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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이해 〓/조직신학I(서철원교수)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by 【고동엽】 2021. 10. 21.

제목: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목차*

 

I. 서론

1. 문제제기의 역사적 중요성

2. 새로운 대안발견의 난점과 가능성

3. 연구결과의 예상

 

II.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역사적 태동과 변고

1. 역사적 태동

2. 역사적 변고

 

III. 대안으로서의 성경신학: 그 신학적 발상의 정당성

1. 새로운 신학적 발상의 난점과 필요성

2. 성경신학적 발상의 정당한 계기들

 

IV. 성경신학의 논리와 특성

1. 성경신학의 논리

2. 성경신학의 특성

 

V. 양자의 구조적 차이점 분석

 

VI. 결론

Ⅰ. 서론

 

1. 문제제기의 역사적 중요성

 

2000년 교회사에 있었던 모든 신학활동의 꿈과 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한다 함은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곧 영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요 17:3)

 

소크라테스 이후 아직도 해답되지 않은 인간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역시 하나님을 올바르게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에 온갖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사를 통해 드러나는 교회의 모습은 실상 성경이해의 폭과 깊이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성경해석의 문제, 즉 성경이해의 수준과 정비례하여 이해된다.

 

초대교회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성경이해의 시도가 있어 왔다.

그 시도 결과 해석의 틀을 찾아내고 그 수준 만큼 하나님을 이해해 왔다.

때로는 잘못된 해석의 틀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한 결과, 전혀 엉뚱한 의미를 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대 교회사(1C ~ 5C경) 시기에는 성경 전체를 통한 복음의 이해가 불가능했다.

성경이 지금처럼 한권으로 묶여져 있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그 시기는 외경과 위경들이 혼재된 상태에서 성경 66권이 정경화를 거쳐가는 시기였기에 도무지 66권을 통채로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때의 진리이해는 단편적일 수 밖에 없었다.

요즘도 우리가 예배 시간에 암송하는 사도신경이라는 것도 그 시기에 있었던 것인데 이것 역시 기독교 진리의 포괄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중 뒤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을 할 것이다.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보수신학은 마치 초대교회의 교회회의의 결정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불변적 진리로 간주한다.

그러나 불변하는 진리는 성경 그 자체의 논리와 증거 뿐이다.

 

어거스틴을 분기점으로 하는 중세교회사(6c ~ 15c) 시기동안에는 성경의 올바른 이해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점차 성경을 체계적으로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했다.

소위 우화적 해석이 판을 치게 된다.

성경의 사건을 통해 단일한 복음적 의미를 추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리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건의 세부적 내용을 가지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다.

유명한 중세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런식의 해석을 곧잘 하곤 했다.

중세 중반기를 지나면서는 본격적으로 신학은 철학화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해 중세신학은 완전히 오염되고 신앙적 생기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신학적 언어만 있을뿐 실상은 철학적 아이디어로 가득차게 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목마른 대지위에 뿌려진 단비와도 같았다.

실상 이 시기에 비로소 인쇄된 단권의 성경소유가 가능했다.

(15C에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술이 발명된다. 이는 때를 맞추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반섭리임이 틀림없다.)

루터의 죄에 대한 체험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 진리를 보게 했고 그후 칼빈의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은 성경을 상당히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거점이 되었다.

 

주권사상은 성경의 근본 핵심적 내용 중 하나인 예정론을 강하게 주장하게도 했다.

칼빈은 그의 주저 '기독교 강요' 에서 오늘날 보수신학에서 가르치는 조직신학보다는 훨씬 탁월한 논리적 구성의 면모를 가진다.

즉 삼위일체론적, 신중심적 논리를 전개하려고 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건전한 면을 수용했고, 중세 스콜라 신학 전반에 대해 철퇴를 가했다.

반면에 루터의 신학은 칼빈에 비해서는 소규모적이며 중심주제 자체가 왜소했다.

루터에겐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진리가 모든 신학적 사고를 과도하게 지배했다.

그러나 실상 로마서의 진리가 이신칭의라는 교리 하나로 환원(reduction) 되지 않는다.

그 보다 훨씬 포괄성 있게 설명되어야 한다.

 

16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는 보수신학은 실제 루터의 이신칭의의 구속의 교리에서 발전적이지 못했다.

루터보다 훨씬 진일보한 칼빈의 주권사상과 예정론 등은 칼빈의 논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취약성(예컨대, 예정론을 성경의 논리에 의해 구체화 하지 못함) 때문에 그 후계자들, 특히 테오도르 베자에 의해서 관념화, 혹은 사변화되고 만다.

사변화된 예정론은 우리의 실제 신앙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예정론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성경적 예정론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인간의 자율적 선택과 노력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신학 활동으로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20세기 보수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은 구속사 신학이다.

이는 자타가 공인한다.

구속사 신학은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과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전개방식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20세기의 구속사 신학은 루터신학의 신드롬 현상이며, 칼빈의 보다 진일보한 면모를 오히려 제거시켜간 번쇄하고 복잡한 논리의 난맥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현대학문적 논리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이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보수신학의 왕좌를 차지해 온 조직(교의)신학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취약하며 또한 사변적이고 복잡하여, 실제 신앙을 인도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와서 조직신학은 가장 인기없는 과목이 되었고 점차 퇴락추세에 있다.

 

조직신학은 퇴락되지만 구속사 논리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소위 주경신학의 하위분야로서의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는 우리가 뒤에서 언급할 언약사적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과는 전혀 다르다.) 이 각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 또한 구속사라는 전제에 의해 논의 영역이 제한 받게 되자 역시 매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대표적 저서는 게할러스 보스의 '성경신학')

구속사적 방법론에 식상한 현대 신진 보수 신학자들은 이제 서서히 현란해 보이는 자유주의적 신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역사 비평적 방법론에 대해 종래의 비판적 태도에서 돌이켜 화해의 제스처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사회학적 현실분석의 방법론이 성경이해를 풍부하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정의와 인간소외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경이 성경 그 자체의 내재적 틀과 개념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함을 망각했다.

그리고 성경해석에 외재적 개념이 하나 들어올때 얼마나 많은 관련 개념들을 끌고 들어오는지를 불행하게도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념은 그 자체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념들과의 구조적인 관련 망(network)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인 신학활동의 현상은 중세신학이 그러했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그 전철을 밟았으며 현금의 보수신학이 또 다시 그 길을 가고 있다.

신학의 철학화, 신학의 자기 정체성(selfidentity) 혼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약간 지루할 정도로 성경이해의 역사를 간략히 검토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보수신학(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건전한 신학)의 현 주소를 밝혔다.

그리고 우리는 보수신학의 핵심주장인 구속사 신학의 문제점을 암시적으로나마 다소간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글의 논의에 뛰어든 독자는 필자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통 보수신학의 대변자 역할을 해온 구속사 신학은 성경전체를 포괄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가?

만약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면, 그는 마땅히 우리가 앞으로 검토하게 될 수많은 문제제기를 성경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논박(refutation)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구속사 신학이 성경의 포괄적 원리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이유는 어떻게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새로운 대안적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의 내재적 논리에 의해서 어떻게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결코 예사로운 질문이 될 수 없으며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절박성과 심각성을 안고 있다.

 

모든 논의의 수준은 그 논의를 가능케한 질문의 수준과 정비례 한다.

좀 대담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검토할 문제제기는 보수신학이 반드시 부딪쳐야 할 성격의 것이며 이는 '역사적' 으로 매우 중요하며, 의의 또한 심대하다.

 

2. 새로운 대안 발견의 난점과 가능성

 

우리의 논의의 목적은 구속사 신학이 결코 성경해석의 포괄적 원리가 될 수 없음을 성경의 내재적 논리에 의해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 절에서는 먼저 구속사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질문의 방식으로 노출시킴으로, 구속사 신학이 수많은 문제제기들을 견딜 수 없음을 밝히고 난 뒤, 새로운 대안모색에 게재되는 난점과 가능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구속사 신학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타락한 인간을 구속(구원) 하려는 것" 이 성경의 중심주제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 자체는 비성경적인 주장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장이 성경의 전체 진리체계에 비추어 볼때 부분적인 타당성만을 갖고 있는데, 이를 성경의 전체적인 원리 혹은 주제로 삼는데 있다.

성경의 해석의 기본원칙 중 하나는 부분은 전체에 비추어서라야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 구조와 포괄적 목적을 분명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어떤 부분도 정당한 이해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구속은 성경의 여러 하위 주제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의 포괄적인 주제가 될 수 있는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만사를 섭리 하시는가?

만약 인간의 구속이 하나님의 섭리와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옥을 만드셨는가?

구속사 신학은 이 질문앞에 성경적 해명이 가능한가?

 

문제제기는 이 뿐만이 아니다.

구속을 하려면 타락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때 타락은 하나님의 섭리와는 무관한가?

구속이 에베소 1장의 말씀대로 창세전 예정이라는데, 그러면 타락도 예정된 것인가?

예정되지 않았다면 우연적인 사건인가?

기독교 역사관에 의하면 우연적인 사건이 있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이는 도대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구속사 신학은 여기에 대한 성실한 답변을 하고 있는가?

질문은 계속된다.

구속사 신학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만족' 을 드렸다고 한다.(벌코프, 기독교 교리요약, p122 ~ p123)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불만족 하셨는가?(이 '만족이론' 의 원래 발상자는 중세 신학자 안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충족하신 분이신데 세상의 일때문에 불만족하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또 다른 각도에서 질문들이 생겨난다.

도대제 성경의 근본적인 기록목적이 인간의 구속만을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구속과는 명백하게 무관해 보이는 성경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구속사 신학은 성경의 서로 다른 부분을 대할때마다 상이한 해석적 원리와 잣대를 대어 가면서 해석하고 있지는 않는가?

여기서 해석의 일관성이 결여되고 상호 모순되거나 상이한 해석의 결과가 속출하지는 않는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구속사 신학은 기독교 윤리를 성경적으로 정립했다고 할 수 있는가?

구속과 윤리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구속받은 성도는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지켜야 한다고 한다.

성도 생활의 권면이 담겨 있는 신약의 서신서에 구약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언급이 도대체 있는가?

지켜야 한다면 구약의 율법 가운데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이고 그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구속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지만 윤리에는 성령의 도우심과 인간의 노력이 합해져야 한다고 한다.

이때 인간의 노력이란 자율적인가 성령의 인도인가?

합해진다면 어느 정도까지 합해지는가?

 

이상과 같은 수많은 '정당한 질문들' 앞에 구속사 신학은 자기 변호의 논리를 갖고 있는가?

이는 뒤에서 자세히 밝힐 내용으로서 구속사 신학은 이 질문들 앞에 궁색하며, 질문의 핵심을 피해간다.

만약 이 정당한 질문들에 견디어 낼 수 없다면 구속사 신학은 이제부터 새로운 대안을 향한 진지한 모색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대안 모색에 난점이 있다.

 

인간의 죄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기존 생각의 체제를 맹목적으로 옹호하고 싶은 경향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기 방어적인 근성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기존 체제로서는 설명되지 않는 사실에 부딪쳤을때 인간은 자기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을 사소한 것 혹은 시시한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자기 예상과는 다른 변칙적인 사태에 봉착할때 어쩔 수 없이 질문을 갖게 된다.

즉, "이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갖는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다시 자신의 기존 체제안에서 얻으려고 한다.

여기서는 생각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좋은 질문이 기존의 자기 생각 체제안에서 매몰 사장되어 버린다.

자신의 기존사고 체제로서는 해답되지 아니하는 좋은 질문은 반드시 새로운 차원의 해답의 체제를 요청하는 것이다.

구속사 신학이 이런 위치에 있다.

 

대안 모색에 또 다른 난점이 도사린다.

인간은 전통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특히 정통신학임을 표방하는 보수신학이 그런 경향성이 농후하다.

보수신학은 전통적 교리를 절대화하여 전통주의의 폐쇄적 안일에 빠져 있다.

반면 전통타파적 성향을 띤 자유주의신학은 성경을 상대화하고 자율적 이성을 강조함으로써 당대 철학의 영향아래 현란한 자유방임적 해석으로 치닫게 되었다.

 

둘 다 문제다.

우리는 성경의 논리와 구조만을 절대시 해야 하며 기존교리의 오류 가능성을 직시하고, 성경 자체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찾으려고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 교리는 발전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자율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절대적 주관에서만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구속사 신학은 과거 신학적 전통에 의해 전승되어온 고착된 도그마(fixed dogma)에 가위 눌려 성경에서 부딪쳐 발생하는 새로운 질문들을 진지하게 수용할 여유가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대안 모색의 난점을 요약하면, 첫째가 인간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쉽게 전통 안에 안주하려는 경향성이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된 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대안의 빛이 먼저 비추어지지 않을 때 자기오류의 인정과 기존 전통의 혁파는 가능하지 않다.

이 일은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대안의 모색과 발견이 성령의 절대적 주관과 인도에서 가능하다는 말의 구체적 의미를 밝혀 보아야 한다.

이것을 명백히 하지 않을때 신비주의적 대안모색, 즉 자신의 신비적인 주관적 체험을 성령의 인도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로 진전하게 된다.

 

이 논의를 위해 우리는 기본적 전제를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는 성경기자들을 영감시켜 자신의 뜻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께서 반드시 그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신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버린 인간, 그래서 만물을 보아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를 드러내심이 그 기록 목적이다.

이것들이 성경이해의 기본 전제들이다.

 

새로운 대안 모색은 인간의 자율적, 이성적 사색이나 신비적 주관적 체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기본 전제들에 그대로 충실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전제에 비추어 볼때, 성령의 올바른 사역에 대한 판별 기준은 성경에 대한 해석의 결과가 하나님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여타의 다른 결론을 도출 하느냐에 있다.

모든 문제는 기본적 사실을 간과하는데 있다.

성경해석의 유일한 바른 방향은 성경의 기록 목적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과 그들 자체로서는 상호 무관하게 보이는 내용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주권적이며 자비하신가를 드러내는 방편들이다.

단 하나의 목적,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한 제반 수단과 방편들이다.

표면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이 상위목적에 의해 질서정연해진다.

인간의 구속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논의하기로 하겠다.

 

앞의 기본전제에서 연역적으로 따라나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이 성경 안에 함축되어 있기에 성경해석의 틀 역시 성경 안에 들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며, 또한 해석의 관점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만 내용적 의미는 타락한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적이며 외재적인 개념과 해석의 틀을 전혀 거부한다.

성경은 성경의 자체구조 안에서 완벽하게 완결된 설명이 가능하다.

모든 해석의 오류는 외재적 해석의 틀을 가지고 성경해석에 들어감에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속사 신학은 그 체제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질문들 앞에 실상은 무력하게 노출된다.

그래서 새로운 설명체제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대안 모색에는 인간적인 난점이 도사린다.

그러나 이 난점의 극복은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해 나가실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사역은 말씀없이 직접적, 체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은 당신이 기록해 놓은 말씀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하나님을 계시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은 기록 목적대로 해석해야 하고 성경내에 내재하는 해석의 틀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해석의 틀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경안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뒤의 성경신학의 특징을 논하는 자리에서 자세히 논증할 것이다.

 

3. 연구 결과의 예상

 

우리는 전통적 구속사 신학의 대안이 언약사적 성경신학임을 밝히고자 한다.

왜 그것이 성경적 대안일 수 있는지를 구속사신학과의 대비적 논증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한다.

만약 양자의 차이점이 드러나면서 언약사적 성경신학이 성경적임이 확인된다면 우리는 그때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요청받게 될 것이다.

신앙적 사고방식 전체와 전통적 교회의 모습에 구조적인 변혁이 예상된다.

이 발전의 모습은 종전의 체제에 부분적으로 추가된 모습이 아닐 것이다.

구속사 신학은 언약사적 성경신학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역할, 윗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역할을 할 것이다.

윗층으로 올라가고 나면 사다리는 필요없게 된다.

부분적 변화가 아닌 혁명적 발전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심각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지각있는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문제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진정 문제는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 진단이 피상적이고 지엽적이라는 데 있다.

문제 진단이 심층적이고 근본적이지 않으면 해결의 시도들이 더욱 혼돈만을 가중시켜 갈 뿐이다.

때로는 처방이 상호 모순되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고질화시켜 간다.

