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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이해 〓/조직신학I(서철원교수)

<기독교 강요> 산책-구속주 하나님의 지식(고 광 필 교수)

by 【고동엽】 2021. 11. 4.

1. 원죄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라는 말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권을 시작한다. 이 말은 어떻게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이 전개되는가를 시사해 준다. 쉽게 말하면 구속주 하나님 지식은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보여진다는 말이다. 칼빈은 이 두 가지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원죄와 인간의 부패된 자유의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구속의 필연성을 논한다. 이 말은 원죄 속에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아니라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논리적 순서상 이것이 앞에 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이미 타락 전의 인간의 상태를 설명했다. 제 2권에서는 타락 후의 인간의 상태를 설명한다. 그리고 타락 후의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신학적인 용어가 바로 원죄라는 개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 에덴을 창설하신 후 위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아래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의 나무는 임의로 따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며 혹시라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놔두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할 수 있겠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결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 피조물의 본분이자 행복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전 12:13).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끝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써 불행의 씨앗인 죄를 짓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죄 곧 원죄이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 것이다.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최초의 죄인이 된 것이다. 또 불순종의 뿌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 교만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 교만을 죄의 뿌리라고 했다. 또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원죄라는 말은 창조 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 버렸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선한 본성의 부패를 말한다.
본성의 부패라는 말은 창조된 인간의 본성(nature)에 의해서 타락이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창조된 본성에서 타락이 온다면 인간은 불순종하든 안 하든 간에 원죄란 필연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칼빈은 “원죄란 본성의 부패를 의미하지만 타고난 본성에서 온 것은 아니며 육신의 출생에 의해서 부모로부터 유전된 것도 아니다. 원죄란 본성의 타락(Sin is not the nature, but its derangement)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우리 인간이 아담 안에서 부패한 것이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귀한 은사들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된 것이다”라고 요한복음 3:6 주석에서 말했다. <기독교 강요>, 2.1.1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선하신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허용이다. 여기서 ‘허용’이라는 말은 마지못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작정(作定) 가운데 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타락 전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그토록 타락하지 아니했을 것이며 타락의 책임도 인간에게 없었을 것이다. 또 인간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파멸시키지 아니했더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했을 것이다. <기독교 강요>, 1.15.8.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는 왜곡되어 비참하게도 노예의지가 되었고, 심히 부패하게 되었다.
원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악된 본성을 갖고 태어났고, 부패함이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공의로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불행하게도 온갖 죄를 짖고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엡 2:3). 여기서 진노의 자식이란 진노의 자식이 아니었는데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아니라 불순종으로 인해 부패된 인간의 죄이다. 여기서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보여진다.

2. 부패한 자유의지

“인간은 자유로운가?”라는 문제는 아주 논란이 많았던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물론 믿지 않은 사람들은 자유의지란 인간의 본질이며 결국 인간의 운명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로 봤다. 덴마크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인 소렌 키에르케고로는 인간의 특성을 자유로 규정지었다. 즉 자유 없이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데서 보여진다. 하나님이 전지 전능하지 않으셨다면 애초부터 자유를 주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신학적인 관점에 많은 차이가 있는데 이 관점에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이냐 보수주의 신학이냐를 판가름하기도 했다.
칼빈은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자유를 박탈당한 체 비참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상태에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선물(gifts)들은 소멸되었고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 있는 이성과 오성 같은 자연적인 선물만 부패된 상태로 아직 남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초자연적인 선물은 믿음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성결과 의에 대한 열성이다. 지극히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낙원을 떠나면서 영혼의 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선물들은 다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되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성화를 통해서 완전히 소멸되었던 선물이 다시 회복되어 간다. 이와 같은 인간의 탁월한 성품은 주어진 것이지 인간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연적인 선물도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였다. 따라서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나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와 오성 능력도 심히 부패하여 올바른 판단이나 건전한 선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행동은 죄를 지으려는 경향(inclination)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지 충동(compulsion)에 의해서 지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악을 선택하는 데 자유스러운 것이지 선을 선택하는 데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다. <기독교 강요>, 1.15.8. “As result, The will is free only to choose evil”(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J. Hesselink, 7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과 구별되는 희미한 이성의 능력이 아직은 남아 있다. 부패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인 재능이나 예술성도 이런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인 선물도 부패하여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중생하지) 않으면 올바로 쓰여질 수 없다. 이와 같이 초자연적인 선물의 박탈과 자연적인 선물이 부패했다는 견해는 자유의지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와 맥을 잇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견해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에 강하게 반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있다. 그 견해는 펠라기우스 논쟁과,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에서 잘 보여진다. 간단하게 말하면 펠라기우스는 타락 후에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자유의지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쉽게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죄악된 인간의 구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라기보다는 하나의 좋은 도덕적 삶의 모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에 의하면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원동력인 인간의 의지는 왜곡(perversion) 되어서 하나님의 법을 그대로 순종할 수 없게 되었고, 이런 왜곡된 의지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불가항력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의해서 왜곡된 의지가 회복되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 새롭게 부어진다(롬 5:5).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할 수 있게 한다(롬 13:8,10).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 주님이시여! 그렇게 행하여 주소서. 오, 자비로운 주님이시여! 그렇게 행하여 주소서. 행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오히려 당신의 은혜로서만 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하심으로 인간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모든 입이 다물게 하시고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대한 것으로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작은 자가 되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게 하소서.” <기독교 강요>, 2.7.9.에서 재인용. 왜곡된 의지의 회복에 의해서 우리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에서 찾으려고 했다. 만약 인간이 자유스럽지 못하면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타락 후에 자유의지가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부패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하여서 구원에 일조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서 방의 반대편에 있는 사과를 받으려 한다. 아기가 넘어지려 할 때 뒤에서 손이 그를 약간 받쳐 준다. 아기는 중심을 잡고 사과를 집는다. 이 조금 받쳐주는 손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구원을 이루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과 협동하는 것이다.” 롤란드 베인턴, <에라스무스>(현대지성사, 1998), 238. 각주 44, 45 참조. 에라스무스에게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협력적(co-operation)인 것이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유의지는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하려 애쓴다 해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사탄의 노예”라는 말이다. 노예란 자기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한다. 또한 가져서도 안된다. 노예는 자기 주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죄의 노예로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있다면 죄를 짓는 자유밖에 없다. 따라서 노예의지를 회복시키는 예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이렇게 자유의지에 대해 어거스틴은 타락으로 인한 자유의지의 왜곡 혹은 전도된 의지(perverted will)라고 했고, 루터는 사탄의 노예가 된 의지(bondage of will to satan)라고 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같은 의미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라고 했다. 그렇다면 전적 부패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기 때문에 그가 죄를 지은 것을 무의식적이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고, 또 강요된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열정에 의한 것이며,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욕의 유혹에 의한 것이었다. 더구나 인간의 본성은 너무 부패하여 악을 향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인간은 틀림없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강요>, 2.3.5.

