 탈보수주의 신학을 개관해 보고 린드벡과 그랜츠의 신학 방법론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두 조류 모두 과거의 근대주의를 버리고 포스트모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론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를 간략히 피력하고 마치고자 한다.


첫째, 복음주의 신학은 탈보수주의 신학이 추구하는 것과 같이 포스트모던 비토대주의 신학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랜츠나 다른 탈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과거의 복음주의 신학이 근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어떤 불변의 토대(예를 들면, 성경의 무오성) 위에서 신학을 하려고 했던 점들은 다시 한번 평가되고 반성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근대 객체주의(objectivism)의 영향 하에 소박한 실재론에 입각한 증거주의적(evidentialism) 변증 접근을 한 것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주의 신학은 그 반동으로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또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랜츠나 머피가 제시하는 비토대주의 신학 방법론은 다분히 반동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고 특별히 그랜츠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에릭슨은 말하기를, 21세기를 시작하는 현재의 복음주의 신학의 상황은 흥미롭게도 이전 세기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했다. 포스트모던 사상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과 전통을 보수하려는 보수주의자들로 나뉜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다른 세력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조류를 "포스트포스트모던 복음주의(postpostmodern evangelicals)라고 불렀다." 이들은 한편으로 포스트모던주의의 타당한 시각들을 받아들이면서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의 영구성(perennial character of truth)을 심각히 받아들여 포스트모던 사상을 넘어서려는 입장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역사적으로 지나가는 이념들로서 복음주의자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극복하고 영구한 진리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릭슨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사상이 제공한 중요한 시각 중에 하나는 인간 지식과 해석의 역사적 조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견해의 제한성을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강조하며 나오는 것이 상대주의이기 때문이다. 에릭슨은 이러한 시각을 받아들여 원죄론과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러한 지식의 조건성과 제한성 자체가 곧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인식 주체의 조건성과 한계성이 의식화되고 객관화되어 주관성을 스스로 축소시킬 때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의사소통을 위해 기본적으로 상정되는 논리의 기본규칙(basic laws of logic)과 보편적으로 상정하는 "원시적인 대응 진리관(primitive correspondence view of truth)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문화와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 간에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의 역사적 조건성과 한계성을 인식하면서 오히려 다 문화적인 대화(multi-cultural conversation)를 강조하고, 상호간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세심한 노력에 대해 보다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통찰력은 복음주의 신학의 나갈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복음주의 신학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항상 분별해내고 영원한 성경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바로 다변하는 상황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밝히려는 애씀이다. 포스트모던 감성에는 어긋나지만 신학작업은 상황성 뿐 아니라 항구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성은 항구적인 하나님 말씀의 다양한 측면의 일부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틀로 사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문화적 상황에 함몰되어 그 말씀의 영원한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오히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자신의 역사적 한계성을 말씀의 엄중한 빛 아래에서 비판적으로 의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복음주의의 방향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제의는 소박하고 상식적인 실재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반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실재와 객관성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가 있다고 본다. 환언하면 기독교인은 기독교 유신론적 실재관과 인식론을 전제해야 한다. 그것에 의하면 외부 세계의 실재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진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은 전혀 다른 해석체계를 가지고 외부 세계를 해석한다. 그 이유는 바로 두 체계가 전혀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무신론의 전제 위에 세워졌다면 후자는 유신론적 체계 특별히 기독교 유신론적 체계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틸의 전제주의는 형식적으로 볼 때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와 형태적 유사성을 띈 듯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기에 이 바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종교나 문화도 바른 세계이해를 가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외부 세계에 대한 실재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보장받게 된다. 이 체계는 인식 주체와 객체를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식을 절대 진리로 믿기 때문에 상대주의에 절대로 빠질 수 없다.


기독교의 복음주의 신학은 기독교적인 실재관과 인식론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학문적 이론들은 좀 더 철저한 비판을 통해 어떻게 기독교의 체계 내에서 유용하게 변환, 사용될 수 있는지 분별한 후에 적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 신학의 이론적 작업에 있어서는 -성경 해석이나 신학 방법론의 논의 등-, 신앙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를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방법이나 선교, 목회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바른 상황화를 위해 개방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새로운 방법들이 적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 : 고동엽(ikorea) 교회개혁 공간
글쓴이 : 바른교회 이야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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