 

근본문제는 여럿이 아니라 단 한가지이다.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수준에서 볼때 한국교회의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신비주의 신앙의 거센 도전, 기복신앙과 물질주의에 의한 교회의 오염, 현존 기독교의 제도적 경직화 혹은 권위주의화,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지도력 부재 등을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 현상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병으로 말하자면 근본 원인이 아닌 징후들에 불과하다.

원인이 치료되거나 제거되지 않은 채 징후에 대한 일관성 없는 처방들은 병을 더욱 악화시켜 갈 뿐이다.

 

필자가 볼때 한국교회의 근본 문제는 '미숙한 신학' 에 있다.

즉 성경에 대한 포괄적이고 심층적 이해의 결핍에 있다.

이 문제만 근본적으로 해결되면 나머지 문제들은 부수적으로 해결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신학을 고답적이고 귀족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은 특정학자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만약 신학을 특정학자들의 전유물로 본다면 많은 성도들을 하나님 배워가는 신학에서 소외시켜 버리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것이 중세의 타락된 신학의 관념이었다.

사변적 관념의 유희가 아닌 성경을 통해 하나님 배워가는, 더 나아가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워가는 참된 신학은 모든 성도의 신성한 권리이다.

이제 모든 성도가 신학자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신학자로서의 성도는 마땅히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핵심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 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외치면서(호 4:6)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했다.(호 6:3)

사도바울은 그의 기도속에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기를 빼놓지 않았다.

요한은 아예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못박았다.(요 17:3)

이만큼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강조한다.

모름지기 성경전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는 계시의 책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구속사 신학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신학 활동들이 이 근본 주제를 망각하고 지엽적인 방편들에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류의 신학 연구는 하면 할수록 더욱 혼미만을 가중하게 된다.

왜냐하면 목적을 잃어 버린채 수단적 방편에 관한 논의만 무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참된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성도들은 철학적 사변과 인본적 논리, 기복적 축복, 우화적 짜집기 설교, 어설픈 사회정의의 외침 등에 식상해 있다.

성경이 올곧게 말하는 대로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듣고 싶어한다.

진리는 다름아닌 하나님(엘로힘:전능자)이 여호와이심,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말한다.

이 진리 명제를 66권을 통해 지속적으로 밝히는 것이 진리 증거이다.

 

오늘날 구속사 신학은 이 일을 하는데 실패했다.

열정과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구속사 신학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논리의 결함 때문이다.

대안이 심각하고 절박하게 요청된다.

만약 우리의 문제제기와 논의를 통해 대안으로서의 언약사적 성경신학이 성경적 진리임이 확증된다면 우리는 오늘의 암울한 한국교회가 벗어나게 되는 올바른 출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II.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역사적 태동과 변고

 

우리는 앞에서 구속사적 전통신학(이후로는 구속사 신학이라고 표기)이 지닌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모색이 절실하게 요구됨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성급하게 모색하고 제시하기에 앞서서 구속사 신학이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적 맥락에서 태동되었으며 그 주장이 어떤 역사적 의의와 더불어 한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도 지적한바대로 구속사 신학을 성경체제의 맥락에 비추어볼 때 결정적인 문제점은 가지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그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더욱이 역사적 시점에 비추어 볼때에는 대단히 긍정적인 면모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장에서 먼저 구속사신학의 역사적 실체를 가능한한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역사적 시점에서 평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다음 그 주장이 가지고 있는 편협성과 피상성을 지적하고, 그것이 오늘의 보수신학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검토하고자 한다.

 

1. 역사적 태동

 

이글에서 언급되는 구속사적 전통신학이란 16세기 종교개혁적 전통을 잇고 있는 개신교 신학을 대체로 지칭한다.

이는 루터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개혁신학의 범주를 말하며, 성경의 중심 주제가 '인간의 구속' 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전통적인 신학사조를 말한다.

따라서 구속사신학의 역사적 태동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과 태동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성격과 특징은 중세신학과 교회의 모습에 비추어 볼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세신학의 반성경적 왜곡성은 크게 보아 두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배적 영향아래 철학화된 중세신학의 사유방식이며,

둘째는 그 결과 교회의 영적 성격은 철저히 상실된채 이루어지는 인간 사제의 미신적 의식의 집행이다.

즉 신앙의 내용은 철학의 정신에 의해 점령당하고, 복음의 내용은 철저히 배제된 형식적 의식(ritual)만이 교회의 표지로서 기능했다.

비유하자면, 마음은 본래의 남편에서 돌아섰고 자신의 육체의 쾌락을 위해 남편을 이용하는 음녀에 방불한다.

 

중세 교회의 철저한 타락상은 성도를 무거운 계율과 사제의 독선적 지배 아래로 매이게 하는데서 더욱 드러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를 통해서 그 공덕이 입증되어야 하고, 자신의 죄악이 보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세교회의 무서운 지배체제의 근거가 구축된다.

구원의 문제에 나약한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성이며 이를 철저하게 역이용하는 것이 어둠의 권세아래 있었던 중세교회의 수법이다.

먼저 지킬수 없는 율법아래 인간을 가두어 놓고 죄의식을 갖게 한다.

그리고 나서 사제의 권세로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걸려들지 않는 인간이 없었다.

이것이 중세교회의 철두철미한 반성경적 모습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중세교회의 신학적 모순을 가장 첨예하게 몸으로 느낀자가 바로 개혁자 루터이다.

루터는 율법아래서 자신의 죄를 발견했고,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이 선행과 공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것임을 발견한다.

여기서부터 종교개혁의 불길은 점화된 것이다.

루터의 확신은 지극히 성경적이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수단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이신칭의의 교리는 자연히 사제 중심의 중세 교회의 제도를 부정하게 되고 만인제사장이라는 놀라운 진리의 통찰을 가져왔다.

모든 성도는 사제라는 중간 다리를 거칠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중세 교회의 권위의 원천인 교황제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이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이후 개혁교회는 카톨릭교회로부터 무자비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후 루터는 계속되는 신학적 논쟁에서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이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음을 밝혔다.

반면 중세 카톨릭교회는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고 있었다.

여기서 종교개혁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절대권위에 대한 주장이 성립되었다.

 

루터의 신학적 주장은 매우 단호하고 간결하며 복음적이다.

그래서 투쟁적 돌파력과 영적 폭발력이 있었다.

루터의 이신칭의의 구원론은 당대 영적무지와 암흑속에 헤매이는 성도들에 비추어진 복음의 빛이었다.

루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성경적 비판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루터는 그시대에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의 진리를 명백하게 드러내었고, 그것으로 그의 사명을 유감없이 수행했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 진리를 드러내는 성경신학의 기준에 비추어 볼때 루터의 관점은 편협적이고 지극히 부분적이다.

이점은 점차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절정은 칼빈에게서 이루어진다.

칼빈은 루터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그 시대의 개혁의 분위기를 함께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칼빈을 루터와는 다른 실존적 체험을 통해 강권적으로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루터의 신학이 구원론 중심이라면 칼빈의 신학은 거기에서 진일보 하여 하나님 영광중심의 신학으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성경전체를 통해 파악했고, 그 논리적 귀결인 예정론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칼빈은 중세신학의 잘못된 인간관 즉, 인간에게 선한 요소가 남아있다는 주장을 철저히 비판하고 인간의 전적타락과 하나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했다.

칼빈에게 보여지는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그의 책 '기독교 강요' 에서 밝힌 것이며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음을 주장했다.

이는 중세 교회의 결정적 오류중의 하나인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맹목적인 신앙(implicit faith)를 정면에서 비판한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루터보다 훨씬 포괄적이며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논리의 전개를 시도하려고 노력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는 중요한 신학적 명제들, 즉 하나님 절대주권사상, 계시의 목적으로서의 하나님 영광, 성경의 절대권위 등은 칼빈의 신학이 얼마나 건전하며 후대의 신학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건전한 신학적 주장과 역사적 위치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빈에게서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점을 보게 된다.

그 문제점이 칼빈의 전체적 신학체계에 비추어 볼때 부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부분들이 신학적 체계에 있어서 핵심의 위치에 차지하기 때문에 칼빈 이후 전개되는 전통적 개혁 신학은 점차 헤어나올 수 없는 미궁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고 전개되어온 전통적 개혁신학 (이를 내용적 특징으로서의 구속사를 부각시켜 구속사적 전통신학이라고 부른다)은 루터와 칼빈의 건전한 면모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그들의 주장안에 내재해 있는 문제점을 더욱 악화 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역사적 전개와 정상의 변고라고 부를 수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루터와 칼빈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여와 공헌을 했고, 그 주장들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그 주장안에 들어 있는 약점들이 후대 신학자들의 신학작업에 의해 보완되고 발전된 것이 아니라 더욱 부정적으로 강화되고 따라서 질적으로 퇴보현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중의 중요한 특징을 다음절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역사적 변고

 

이 절에서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이 역사적으로 공헌한 바가 심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약점과 한계는 무엇인가이다.

둘째, 그 약점과 문제점이 후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왜 보완되지 않고 악화되어 갔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석, 파악하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 관련이 있지만 엄격하게 구분하여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현대 보수신학의 문제의 본질과 그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며 극복의 방향도 잡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절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현재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적 주장이 부정적으로 극단화되어간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절의 논의를 통해서 이 기본가정이 타당한지를 확인해 갈 것이다.

 

루터신학의 근본적인 약점은 성경의 중심주제를 이신칭의라는 구원론적 교리로 축소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루터의 개인적인 신앙적 체험이 신학의 체계에 절대적으로 반영되어 생겨난 결과이다.

루터에게 절실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세교회의 잘못된 구원론, 즉 선행과 공덕을 쌓아야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루터에게는 가장 심각한 신앙의 장벽이었고,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하위주제중의 하나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로 승격되어 신학이 체계화 되어 갔다.

이것이 바로 나중 개혁신학의 기본적 원리가 되어버린 구속사신학의 원초적 모습이다.

이 문제를 좀더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루터의 구원론 중심의 신학은 성경 66권의 포괄적인 이해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루터는 당대 중세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의 가르침에 의해 고통을 받는 중 성경의 몇 귀절에서 올바른 구원의 방식을 발견했고 그것을 소신껏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신학은 성경전체의 사상을 포괄한다고 할 수 없으며 성경의 하위주제중의 하나인 구원의 문제에 대한 해명의 논리를 전개해 간 것이다.

즉 중세신학의 잘못된 구원론에 대한 대항 명제로서 출현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구원의 문제가 성경의 포괄적인 주제가 될 수 있는지를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음장 성경신학의 특징을 논하는 자리에서 취급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구속사가 성경의 기본 골격을 이룬다고 하는 주장을 당연시 해왔다.

그것은 아예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성경이해의 기본전제였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여기서 해답을 하기에 앞서 질문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부각시키고 그 해명은 다음장에서 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근본 목적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과 교회의 설립과 성장 등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하는 것이 근본 목적인가?

전자가 옳다면 우리는 그것을 구속사 신학이라고 부르고, 후자가 옳다면 그것은 뒤에서 밝혀질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구원을 위한 계시인가? 아니면 계시를 위한 구원인가로 압축된다.

어느 것이 더 상위의 개념인가?

이것의 결정에 따라서 신학의 체계는 완전히 구조적으로 상이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루터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논리와 사상을 가진 칼빈의 신학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것을 상세화하여 밝히려면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단지 여기서는 원리적인 문제점 만을 노출시키고자 한다.

칼빈의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사도신경의 논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도신경을 마치 절대적인 신앙고백처럼 알고 있지만 실상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포괄적이고 균형있게 고백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 중 그리스도에 치중하여 고백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써 치우쳐 고백되고 있다.

칼빈은 이 논리를 따라 기독교 강요를 집필했다.

기독교 강요는 처음에 창조주 하나님에 관해서 그 다음엔 구속주 하나님에 관해 전개한다.

그리고 나서 구원의 서정으로써 성령론을 대신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론을 언급한다.

이것이 대체적으로 사도신경의 논리와 일치한다.

이 논리는 루터신학이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보다는 진일보된 신론 중심의 논리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과연 이 논리가 성경전체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재고의 여지가 있다.

조금 뒤에 상술 하겠지만 이 논리를 단편적으로 세분화해 놓은 것이 현대 보수주의 신학의 골격을 이루는 교의신학의 구속사적 구조이다.

 

칼빈에게서 노출되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율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이다.

칼빈은 당대의 스콜라 신학의 오류를 분명히 의식 했었고, 그에 대해 대안적인 성경적 논리를 전개했다.

그러나 유독 율법의 문제에 관해서만은 스콜라 신학과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스콜라신학자들의 분류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나누고,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성취 되었으나 도덕법은 성도에게 여전히 규범으로 남아 기능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강요 2권 찹조)

실상 이 주장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구원론, 즉 공덕을 쌓아서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다.

즉 구약의 율법을 자기들의 그릇된 관접에 의해 자의적으로 재구성하여 분류해 놓고,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는 자신들의 구원론의 틀에 맞추어 율법을 왜곡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 성도의 도덕법으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귀절이 있는가?

 

또한 십계명이 도덕법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무지 성경에서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중 일부만을 성취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델로스)이 되셨고,(롬 10:4)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을 이루셨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롬 8장) 율법은 성도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십계명을 지켜가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독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게 되며, 성령의 주관에 의해 사랑의 법이 내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갈 5: ~ 6:)

 

이상의 논의에서 지적한대로 루터와 칼빈은 그들의 정당한 성경관과 부분적으로 올바른 신학적 주장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체계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 이후에 전개되어간 후대 개혁신학자들의 신학 활동에서 보여진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확신을 가졌고, 따라서 자신의 신학작업을 통해 드러난 명제라도 문제점이 방견되면 언제라도 성경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는 개혁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의 후예들은 그러하질 못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루터와 칼빈의 신학은 암울했던 중세의 상황속에서 태동된 그 시대의 오류에 대한 시대적 대응양식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신학은 성경전체의 보편적 원리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당대 대적자들의 특정의 오류에 대한 도전과 해명이기에 성경의 포괄적 원리에 비추어보면 여전히 국부적이며 부분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후대 개혁신학자들은 루터와 칼빈의 신학체계를 거의 절대화하여 정통신학이라는 미명아래 선배신학자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강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원래의 복음적 취지와 생기를 상실해 가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분석,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는 루터와 칼빈의 직계 계승자들의 문제이다.

둘째는 개혁자들의 신학작업을 교리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이며,

셋째는 그 결과 교리교육이 성경본문의 이해보다 앞서게 되는 문제점이며,

넷째는, 그로 말미암아 신학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인 왜곡과 혼미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루터와 칼빈의 직계 계승자들의 문제이다.

 

루터신학의 대표적인 계승자 게르하르드(Johann Gerhard, 1582 ~ 1637)와 칼빈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베자(Theodore Beza)는 그들의 신학연구 방법에 또 다시 중세의 스콜라 신학적인 형식을 채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승의 신학적 작업을 토대로 하여 보다 근본적인 성경의 원리의 발견과 성경의 구체적인 검증작업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루터와 칼빈이 작업해 놓은 신학적 주장을 기술적으로 다듬는 수준에서 신학작업을 수행함으로 신학적 퇴보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신학적 진술들은 더욱 번쇄해지고 복잡해져 가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게르하르드의 대작인 신학 개요(Loci Theologici)는 루터의 사상에 충실하여 그 정통성을 가려내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후 루터교 신학은 지금까지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한채 정체되고 말았다.

칼빈의 계승자 베자는 칼빈의 예정론을 성경의 맥락속에서 확인, 증명하지 못하고, 번쇄한 스콜라적인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제자 알미니우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칼빈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던 알미니안 주의가 태동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게 된다.

이와 같은 신학의 계승작업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전되지 못하고 더욱더 악화되어 왔다.

 

둘째, 개혁자들의 신학적 주장을 교리화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이다.

 

17세기에 넘어오면서 개혁교회는 안팎으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된다.

최대의 도전은 알미니우스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그는 예정론과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역설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개혁교회는 자신의 주장을 방어적으로 교리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의 열매가 소위 칼빈주의 오대교리라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정형화(formulation)하여 고정시키는 신앙 고백서를 만들어 갔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것도 이 시대의 산물이다.

문제는 단순히 그들이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선배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교리화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작업은 때로는 필요하고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파생되는 문제가 오히려 심각하다.