사도 바울도 인간의 전적부패를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고백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는 선을 하고자 하는 원함은 있으나 그것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의하여 보여진다고 말한다. 원래 인간은 선을 지향하는 지향성이 있었지만 타락 후에는 없어졌다.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항상 악으로 가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항상 악을 행하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렇게 만든다. 인간은 충동에 의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의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견해는 다소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다같이 자유의지의 전적인 부패와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의하여 우리의 왜곡된 의지가 다시 회복되고 불 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이 인간의 자유를 통제하실 때만이 인간은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다(갈 5:16). 신자는 모든 것을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죄를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죄의 노예가 되어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또 이렇게 될 때 부패한 자유의지의 회복에 의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갖게 된다.

3. 율법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복음과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었다. 칼빈에 있어서 율법이라는 말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 전체와 선민에게 계시된 도덕법(십계명) 및 예수께서 요약하신 것과 각종 민사법과 의식법을 의미한다. <기독교 강요>, 2.7.l., 2.8., 4.20.15. 모세에 의해서 공포된 율법은 일반적으로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그리고 재판에 관한 율법을 말한다(<기독교 강요>, 4.20.14).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의식법은 폐해졌으나 도덕법은 여전히 신자의 마음 속에 새겨져 영원한 삶의 규범이 되었다. 이 점이 율법의 기능에 있어서 정죄의 기능을 제일 중요시한 루터와 다른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정죄의 기능을 칼빈이 무시했다는 말은 아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기독교 강요>, 2.7.1-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율법의 의미는 무의미하다.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이다. 이것을 깨달은 칼빈은 율법을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에서 다룬다. 이는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을 받아 주시는 데 필요한 의를 밝히는 동시에 인간의 불의를 알리고 책망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받을 자임을 알게 한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보도록 하는 “거울”이다. <기독교 강요>, 2.6.7.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고 죄악되며 야속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생각해 보라!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도록 한다. 둘째, 율법은 율법을 어긴 자들은 벌을 받으리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악한 행위를 억제케 한다. 사도 바울도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 불순종하는 자, 경건하지 않은 자, 사회에서 온갖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하여 세워졌다고 말했다(딤전 1:9-10). 그렇다. 율법은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 건전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셋째, 율법은 하나님의 의롭고 선한 뜻을 알게 하는 동시에 그 뜻에 복종하고 살도록 훈계하고 훈련시킨다. 이는 도덕법(십계명)으로서 율법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것으로서 성도에겐 필수적인 율법이다.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서론> (기독교문서협회, 1993), 217. 십계명(도덕법)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믿음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명령하며 다른 하나는 진실한 사랑으로 사람을 영접하고 사랑하도록 명령한다. <기독교 강요>, 4.20.15. 이 도덕에 관한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소망하는 모든 사람과 시대를 위한 “참되고 영원한 의의 규범”(the true and eternal rule of righteousness)인 동시에 자연법칙의 증언이며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증언(a testimony of natural law and conscience which God has engraved upon the minds of men)이다. <기독교 강요>, 4.20.15, 4.20.16. 결국 율법은 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가정교사)이다(갈 3:24). 에베소서 2:19-22에 대한 설교에서 칼빈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깨달음을 주는 선지자와 율법을 우리의 연구과제로 삼자고 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로 통일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꽁꽁 묶여 있던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또 순간 순간 가시처럼 솟아나는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된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율법의 의식적인 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용이 폐기되었다. 그렇게도 중요했던 구약의 의식법은 오실 메시아의 여러 면을 예시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직접 돌판에 새겨주셨던 도덕적인 율법은 이제는 우리 마음 판에 새겨져서 하나님을 믿고 살도록 늘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게 한다. 율법은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정죄하고 사망을 주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 굳게 동여매는 황금 줄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옛날의 기능이 바뀌어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비하시고, 의로우시며, 거룩하시고, 우리에게 사랑 가운데서의 복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 십계명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했고, 또 죽은 글자에 생명을 주시는 살려주는 영이라고 했다(고후 3:6).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롬 10:4)이요, 살려주는 영(고후 3:6)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뿐이다.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가! 두려움으로 떨리게 했던 부정적인 명령을 긍정적인 명령으로 바꾸셨다. 율법의 가장 좋은 해석자는 누구이겠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에 의하면 율법의 목적은 “인간 생활을 거룩한 순결의 모범에 따라 이루어 나가기 위한 의의 완성이다.” <기독교 강요>, 2.8.51. 우리는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다. 비로소 신자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것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목숨을 바쳐서 사랑해야 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어떠한 사랑인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희생의 사랑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덧입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롬 5:8). 그래서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요일 3:18).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율법을 완성해 나가며, 아무리 빚을 져도 부담이 없는 사랑의 빚을 서로가 서로에게 지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롬 13:8).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과 섭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과 불멸의 관계를 체결하시기 위해 은혜의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계시하셨다. 즉 복음을 계시하신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선지자와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말한다(롬 1:2). 반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도록 깨우치기 위해서 주셨다. 커다란 구속사의 한 부분으로서 율법에도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의롭고 거룩하며 영적인 것이다.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복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죄 사함을 줄 수 없다.

