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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by 【고동엽】 2021. 11. 5.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도드라지는 의의, 그러면서도 전작인 <그리스도인의 비전>(IVP 역간)과 크게 두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이는 저자들의 서문 첫 머리에 분명하게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근대를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내러티브에 뿌리박은 성서의 세계관을 규명하는 것이다.
첫째, 포스트모던(postmodern)을 세계관의 사고 대상과 주제로 삼았다. 저자들은 포스트모던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호의적이다. 그들은 포스트모던의 문화가 변동하고 있는 북미에서 자신들이 예전에 개진했던 세계관 논의를 적용하고, 재해석하고 있다. 이전에 근대의 자리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전개하고, 근대를 향하여 기독교 세계관의 가치를 설파했다면, 이제는 포스트모던의 자리에서 포스트모던을 향하여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가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둘째, 이야기(narrative)를 세계관의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이야기에 입각해서 세계관을 설명한다. 기독교 세계관이 기독교의 세계관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서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출애굽 이야기를, 신약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성경 이야기가 곧 세계관의 뿌리이자 형식이다. 해서, 두 저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안은 그렇더라도 성서의 내러티브를 간과한 지난날의 책을 심히 애석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인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포스트모던하면서도 성서적이며, 개신교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맞는 적절하고도 유효한 형식이자 내용이다. 이 책이 강력하게 예증하는 바, 성서를 이야기로 읽고, 세계관의 성격과 기초를 이야기에서 찾는 것은 그 효능이 뛰어나면서도 성경에 철저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어쨌든, 이 책은 변화된 시대에서도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치밀하고도 대담하게 논술한다. 그렇다. 잔치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서의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살아내는 것은 영속적인 과제다. 이 책은 그 과업을 달성하는데 중요한 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순서대로 설명을 풀어보자면, 먼저 기독교 세계관이 포스트모던 현상을 상당히 공을 들여 성찰한다는 것이 이채롭다. 거칠게 말하자면, 대개 보수주의 신학은 포스트모던 현상뿐만 아니라 이론에 대해서도 부정적 태도를 견지했다고 보는 것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고, 그것을 신학의 방법론으로 삼으려 하는 일군의 신학자들을 ‘복음주의 좌파’라 규정하고, 보수적 복음주의의 시각에서 많이 이탈하여 표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The Evangelical Left(Baker Books, 1997) 그러니까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복음주의 노선으로부터 변질했다고 보는 입장인 셈이다.
하지만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포스트모던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는 포스트모던을 신학의 새로운 어젠다로 삼고 방향모색을 시도한다. 스탠리 그렌츠(Stanley Grenz)는 포스트모던의 기회를 강조하는 이들의 대표주자이다. 그는 딱딱하고 고정된 교리보다는 경건한 인격적 경험에, 파편화되고 고독한 개인보다는 그 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자리인 공동체에 방점을 두는 신학, 인식론으로는 근대의 기초주의(foundationalism)가 아니라 포스트모던한 반기초주의(nonfoundationalism)에 입각한 신학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야심에 찬 기획을 선도하였다. 그의 때 이른 갑작스런 죽음이 그의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든다.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이렇게 지형을 그리고 보면, 미들톤과 왈쉬는 포스트모던을 위기만이 아니라 기회로도 여기는 일군의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다. 위기의 측면을 수긍하면서도 더 긍정적인 기회로 포스트모던을 받아들인다. 하여 그들은 포스트모던을 그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아주 간편한 딱지를 붙이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손을 털어버리려는 이들과 궤를 달리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포스트모던을 위기이자 기회로 간단히 규정하거나 그래서 모던이 신학에 채운 족쇄를 포스트모던이 어떻게 풀어주었는지 그 해방적 성격을 찬미하지 않는다. 이 책의 구성에서 보듯이 그들은 포스트모던의 약점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다.