한번 교리화 해놓은 신앙고백서나 신조들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으로 후대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고정화된 교리는 참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정리해 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으나 그것이 절대화되면 보다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성경연구에 걸림돌로서 작용한다.

고정된 교리적 틀이 신학자들의 사고를 결정했고 그들에 의해 성경이 왜곡되게 재구성되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기서는 성경이 그 자체의 논리와 근거를 가진 권위있는 말씀이기보다는 기존의 교리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되는 근거자료(proof text)일 뿐이다.

그리하여 각기의 교리를 정당화 하는데 있어서 성경의 맥락에서 분리된 단편적인 성경의 귀절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인용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셋째, 신앙고백이 교리로서 정형화되고 고착된 후부터는 교회에서 교리교육이 성경 본문의 해석보다 중요시 된다.

 

교회 내에서의 교육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교리에 대한 절대화의 경향은 교리교육을 통해서 더욱 공고화되고 그것이 모든 신앙적 판단의 준거가 된다.

외부의 도전이 강할수록 폐쇄적 논리를 가진 교리는 안전장치로써 가능하며, 안이한 방어논리로써 교육되고 사용되어졌다.

교리교육의 근본문제점은 그 교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질문이 생겨 났을 때 그것을 성경적으로 검토하려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질문은 사악한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한다.

여기서는 보다 깊은 성경의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고, 그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봉쇄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의 체계이다.

질문의 수준이 높고 예리할수록 그것은 더욱 환영할 일이다.

그것이 결코 부정적인 현상일 수 없다.

그러나 절대화된 교리교육은 이 길을 봉쇄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래서 더 깊은 진리탐구의 길을 스스로가 묶고만 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학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인 왜곡과 혼미의 현상이다.

 

17세기 이후 전통적 개혁신학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논리체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부분적으로 상세화해가는 길을 걸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바로 우리가 요즘 보게되는 교의신학 혹은 조직신학의 체계이다.

교의신학은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이 순서의 흐름이 우리가 이글에서 근본적으로 지적하고자하는 구속사신학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준다.

칼빈의 신학은 확실히 루터의 구원론 중심의 신학보다는 신론 중심의 논리를 전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논리적 구조를 따라 신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사도신경의 구조에 맞추어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결국 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 칼빈의 불완전했던 신론 중심의 구조는 와해되어 버리고 요즘의 교의신학적 체계인 구속사 신학의 논리로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의신학의 체계가 구속사적 논리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모든 논리체계는 하나의 근본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그 아이디어를 확증하기 위한 하위 개념들의 관계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교의신학 체계의 기본 아이디어는 인간의 구원문제에 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이를 위해 이루어져 간다.

맨 처음 신론이 있고 그 다음 인간론에서 인간의 타락의 문제가 나누어진다.

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려고 그리스도가 오신다.

이것이 기독론이다.

그 구원의 적용을 다룬 것이 구원론이며 구원받은 성도가 교회를 이루며, 그 교회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룬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이 논리의 목적과 정점을 이루며 나머지는 그를 위한 하위 개념으로써 동원된다.

구속사신학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으로 논리가 짜여지지 않게 되자 모든 신학의 부분들은 구조화 될 수 없으며 파편화된 논리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개진되게 되었다.

여기서 신학의 개념의 외연이 무분별 확장되기 시작했고, 더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온갖 다른 학문의 개념들까지 들어오게 되는 이중의 개념적 혼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의신학의 만신창이가 된 모습이다.

 

신학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체계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의신학과 새로이 등장하는 신학들은 그 연구대상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내적인 합의를 보지 못한채 혼미를 거듭한다.

교의신학에서 보여지는 대로 인간론과 구원론 등이 어떻게 신론과 대등한 논리적 자격을 부여 받을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심지어 요즘은 환경신학, 통일신학까지 생기는 형편인 것을 보면 이미 신학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신학의 연구대상이 무엇인지를 설정하지 못한채 자기가 생각해서 좋은 것, 혹은 중요한 것은 모두 신학의 과제라고 하는 가장 모호한 사고방식이 신학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신학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인 왜곡과 혼미가 오늘의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교리화의 과정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세분화된 교리의 교육과 주입은 성경의 구조적인 논리에의 접근을 봉쇄했고, 그 결과 파편화된 하위 주제들간에 모순과 갈등이 생겨났고, 마침내는 신학작업이 중심주제를 상실한 채 산발적인 주제들 속에서 혼미를 겪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된 대략 네 가지의 문제점이 전통신학이 겪어온 역사적 변고의 과정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전통신학의 부정적인 전개과정이 현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이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신학체계의 내적 혼란 현상이며,

둘째는, 설교의 문제점이다.

양자는 상호긴밀한 연관성이 있고 이들은 결국은 성도의 신앙에 체계적인 왜곡현상을 낳게 된다.

 

먼저, 현대 보수신학의 내적 혼란현상을 검토하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통적 개혁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의 창도자들인 루터와 칼빈에게 지나치게 무분별하게 의존한 나머지 그들 당대의 문제의식과 관심사에 함몰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구속사신학의 논리이다.

루터에게는 당장 구원의 문제가 심각했고 그것이 그의 신학체계를 주관하는 원리가 되었다.

칼빈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여전히 사도신경의 논리를 따름으로써 후대 신학자에 의해서 구속사적 교의신학으로 변형되어 전개되는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통적 개혁신학은 인간의 구원을 성경논리의 목적으로 보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의 구원 혹은 구속을 신학의 근본 목적과 원리로 삼고 나면 성경의 다른 중요개념들이 하위개념으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언약이라는 성경의 중심개념이 구속의 도구가 되는 논리의 역전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언약신학을 전개하는 보수주의 계열의 언약신학자들, 머레이(John Marry), 맥코미스키(Thomas Mc Comiskey), 카이저(Walter Kaiser)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서 언약이란 언제나 인간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로써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성경적 논리의 구조인가?

우리는 결코 구속과 언약의 관계가 그렇게 정립될 수 없다고 본다.

이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취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문제점만을 언급하기로 하겠다.

인간의 구원을,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보게될 때 생기는 구체적인 문제점은 신약 서신서를 해석 할때도 생겨난다.

예컨대 로마서가 과연 이신칭의라는 구원의 교리에 의해 포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로마서는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고 성도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는 서신으로 보아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편에 불과하다.

 

문제는 좀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구속사의 관점으로 보게되면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있는 관계의 정립이 불가능하다.

구속사신학에서 신구약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문제점은 구약을 실패의 과정으로 보고 그래서 신약에서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논리이다.

(맥코미스키, p.251 ~ 252: 서철원, 1989, p. 140)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어쩔수 없는 설명의 논리이다.

구약은 율법을 어기는 타락과 실패의 연속이며 따라서 신약의 그리스도가 구속을 위해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서 그럴듯한 논리로 보여지지만 이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정립에 결정적인 실수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 구약은 신약보다 열등한 계시이며, 구약에서 복음의 진리를 찾는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실제 이런 주장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날 강단에서 구약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희귀한 실정이다.

 

위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파생된다.

모든 논리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는 구속사신학은 성령론의 정립에 실패하게 된다.

성령론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가 구속사적 교의신학에는 아예 보이질 않는다.

단지 성령에 대한 언급은 구원론이라는 타이틀속에서 잠깐 언급하는 정도이다.

여기에서 성도의 생활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구속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는 언제나 구속사신학에서 골치거리로 등장하며, 이 문제를 취급하는 기독교 윤리의 문제가 미해결의 상태이다.

이는 바로 성령론에 대한 상대적인 약화와 미정립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점들을 종합해서 발생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노심초사하시며 이를 위해 언약하시고 사역하시며 존재하시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구속사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서 회피할 수 없다.

이 질문과 대결하여 해답해야 한다.

해답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구속사신학으로 특징 지워지는 전통신학은 성경의 부분적 요소인 인간의 구원을 성경의 전체원리로 삼는 오류로 인해서 그 신학체제가 논리적으로 뒤틀릴 수 밖에 없으며, 온갖 다른 요소와 충돌, 갈등을 빚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내적 혼란을 빚고 있는 신학의 체계는 필연적으로 설교강단에 그대로 반영되게 된다.

구속사신학의 설교패턴은 대개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하여 구원을 이루셨다.

이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를 믿도록 노력해야 한다.

믿는 우리들은 은혜에 보답키 위해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리한 구속사신학자들 중에서는 성경의 본문 중에는 이런식의 설교를 하기가 어려운 부분들이 허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하게 보이는 성경과 귀절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신약에 나타나는 교훈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

 

현대 설교학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있다.

설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성경의 논리를 통해 증거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낳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루어진 구속의 사건을 믿으라고 독촉한다.

그리고 믿는 우리들로 하여금 선행 행위를 하며 살라고 외친다.

우리는 이런 설교가 얼마나 공허하며 아무런 생명과 능력이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믿어라', '행하라' 라고 외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행할 수 있는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설교의 본령이다.

구속사신학은 그 신학의 최종적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설교에서 그 문제점이 여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앞에서 언급한 우리의 기본가정, 즉 현대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둘 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적 주장의 부정적인 극단화 모습이라는 것이 타당함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현대 보수신학의 구속사적 경향과 율법주의화는 그 연원을 따지고 보면 루터의 구원론중심의 신학과 칼빈의 율법에 대한 오해에서 말미암는다.

루터와 칼빈을 계승한 후대 신학자들은 선배 개혁자들의 위광에 눌려 그들의 부분적 성경해석의 결과를 성경의 전체적 원리로 삼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구속사의 원리는 현대 보수신학에서 요지부동의 권좌를 누리게 되고 따라서 성경의 다른 측면들이 외면당하고 더 깊은 원리로의 접근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율법주의적 경향도 마찬가지다.

칼빈의 율법관에 대한 비판은 아예 애초부터 가능하질 않다.

오히려 칼빈의 율법이해야 말로 최고의 기독교윤리의 규범이라고 지금까지 칭송되고 미화되고 있다.

칼빈을 비판하고 넘어서는 것, 그것 자체가 이단시되는 것이 오늘의 보수신학의 현 실정이다.

 

19세기에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자유주의 신학은 그 태동의 과정을 보자면 직접적으로는 18세기 계몽주의 영향이며,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16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전개에서 나타나는 논리적 결함과 그로 말미암은 설득력의 부재에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철학의 영향아래 합리적 사고를 발달시켰고 모든 주장에 대한 근거를 캐묻는다.

반면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이 권위있고 무오하다는 형식적인 정의(formal definition)만을 반복해서 외칠 뿐, 그것의 실질적인 논증을 성경을 통해 입증하지 못했다.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반동적 도전을 가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극단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트만의 비신화화 이론에서 보여지는 불트만의 고민을 살펴보면 우리는 보수신학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알 수 있다.

불트만은 역사와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며 씨름하다가 역사적 예수를 포기하고 실존적 믿음을 자신의 신학의 내용으로 선택한다.

불트만은 이 때의 믿음을 어둠속을 뛰어드는 모험과도 같은 결단의 한 형식으로 이해한다.

이 믿음은 성경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이런 불트만의 고민을 보수신학이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전통적 보수신학은 앞에서 밝힌대로 성경을 통해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 하는데 실패했고, 단지 그리스도가 구속을 이루었으니 믿으라고 독촉한다.

그러나 불트만으로서는 그것이 납득되지 아니한다.

어떻게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서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유있는 항변이라고 받아 들인다.

볼트만 신학은 구원론 중심의 전통 신학의 기반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해서는 도무지 해명이 없다.

믿음이 생길 수 있는 논리와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다음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성경신학의 구조에서 해명될 것을 기대한다.

 

Ⅲ. 대안으로서의 성경신학의 특징들: 그 신학적 발상의 정당성

 

우리는 앞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이후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온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 문제점들이 신학적 논리와 구조에 있어서 부분적이거나 지엽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종의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청됨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구속사적 전통신학에 대한 대안적 관점과 논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박용기 목사에 의해 제창되어온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이 성경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그 신학적 발상의 성격을 규명해 보기로 한다.

 

1. 새로운 신학적 발상의 난점과 필요성

 

우리는 앞장에서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갖고 있는 문제와 한계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 모색을 위한 발상의 전환은 그리 쉬운 작업일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에는 많은 난점과 끈질긴 저항이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혁신적인 발상이 언제나 기존의 체계에 의해 억압되고 질시를 받는 것처럼 성경신학의 새로운 발상도 그러하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신학의 울타리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그리고 기존의 체계가 오랜 역사적 전통으로 말미암는 권위를 소유하고 있을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전통신학의 대안으로서의 성경신학의 논리와 특징들 밝히기에 앞서서 어떤 이유에서, 어떤 발상의 경로를 통해서 성경신학이 출현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신학적 발상을 가로막고 있었던 난점 혹은 장애는 무엇인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후자의 문제부터 검토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우선되리라 판단되기에 이 절에서 먼저 검토하겠다.

 

새로운 혁신적인 발상은 기존의 전통적 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요청된다.

그러나 전통의 영향을 부단히 받고 있는 인간은 그 전통이 삶의 안정된 기반을 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발상을 해가는데는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신앙적 전통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다.

신앙은 절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전승되어온 기존의 신앙체계 혹은 교리체계를 절대시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이렇게 되면 더 깊은 진리에의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교리가 절대적인 성경의 자리를 대치하게 된다.

여기서 교리주의라는 대단히 위험한 독단적, 폐쇄적 신학의 경향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하고 있는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이런 위치에 있다고 보여진다.

 

전통신학은 우리가 앞에서 제기한대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전통의 계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부의 비판에 쉽게 요동되지 아니한다.

문제가 제기되고 도전을 받을수록 오히려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여 폐쇄적 울타리안에서 안정을 희구한다.

이런 상황속에서는 기존의 교리체계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생각의 발상은 용납되지 아니하는 불관용적인 미숙성이 노정된다.

 

전통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신학적 기원을 교회사에서 빛나는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

즉 종교개혁의 역사적 위광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위업이 큰 만큼 거기에 기원을 두고 있는 전통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발상의 전환은 그리 쉬울리가 없다.

전통신학은 종교개혁이후 5세기의 장구한 세월을 통해 역사적 검증과정을 거치면서 최선의 대안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점이다.

즉 부단히 계속된 역사적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 정통성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역사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는 전통신학의 사유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학적 발상을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두려운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성경신학은 이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령의 절대적인 주관과 인도에 의해서 되어진 일 이었다.

 

우리는 먼저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기원을 두고 의존하고 있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권위의 실체를 2,000년 교회사의 전체적 조망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통해서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계승해야 될 정신은 무엇이며 극복해야 할 문제점과 한계는 무엇인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교개혁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종교개혁은 결코 우리의 성경적인 신학적 발상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와 정신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전통신학자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활용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역사를 소중히 관찰하고 거기서 신학하는 정신과 신앙적 자세를 배우려는 개신교도에게 있어서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식된다.

중세기 교회의 암울한 모습, 즉 껍데기 교회의 건물은 화려했지만 알맹이로서의 신앙은 철저하게 부재했던 중세교회와는 너무도 극적으로 대비되는 루터의 복음적 신앙, 그리고 그의 확신에 찬 저돌적 신앙운동은 교회를 성경에 의해 개혁하고자 하는 개신교도들에게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뿐이 아니라, 로만 카톨릭의 무서운 탄압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높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던 칼빈의 개혁신학의 정신은 만대에 길이 전승되어야 할 신학의 이정표로 여겨진다.

 

논자가 보기에도 이와 같은 루터와 칼빈의 개혁운동은 오고오는 세대에 길이 전승되어야 할 하나님의 섭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루터와 칼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이상화(理想化)한 나머지 우상화에 가까운 숭경심을 갖고 있는 후대 신학자들의 잘못된 신학하는 태도에 있다.

루터와 칼빈은 교회사적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명백히 성경적인 사고방식을 견지하려고 했던 정통적인 신학사상의 보유자들임에 틀림없다.

 

최종적 진리판단의 표준으로서의 성경권위의 인정, 역사섭리의 원리로서의 하나님 주권사상, 인간구원에 있어서의 은혜사상 등은 모두 빛나는 종교개혁의 신학적 유산들이며, 그것은 지금에도 타당한 원리적인 신학적 명제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의 맥락속에서 그들의 여건과 수준으로서는 최선의 성경의 해석을 통해 암울했던 교회를 개혁해 갔다.