4. 율법과 복음의 관계

구속주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계시되었다.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은 어떤 관계인가?
첫째, 율법과 복음은 약속의 성격(nature)과 질(quality)에서 서로 다르다(“Only, we must note a difference in the nature or quality of the promises: the gospel points out with the finger what the law foreshadowed under types”). <기독교 강요>, 2.9.3. 다르게 표현하면 복음은 율법이 여러 가지 상징으로 표시한 것을 손으로 지시한다. 즉 복음과 율법은 계시의 명백성에서 서로 다르다(the gospel differs from the law only in clarity of manifestation). <기독교 강요>, 2.9.4 그러나 “복음은 구원의 다른 방법을 제시할 만큼 율법 전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의 약속을 모두 확증하고 만족시키며 그림자에 실체를 부여하였다(The gospel did not so supplant the entire law as to bring forward a different way of salvation. Rather it confirmed and satisfied whatever the law promised, and gave substance to shadows).” <기독교 강요>, 2.9.4, 2.7.16, 2.8.28-29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Ο νομος και οι προφηται μεχρι Ιωαννου') 그 후부터(απο τοτε)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6-17). 여기서 “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은 복음이 옴으로써 율법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세례 요한의 직분을 율법과 선지자의 직분에 비교한다는 의미이다. 즉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제시되었던 것이 이제 복음에 의해서 분명하게 보여진다는 의미로서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전환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CC, Vol. 16, 2nd Vol, 15-16 반면 루터는 누가복음 16:16-17 말씀을 율법과 복음의 계속성으로 보지 않고 마지막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로마서 10:4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τελος γαρ νομου Χριςτος εις δικαιοσυην παντι πιςτευοντι)이 되시니라”. 이 말씀에서 루터는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장차 어루어질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율법의 마침”으로 이해했다. 즉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가 마침이라는 말에는 ‘마침’이라는 의미에 ‘완성’(completion)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서 10:4주석에서 율법이 무엇을 약속하든, 무엇을 명령하든, 무엇을 가르치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리스도는 주제요 율법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부제이며, 그리스도는 전체요 율법은 부분이라고 했다. CC, XIX, 384-385.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은 루터처럼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을 대체시켰다(마침)는 의미가 아니라 완성하는 의미로 즉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사에서 이해했다(히 1:1).
로마서 10:4의 문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義) 즉 믿음의 의를 추구하지 않고 율법에 기초한 의로 구원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율법 이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은 완성의 의미이자, 과거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왔는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길이 없어지고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과 목표로서 자신의 죽음과 삶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월터 카이져, <구약성경윤리>, 홍용표 역(생명의말씀사, 1997), 350-352 이처럼 루터와 칼빈의 복음과 율법 이해는 서로 상반된 점이 있다.
둘째,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거울과 용서와 같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나 죄를 사해 주지는 못한다. 사도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라”고 했다(롬 8:2-4). 우리 주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시키셨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정죄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의 기능과 양심을 속박하는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자로 살게 하는 의의 규범이 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율법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는 거울과 같지만 복음은 율법이 알게 하는 죄를 용서해 준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고전 1:18).