예컨대, 근대적 인간의 전형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신으로 상징되는 일체의 모든 권위에 복속되기를 저항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규범이 되는 자율적 인간이야 말로 근대적 인간의 이상이었다.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금지 조항을 벗어던지려는 순간 자신이 또 하나의 신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려는 제국적 자아로 변질한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국가와 과학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일까? 저자들은 바로 이러한 제국적 자아의 확장이 얼마나 허구에 지나지 않는가를 여실히 폭로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자아들이 타자에게 신이 되고자 할 때, 충돌과 폭력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근대인의 모순을 철저히 인식한다. 제 스스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라 믿었지만 그 실상을 파헤치니 개인은 문화, 언어의 사회적 산물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목욕시키는 법에서부터 땅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동양과 서양이, 북미 인디언과 서구는 현저하게 다르다.(<그리스도인의 비전>, 1장) 그렇게 자라난 이들의 세계관과 정체성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삶에 의해 저절로 구성된다. 그 관계망에 의해 포섭된 이상 자신은 특정한 사안에서의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독자적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결국 그는 사회적 구성물의 산물에 불과하다. 하여 인간의 정체성은 탈중심적이고 다중적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인간 이해의 문제점을 파고든다. 제국적 자아에서 다중적 자아로의 전환을 포스트모던은 경축하지만, 그 자아가 실체 없는 주체로 전락하여, 의미 있는 삶을 규정할 만한 규범이나 잣대가 상실하고, 결국 삶의 혼돈, 곧 아노미를 초래한다. 자연히 소비나 도덕적 행위에서 선택의 기준이 없거나 약화된 이상, 무한한 선택의 자유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무한한 선택의 보류가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을 선택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근대적 인간관과 희망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여간에 포스트모던한 인간은 나침반을 잃어버리고 정처 없이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포스트모던의 문제를 들추어낸 다음에 성서의 인간 이해를 들이민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한편으로 자율적 인간을 주장하는 근대를 향해 인간이란, 지배자나 정복자가 아니라 청지기이며, 세계의 주인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파편화하는 포스트모던을 향해 인간은 그렇게 무능력하거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조자의 위엄과 영광을 반영하고 반사하는 신적인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그리고 세상에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사명을 받는 존재라고 선언한다.
두 저자가 근대와 포스트모던의 자장을 해체하지 않고, 긴장을 견뎌내면서도 대안을 창조하는 것은 구약이 자리했던 애굽과 바벨론이 근대와 포스트모던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철학은 그네들은 신들의 엘리트로, 노예와 포로인 히브리인들은 신들의 노예로 축소하였다. 이는 제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우리는 바벨론과 근대적 의미의 독재자적 인간도 아니며, 바벨론 강가의 히브리인들에게 강요하고 포스트모던 사회가 조장하는 희생자로서의 인간도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아들이요, 딸들이다. 이렇게 고전적인 신학적 진술과 성서의 세계관이 근대와 포스트모던에도 유효하고 적실한 대안이다. 이것이 3장과 6장의 내용이다.
물론 근대와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저자들과 시각을 달리할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에 경사된 이들은 그들대로, 그리고 맞은편 근대에 서 있는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탐탁치 않는 대목이 많을 것이다. 또한 과연 이 땅 한반도가 포스트모던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서구와 달리 제대로 된 근대를 경험조차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전근대적 모습이 폐부 깊숙이 자리하는 마당에, 그래서 전근대와 근대, 포스트모던이 마구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포스트모던을 논한다는 것이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관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심히 당혹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이 볼 때, 두 사람은 정확히 아버지 집을 떠난 탕아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석연찮음이 타당하다 하더라도 저자들의 시도는 적어도 세계관의 전통적인 구조를 포스트모던한 상황에 맞게 이해하고 적용하려 했다는 점이나 설명 방식을 명제적 진리가 아닌 이야기로 말한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과 운동이 내적으로는 교회 갱신과 외적으로는 사회 변혁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이나 문제 상황이 저자들의 것들과는 분명 구분된다. 따라서 두 사람의 논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어도, 또한 그렇게 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들의 참신한 시도가 새로운 길을 여는데 혁혁한 공헌을 할 것이 틀림없다. 북미의 세계관이 그네들의 삶의 자리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면, 한국의 세계관 담론이 지금 여기를 어떤 구도나 형식으로 볼 것인지를, 이 땅의 교회와 사회를 깊이 들여다 볼 것을 채근한다.
명제에서 이야기로
다음으로 이 책의 의의는 세계관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 책의 틀은 전작인 <그리스도인의 비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도식과 네 가지 세계관적 질문은 책 전부를 끌고 가는 핵심 동력이다. 첫째,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실재를 모색하는 것으로 창조에 해당한다.(2장, 7장) 둘째, “우리는 누구인가?”는 인간의 본질과 사명을 묻는 것으로 이는 타락과 관련된다.(3장, 6장) 세 번째와 네 번째 질문은 구속과 관계된 질문으로 다음 두 가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와 “해결책은 무엇인가?” 앞의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장애를, 뒤의 것은 고통과 폭력을 극복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대답한다.(4장, 5장)
아무래도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이야기다. 두 사람은 앞의 책의 형식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이야기의 방식을 도입한다. 성서를 명제(proposition)로 읽지 않고 이야기(narrative)의 세계로 본다는 것이 진일보하면서도 돋보이는 변화다. 성서를 명제로 이해하는 한, 성서는 교리적 진술을 위한 증거 본문(proof text)으로 인용되는 자료집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성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침묵하고 도리어 억압당한다. 또한 딱딱한 논리와 화석화된 역사로 인식하는 한, 성서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은 근대와 계몽의 세계관에 대한 반발이자 대안이다. 확고부동한 지반을 구축하려는 근대의 관점에서 성서는 스스로 제일 토대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 과학적 증거와 역사적 사실, 철학적 논리라는 잣대 앞에 성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과학적 세계상으로 보면 오래된 신화 정도로 여겨지고 성서가 성서 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들은 배제되거나 적어도 재해석되어야 할 무엇이 되었다. 성서 이야기를 사변적 원리나 객관적 명제, 고고학적 자료로 환원되는 순간,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도, 교회 공동체의 정경일 수 없다.