그러나 그들의 구체적 성경해석의 틀이 과연 성경의 전체적 논리와 구조에 얼마나 접근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글의 핵심적 포인트는 바로 종교개혁당시의 신학적 원리들은 매우 건전했지만 구체적 성경해석의 틀이 구속사적 관점에 국한됨으로써 성경의 전체사상을 드러내지 못했음을 밝히려는 데 있다.

이점이 종교개혁의 한계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다.

스승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의 신앙적 제자들 즉 후대의 개혁신학자들은 선배 개혁자들에게서 진일보하지 못한채 종교개혁의 역사적 권위를 자신들의 신학적 주장의 근거로 무비판적, 무반성적으로 사용하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하여 루터교회는 루터의 이신칭의의 가르침에서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했고, 보수적인 개신교 장로교회에서는 칼빈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루터와 칼빈 자신들도 바라지 않는 것임에 분명하며, 논자가 볼 때 이들에 의해 종교개혁의 진정한 정신은 계승되고 있지 못하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참된 정신이란 여하한 인간의 가르침과 주장도 그것이 성경의 주장과 합치하는지를 엄격하게 검토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점을 고려할 때 구속사적 전통신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궁극적으로 전통신학이 의존하고 있는 종교개혁에로 거슬러 올라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종교개혁이 지니고 있는 교회사적 의미와 긍정적 의의를 충분히 부각 시키되, 그것이 지닐 수 밖에 없는 한계도 동시에 지적해야 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참된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신학적 태도이다.

요컨대 성경에 비추어 보다 깊이 있는 신학적 발상을 하는데 종교 개혁사상은 한편으로는 길잡이 노릇을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기존 전통적 보수신학계는 종교개혁이 지니고 있는 올바른 신학적 원리를 계승, 발전시키기보다는 개혁자들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적 맥락에서 발견하고 주장한 내용을 거의 무반성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종교개혁은 신학의 발전에 걸림돌로써 작용되고 있다.

 

그 다음 우리가 새로운 신학적 발상을 해가는데 있어서 극복해야 할 난점은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5세기의 역사적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획득한 정통성의 권위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전통신학이 거쳐온 역사적 검증 과정에서 작용한 검증의 원리 혹은 표준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며,

둘째는 역사적 정통성의 권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첫째 문제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그들의 신학적 주장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표준이 성경임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논자가 볼 때 그 언급은 형식적 표방일뿐 실제적으로는 다른 검증의 표준이 작용하고 있다.

이 점을 규명해 보기로 하겠다.

 

전통신학의 신학적 사유의 틀은 종교개혁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그에 따른 교의의 형성으로 이루어져 갔다.

중세의 잘못된 구원의 교리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구원의 교리는 점차 성경해석의 원리로써 격상되어 갔다.

그리하여 성경전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한다는 구원론의 틀에 의해 해석되고 그 관점만이 우세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신칭의의 구원의 교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성경적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해석학적 원리로써 기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의 원리와 방법은 성경이 전하는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의 근본 주제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에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점차 논의가 진행되면서 보다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사적 해석의 원리가 점차 교의의 형식으로 고착화되면서 파생된 문제점이다.

구속사적 해석의 결과로 생겨난 교의신학적 틀은 점차 비판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 체계로써 고착화 되었고, 그 후 계속된 인본주의적 신학의 도전을 받으면서 그 교의체계는 더욱 자기 방어적 본능에 의해 더욱 폐쇄적으로 견고해져 갔다.

그 결과 교리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다.

교리주의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교리가 전이해(前理解)의 구조로서 작용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 되는 것을 지칭한다.

그리하여 결국 성경을 어떤 특정 관점에서 해석하여 나온 결과로써의 교리가 이제는 성경해석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틀로써 작용하게 되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성경이 신학활동의 궁극적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그 자리를 대치하게 되었다.

 

성경은 기존의 교리를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탈맥락적으로 흐름에서 벗어나 인용되어지는 증거 자료(proof text)로 전락되었다.

이 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통신학의 교리는 구속사적 해석의 관점에서 생겨났다.

여기서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관점이 올바른 것으로 전제 된다.

그리고 그 전제에 의해 연역적으로 모든 진리 주장이 빠져나오게 된다.

모든 연역적 체계에 의하면 전제에 이미 결론이 함축되어 있기에 빈틈없는 논리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연역적 논리체계의 맹점은 그 전제가 오류일때는 그 전제에 입각한 논리적 전개과정은 점점 더 오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구속사적 교의신학이 이런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과연 교의신학의 해석적 전제인 구속사적 관점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존의 전통신학에서는 이 전제에 대한 의심은 언제나 유보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잠깐 밝힌대로 성경의 해석의 틀은 성경안에 내재해 있다.

성경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진리체계이므로 여하한 외재적 해석의 틀을 가지고 해석되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높은 수준에 있는 권위있는 학자의 주장을 낮은 수준의 사람이 가진 해석의 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해석을 시도한다면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려 오해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절대 진리로서의 성경의 정당화 혹은 해석적 작업은 성경 그 자체안에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이 점을 고려할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구속사적 해석의 관점이 성경안에 내축되어 있는 구조적인 해석의 틀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박용기 목사가 제창해온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 의하면 구속사적 해석의 관점은 결코 성경해석의 구조적인 틀이 될 수 없으며 단지 해석의 지엽적 요소로 사용되어 진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장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그들의 진리주장을 검증하는 표준으로써 성경을 표방하지만 실제적 논증구조를 보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다.

즉 성경의 지엽적 해석의 관점인 구속사적 해석의 결과로 나타난 교의체계가 진리의 검증원리로 작용하며,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는 보조자의 위치로 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실제 전통신학의 논문이나 책을 보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올바른 신학적 논의나 논증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모종의 관점이 전제되어 어떤 논리가 주장되면 그 전제와 논리가 과연 성경의 전체적, 혹은 내재적 논리에 합치하는가를 살펴가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신학적 주장의 근거가 성경의 내재적 흐름에 의해 제시 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성경의 전체적 논리가 무엇인가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적어도 신학을 하는 올바른 태도는 성경의 전체적 논리와 골격이 드러 날 때까지 자신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가면서 성경의 흐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성경의 전체적 논리는 성경신학에 의하면 언약과 성취의 언약사적 구조로 짜여져 있다고 주장하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말한다. 논자는 이것이 성경의 전체적 골격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독자는 여기에 의심을 가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골격이 성경의 내재적 구조와 합치된다면 수납해야 할 것이며, 아니라면 이보다 더 좋은 성경적 논리를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통신학의 논문이나 책을 보면 그들의 모종의 관점과 진리주장을 전개함에 있어서 성경은 탈맥락적으로(흐름이나 맥락에서 벗어나) 부분적으로 인용될 뿐이며, 그들의 주장의 실질적 근거로서 신학자들의 이름이 거론 될 뿐이다.

즉 그들의 진리주장을 지지하는 근거 혹은 참조체계(frame of reference)는 권위있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모든 신학논문의 각주(footnote)는 과거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이름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신학활동 혹은 작업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성경 그 자체의 논리와 주장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전통신학은 이 일로부터 이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온갖 신학자들의 지엽적이며 부분적 주장들의 난맥속에 갖혀 버린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학문이라는 미명 아래 진리를 더욱 혼잡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논증구조속에 성경이 맥락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곳이 있는가?

 

논자의 미천한 공부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하라면 그런 논증구조는 눈 씻고 찾아 볼려 해도 없다.

성경 66권의 구조적 흐름은 고사하고라도 성경 한 권이라도 그 전체적 조망속에서 신학의 논리를 전개하는 논문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경이 낱낱이 원자적으로 분해되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사용되어질 뿐이다.

이런 방식은 원래 성경의 통일성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즐겨 사용한 방식이다.

그러나 요즘은 성경의 의미적 통일성을 전제하는 보수신학계도 마찬가지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는 듯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진리 주장속에서 성경의 권위는 추락될대로 되어 있다.

요컨대 성경은 신학적 진리주장의 검증원리로써 사용되지 아니한다.

 

이제 두번째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역사적으로 획득해 왔다는 정통성이라는 권위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먼저 정통(orthodox)이란 개념이 어떤 역사적 맥락속에서 생겨났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통(orthodox: 옳은 의견이라는 뜻)이란 용어는 이단과의 대비 개념이다.

만약 교회사에서 이단들이 발흥하지 않았다면 정통이란 신학적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는 수많은 이단적 주장의 도전속에서 성경을 의지하여 존속해 왔다.

그 과정속에서 정통적 교리가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중에는 이글의 논조로 보아서 논자가 혹시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이 비진리의 도전 앞에서 발견해 온 모든 신학적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자하는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논자는 추호도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앞장의 종교개혁의 의의를 언급하는 자리에서도 약간 비추인대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의해 그 시대의 사명을 담대하게 수행했었음을 인정한다.

단지 그들의 주장이 보다 성경의 논리와 구조에 접근해 갈 수 있는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할 뿐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따라 교회가 이단의 도전 가운데 형성시켜온 정통적 교리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확고한 형식을 갖춘 교리의 체계가 없이는 진리투쟁이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각 시대에 처한 교회는 그때마다의 이단의 도전 앞에 대응할 수 있는 교리체계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정통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통성을 확보한 교리가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교리란 성경해석의 결과이며 따라서 해석의 수준에 따라 교리의 우열이 생길 수 있다.

보다 올바른 해석의 틀이 발견되면 그 이전의 교의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통성이란 한 시대의 맥락에서는 올바른 진리주장으로서의 확고한 의미를 갖지만, 그것이 더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는 확정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통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되 그 정통성의 기준이 보다 성경적 표준에 비추어 개선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즉 정통이란 고정된 의미가 아닌 발전적 개념을 함축하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교의체계를 들여다보면 이점이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각시대마다의 단절적인 교의가 각자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시대의 교의들과 병렬적으로 군집되어 있는 양상이다.

그리하여 내적 정합성(coherence)을 상실하고 있다.

이점이 보수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으로 보여진다.

이점이 극복된 이상적인 신학작업이란 기존의 교의의 인도를 받되 그것은 보다 포괄적인 해석의 틀이 발견되기까지 잠정적인(probationary) 권위만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보다 포괄적인 성경해석의 틀이 드러나고 진리가 드러날 때는 과거의 교리들은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교육적으로 활용될 뿐이지 그것 자체로 확정된 진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전통신학은 정통이라는 이름아래 너무도 많은 건전한 문제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성급하게 단죄해 온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논자가 볼 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은 정통신학의 폐쇄적 독단적 태도에도 그 상당한 책임이 있어 보인다.

앞에서도 지적한대로 전통적 보수신학은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전제에 발이 묶여 자신의 연역적 체계 안에 스스로 갇혀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논리체계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질문들을 이단시하는 유아적인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물을 수 있는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의 체계이다.

따라서 질문의 수준이 높고 예리할수록 그것은 신학적으로 환영할 일이지 결코 배척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예컨대 질문에 해답이 되지 않을 경우 기존의 해답의 체계 즉 교의의 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더욱 성경을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전통신학은 자신의 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해오는 자에게 오히려 이단적이며, 잘못된 발상을 한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여 왔다.

이것이 정통의 이름아래 이루어진 과오이며 이는 지금도 교의신학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성경에 보다 접근하려는 새로운 신학적인 발상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우리는 이절에서 밝혀온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이 분명해졌다.

종교개혁이후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해 온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전제하는 성경해석적 원리를 새롭게 검토하는 일이다.

실제 서론에서 지적한대로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수많은 건전하고 정당한 질문들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노출한 이상 이제 새로운 신학적 발상의 전환이 너무도 절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신학의 역사적 의의 마저 전면 부정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단지 그것이 성경의 지엽적 내용임을 확인하고, 오늘날의 온갖 비진리의 무차별적인 도전 앞에 위기에 처해 있는 보수신학과 교회가 견지해 가야할 보다 포괄적인 성경 그 자체의 논리와 구조의 확인이 필요함을 역설하려고 할 뿐이다.

 

논자가 볼 때 박용기 목사가 체계화시킨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구속사적 사고의 범주를 벗어난 새로운 신학적 발상을 토대로 기존의 성경해석의 틀과는 구조적으로 상이한 성경해석학적 논리를 성립시켰고, 그 해석에 의해 성경의 논리와 주장의 골격을 온전히 드러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다음절에서 그 성경신학적 발상의 계기들은 어떠하며, 그것은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겠다.

 

2. 성경신학적 발상의 정당한 계기들

 

재론할 여지가 없이 모든 종류의 신학적 발상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건전한 신학적 발상의 전제조건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온갖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발상은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사라지는 유행신학이 되고 만다.

앞의 전제조건을 받아들인다 함은 신학적 발상이 타락한 이성의 논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따라 성령이 기록해 놓은 성경의 길을 따라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절에서 세 가지 측면에서 성경신학적 발상의 계기들을 확인하고자 한다.

 

박용기 목사의 신학적 발상 중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핵심적 내용은, 성경은 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경을 관통하는 독특한 개념구조를 가진 일관된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경자체안에 성경을 해석하는 논리적 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작업이란 궁극적으로 이것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성경의 각 권 사이에 그리고 한 성경 안에서 장(chapter)과 장사이에 얼핏보아 연결성이 없어 보이는 것을 그냥 수납하지 아니한다.

아직 그들간에 모종의 질서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너무도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발상은 기존의 구속사적 교의신학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어 보인다.

 

교의신학의 다른 이름은 소위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교의신학을 조직신학으로 명명한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진리란 조직적으로 구성된 체계를 그 의미의 한부분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외견상 그 전체를 망라하는 구조적 논리를 갖고 있어 보이질 않는다.

 

구약에는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시를 노래한 시서가 있고 또 시대마다 다른 역사적 정황에서 발언된 예언서가 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는 다양한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그리고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복음적 처방을 내리고 있는 각종의 서신서들, 그리고 계시록이 있다.

 

도저히 이들을 하나의 통일된 논리로 관통하는 작업은 불가능하게 보여진다.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즉 성경은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는 역사적 문서임에 불과하다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전통신학자들은 성경에서 일관된 주제와 논리를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하고, 기존의 교의신학을 조직적으로 구성해 봄으로써 진리가 지녀야 할 조직적 통일성의 이상을 추구해 보았다.

그러나 앞 절에서 약간 언급한대로 기존의 교의들은 시대마다의 이단의 도전앞에서 구성된 것들로서 그 교의들간에 논리적인 연결점을 확보할 수가 없다.

각각의 교의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신학적 틀에 의해 신학작업을 수행하는 오늘날 조직신학자의 글이나 주장을 보면 가장 비조직적이며, 논증구조가 치밀하지 못한 역설적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독자들이 실지로 보수신학계의 조직신학자들의 글이나 책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보수신학이 현대 사회와 교회에서 지탱할 수 없어 보인다.

과연 현대 학문의 세련된 논리로 무장된 현대신학의 도전 앞에 비조직적인 조직신학이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성경신학의 발상을 갖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 된다.

논리적 틀을 가진 체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핵심 개념 혹은 주제 개념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설명하고 보조하는 하위 개념들이 조직적인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성경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무엇이며 그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개념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둘째로 성경신학은 그 신학 발상에 있어서 전통신학의 구속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난다.

전통신학이 구속적 동기에 지배되고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성경의 근본 주제 혹은 기록 목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책이라는 말을 너무도 당연시하고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주장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인간편에서 본다면 타락된 상태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진리 체계를 총망라 하는 근본 원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신학의 중심에 놓는 구속사 신학은 본질적으로 인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시각으로는 포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이 불가능하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밝혀 보도록 하겠다.

우선 구속사적 동기에 지배되는 전통신학이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적임을 밝히기 위해서 인본주의적인 이방종교와 철학이 역시 구속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양자간에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로 하겠다.

 

먼저 불교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불교의 핵심은 욕망의 포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거기서 해방, 해탈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의 문제로 고뇌했던 석가모니는 인간이 얼마나 욕망에 의해 번뇌하는가를 발견했고 그 해결책을 나름대로 제시했다.

이는 결국 인간의 구원 문제에 해당한다.

물론 구원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문제의 설정은 동일하다.

 

서양철학의 대부격인 플라톤의 경우는 어떠한가?

플라톤은 변화무쌍한 세계속에서 불변하는 세계를 그리워했다.