셋째,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글자와 영(letter and spirit/γρμματος not γραφη, αλλα πνευματος)과 같다. 글자와 영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칼빈은 이를 예레미야 31:31-34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I will put my law within them, and on their heart I will write it)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모세를 통해서 준 언약은 돌판(율법)에 쓰여졌지만 새 언약(복음)은 마음에 쓰여졌다. 돌판에 쓰여진 언약은 이스라엘이 지키지 못하여 파기되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기록된다. 그래서 성령께서 지키도록 돕는다. 복음 즉 그리스도 예수 없이는 율법은 기록된 글자요, 죽이는 글자(letter/not γραφη but γρμματος)에 불과하다. CC, Vol. X (Michiga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9), 131.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spirit)이다. CC, Vol. X, 141. 복음은 글자가 아니라 영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심고 우리를 가르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3:6에서 말하는 의문과 영의 관계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생명이요 정신이라고 했다(Christ is the life and spirit of the law). CC, Vol. XX, Second Corinthians 3:17, 185. 예수님은 우리를 중생케 하심으로 율법에게 생명을 준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영으로서 우리를 중생케 함으로써 율법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은 살리는 영으로서 율법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적 요소가 배제된 율법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복음은 살려주는 영으로서 율법이 하나님의 의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글자가 없이는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규범을 알 수 없다. 즉 율법은 우리를 중생케 하거나 의롭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신자로서 살아야 할 의의 규범을 제시하고 가르친다.
율법은 우리가 지키지 못할 때 우리를 정죄한다. 이는 우리가 지키지 못할 때 공포와 저주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갈 3: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여기서 중요한 말은 율법의 저주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으로서, 이 말은 율법을 없애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심으로 율법이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속박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더 이상 우리의 양심을 속박하지 못한다(롬 8:1-3).
넷째,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감시자와 예수와 같다. 갈라디아서 3:19-25 주석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3:19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감옥에 갇히게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tutor/παιδαγωγος/감시자)이다. “약속한 자손이 오시기까지(갈 3:19), 믿음의 때까지(갈 3:23), 온 후로는(갈 3:25)”이라는 단어는 율법의 때를 명시한다. 율법의 한시적인 역할을 말해 준다. 칼빈은 율법의 한시성을 율법의 마지막으로 이해하지 않고 계시의 점진성으로 이해한다. 감옥이나 감시자의 기능은 괴롭히는 것도 있지만 교육하고 보호하는 측면도 있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죄악을 들어내는 기능은 가지고 있다. CC, Vol. 21, 106-9. The true purpose of the Mosaic law, though the law couldn't make men righteous(v. 21), it revealed God's will so that men might recognize their transgressions(v. 19, 22). 학자들간에 갈라디아서 3:24 말씀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εις Χριστον)에서 전치사 “에게로 인도하는”(εις)이 목표를 표현하느냐 시간을 의미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한다. 즉 전치사 “에게로 인도하는”(εις)을 목표로 해석해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고, 시간으로 해석해서 “이같이 율법이 그리스도의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생명의말씀사, 1996), 194. 그러나 칼빈은 시간적인 의미를 계시의 점진성에서 봄으로써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to bring us unto Christ) 보호자요 감시자로 봤다. 즉 감시, 교육, 보호의 기능을 동시에 중요시했다. 만약 전치사 εις를 시간적인 부사로 해석해서 율법의 기능을 속박이나 예속으로만 본다면 율법과 복음을 연결하는 긍정적인 연결고리가 없어지고 만다.
다섯째,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그림자와 실체와 같다. 구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질 속죄를 예시한다. 구약에서는 백성의 죄를 양과 염소의 피를 통해서 속죄했다.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 즉 죄를 지으면 반드시 피를 봐야 했다. 죽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대신 양과 염소를 죽이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셨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을 예시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10:1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Σκιαν γαρ εχων ο των μελλοντων αγαθων, ουκ την εικονα των πραγματων, κατ´ ενιαυτον ταις αυταις θυσιαις ας προσφρουσιν εις τοο διηνεκες ουδεποτε δυναται τους προσερχομενους τελειωσαι.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장차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σκια)와 참 형상(εικονα των πραγμα)이다. 참 형상이라는 말은 실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reality itself라고 번역했다. 즉 율법은 그림자요 복음은 실체이다. 그림자의 의미는 실체에 의해서 명확하게 된다.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복음에 드러난 더 좋은 것을 소망하도록 소개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2.11.4; 히 7:19, 시 110:4, 히 7:11, 9:9, 10:1. 도덕법―십계명―과 의식적 율법도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the moral and ceremonial law significant as leading to Christ). <기독교 강요>, 2.7.1.