하지만 성서의 정당성은 스스로 확보된다는 것은 종교 개혁의 이념이자 이상이 아니던가? ‘오직 성서로만’은 성서를 성서 이면(behind)이나 너머(beyond)의 탐색이 아니라 성서와 함께(within)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서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견 어리석기 짝이 없고 미련하기 그지없는 듯 보여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다. 분명 성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의 과학과 철학·역사에 처진다고 말하는 그는 대관절 누구인가? 해서 이야기의 부각은 포스트모던하면서도, 개신교의 오직 성서로의 정신에 부합한다.
그러면, 세계관을 이야기로 말해야 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가? 만약 당신이 세계관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하자. 제일 먼저 세계관의 개념 정의를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은 창조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개 그들에게 창조는 과학주의와 다투는 병기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충실한 해석자요 대변자인 낸시 피어시의 책, <완전한 진리>(복있는사람 역간)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온통 진화론을 공박하는데 이용한다. 하지만 신국원의 말마따나 “창조의 진리를 진화론과 싸우는 데만 사용하는 것은 큰 낭비다”.(<니고데모의 안경>, IVP 역간)
국내의 대표적인 책인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은 성경의 창조에서 문화 명령과 변혁적 규범을 찾아낸다.(3장) 창조의 일부분인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해야 한다. 미들톤과 왈쉬의 앞의 책, <그리스도인의 비전>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창조를 사회 변혁적 비전을 제공하는 틀로 이해한다.(3장) 말씀과 지혜로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책무를 주셨으므로 마땅히 신자는 세상에 대한 청지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인 한, 성서의 이야기가 세계관의 뿌리요 기초인데, 성서 이야기에 충실한지를 한번 따져 보자는 것이다. N. T. 라이트의 말처럼, 이야기는 세계관의 결정적인 틀이며, 수단이며, 이야기 자체가 세계관이다.(<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크리스챤다이제스트 펴냄, 79쪽) 창세기가 이야기하는 창조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며,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세계관 교재들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의 틀을 반영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세계관 교과서들은 성서 이야기와 상당히 멀다.
미들톤과 왈쉬는 세계관의 렌즈인 창조를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 입각해서 설명한다.(2장, 7장)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애굽, 특히 바벨론 신화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바벨론 신화에서 세계와 인간은 신들의 전쟁에 의해, 그리고 전쟁 이후 패배한 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흙을 섞어 창조된 것들이다. 이 신화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악하고 추한 것으로 보는 것이며, 인간을 그저 신들의 대리자요, 신들의 백성인 제국에 충성하는 노예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함축한다. 그리고 강자의 무력과 폭력에 의해서만 제국의 혼란과 혼돈을 제압하고 평화를 정착할 수 있다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반면 성서는 세계가 처음부터 선하며, 신들의 전투와 같은 갈등이나 폭력이 아닌 평화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악은 선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우선권이 없으며, 폭력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평화에 기여하는 바도 없다. 다만, 악은 평화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훼방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은 창조에 반하는 혼돈의 땅이다. 하여, 더는 애굽의 노예로 신음하며, 바벨론에서 포로로 연명하는 히브리인들이 그곳에 살아야 할 하등 이유가 없다.
그러기에 조화를 이루며 평등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약자와 빈자를 짓누르는 거짓 평화의 허세와 실체를 폭로하고 거저주시는 선물의 땅에서 샬롬을 구현하는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선물이기에 근대와 달리 우리는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고, 사명이 있기에 포스트모던적 해체를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질서의 수립자가 되려는 근대의 교만을 꺾어야 하며, 일체의 질서를 부정하려는 포스트모던의 자학과 맞서야 한다.
이렇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자리에서의 창세기와 창조 독해는 오늘날의 과학적 읽기와 꽤 거리가 멀다. 성서를 과학적으로 읽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노예와 포로의 실존과 사회적 정황에서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또는 진화되었는지는 토론은커녕 관심거리도 못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 적어도 분명한 것은 성서를 성서 자체로 읽어내는 것,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과학과 결부해야 한다.
김기현 / 수정로침례교회 목사
*이 글은 <프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역자 후기로 필자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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