변화하는 세계의 지배를 받는 육신을 벗어나 이성의 노력으로 이데아, 즉 불변의 세계를 보는 것이 삶의 궁극적 지향점이라고 했다.

이 역시 어떻게 해야 변화, 소멸하는 세상에서 구원 받아 불변의 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한 인간구원의 논리이다.

 

이제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속 신앙의 구조를 보면 더욱 실감난다.

무속신앙은 앞의 예를 보아도 더욱 노골적으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취급한다.

앞의 두 경우가 좀 고상한 방식을 취한다면 무속신앙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노골적이다.

무속신앙은 인간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신들의 도움을 통해 벗어나고자 하는 구속적 동기가 가장 잘 드러난다.

무당은 신들의 구원의 능력을 매개하는 자로 자처한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방향을 바꾸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우리의 논의에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철저히 당대의 철학의 영향권 속에서 신학활동을 한다.

그런데 그들 조차도 알고 보면 구속사적 동기가 근본적으로 작용한다.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주장의 핵심은 보수신학의 개인구원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사회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원의 대상이 개인인가 아니면 사회인가의 차이가 있을뿐 구원의 문제가 신학작업의 핵심적 동기로써 작용하기는 양자에 있어서 매 마찬가지 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구속적 동기는 모든 이방 종교와 철학의 근본적 동기로 작용한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죄된 세상의 현실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고뇌하고 불행하며, 두려운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이 괴롭고 불행한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의 상태로 건너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모든 인간적 노력의 핵심이며, 철학적 종교적 논리의 기저에 깔려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절대성을 주장하는 기독교 진리체계도 이와 같이 인간의 구원이 논리의 핵심에 차지해야 하는가 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성경신학의 신학적 발상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방종교의 논리적 틀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이는 엄청난 신학적 오류임에 분명하다.

 

구속사적 동기는 인간을 본위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는 시도이며, 이는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관련된 시각으로 성경을 이해하기에 결국 부분적 논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전체적 논리가 빠져 나올 수 없으며, 포괄적인 세계관 정립이 불가능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게 되는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포괄적인 기독교 진리체계에 있어서 부분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면 성경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주제 혹은 논의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또한 다음 장에서 자세히 검토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성경신학은 죄의 문제에 대한 설명의 방식이 기존의 전통신학과는 전혀 상이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신학은 인간의 타락, 혹은 범죄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가운데 계획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시간세계내에 발생, 존재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대로 진행되며,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간다는 철저히 일원론적 사유의 방식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 신학적 발상으로부터 성경신학이 전통신학과 결정적으로 구분되게 되는 구체적 내용의 전개가 이루어진다.

 

전통적 교의신학의 신론을 보면 하나님의 사역가운데 작정(decree) 혹은 예정(predestination)의 문제를 취급한다.

그러나 최근의 교의학자들의 가르침과 글속에서는 점차 하나님의 작정 혹은 예정에 대한 강조가 현격하게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옥처럼 밝혀놓았던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예정사상의 포기를 의미하는 징후로 보여지며 그 결과는 종교개혁의 신학적 알맹이를 상실하는 것이다.

논자는 이점을 예의 주목하고 있으며, 실제적 예증은 차후에 다른 글에서 본격적으로 제시할 예정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칼빈, 더 나아가서 어거스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하나님의 작정 혹은 예정은 조금만 성경의 내용을 주의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초보적인 논리적 사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예컨대, 에베소 1장과 2장만 보더라도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 그리고 역사를 지배, 주관하시는 분으로 간주할 때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 혹은 작정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시간적 존재가 아닐진대 시간의 변화따라 역사를 즉흥적으로 주관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한 작정을 하시고 그 작정에 따라 당신의 계획된 일을 역사가운데 이루어 가신다는 것은 지극히 초보적 인 논리의 문제이다.

그런데 문제의 실상은 작정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죄의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부각되는 것이다.

죄까지도 작정된 것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해답하기 쉽지 않는 질문이 생겨 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 즉 죄까지도 작정을 하셨다면, 그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 갈 것 같은 난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난점을 해소하려는 궁색한 시도가 소위 전통신학에서 주장하는 죄에 대한 허용적 작정(박형룡, 1977, pp.263 265)이라는 명제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얼핏보아 문제의 난점을 해소하는 적당한 절충안처럼 보이지만, 이는 강인한 논리적 사고를 가진 사람의 질문을 받게 되면 더욱 해답이 곤란한 궁색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즉 허용적이란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타락을 예견은 하셨지만 그 타락은 직접적으로 주관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사용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의지의 행사가 가능하다는 뜻인가?

인간이 독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산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적 역사주관이란 명제와 양립할 수 있는가?

둘 중에 하나는 포기되어야 하지 않는가?

죄가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 가는 문제 때문에 허용적이라고 변명을 하는데, 과연 하나님께 책임이라는 용어가 합당한가?

책임이라는 말의 성립은 그 당사자보다 높은 자나 대등한 자 앞에서 가능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절대 자존자이신데 누구 앞에서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

이 말은 둥근 원이라는 말처럼 성립불가능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닌가?

 

이제 많이 양보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허용적 작정도 궁극적으로 작정이라는 뜻을 함축하는데 왜 하나님은 죄를 허용적으로나마 작정하셨는가?

아예 죄의 발생을 막을 수가 없었는가?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므로 당신이 뜻하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막지 않으셨는가?

그 이유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질문이 여기까지 이르면 전통신학은 언제나 중요한 신학적 난제의 처리방식에서 사용해 온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써 이를 신비의 문제로 처리한다.

그러나 과연 죄의 문제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의 문제로 넘어 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기독교란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의 종교가 아닌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가 죄의 발생이유 즉 하나님이 죄를 작정 섭리하시는 목적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 하는가?

 

성경신학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전통신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발상을 시도했다.

죄는 하나님의 작정섭리안에 분명히 발생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섭리하시는 뚜렷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드러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의 전개는 다음 장에서 검토하기로 하자

 

Ⅳ. 성경신학의 논리와 특징들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그 시대적 소임을 잘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경의 전체적 진리를 대변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성경적신학의 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요청에 부응하여 태동된 신학의 틀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라 이름하였다.

 

우리는 앞 장에서 성경신학을 기존의 전통신학이 회피해 온 정당한 신학적 문제제기들을 정면에서 대면해 왔고 그 해답을 위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음을 밝혔다.

이제 이 장에서는 성경신학이 주장하는 논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정당화의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성경신학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들이 도출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작업의 결론을 가지고 다음 장에서 기존의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이 얼마나 다른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1. 성경신학의 논리

 

박용기목사에 의해 제창되어온 성경신학을 관통하는 논리는 다음의 세 차원으로 압축되어 진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주장으로써 성경이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는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책이라는 것이다.

둘째, 빛과 어둠, 선과 악은 이원론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지배되는 일원론적 논리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셋째, 영원과 시간은 별개의 두 실체로서 설명되어서는 안되며 시간은 영원안에 함축되어 설명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전자의 두 차원만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성경신학적 논리는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글의 주제인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구조적 대비를 위해서는 앞의 두가지 문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1) 성경의 논리적 일관성: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계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온 건전한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막연한 수준이지만 성경은 한 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그 의미도 단일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이 소위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관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신학적 이상(理想)은 실제로 구체적인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서 확인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이상(理想)으로만 존재했었다.

 

그 경위를 좀 설명해보기로 하자.

 

중세 카톨릭의 전통우위사상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신적권위와 절대성을 믿었다.

개혁자들은 성경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책이므로 따라서 성경 해석의 관점과 틀이 성경밖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는 너무도 중요한 성경해석학적 원리를 천명했다.

 

이 주장은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면 너무도 건전하고 타당하다.

예컨대 높은 수준의 문학작품이 있다고 하자.

그 작품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그 작품을 만든 사람과 대등한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

만약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이 해석을 시도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 낮은 수준으로 해석되고 만다.

마치 아버지의 어떤 말을 어린 아들이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이 듯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럴수 밖에 없다.

이런 논리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해석원리는 너무도 자명하게 도출 된다.

성경이 절대적 수준의 권위를 가진 책이므로 그 해석의 관점과 틀이 밖으로부터 올 수 없으며(만약 그렇게 되면 성경은 낮은 수준의 관점으로 왜곡된다) 그 자체 안에 붙박혀 있을 수(built in)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성경의 내재적 해석' 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성경밖에서 해석의 틀을 빌려오는 것을 '성경의 외재적 해석' 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외재적 해석의 관점(틀)을 가지고 성경에 뛰어들면 그것은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성경에 부과해서(impose upon) 다시 끄집어내는 해석학적 오류(eisegesis: exegesis 와 반대되는 해석학의 용어로써 객관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생각을 집어넣는 것을 의미함)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성경 본래의 뜻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존 생각을 정당화, 혹은 강화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외재적 성경해석 방법은 결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내재적 성경해석이라는 올바른 성경해석의 원리가 종교개혁 후대에 구체적인 성경해석과정에 원칙적으로 고수 확인되지 못한채 신학논의에서 과거의 해묵은 유산정도로 취급되고만 현상에 있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대로 종교개혁이후 개혁신학의 논의는 성경의 진리중 한 요소인 이신칭의의 교리가 성경해석의 틀로서 격상되어 갔고 그리하여 인간의 구속이 성경의 중심사상인 것처럼 강조되는 구속사신학이라는 틀이 고정화되어 갔다.

이것이 구속사적 전통신학(개혁신학)의 최대 약점이 되고 말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신칭의이라는 구원의 교리는 중세의 잘못된 공덕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경에서 발견한 종교개혁의 빛나는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포괄적 진리중 한 요소가 될 뿐이지 결코 성경을 해석하는 틀로써 기능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성경해석의 기본 틀로써 기능하게 되면 성경에 나타난 근본사상을 배제, 무시하게 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했을때 가장 중요한 점은 성경에 나타난 지엽적 요소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붙박혀 있는(built in) 근본적인 해석학적 틀로써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그 해석학적 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안에서 확인되지 않는한 그 해석은 성경의 전모와 통일된 의미를 드러낼 수 없으며 언제나 지엽적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자면,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성경의 통일성을 막연한 수준에서 믿어왔고 성경은 절대적 권위의 책이므로 외재적 해석이 허용될 수 없음을 천명해 왔다.

그러나 성경진리의 한 요소인 이신칭의라는 구원의 교리가 성경해석의 기본틀로 작용함에 따라 그 결과 성경의 의미의 통일성과 근본사상의 파악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안에 붙박혀있는 해석학적 틀이 무엇이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대안으로 등장한 성경신학의 해석의 틀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자유주의신학 진영에서의 성경해석의 오류를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에 매우 중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신학의 탄생은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한계에 따른 문제점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며 성경신학은 양자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자유주의신학의 태동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에서 시작되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그들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이 싹터 왔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열기가 17세기에 와서 신조의 확립과 교리의 확정작업(formulation)으로 바뀌게 되면서 진리의 체계화라는 긍정적인 모습을 띠는듯 하지만 실상은 전포괄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단편적이고 항목화된 교리의 형태로 축소, 환원(reduction)하게 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이 현상은 점차 교리주의(dogmatism)라는 폐쇄적, 독단적 형태로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교리의 범주밖에서 제기되는 모든 정당한 질문을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워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포괄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교리의 원천인 성경의 진리성과 권위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 시기는 이미 18세기 이성의 권능을 주장하는 계몽주의가 꽃피는 시기이며 그 완성자인 칸트에 의해서 초월적 계시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만다.

그에 의하면 신에 대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며 신이란 단지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수행키 위해 요청되는 존재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 자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격인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전통적 교리신학자와 기독교를 도덕화시키려는 칸트주의자들을 모두 비판하면서 종교는 인간의 종교적 감정 위에 세울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에 대한 절대적 의존감정이 있으며 이것이 기독교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기독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성경은 이제 그 절대적 권위를 상실하며 인간의 주관적 종교적 체험이 우선시된다.

 

또한 그가 보기에 성경은 논리적 일관성과 포괄성을 띤 책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굴러다니던 문서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시대마다의 종교적 신앙적 체험이 반영된 인간의 책일 뿐이다.

철학의 강인한 논리와 보편성에 훈련된 마음으로 볼 때 전통적 교리신학자들의 단편적 교리에 관한 주장은 유아적인 발상과 산만한 논리로 밖에 보여지지 않으며 그 교리가 원천으로 하는 성경 역시 그렇게 보여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로부터 전개되어간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성경이라는 텍스트(text) 보다는 그 시대의 상황(context)과 철학이 더욱 중요시되고 시대의 상황과 시대정신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소위 '외재적 해석' 이 난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인 틀을 성경밖에서 가져오는 오류인 것이다.

이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불신할 때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주의신학이 태동하게 된 데에는 성경의 진리성을 성경자체의 해석적 틀과 논리에 의해 입증하지 못하고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인출된 단편적 교리를 절대화시킨 전통적 교리신학자들이 간접적인 기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는 성경에 대한 미숙한 이해로 말미암는다)

 

이 쯤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진리성을 성경자체의 내적 해석의 틀에 의해서 확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중차대한 일임을 확인했다.

전통적 개혁신학의 교리적 폐쇄화 현상이나 자유주의신학의 철학화 모두 성경의 내적 논리를 발견치 못한 결과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확인하려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이란 이상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의 틀을 구속사신학과는 달리 약속과 성취라는 언약사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약속과 성취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계시하고 그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속이란 하나님 당신이 자기 계시를 위해 메시야를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한 요소일 뿐이다.

즉 인간의 구속이란 성경해석의 기본틀이 될 수 없으며 약속과 성취라는 언약사적인 기본틀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반 이후에 등장한 하나님 나라라는 해석학적 관점도 성경신학에서는 그것이 성경의 기본틀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언약사적인 틀속에서 함축되어 설명된다.

 

이제 여기서 언약사적 해석의 틀이 왜 성경의 기본 골격이 되는지를 성경 내용을 통해 확인하도록 하겠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최초 형태는 창세기 1장 28절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위의 이 본문은 오늘날 신학계에서 해석상 가장,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구절이다.

필자에게 확인한 범위내에서 말하라면, 이 본문은 보통,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이해되고 있다걸로 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문헌을 통해서 추적해 보았으나 그것을 명시적으로 논의하는 곳이 없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막연히 그렇다고 전제하며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구절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설명되어야 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령 앞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최초로 주신 복(히브리어로 베라카) 이 과연 문화의 차원으로 주어진 것인가?

이것을 성경 전체를 통해 확인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문화라면 인간이 가꾸고 개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성경의 복을 가리키는가?

성경에서 인간이 개발하는 것을 복이라고 지칭하는데가 있는가?

복의 구체적 내용으로써 생육 번성, 땅 정복, 다스림이라는 형식이 노아(창9장)와 아브라함(창17:1 8), 그리고 야곱(창35:11 12)에게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들에게도 모두 문화적 의미를 띠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창세기 전체의 내용이 문화라는 범주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이 정도 질문만을 던져도 해답은 분명하다.

 

문화명령이라는 해석은 성경자체내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외재적 해석' 임에 분명하다.

인간의 그릇된 생각의 틀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증빙자료(proof text)로 탈맥락적으로 잘못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이 본문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성경신학에서는 이 본문을 하나님의 언약(베리트)로서의 복(베라카)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는 이 문맥자체로 보아도 타당하며 그 뒤에 성경의 전체과정에서는 더욱 확증된다.

하나님께서 이 3 대언약(명령)을 하시기 전에 '복(베라카) 을 주시며 이르시되' 라고 명백히 말씀하고 계신다.

따라서 3 대 명령은 하나님의 복을 의미하며 이 복은 인간이 수행하고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진다.

 

앞에서도 잠간 언급한대로 이 3대 명령 즉 언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계승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자손에게 언약, 즉 복을 계승하고 계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창세기 이하 에스더서까지 구약역사의 전개과정은 이 3대 언약의 실현과정으로 구조화 되어있다.

즉 자손 언약의 성취는 창세기 후반에서 민수기 30장까지에서 이루어지며, 땅 언약 성취는 민수기 31장에서 사사기까지이며, 통치 언약 성취는 룻기에서 에스더서까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 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 즉 복은 명령문의 형식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 명령문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여 성경 전체의 중심사상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 때의 명령문(히브리어로 수동명령의 형식으로써 하나님이 수행하실 것을 말한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인간이 그 명령을 수행할 의무를 지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가 된다.