5. 율법과 복음의 신학적 중요성

율법과 복음의 신학적 중요성을 보자.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기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율법 폐기론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명한 것―안식일, 절기, 의식―을 지킴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칼빈의 견해는 율법 폐기론자들이나 율법주의자들과 다르다. 성경적이다.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계시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복음을 이해함으로써,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구별함으로 구속사에서 서로 다른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구속사가 아니라 구원의 과정의 일부로서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 루터는 율법이 먼저 선포되고 그 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함을 강조했는데, 이때 율법과 복음은 긴장관계에 있었다. 서철원, <복음과 율법의 관계>(엠마오, 1993), 21. 이처럼 루터는 율법의 정죄 기능을 강조했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을 강조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의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을 강조한 칼빈은 이런 맥락에서 신자들의 성화된 삶을 강조한다.
율법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하는데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약속의 성격과 질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거울로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의 죄악성을 드러내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거나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한다. 또한 율법과 복음은 계시의 명백성에서 서로 다르다. <기독교 강요>, 2.9.4. 율법은 여러 가지 방법(히 1:1)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지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 즉 율법은 그림자―모형―를 통해 그리스도를 가르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다. 이처럼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율법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림자의 실체를 보여주듯 복음은 율법을 확증하고 만족시킨다. 참으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복음의 토양에 뿌리를 내릴 때 그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토양 안에서 율법은 올바른 의미를 가지며 또 의의 규범으로서 제 역할을 한다.
십계명은 도덕법으로서 의롭고 거룩한 삶의 원칙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형식이다.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서론>, 213. 인간을 저주하고 정죄했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동여매는 긍정적인 사랑의 줄이 된 것은 실로 하나님이 용서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빛나는 지혜요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후 1:18).


6.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필이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게 되었는가? 누구를 위해서 오셨는가? 성육신에 어떤 절대성이 있는가? 절대성이 있다면 그 절대성은 어디에 기초한 것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되어야 했는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 되셔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야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 되신다. “우리를 위해서”(for us)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데에는 네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하늘의 작정(a heavenly decree), 즉 인간들의 구원이 의존하고 있는 작정에서 나온 것이다. 가장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최선의 것을 작정해 주신 것이다.” <기독교 강요>, 2.12.1. 즉 성육신은 창세 전의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안 지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논리적으로 배제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낙원을 상실하고 진노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아무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죄 있는 사람이 죄악된 자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오직 죄 없으신 분, 그러면서도 인간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함께 살 수 있는 분만 중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리하여 인간은 중보자가 될 수 없고 죄 없으신 하나님만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하나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구원하셔서 새 사람 되게 하시고, 함께 살면서 귀한 천국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으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시며,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사 42:3).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임무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그 누가 인간을 죽게 한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올 수 있겠는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을 이해하실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성품도 취하셨다. 예수님도 슬플 때는 우셨다. 목자 없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해가 저물도록 하나님의 나라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했다(막 8:2).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집이 되었을 때 가차없이 장사꾼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기도 하셨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 두려워 할 때면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고 또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도 해주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죽으시고 살아나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기꺼이 보혈의 피를 흘려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성경대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넷째,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죄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이 희생은 완전한 희생의 제사요 순종의 제사였다. 또한 신성으로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붙드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소망을 조건 없이 주셨다. 인간은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진실한 것이다.

7. 중보자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칼빈에 의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논했고, 제 2권에서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논했다. 두 가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지식이지만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로 통일된다.
하나님의 지혜의 보고요 웅대한 “극장”인 우주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었지만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나님은 선하고 거룩한 예정과 섭리 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서 십자가에서 값없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은혜로운 구속주가 되셨다. 이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엡 1:4). 이 예정과 섭리는 구약에 예언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주가 되심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예언된 역사적인 사실이다(사 55:3-4, 렘 34:23-25).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요 신약은 그 약속의 성취이다.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로 통일된다. 즉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며,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성경을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정말 옳은 말이다(딤후 3:15-18). 또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우리를 간절히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주 아래 있는 인간들은 새로운 인간이 된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은혜로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두더지 같고 벌레만도 못한 죄악된 인간이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뵈올 꿈도 꿀 수 없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계시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 되신다.
중보자는 한 분이시다(딤전 2:5).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보면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이 통일성을 이루며,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가 되심을 각 사람의 마음에 인을 치시고 확신케 하신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과 신약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며 동시에 복음과 율법이 통일성을 갖게 된다.
“우리를 위해서”(for us)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을 입고 오신 것은 중보자로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에 기인한다.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 되셔야 했다. 왜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 되셔야 했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자비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아버지요, 구속주가 되심을 계시하신다.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다. 다시 말하면,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분이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8. 삼중직

