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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및 신조〓/한국 교회사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 역사적 개관

by 【고동엽】 2021. 11. 5.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 역사적 개관

 

일련의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지우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이될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지우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과 종말론의 발흥이었다. 이 두가지는 깊숙한 연계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를 특징지우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는 두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삼일운동 탄압 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운동이었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1)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정치(민족). 종교.교육. 문화등 여러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이다.”2) 그러나 신앙적인 차원에서 신사참배문제는 교회와 불의한 세속권력과의 갈등문제로 이어져 교회는 이에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사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나아가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히 연계되었던 것이다.3)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정부의 주도하에 처음부터 용의주도하게 준비되었으며, 그 중에 하나가 일본 천황숭배였다. 일제는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축하식에는 모든 학생들이 일장기를 들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했다. 신사참배 이전에 공립학교에서 천황예배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은 곧 이어 진행될 신사참배를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일제가 기독교 학교에도 천황숭배를 요구하자 선교사들은 일요일의 행사참여, 일요일의 교사시험실시는 “기독교도로서 양심이 허락치 않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반대한다”는 사실, 기독교 학생들을 “천황예배를 프로그램의 하나로 하는 의식에 참가시켜 폐하의 사진에 경례하게 하는 것 같은 명령에 대해서는 모두 다 반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것은 천황에 대한 존경이 없어서가 아니라, 또 그를 위해서 기독교인이 기도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신으로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제왕을 존경하고 이에 순종하는 것은 기독교도가 언제나 성서 및 교사로부터 배우는 도의다. 폐하를 위하여 또 위정자를 위하여 비는 것은 주일날 우리의 예배의 일부지만 그러나 폐하를 신 또는 신과 대등한 지고자(至高者)로서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도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4) 선교사들은 이와 함께 “조선사 및 세계사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도 제한을 철폐”해주기를 청원하였다.5)

신사참배는 물론 공립학교에서 교과과정을 개편해 지리와 역사과목을 없애고 일본어 독본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역사, 그것도 포장된 일본 역사를 조선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더구나 일본천황예배를 도입해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미션 스쿨에서는 기독교와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이면에는 한국을 자신들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기위한 소위 일본의 신민화 정책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용의 주도하게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그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진시목적으로 강제 동원되었고, 내선융화 이름하에 황민화 정책이 진행되었다.

1937년 10월의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강요,” 1938년 3월의 조선어 사용금지, 1939년 11월의 창씨개명 강행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일본은 한국인을 전력에 동원하기 위해 1938년 2월 육군지원병제도와 1943년 5월 해군지원병제도를 실시하였고, 1943년 8월에는 징병령을 포고하였고, 1939년 7월에는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국민징용령이 실시되었다. 조선 인들도 황국신민으로 동등한 의무가 있다며 “강제 동원하고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무보수로 가혹한 중노동을 하게 하였다.”6) 일제의 침략 정책에 길들여진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은 조선교회와 조선 민족이 여기에 협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고 외쳐댔다.

 

 

출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http://www.ki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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