구약 전체의 흐름을 통해 확증할 수 있는 대로 이 3대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두 성취, 수행해주신다.

아브라함에게 자손 주실 것을 언약하신 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주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게 하시고 그 땅을 통치할 수 있도록 다윗을 보내어 주시는 것이다.

이 언약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계시 하시는 것이다.

이 일관된 골격이 성경 전체를 관통한다.

 

이상에서 확인한 대로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의 구약말씀은 이런 저런 잡다한 사건과 사실들로 무질서하게 엮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언약과 그 성취로써 너무도 일관되게 역사가 진행되며, 그 배후에 일관된 논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신학이 주장하고 역설하는 성경계시의 논리적 일관성이다.

성경이 다양한 문서들의 집합이어서 일관된 논리가 없다는 자유주의신학자들의 견해는 너무도 미숙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주장인 것이다.

성경의 내재된 깊이 있는 논리를 발견치 못한채 외관상 다양한 사건들로 되어있는 성경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오해, 평가하고만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역사적 성격을 띠는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 뿐만 아니라 시가서인 욥기부터 아가서까지, 그리고 예언서 역시도 언약성취를 근거로 그 의미가 통일성을 유지한다.

이 부분은 기존의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그 의미를 발견치 못한채 더욱 혼미를 겪고 있는 곳이다.

 

성경신학에서는 욥기부터 아가서까지의 시가서는 찬양으로서의 언약으로 정리되며 이 부분은 역사서를 배경으로 한다.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 언약하신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이 드러났는데 그것을 시적 형식으로 찬양하는 것을 시가서로 본다.

욥기는 하나님의 전능성, 시편은 언약대로 이루신 신실성, 잠언은 주권성, 전도서는 영원성, 아가서는 자비성을 각각 특징있게 드러내며 그것이 종합되어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하게 계시한다.

이처럼 시가서 조차도 그 이면에 논리적인 통일성 혹은 일관성을 가지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예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이 일관된 뜻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게 된다.

예언서들은 유다의 바벨론 포로시기 이전과 이후의 시대에 기록되었다.

솔로몬 이후 타락해 가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한번 때리시겠다고 말씀하신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대로 유다 나라는 아주 망하지 않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예언이 예언서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예언서의 전반부는 진노의 말씀이며 후반부는 회복의 말씀으로 되어있다.

이런 예언서의 흐름은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반부만을 강조하면 예언서가 성도를 위협 억압하는 말씀으로 오용된다.

예언서 역시 그 이전 열조(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을 기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때리시지만 언약대로 싸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두 언약과 성취라는 하나의 의미에 의해서 완벽하게 관통되어 있음을 확인했고 그 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진리성을 일관된 논리와 의미에 의해 확인하게 된 것은 성경에 대한 불신과 왜곡, 오해로 가득찬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사건이 아닐수 없다.

 

이제 우리는 신약의 내용을 통해 성경의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마지막 쐐기를 박고자 한다.

신약까지도 그 논리적, 의미적 일관성이 확인될때 우리는 더 이상 성경에 대한 의심의 여지는 사라지며,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집요하게 공격해 왔던 자유주의신학의 도전에 대해 이제 성경자체의 논리적 구조를 통해 당당하게 포문을 열 수가 있는 것이다.

 

신약의 첫 구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전체를 관통하는 언약사적 논리를 신약에 접합시키는 연결고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구약의 신실하신 성취임을 마태복음이 첫 구절에서 증거함으로 신약이 구약의 언약에 근거하여 기록되어짐을 확증해 준다.

 

마태복음 전반부(1장 4장)에서의 논법을 보면 모두 예수의 잉태, 출생, 출현 등이 구약의 예언(약속)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을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구속사적 신학의 전통을 따르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잉태, 고난, 십자가 죽음을 당하였다라는 것을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의 근본 골격이 아니라 지엽적 내용에 불과하다.

성경신학에 따르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즉, 예수가 왕이시고, 선지자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의 제물이 되심)이 무슨 근거와 배경속에서 증거되느냐 하는 근본적 구조를 일차적으로 중시한다.

 

성경신학에서는 신약의 주제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확인한다.

이는 구약에서 증거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입증하는 구체적 내용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시기에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그림자적으로 이루시고 신약에서는 실체적으로 예수를 보내 사역케 하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정리하자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논리에 의해 신약의 내용을 분석, 확인해 보자.

 

4복음서의 해석과 조화문제는 자유주의신학이건 보수주의신학이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제로 남아있다.

소위 공관복음 문제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유사한 사건을 4복음서에 기록하게 하셨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건에 대한 서술이 복음서마다 약간씩 달리 기록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문제에 봉착하면 조금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현대 지성인이라면 성경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 성경신학은 해답을 시도했고 4복음서의 논리적 조화를 확인했다.

마태복음은 직임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은 신분을 중심으로, 누가복음은 사역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은 본성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4복음서를 종합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완벽한 구조적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각 복음서는 각기의 특징을 부각시키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한 사건의 서술 방식도 다른 복음서와는 약간씩 달리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복음서 간의 논리적 부조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합적으로 한 분 그리스도의 총체를 드러내는데 기여할 뿐이다.

 

그 다음은 신약의 역사서격인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 역시 얼핏보아 다양한 사도들의 행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도행전 역시 엄밀한 언약사적 구조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사도행전 1장이 바로 예수님의 최후 약속 즉, 성령의 강림,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 재림에 관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이 약속들의 성취과정으로 되어있다.

2장에서 약속(언약)하신대로 성령이 오신다.

사도행전을 언약사적 구조에 의해 보지 못한 오순절 주의자들은 성령이 인간들의 간구에 의해 오신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2장에서의 성령강림은 1장에서의 예수님의 언약(약속)에 근거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취의 사건이다.

성령의 강림후 비겁했던 베드로가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이 되고 포악했던 바울이 복음의 사도로 변한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 사도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삼아 땅끝까지 전파하게 하신다.

그들의 증거내용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복음의 전파사건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약속 성취의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실 분이신 것이다.

세번째 약속인 예수님의 재림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된 뒤에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인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언약사적 논리인 것이다.

 

이제 서신서의 논리를 확인할 차례이다.

오늘날 신약 학자들은 서신서를 아무런 성경의 내적 논리와 근거도 없이 바울 서신, 베드로 서신, 목회 서신, 요한 서신, 야고보서, 옥중서신 등등의 범주를 설정하여 파편적으로 연구한다.

그 결과 서신서에 관통되는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다.

어떤 자는 바울신학의 권위자이고 어떤 자는 요한의 서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류의 연구는 하면 할수록 성경의 내적 흐름과 중심사상을 발견하지 못한채 더욱 혼미만을 거듭 할 뿐이다.

그러면 과연 여러 기자들(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 기록한 각각의 서신서들 간에도 의미상의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그러하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성경은 한 분 성령의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한 영감의 작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신서의 논리적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약 전체의 논리를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신서 역시 신약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셔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신다.

그 다음이 서신서이다.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성장의 단계대로 서신서가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에는 가장 기초적인 복음인 '칭의의 복음' 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린도전후서는 아직 어려서 분쟁하는 교회에 '건덕의 복음' 을 전해주며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재판으로 '은혜의 복음' 을 전해준다.

여기까지가 처음 출생한 어린 교회가 먹고 양육받아야 할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이다.

그 다음 에베소서부터 빌레몬까지가 양육받은 교회가 무장하게 될 진리를 증거한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진리로 무장하고 빌립보서부터 데살로니가후서는 교회의 생활로(빌립보서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 골로새서는 굳은 믿음의 생활,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성도의 성숙한 생활) 무장하고, 디모데전서부터 빌레몬까지는 성숙한 신앙의 생활로 무장한 교회가 조직적인 체제로 무장해야 할 것을 증거해 준다.

(디모데전서는 교회의 조직과 행정, 디모데후서는 교회의 지도자 지침, 디도서와 빌레몬서는 교회의 정당한 치리)

 

여기까지에서 교회가 체제로 무장한 다음 하게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투쟁이다.

히브리서부터 유다서까지 교회의 투쟁으로 증거한다.

(히브리서는 유대주의에 대한 경계, 야고보서에서 베드로후서는 세속주의에 대한 배격, 요한일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대적)

마지막으로 계시록에서는 교회의 승리에 대해 증거한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서신서가 전개됨으로써 서신서 역시 예수가 교회를 양육, 성장, 투쟁, 승리케 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해 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 서신서는 교회의 양육, 무장, 투쟁이라는 논리의 흐름을 가지고 점차 성장함에 따라 먹게 될 양식임을 보여준다.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라는 말씀이 신약 서신서의 전체 논리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계시록에서 교회의 승리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승리를 통해 종결되는 것이다.

이때의 재림 역시 사도행전에 약속대로 오시는 것이다.

이 논리의 흐름이 성경안에 들어 있음을 확인한 것이 성경신학인 것이다.

여러 교회의 다양한 상황속에서 각기 다른 기자들이 기록한 말씀이 어떻게 이런 논리적인 구조를 가질수가 있는가?

이는 도저히 성령 한 분의 치밀한 사역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신ㆍ구약성경 모두가 '언약과 성취' 라는 언약사적 틀에 의해 완벽하게 구조화되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유일하고 올바른 해석학적 틀임을 확인했다.

또한 언약과 성취라는 사건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고 따라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는 방편임을 확증했다.

더 나아가서 신ㆍ구약성경이 약속과 성취라는 논리에 의해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있고 서로를 정당화 해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구조성과 자증의 논리를 함축함을 알 수 있다.

이것 이상 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해 줄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이다.

 

2) 성경신학의 일원론적 논리

 

이제 성경신학의 두 번째 논리적 특징인 '일원론적 논리' 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보기로 하자.

 

먼저 일원론적 논리가 어떤 성격을 띠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대비되는 이원론적 논리가 어떤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원론이란 세계의 존재와 역사의 진행, 그리고 인간의 삶을 설명함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대치, 대결하고 있는 두개의 세력 혹은 원리를 상정하는 논리를 말한다.

가장 뚜렷한 실례는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니교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 영원전부터 존재하며 그로부터 현실에서의 선과 악이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다.

선신의 궁극적인 승리는 보장할 수 없다.

 

이와 반면에 일원론이란 영원부터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시며 이 세상의 빛과 어둠, 선과 악, 천사와 사단 모두는 그의 절대적인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논리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그의 뜻에 대적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그의 작정하신 뜻의 실현에 다름아니다.

 

위의 대립되는 두 입장을 볼 때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후자, 즉 일원론의 입장을 지지할 것 같이 보인다.

누가 이원론적 논리를 수용하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질 않다.

이원론적 논리는 명백하게 오류로 보여지지만 일원론적 논리를 수용하게 되었을때 따라오는 문제점이 생겨나고 그 문제점이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문제점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역사섭리 가운데에서의 '죄의 문제'이다.

 

일원론적 논리에 의해 이 문제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을때 자연스럽게 인간의 사고는 자신도 알지 못하게 이원론적 사고로 기울어지게 된다.

즉 죄란 하나님과 이원론적으로 대립되는 사단에 의해 생겨나게 되었다고 얼버무려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그 사단은 어디서 생겨났느냐?

이때 기독교의 역사이래 천사가 타락한 것이 사단이라고 해답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의 초보만을 아는 사람에게도 수긍할 수가 없는 해답이다.

천사가 타락한 것이 사단이라면 이는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즉 하나님이 천사를 지어놓으셨을때 온전하게 창조하지 못해서 타락의 소지가 천사 자체안에 있었거나, 아니면 온전하게 창조해 놓았는데 천사를 타락케 하는 외부적 요인이 있었거나 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므로 수용할 수가 없고 따라서 후자가 남게되는데 천사를 타락하게 만드는 악의 원천은 이제 설명될 길이 없는 것이다.

악한 무엇이 있어야 천사를 타락하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쯤 질문이 이루어지면 전통적인 신학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신비'라는 전가의 보도가 등장하여 질문하는 사람의 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할려고 한다.

그러한 질문은 매우 비신앙적인 것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질문하는 사람이 비신앙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부당하게 억압하려는 자가 비신앙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사실상 천사타락론은 도무지 성경의 지지를 받지못한다.

타락한 천사는 유다서에 의하면(유다1:6 7)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지금은 활동할 수가 없다.

또한 이사야 14장 12절 이하에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떨어진 사건을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해석학의 초보도 파악하지 못한 억지 논리이다.

이사야 14장의 전후맥락은 자고하는 바벨론 세력을 멸망케 한다는 경고의 예언이다.

왜 그 본문이 엉뚱하게 천사타락의 근거로 사용되는가?

도무지 그럴만한 근거가 없다.

 

이쯤 논의가 진전되면서 우리는 이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선과 악의 세력이 영원히 대결한다는 원천적 이원론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일원론을 수용하면 설명하기 곤란한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학 논의에서는(어거스틴으로부터 현재 개혁신학에 이르기까지) 원천적으로 표방하기는 기독교는 일원론의 논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신학적 논의에서는 이원론적 입장을 수용하고 말았다.

이 내용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밝혀진다.

 

이런 모순은 역사이래 두고두고 논리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철학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왔고 취약점을 노출시켜 왔다.

진리는 논리적 모순이 없는 체계를 가질때 일차적인 그 힘을 발휘하게 되어있다.

기본 전제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명제를 한 진리체계 안에 가지고 있을때 이미 그것은 진리로서의 값어치를 가지기 어렵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의 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이 글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성경신학은 성경의 내재적인 논리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해 해명을 시도했다.

여기에 성경신학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신학의 해명의 논리를 제시하기에 앞서서 먼저 역사적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취급되어 왔느냐를 좀더 살피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이글에서는 어거스틴과 아브라함 카이퍼의 예를 들기로 하겠다.

이 두 사람은 개혁신학의 노선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보여진다.

 

먼저 어거스틴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어거스틴은 실상 복합적인 신학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서로 다른 입장, 즉 개혁신학과 카톨릭신학 양진영에서 모두 자기들의 신학의 선구자로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우리 입장에서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처음 마니교에 심취되었다가 신플라톤 철학을 배우면서 거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세계의 존재와 선악의 문제를 신플라톤 철학의 도식으로 해명하고 매우 흡족해 했다.

악이란 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 선의 결핍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악이 적극적인 실재라면 설명하기가 난처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죄를 설명해야 하겠는데 그것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해석했다.

그는 마니교적 이원론(Manichaean Dualism) 즉, 선과 악이 영원히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그것 때문에 현실의 악이 존재한다는 논리는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대안으로써 그는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을 취하였다.

윤리적 이원론이란 신이 주신 자유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현실에서는 선악이 투쟁하지만 궁극적으로 선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이 논리는 얼핏보아 죄에 대한 매우 합리적인 설명처럼 보이며 사실상 이 견해가 기독교의 정통적 견해처럼 간주되어 왔다.

이는 개신교 뿐만 아니라 카톨릭 신학에서도 수용하는 견해이다.

이점에서만은 개신교와 카톨릭은 하등의 차이점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죄가 세상에 발생하게 된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때 신은 자신에게 등을 돌릴수 있는 자유를 창조한 격이 된다.

따라서 신 스스로가 간접적으로 악의 창시자(the author of evil)이며, 신은 악을 허용한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은 윤리적 이원론은 세가지 문제점을 함축한다.

 

첫째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성격의 문제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자유의지로 타락할 줄을 아셨을 터인데 왜 허용 하셨느냐이다.

셋째는 역사 과정상의 선악의 투쟁가운데 인간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 문제점이다.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째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면 그때의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성격인가?

그 의지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는 완전히 독립적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독립적인 실체가 되고 만다.

과연 이것을 신학이론에서 주장할 수 있는가?

이런 독립적 자유의지는 인간의 주체성을 내세우는 철학이론에서나 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주로 등장하는 설명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격적으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로 짓지 아니하시고 인격으로 존중하여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질문을 하자면 문제의 핵심은 그 자유의지의 행사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가? 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 해답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역사의 진행에 자기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간주하지 않는 꼴이 되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의 자유의지는 어떤 성격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의 과실을 임의로 따먹되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셨을때, 그때의 자유의지는 피조차원에서의 자유로운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즉 사단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사단 모두를 주권적으로 장악하고 계신다.