칼빈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중직―제사장과 왕―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1539년 제 2판)와 제네바 요리문답(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1541)에는 선지자 직분을 첨가했다. 성경에는 선지자, 왕, 제사장이 나온다. 이들은 그 직분과 역할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로서의 직분, 왕으로서의 직분,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다 갖고 계신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세 가지 활동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for us)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으로 기름을 부으셨다. 여기서 “우리를 위해서”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구속사역은 우리를 위해서 한 것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은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들처럼 가시적인 기름(the visible oil)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혜(by the grace of the Holy Spirit)로 된 것이다. 이 성령님의 은혜는 구약에 행해졌던 외적 기름 부음의 실체(the essence of that external anointing/Ps.45)이다. 삼중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사역을 알 수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이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늘 들려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까지는 계시의 충만한 빛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은 참된 종교에 대해 무지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올 줄을 내가 아나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 4:25).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待望)은 단순한 경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믿음에서부터 왔다. 사도 바울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느니라”고 했다(히 11:1). 하나님은 옛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기름 부으시고 이 땅에 보내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시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다(사 61:1-2).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천사들의 특별계시를 통해서, 계시의 영으로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교훈함으로(벧전 1:11-12), 그리고 신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심으로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셨다. 여기서 선지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의 영,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신약에서는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시며,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시고 가르쳐 주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복음의 사역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님의 능력이 계속 역사하도록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예언의 완성이요 마지막이 되셨다. 이제 더 이상 직통 계시(새로운 계시)는 없다.
제네바 요리문답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지자 직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9. 목사: 어떤 의미에서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라고 부르는가?
아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사 7:14)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최고의 대사(He proclaimed himself an ambassador to men and an interpreter/ messagier-使者)요 최고의 대사(embassadeur)가 되어 하나님의 뜻(the Father's will)을 세상에 충분히 제시하셨고, 또 모든 예언과 계시를 완성(He might put an end to all revelations and prophecies/사 61:1, 히 1:2)시키셨기 때문입니다.
40. 목사: 이로부터 어떤 유익이 너에게 돌아오는가?
아이: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은사들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은사들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요 1:16).
41. 목사: 보다 자세히 설명해 보라.
아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은사들과 더불어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정도에 따라(엡 4:7) 이것들을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영적인 재화들을 마치 우물에서 길어내듯 그분으로부터 얻어냅니다.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 옮김(도서출판 경건, 1995), 111-112.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ed. J.K.S. Reid, LCC (London: SCM Press LTD, 1954), 95. To each of us grace has been given as Christ appointed it.

둘째,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왕이시기 때문에 왕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영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나라도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은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교회와 개인을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몸이다. 예수는 자신의 피로써 몸 된 교회를 사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영원한 인도자요, 수호자요, 보호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반석이시다. 세상의 국가는 흥망성쇠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많은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반석 위에 서 있다. 왜 그럴까? 교회의 반석이 왕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반석이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흔들린다면 처음부터 반석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우리 신자는 예수님의 피로 건설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확실한 소망을 두고 그 곳을 바라보며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왕 되신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의 순례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어려운 고난을 만날 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순례 길을 가야 한다.
제네바 요리문답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왕국(kingdom)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37. 목사: 네가 말하는 ‘왕국’ 이란 어떤 유형의 것인가?
아이: 그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 왕국은 의와 생명을 지니고 있는 말씀 및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A spiritual kingdom, contained in the Word and Spirit of God, which carries with them righteousness and life).
42. 목사: 그리스도의 왕국은 우리에게 무슨 소용(confer upon us)이 되는가?
아이: 그분을 통해 우리의 양심이 해방을 받고, 그분의 영적인 풍요함으로 충만해져서 의와 거룩함 가운데서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영혼의 적들인 악마, 죄, 육, 그리고 세상을 이길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Just this, that by its benefit we are accorded freedom of consciences for pious and holy living, are provided with his spiritual riches, and also armed with strength sufficient to overcome the perpetual enemies of our soul, sins, the flesh, the devil and the world.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 옮김, 110. Calvin: Theological Treaties, 9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백성은 혹독한 어려움과 이겨내기 힘든 고난이 있어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산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에 의로움, 평강, 희락의 샘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의로움, 평강, 희락이 없는 삶은 어두운 삶이요 참으로 괴로운 삶이다. 양심을 후벼파는 고뇌의 삶이다. 왕 되신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 영광스러운 심판주로 오신다. 그 때에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산 자만이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보호자이시요 개인의 보호자이시다.
셋째,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 대제사장으로 화해와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신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이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생겼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인간의 죄를 참으실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을 반드시 처벌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흠 없고 점 없는 영원한 중보자가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우리 죄과를 말소하시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으므로, 제사장 직분은 그리스도께만 속한다”. <기독교 강요>, 2.15.6.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다 씻기시고, 거룩케 하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게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가 된다니(히 13:15)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무가 주는 유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43. 목사: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우리에게 소용되는 바가 무엇인가?
아이: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직무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는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그분의 직무)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그분의 제사장직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First, that on this ground he is our mediator, who reconciles us to the Father. Then too, because through him there is open up for us a way to the Father, so that with boldness we may come to his presence, and ourselves also offer in sacrifice to him ourselves and all we have. And in this way he makes us his colleagues in the priesthood.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 112,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96; 히 7, 8, 9, 10 그리고 13장).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삼중직을 갖고 있다. 예언자 직분, 왕의 직분, 제사장 직분이 그것이다. 삼중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며, 예수는 삼중직을 통하여 구속을 완성하셨다.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복스러운 자녀가 되었다. 여기에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이 계시된다.