피조 아담이 느낄때 자신은 자유롭게 동산을 거닐며 과실을 따먹지만 하나님께서 아담보다 강력한 상대자를 보내면 아담의 자유로운 행사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피조물의 자유의 성격이다.

결국 상대적 차원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문자그대로 상대적 차원으로 자유롭게 느낄뿐이지 궁극적 차원, 절대적 차원에서 볼 때는 절대적 의지에 종속되어 있다.

우주계의 운행에서부터 소립자 쿼크(Quark)의 세계에까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에 종속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을 성경은 표현하기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시며,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신앙인의 참된 인격은 그리스도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를 가질 그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붙잡힌 바 된, 즉 종속된 종의 의지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죄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라고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자유로운 의지를 주면 타락할 줄을 몰랐을까라는 것이다.

만약 모르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어긋난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셨음에 분명한데 왜 그렇게 되도록 하셨느냐이다.

또한 아담이 범죄하게 된것이 자유로운 의지의 행사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 유혹자 사단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그 유혹자 뱀이 들어오는 것을 모르셨을리가 없고 또한 막으시려고 뜻하셨으면 아예 들어오는 길에서 봉쇄하시면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하셨을까?

하나님은 애초에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것일까?

 

어거스틴 이후 전통적 개혁신학에서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저 단순하게 인간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못박고, 그 이상의 질문은 불온한 비신앙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해결은 진정한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

건전한 개혁신학(구속사적 전통신학)의 기본 전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대로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치고 이 명제를 수용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 명제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을 벗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의지와 맞서는 의지를 인정하는 이원론적 발상(dualistic thought)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개혁신학의 고민은 실상 이 명제의 일관성있는 적용에 있다.

즉 이 명제는 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으나 타락의 문제가 등장하면 논리적인 곤혹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명백히 하나님의 작정 안에 인간의 타락이 일어나고,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어진 일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대답했을때 그 다음 생기게 되는 질문이 대답하기에 매우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즉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대로라면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황한 나머지 전통적 개혁신학자들은 엄청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지만 죄의 문제에 관해서는 허용적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허용적 작정이란 이런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어진다.

그러나 죄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범할려고 하니까(그에 뒤따라서) 하나님이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 문제 만큼은 하나님의 확고한 작정에 혹은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독자적 자유의지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필자가 볼 때 허용적 작정이라는 이 주장이 개혁신학의 근본적 약점으로 보여진다.

이는 논리적인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 만든 사이비 논리이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함정을 판 꼴이 되고 만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도 인정하고, 인간의 타락문제도 해결하려는 훌륭한 묘책처럼 보여지지만 결국은 인간의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인정하게 됨으로써 신학의 근본적인 토대를 흔들어 놓고 말았다.

이것은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허용적 작정론과 자율적 자유의지론의 논리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개혁신학의 체계 안에 체계적인 논리적 모순을 간직하게 되고 만다(이는 뒤에 가서 자세히 밝혀지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의 논의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진행된다.

아담의 타락 역시 예외일 수가 없다.

이때 아담의 자유의지는 앞에서 논의한 대로 독자적, 절대적 자유의지가 될 수 없고, 그것은 피조차원의 상대적 자유의지일 뿐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매여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작정하셨는가로 문제는 압축된다.

이것은 조금 뒤에가서 종합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문제점만을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제 셋째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죄가 인간의 독자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라고 단정했을때, 역사 과정상에 있어서 선악의 투쟁에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그 뒤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리듯이 인간의 자율적 자유의지를 신학체계에서 수용하게 됨으로써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있어서도 그 권리주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건전한 개혁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구원의 문제만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성도의 성화 생활은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다.

또 다시 자유의지의 망령이 되살아나서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해 가는데 성령이 도우시지만 인간도 자기 의지로 노력해야 한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다.

여기서 또다시 성령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가 동일한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개혁신학에서는 '협력'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구원은 신인합력이 아닌 하나님 단독적 사역이지만, 성화 생활은 신인합력(神人合力)을 주장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인간의 독자적 의지를 강조한 곳이 있는가?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이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간다.

머리에 절대적으로 매여있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성화는 전적인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고 그 열매를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못박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 성도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성령에게 매인바 된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때 성도의 생활은 또다시 무거운 멍에를 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확인한 대로 죄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윤리적 이원론(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절대의지와 독립적으로 인정해준 이원론)은 얼핏보아 합리적인 설명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엄청난 모순을 발생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를 소개한 뒤 이상에서 거론된 문제들을 성경신학적으로 해명해 보기로 하겠다.

 

19세기말 칼빈주의의 새로운 부흥을 꾀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면, 죄의 발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영역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견해는 실상 조금만 성경적으로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생각이다.

어떻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섭리 영역밖에서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이원론적 사유방식의 결과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죄가 하나님의 섭리 영역에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성경에 입각해서 설명을 하지 못하는데 있다.

카이퍼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하겠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명백히 죄는 하나님의 섭리 영역 안에 일어나는 것이며,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카이퍼의 입장은 매우 솔직하고 건전한 일면을 보인다.

기존의 개혁신학(카톨릭신학에서도 동일하게 주장한다)에서 말하는 허용적 작정이라는 회피적인 견해보다는 훨씬 정직하다.

진정한 탐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하는 신앙적 용기가 필요하다.

개혁신학은 아직 성경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것을 모른다고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神秘)라는 것으로 오도함으로써 후대 신학도로 하여금 아예 그 문제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폐쇄성과 미숙성을 노정시켜 왔다.

 

이제 성경신학적 논리에 의해 해명을 할 단계에 왔다.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 세상의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일원론적 논리를 주장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죄의 문제도 일관되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혹은 계획이 아니면 이 세상에 어떠한 일도 발생할 수 없다.

아담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피조적 상대적 자유의지를 아담에게 주었고 사단이 에덴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이런 상황속에서 타락할 줄을 모르실리가 없으며,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을 능력이 없어서 막으시지 못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되는 것을 작정하신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보기로 하자.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아니하고 에덴에 머물러 있었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피조물인 인간은 상대적인 비교의 거점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어떤 판단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늘상 공기가 있는 곳에 살아가면 공기의 고마움 뿐만 아니라 공기가 있다는 의식과 감각조차 생겨나지 아니한다.

공기가 없거나 희박한 곳에 가서라야 비로소 공기의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찬 가지의 논리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있었을때 아버지의 고마움과 은혜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불만이 싹트며 그래서 집을 나가기를 원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이 나가면 빈털털이 될줄을 아시지만 나가도록 허락한다.

돼지우리에 가서야 비로소 탕자는 아버지집이 얼마나 좋은 곳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돼지우리의 존재의 의인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다.

왜 이렇게 죄 많은 세상을 섭리하시느냐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장 이 죄많은 세상을 제거시켜 버리고 새 세상을 만들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택한 성도들을 죄 가운데서 고난받고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탕자의 심정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돼지우리의 체험없이 아버지집의 좋음을 느낄수가 없기 때문이다.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죄의 권세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속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성도로 하여금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미케 하시려고 타락의 섭리를 하신 것이다.

이를 바울이 깨닫고서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찬양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 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2 33)

 

우리는 위의 논리를 구약을 통해 보다 확증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어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뒤의 섭리를 보면 아브라함 후손들로 하여금 그냥 그 땅에 살게 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자식들 가운데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고 나중 가나안 땅에는 기근을 내린다.

그렇게 하여 결국 아브라함 후손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다.

거기서 400년 종살이를 한 뒤 하나님의 약속대로(창15:11 16, 이방에 객이 되어 애굽을 섬기다가 그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징치하여 나오게 하신다고 약속되어 있음)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해방되게 하신다.

그 뒤 40년 광야의 어려운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약속대로 인도 하신다.

왜 이러한 섭리를 하시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실 가나안 땅이 은혜로 주어질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체험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만 살았다면 가나안 땅의 은혜를 느낄 수 없다.

애굽의 모진 종살이와 광야의 어려운 시련을 겪어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가나안 땅의 은혜를 참으로 은혜로 느끼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광야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받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구습이 몸에 배어 있어서 우상을 섬기며, 모세를 반역하며 음행하며,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이런 패역하고 범죄한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이때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 자신의 행위의 대가대로 얻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사건인줄 알게된다.

이렇게 볼 때 애굽의 종살이와 광야의 어려운 생활, 그리고 가나안 땅의 축복, 이 모든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데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된 섭리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집어 넣으시고 빼내심으로 당신이 여호와이시고 전능자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땅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불필요한 것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하는 일원론적 논리인 것이다.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필요하고 없었으면 좋을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을 모르는 생각의 결과이다.

애굽이 없었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홍해를 건널때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볼 기회가 없으며 가나안의 축복을 축복으로 느낄수가 없다.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케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추적하게 하고 결국은 홍해바다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를 로마서가 이렇게 증거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7 18)

 

요컨대 죄는 하나님의 섭리 경륜에 있어서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데 필요한 방편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원론적 논리를 시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시편139:12)

 