9. 속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죄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어떤 관계인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 다시 말해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죄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다(요 3:16).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 사역을 이루신다. 그분의 속죄 사역은 “우리를 위한” 속죄 사역이다. 우리를 위한 속죄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사도신경에 잘 요약되어 있다. <기독교 강요>, 2.16.18. 칼빈에 의하면 믿음의 시작과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잘 요약하여 준 것이 사도신경이다(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that is a plan for instructing Children in the doctrine of Christ: concerning the faith, Calvin: Theological Treatisies, LCC, Vol. 22, London:SCM LTD, 1954, 92).
1) 속죄 사역의 출발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 히브리서 2:9 주석 for the cause of redemption was the infinite love of God towards us, through which it was that he spared not even his own son. 요한일서 4:9 주석; <기독교 강요>, 2.16.4.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 사역의 출발점(the starting point)이다. 여기서 사랑은 강요된 사랑이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의 사랑(요일 4:9, the gratuitous love of God in Jesus Christ)이다. We have the love of God towards us testified also by many other proofs. For if it be asked, why the world has been created, why we have been placed in it to possess the dominion of the earth, why we are preserved in life to enjoy innumerable blessing, why we are endued with light and understanding, no other reason can be adduced, except the gratuitous love of God(The First Epistle of John 4:9). 즉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 강요>, 4.1.12. 속죄의 필연성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두는 사람도(루이스 벌코프)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성에 기초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처벌해야 한다. 죄 지은 인간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속죄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있다.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신 한 분이다(레 11:44-45, 19:2). 거룩하시기 때문에 어떤 죄도 용납하실 수 없으며,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거룩케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성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으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거룩성은 구별됨 의미한다. 구약에서 사용된 거룩성은 엄위와 신성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사역적 의미를 가지며 교회의 성화의 원리이다(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 옮김(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308-310).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도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의 한가지 표현이라고 말한다(New Geneva Study Bible, “God is light: Divine Holiness and Justice"(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5), 167).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죄인이다. 그래서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요 3:16).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아!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는가?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 마리로 삼아도 그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찬송가 기자는 고백했다(찬송가 404장). 그래서 칼빈이 속죄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강요>, 2.16.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칼빈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첫째는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그 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이요(엡 1:4), 둘째는 그 안에서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셔서 그가 우리에게 은혜로우시다는 점을 입증하셨기 때문이다(롬 5:10).” And, indeed, Paul informs that there are two ways in which we are loved in Christ; first, because the Father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Eph. 1:4) and secondly, because in Christ God has reconciled us to himself, and has showed that he is gracious to us,(Rome. 5:10). Thus we are same time the enemies and the friends of God until, atonement having made for us our sins, we are restored to favour with God(요 17:23 주석, CC, Vol. 18, Baker Book House, 186).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심은 결코 성자의 보혈을 통한 화해 이후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주 창조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와 함께 우리도 아들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속죄의 전제조건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하여 참 인간이 되셨다(God became a man and thereby took what was ours(humanity) to impart to us what was His(salva -tion)).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왜 죄 없는 하나님이시요 인간이신 주님이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셔야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이요 사랑의 표현이요 공의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죄악 된 인간을 사랑하심은 그의 의에 있다(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had done no sin,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인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러나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misericordia)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체험할 수 없다.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대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보신다. "God's wrath is a response to sin. But God initiates our liberation from sin by his mercy(misericordia). This mercy cannot be experienced apart from Christ. Apart from Christ, God is, so to speak, hostile to us"(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6.2.).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속죄하셨는가? 속죄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을 통해서 보여진다.

2) 속죄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서 보여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시다. 성육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약화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이셨듯이 인간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도 참 하나님이시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버림과 멸시를 당하고 육신으로 수난을 당한 바로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는 또 하늘에 계신 인자였는데(요 3:13), 이 육신을 따라 인자로 지상에 살던 바로 그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을 따라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고 한다. 이는 신성이 하늘을 떠나서 육체라는 감옥에 숨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성은 비록 만물에 충만해 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육체로 거하셨기 때문이다(골 2:9). 즉 본래대로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거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4.17.30.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셔야 했는가? 그것은 죄악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했다(요 1:14). 이 세상에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통해서 보여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와 함께 사심이 우리에게는 은혜 위에 은혜요 진리 중의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분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오셨는가를 모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칼빈성경주석>, Vol. 17. 요한복음 1:49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속죄의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믿음의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를 모두 다 의롭다 하셨다.
구약의 속죄 제도는 양과 염소의 피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속죄의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로 말미암은 화목제로 세우셔서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고 죄 사함을 주셨다(롬 3:25).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롬 3:23-26).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과 화해케 한다는 말이다. 즉 화해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도 화해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의 속죄 제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주 되심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훌륭하다거나 다른 민족보다 탁월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택하신 이유는 단지 사랑 때문이었다(신 4:37-40).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요 3:16). 이와 똑같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엡 1:6).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함을 받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 받은 존재였는데도 죄를 지었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다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나님은 인간을 죽여버릴 수도 있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속죄의 방법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 완전한 속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또 하나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그의 피를 믿는 자에게 전에 지은 모든 죄를 간과하시고 동시에 의로움을 나타내셨다(롬 3:24). 이 사실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잘 예표된다(출 2:1-5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인간은 원래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자를 죄가 없다고 선언하셨다(롬 3:24).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때문에, 가령 판사가 법정에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을 무죄라고 판결을 내린 것처럼,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되심과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이 저주의 십자가에서 보여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한데 융합되어 흘러내리는, 한량없이 자비스럽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보이는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하나로 통일된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것처럼 기독교인의 정의도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정의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제물(Christ our sacrifice)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신 법적인 면(Christ our legal substitute)도 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우리에게 임한 저주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옮기어졌으며 제거되었다. “십자가는 비단 인간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작정으로 보아도 저주받은 것을 말한다(신 21:23).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는 자신을 저주에 내맡겼다는 뜻이 된다.” <기독교 강요>, 2.16.6. 로마서 주석에서 “재판관이 무죄를 선고하는 때에는 아무도 소송에서 성공할 수가 없는 것처럼, 율법이 충족되고 죄 값이 이미 지불되어 버린 경우에는 아무런 정죄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칼빈성경주석>, Vol. 19. 롬 8:34. 율법의 요구에 대하여 빚진 자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으신 것은 율법 아래서 저주받은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칼빈성경주석>, Vol. 19. 롬 6:14.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의 부활을 통해서 보여진다. 사도신경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 강요>, 2.16.5.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임한 저주가 그리스도에게 옮겨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죽으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 모멸, 채찍,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준다. <기독교 강요>, 2.6.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죄악된 육체의 죽음(mortification of flesh)을 가져왔다. <기독교 강요>, 2.6.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화해했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충족되었으며,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소멸되었다. 동시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되살아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발생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만 끝나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서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셨다”(롬 4:25). 칼빈은 이 말을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죄는 제거되었으며 그의 부활하심으로 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해석했다. <기독교 강요>, 2.16.13.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는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소멸되었으며 그의 부활을 통해서는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되살아나 그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부활 덕분이다”라고 칼빈은 말했다. <기독교 강요>, 2.16.13.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의 승천을 통해서 보여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가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높이심이며 그를 통해서 만물을 지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되시기 위함이다. <기독교 강요>, 2.16.15., 히 7:25, 9:11-13, 롬 8:34.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우리를 보신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능력과 은혜와 힘을 주신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의 재림을 통해서 보여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재림주로 오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심으로 선악간에 마지막 심판을 하신다. 심판자요 재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주이시다. 칼빈은 이를 “심판주이신 구속주”라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2.16.18.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이신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가 아니시라면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속하심은 십자가를 통해서 단번에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순종이다. 사실 우리 주님의 삶 전체가 순종의 삶이었다. 말 그대로 죽기까지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사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아래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빌 2:9-11).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그래서 우리 신자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야 한다. 이 말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순종을 배울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로 흉악한 죄인이나 매달리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것으로써 단번에 구속을 완성하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를 하나님은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고 그의 의로우심과 은혜로우심을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역사를 이렇게 요약했다.

그러므로 우리 전체 구원과 그 모든 다양한 부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포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다른 원천으로부터 그것에 관해 최소한의 요소라도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추구한다면, 예수의 참된 이름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은 오직 그분에게만 속해 있음을 상기시킨다. 만일 어떤 성령의 은사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다스리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만일 위로자가 있다면, 그분은 동정으로 가득 차 계시기 때문에, 만물 속에서 우리에게 있는 어떤 다른 위로자와는 다를 것이다. 만일 구속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고난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사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정죄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저주로부터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십자가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육체의 고행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장사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생명의 거듭남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부활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하늘의 유업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승천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심판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심판권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모든 축복에 대한 충만한 공급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보좌로부터 발견될 것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속주 하나님의 은혜와 크신 사랑을 알 수 있게 하셨으며, 그분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을 통한 속죄 사역은 그의 오심,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을 통해서 보여진다. 즉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여진다.
칼빈의 속죄는 안셈의 만족설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것은 아니다. 안셈에 의하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존경(honor)에 있지만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justice)에 있다. 안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충만하게 넘치는 자신의 공로(excess merit by virtue of his perfect obedience))를 인정받아서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준다. 반면 칼빈에 의하면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안셈에게는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과 부활의 중요성이 없다.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I. John Hesselink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121-124. 칼빈은 사도신경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를 해석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잘 설명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었다. <기독교 강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the substitution of Christ/2.17.4.), 지불배상(Christ's death the price of our redemption/the payment or compensation that absolves us of guilt)을 속죄의 모티브로 말한다. 파커는 속죄의 모티브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1)제물(sacrifice), 2)만족(satisfaction), 3)순종(obedience), 4)4)정화(cleansing/expiation of sin), 5)승리(victory)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구속주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가?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3권에서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을 다룬다.

출처 : 개혁 신학 연구소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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