Ⅳ. 성경신학의 논리와 특성2. 성경신학의 특성 우리는 앞의 두 장의 논의를 통해 성경신학이 태동하게 된 배경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성경적 논리를 확인했다.논의해 온 바와 같이 성경신학의 태동은 기존신학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의식하면서 이루어졌다.여기서 기존신학이란 보수신학으로 대변되는 전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전통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했지만 그 믿음을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하여 정당화하지 못한채 역사적 계기에서 구성된 파편적 교리의 무반성적 계승과 맹목적 강요의 문제점을 노출시켰다.이에 대한 철학적 반동으로서의 자유주의신학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신적 기원과 계시성, 그리고 통일성을 부정하고 성경을 역사적 문서로 간주함으로써 기독교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평면적 윤리의 체계로 왜곡시키고 말았다.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자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성을 확증할 수 있는 성경 자체의 내용적 통일성의 확보에 있음을 알 수 있다.즉 성경이 통일된 의미를 가진 것이 성경 자체의 논리에 의해 확인되면 전통신학의 비체계적 교의신학의 문제점도 극복 해소되고, 또한 성경이 역사적 정황속에서 기록된 문서임으로 각각 상이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자유주의신학의 그릇된 주장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 상황속에서 성경신학은 태동했고 성경신학은성경의 통일성(the unity of the theology)을 확인함으로써 신학사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자임한다.그 통일성은 언약과 성취의 구조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통일된 성경의 의미의 발견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주신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다.이는 철학과 철학의 영향아래 형성된 자유주의신학의 도전 앞에 추락될대로 추락된 신학의 권위, 더 근본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되찾으며 기독교 신앙의 확고부동한 근거를 확보함을 의미한다.이 글은 바로 이러한 성경신학의 면모를 전통신학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의 종합적 결론인 성경신학과 전통신학의 구조적 대비를 하기에 앞서 성경신학이 기존신학과 차별화되는 특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여기서 언급하는 성경신학의 특성은 기존신학의 문제점과 맞물려 있으며 앞 절에서 논의된 바 있는 성경신학의 논리에서 따라 나온다.이 절에서 밝히고자 하는 성경신학의 특성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정리 요약된다.첫째는 신학의 정체성 문제이다.전통신학은 결국 인간 구원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것이 타당한가이다.성경신학은 신학의 본질적 정체성을 하나님 자기계시의 논리에서 찾는다.둘째는 신학의 독자성 문제이다.성경신학은 전통신학이 성경적 개념과 사고 방식에 의하여 신학 작업을 하는가에 대해 의심한다.성경신학은 신학의 개념과 논리를 철학에서 끌어오는 것을 비판하며 성경 자체의 독자적 개념으로 신학 작업을 수행해야 함을 주장한다.셋째는 신학의 절대성 문제이다.성경신학이 성경 자체의 구조적 논리와 독자적 개념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기존의 어떤 신학과도 구별되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이런 세 가지 성경신학의 특성은 서로 매우 긴밀한 관련성을 가진다.이 점은 이하의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먼저, 성경신학이 주장하는 신학의 정체성(the identity of the theology)은 어떠한가 살펴보자.성경신학은 신학의 자기 정체성, 즉 본질을 언약과 성취를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존재 확증으로 본다.성경의 모든 다양한 사건과 내용은 이를 증명하는 방편으로 간주한다.여기서 우리는 이 점의 정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전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 양자의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우리는 앞의 논의에서 성경을 인간 구원의 관점으로 보는 구속사적 전통신학이 얼마나 성경을 편협화하고 있는가를 확인했다.그러나 한편 그러한 논리가 태동된 역사적 배경과 인간 실존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즉 구속사적 논리는 중세의 그릇된 구원의 교리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산출된 종교개혁의 역사적 산물인 동시에 죄와 고통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 날 수 있는가라는 인간 보편의 열망을 반영한다.앞 장에서도 잠깐 언급한 대로 어떻게 하면 죄악과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 좋은 세상을 만들수 있는가라는 인간 구원의 명제는 모든 이방종교와 철학의 중심 주제이다.구속사신학의 한계는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과연 신학의 중심 주제가 이방 종교의 그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가이다.다시 말하자면 구속사적 논리가 역사적으로 중세의 잘못된 구원교리를 비판하면서 발견된 성경의 부분적 진리임에는 분명하지만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중심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방 종교나 철학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차원에서 기독교가 설명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이 점은 철학의 절대적 영향에 의해 태동된 자유주의신학의 문제점을 검토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이 글의 입장에서 볼때 자유주의신학은 형식적으로 드러나는 언어와는 달리 실상은 철학적 인간관과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본질적으로 신학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이점은 실제 자유주의신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즉 그들은 자기네들의 신학의 모학문으로써 철학을 더욱 숭상하고 그 논리에 의해 자기 주장을 정당화 함을 감추지 않는다.문제는 이런 철학적 자유주의신학이 전통신학에 대해 가지는 비판적 태도이다.자유주의신학자들의 눈에 비치는 전통신학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즉 첫째, 조금만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버리면 해답을 못하는 논리적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비체계성이며, 둘째, 만약 전통신학의 주장대로 성경이 인간 구원의 논리라면 그 주장이 보다 철저하게 주장되지 못하는 불철저성 이다.첫째 문제는 앞의 서론적 문제 제기를 통해서 많이 취급되었고 여기서는 둘째 문제를 살펴보도록 한다.자유주의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전통신학의 불철저성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만약 인간 구원이 성경의 중심 주제라면 왜 개인구원과 영적구원에만 한정된 논의를 하느냐이다.그들의 주장인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개인구원을 넘어 보편적 사회구원과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포괄하는 것이 보다 철저한 구원론적 논리라는 것이다.인간구원을 성경의 대주제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의하면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며 전통신학은 이를 비판할 성경적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최근에는 전통신학 안에서도 이미 사회 구원을 긍정적으로 논의하는 조짐이 역력하다.(창세기 1장28절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언약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수행해야 할 문화명령으로 보는 데서 그 논의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신학이 전통신학에 대해 가하는 비판적 논리를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이 글에서 언급하는 전통신학이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보수신학을 의미한다.루터에 있어서는 인간구원의 논리가 두드러졌지만 칼빈에 와서는 인간구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 영광 중심의 논리를 전개했다.그리하여 인간의 구원 뿐만 아니라 멸망까지도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어진 것이며 인간의 죄 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기독교강요 1권).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시느냐에 대해서는 명료한 성경적 해답을 하지 못했다.이 부분이 전통적 개혁신학의 결정적 약점인 것이다.여기에 대한 성경적 설명이 분명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칼빈 이후의 전통적 보수신학은 점차 예정론을 신학 강단에서 형식적으로 논의될뿐 심도 깊은 논의는 회피하게 되며 최근에 와서는 아예 언급을 차단하는 실정이다.이렇게 하여 칼빈은 성경을 인간 구원 중심으로 보려는 관점을 분명히 극복하려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 중심의 논리를 확립하려 했으나 죄 문제에 대한 성경적 설명의 부재로 인하여 후대에 다시 루터식의 구원론적 관점으로 퇴행하게 되었다.인간의 선택과 유기의 영원한 예정에 의해 구원과 멸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명백한 성경의 증거이지만 그것을 강하게 주장하면 바로 전통신학의 논리로서는 해답할 수 없는 문제가 튀어 나온다.그것은 바로 죄의 기원 문제와 인간의 자유의지 유무의 문제인 것이다.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라면 죄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인간은 로보트와 같은 존재가 아니냐는 반론이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할 여유가 없다(박용기목사의 기독교 예정론을 보면 잘 설명되고 있다).단지 이 글은 이런 문제점을 철학의 날카로운 논리에 익숙한 자유주의신학자들이 모를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그리하여 자유주의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근거로 예정론에서 말하는 인간의 유기의 문제를 비판했다.즉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 안에서 어떤 자는 선택하고 어떤 자는 유기, 즉 멸망시키기로 정해 놓으셨겠는가이다(이 주장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칼 바르트이다).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과 모순될 뿐 아니라 공의롭지도 않다는 것이다.이로써 그들은 전통신학의 애초의 인간구원의 원천적 근거인 예정론을 부정함으로써 구속사의 뿌리를 짤라 버렸다.이렇게 구속의 근거인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제거시킨 다음, 뿌리 뽑힌 인간 구원의 문제만을 가지고 전통신학과의 신학적 논쟁을 시도하는 것이다.즉 인간의 구원이 성경의 중심 주제라면 개인 구원을 넘어서 인류 전체를 염두에 두는 사회 구원쪽으로 진행되는 것이 더 성경적이 아니냐는 것이다.말하자면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성경의 중심이라는 전통신학자들의 주장을 역이용 하여 더욱 확대된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아버린 것이다.이쯤되면 구속사적 주장을 하는 전통신학은 자유주의신학의 논리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오늘날 전통적 보수신학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예리한 공격을 두려워하거나 아예 폐쇄적 울타리 안에서 도피적으로 안주하고 있다.이렇게 볼때 '신학 = 인간 구원의 논리'라는 전통신학의 편협된 주장은 그것이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논리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유주의신학이 인본주의적 주장을 전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매우 취약한 주장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성경신학은 신학이 인간 구원의 논리로 환원(reduction)되어질 수 없음을 주장한다.성경신학은 '신학 =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한 신 존재 확증의 논리'임을 말하고, 인간 구원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는 과정상의 한 방편으로 간주한다.여기서우리는 성경신학의 올바른 신학적 정체성 확립의 논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요컨대 신학은 하나님 존재의 확증 그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제 두번째 성경신학의 특성인 신학의 독자성(the autonomy of the theology)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성경신학은 기존신학과는 달리 일체의 철학적 개념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신학의 개념과 논리를 성경 안에서만 확보하는 신학의 독자성을 주장한다.이 점은 위에서 논의한 신학의 본질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정체성 문제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신학의 정체성은 신학의 본질적 내용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라면, 신학의 독자성은 그것이 과연 어떤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왜냐하면 설명의 대상과 설명의 도구인 개념간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신학의 본질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한 하나님 존재의 확증이라고 하는 신학의 정체성이 정립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성경적인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전혀 엉뚱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이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예가 중세신학의 철학적 신관이다.중세신학의 대변자인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은 계시에 의해 설명된다고 함으로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한 듯 하였으나 실상 신을 설명하는 구체적 논리 전개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설명되고 증명되는 신은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라 철학적 신으로 드러났다.이는 아퀴나스의 대표적인 저서 신학대전을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아퀴나스는 신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논법을 빌어 신을 드러난 결과로 부터 원인을 찾아가는 우주론적인 철학적 논증으로 설명한다.(아퀴나스, 신학대전 요약, p.28)그래서 신이란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최초로 만물을 움직이게 한 '제일 원동자(the prime mover)', 혹은 '부동의 시동자'(the unmoved mover)라는 철학적인 조작적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이는 그럴듯한 신존재 증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계략이 숨어 있다.이때의 신은 만물을 움직이게 시동만 걸어놓고 현실의 세계로부터는 초월해 있는 관념적 존재로서의 신이다.이렇게 신을 현실에 주관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실제 세상과 교회의 지배는 인간 교황이 하도록 신학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철학적 개념이 동원되어 설명되는 중세신학의 신은 전혀 성경과는 거리가 먼 신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오히려 신은 인간교황의 세상 지배의 정당화를 위하여 사용되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신일 뿐이다.이는 철학자 데카르트가 인간의 인식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나 또한 철학자 칸트가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해 신을 요청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방식이다.이들 모두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 신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을 뿐이다.이들의 신들은 모두 인간의 하수자일 뿐이다.이렇게 볼 때 신학의 논리 전개에 철학적 개념이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으며 신학의 정체성의 진정한 확립은 성경적 개념의 확보, 즉 철학적 개념과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신학적 개념의 사용에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면 전통신학의 경우는 어떠한가?필자가 볼 때 전통신학은 신학의 원천으로서의 성경의 절대 권위를 믿었으며 신학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 철학적 개념의 사용을 거부하는 신학의 독자성의 원칙은 건실하게 세웠다.그러나 신학의 주제를 인간의 구원으로 삼음으로써 생겨나는 논리상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고 말았다.다시 말하자면 원칙적으로는 철학적 개념의 유입을 거부하는 신학의 독자성을 표방했으나 구체적 논리의 전개상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철학의 유입을 허용하고 말았다.이것의 가장 뚜렷한 예가 바로 죄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난다.전통신학에서는 죄의 발생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주장하게 될 때 죄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거슬러 올라가게 될까 염려하여 죄의 문제 만큼은 허용적 작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이로써 죄의 발생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에 달려 있다고 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자율적 자유의지, 즉 철학적 의미의 자유의지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이는 결국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 되며 여기서부터 전통신학은 인본주의적으로 신학의 경향이 기우뚱하고 말았다.즉 죄의 발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적 자유의지의 사용에 있다고 하는 도덕적이며 철학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서로 독자적으로 보게 되는 이원론으로 귀착하고 말았다.이 주장의 최초의 기원은 어거스틴에게 있으며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성경적 주장인 것처럼 확고하게 전통신학 안에 뿌리 내렸고, 무비판적으로 계승되어 왔다.그러나 성경신학의 죄관은 이와는 전혀 상이하다.인간의 죄의 발생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하는 계시적 도구이다.하나님의 작정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를 위해 불필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현상적으로 볼 때 아담의 범죄가 아담의 자유의지의 행사에 의해 발생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권적인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다.이것이 죄에 대한 계시적 성경적 설명이다.그때의 의지는 결코 철학에서 생각하는 자율적 의지가 아니다.그 자유의지는 사단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상대적 의미의 자유의지이지 결코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피조 만물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에 붙들려 있다.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대로 하나님은 주권자시며 성도는 그의 종이다.이때 성도에게 있어서 종의 개념은 결코 억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사랑의 종이므로 참으로 자유로움을 느낀다.하나님 앞에서의 자율적 자유란 어불성설이며 自由의 어원적 뜻인 스스로 말미암는다(스스로 自와 말미암을 由)는 그 말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의지를 인정치 않으려는 죄 된 생각의 발로이다.그래서 철저한 인본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 신은 없어져야 한다고 극언을 했다.이는 인간의 절대적 자유와 신의 절대적 자유는 양립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통신학이 죄의 발생 기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적 자유의지의 개념을 자신의 체계속에 유입함으로써 죄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신학적 체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한 명의 첨병 뒤에는 일개 군단이 뒤따르고 있듯이 학문에 있어서 하나의 핵심 개념 뒤에는 엄청난 종속 개념들이 포진 되어 있다.이만큼 신학의 체계안에 철학의 개념 하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죄와 관련하여 자유의지를 인정하게 되자 인간의 믿음과 성화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은 자기 주장을 하게 된다.그래서 하나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셨지만 그것을 믿는 것은 나의 의지적 믿음에 달려 있으며, 또한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성화는 성령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적인 협력에 의한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이 전통신학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신학의 독자성을 원칙적으로는 표방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철학의 개념에 의하여 신학의 체계가 뒤틀려 버린 전통신학의 보기 민망한 모습이다.전통신학은 이러한 결정적 오류를 범했으나 그래도 신학은 성경에 의존해야 하며 그래서 신학의 독자성을 원칙상으로는 제시했다.그러나 자유주의신학은 아예 신학의 원칙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즉 성경을 당대의 시대 정신에 의해 번역하고 해석한다는 것이다.이로써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의 독자성을 묵살해버렸고 이들의 신학은 철저히 철학적 개념으로 환원, 변질되고 말았다.그리하여 19세기 이후 자유주의신학은 당대의 철학의 유행을 따라서 그 옷을 갈아입는 변전하는 신학의 내용을 구성했다.이는 신학의 철학화라는 면에서 볼 때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 중세신학의 현대적 재판이라고 볼 수 있다.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대로 이들의 신학은 그들의 논의 속에 신의 존재와 사역 등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미 그것은 철학적 개념에 의해 관념화된 신이므로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보다 정확하게 말 하면 성경의 하나님과는 정반대로서 인간의 관념에 의해 조작된 신이다.이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그들도 마치 신의 주권과 섭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이 점을 좀더 설명해 보기로 하자.중세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하여 신을 관념화시킴으로써 현실을 주관하지 못하는 신으로 상정해 놓고 실제 교회와 세상의 지배권은 교황에게 맡기는 교묘한 논리를 전개했다.그래서 껍데기는 종교적인 것 같았으나 철저히 인간 교황의 절대권이 행사되는 인본주의적인 교회관을 낳았다.19세기 이후 신학의 독자성을 상실해 버린 유주의신학도 중세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자유주의신학의 인식론적 배경에는 칸트가 있다.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경험적으로 지각되는 현상계뿐이다.현상계를 초월하는 신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하여 요청되는 논리적 가정일 뿐이다.여기서 계시로서의 신지식의 가능성이 부정되고 성경은 초월세계로부터 계시된 말씀이 아니라 단지 역사 안에서의 문서에 불과 하다는 자유주의신학의 근본 방법론인 역사비평의 주장이 성립된 것이다.이런 칸트의 도식 안에서의 신은 역사 지배자로서의 신이 아니다.실제의 삶의 영위는 신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며 신은 인간의 행위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논리적 요청일 뿐이다.이런 관념적이며 불가지론적인 신관이 자유주의신학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이런 칸트의 관념적 신관은 19세기 헤겔에 와서 더욱 진행된다.헤겔 철학의 중심 개념인 절대정신은 마치 기독교의 절대적 하나님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았다.헤겔 자신도 자신을 기독교적 철학자로 간주했다.그러나 헤겔에 있어 절대정신이란 인간이 추구해야할 삶의 목표로써 개념상 방편적으로 그리고 관념적으로 상정될 뿐 실제 인간의 역사는 인간 주체에 의해 수행된다.역사의 진행이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라고 했을때 절대정신은 자기 부정을 통해 역사 안에 내재하고 만다.그래서 헤겔 이후 신은 철저히 역사화, 내재화되고 만다.이와 같은 칸트와 헤겔의 철학적 도식에 의해 진행된 자유주의신학은 칸트의 명령을 따라 기독교를 도덕화시켰고 헤겔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독교의 생명인 영원성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역사 안에 내재화 시켰다.그리하여 자유주의신학의 목표는 역사 안에 인간의 노력에 의한 도덕적 이상 국가의 형성에 있다.이것이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대표적 인물인 리츌의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다.이는 성경적 가르침,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신실하게 성취함으로 이루어 간다고하는 것과는 정확하게 정반대이다.신학의 독자성을 상실한 자유주의신학은 20세기에 와서도 다른 철학으로 변신할 뿐 근본적 아이디어는 동일하다.20세기초 양차 대전으로 인해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유토피아적 아이디어가 붕괴되자 자유주의신학은 즉각 실존철학의 개념에 의지하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시작했다.이것이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라고 불리우는 칼 바르트의 신학적 생존 전략이다.흔히 바르트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을 매우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바르트의 진면목을 상당히 오해한 결과이다. 우선 바르트의 성경관은 우리의 입장과는 전혀 상이하다.그는 키에르케고르의 진리관, 즉 "진리는 주체성이다"는 명제를 수용하여 진리의 명제적 객관성을 부정했다.그리하여 바르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서 보지않는다.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 결단이 그것을 진리로 받아 들일 때 이다.이로써 바르트는 인간의 결단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는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놀라운 사실은 20세기 초반 그렇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바르트 신학도 60년대 이후 사회 상황이 바뀌면서 그 종적을 감추기 시작했고 새로운 실천 지향적 신학이 등장한다.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고 동양사상이 부각되자 자유주의신학권은 재빨리 여기에 발맞추고 있다.이러한 신학의 줏대없는 자기변신과 철학을 향한 아부와 숭경은 놀랍고도 처량하게 보인다.그리스도를 알고난 이후 이전의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의 신학적 긍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우리는 이 글에서 현대신학의 동향을 모두 서술할 여유가 없다.단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 개념을 신학에 받아들인 결국이 어떠한가이다.신학의 독자성은 왜 중요한가?이는 신학이 원천으로 삼는 성경이 독자적이기 때문이다.성경의 내용은 타락된 인간의 머리로서는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말씀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언어를 빌리고 있지만 그 개념과 내포된 의미는 영원하며 절대적인 성격을 띤다.따라서 성경의 진리는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월적이며 영적 내용이다.그러므로 신학은 타락된 인간의 생각과 경험의 산물인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의 비진리성과 상대성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이 글이 말하는 성경신학은 이러한 입장에 있다고 주장한다.성경신학은 어떤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언약과 성취라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이고 고유한 개념을 기본 골격으로 삼는다.그 언약과 성취는 근본에 있어 영원성을 갖는다.그것이 역사적으로 계시되었다.언약과 성취가 함축하는 의미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당신이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것이다.이것을 발견하는 자는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성경신학이 이천년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공헌은 신학의 작업에 있어서 철저히 성경적 개념만을 사용하여 신학의 독자성을 정립했다는 점일 것이다.이제 성경신학의 세번째 특성인 신학의 절대성(the absoluteness of the theology)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이십세기 들어서면서 모든 학문에 있어서 진리의 절대성 문제는 논의의 핵심에서 사라져 버렸다.인간의 인식과 해석과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 거점을 확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진리 주장과 실천은 상황적이고 맥락적이어서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이는 현대철학과 현대과학이 너무도 많은 증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내용이다.그래서 현대는 상대주의의 시대, 혹은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다원주의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이젠 어느 누구도 감히 자기의 주장이 절대적임을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이는 최근 철학적 학문적 논의에서 급속하게 부상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더욱 강화되어 주장된다.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소위 세계를 전포괄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설명하는 거대 이론(grand theory)은 불가능함을 천명했다.도무지 진리 인식이란 인간의 주체적 태도와 상황적 맥락에 달려 있음으로써 절대적 진리 파악이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신학의 입장에서 볼때 이런 주장은 역설적이게도 사실상 매우 반가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이는 인간의 철학적 인식의 한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문제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신학의 절대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이처럼 온통 상대주의적인 시대정신 속에서의 신학의 자리매김은 어떠해야 하는가?이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전통신학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하여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막연한 수준에서나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에 거기에 의존하는 신학은 절대성이 있음을 주장한다.그러나 성경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절대성의 실상은 매우 빈곤함을 나타낸다.즉 성경의 부분적 해석의 결과인 인간 구원의 교리에 한정됨으로써 포괄적인 절대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비유컨대 어린 자녀는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절대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그 자녀가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과 사랑의 내용은 매우 유치하다.아버지의 깊고 넓은 생각과 사랑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말하자면 절대성에도 그 수준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전통신학이.주장하는 진리의 절대성이라는 것이 이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이런 유아적인 수준의 절대성은 우리에게 확고 부동한 믿음을 줄 수가 없다.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조그만한 어려움이나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그래서 사실상 전통신학은 오늘날과 같은 상대주의적 철학과 첨단 과학의 시대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다.조금이라도 정직한 전통신학자들은 이점을 느끼고 있다.그들의 내심은 현란하고 찬란하게 보이는 현대의 과학적, 철학적 세계관의 논리 앞에 자신이 주장하는 절대성의 내용이 얼마나 초라함을 절감하는 것이다.우리가 성경이 절대적 진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절된 명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명제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포괄적인 세계관을 함축 한다.성경에 나타나는 단순 명제들은 그것들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분리된 진리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예컨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성령이 오순절에 오셨다라는 등등의 성경에 나타나는 명제들은 사실상 각각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이들 모든 명제들은 하나의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 의해 자리매김되고 전체의 의미에 비추어 진리성을 가진다.이 점이 성경 진리의 절대성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이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이는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스광스러운 수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이를 좀 더 설명하기로 하겠다.왜 각 교파마다 자기의 교리를 절대시하는가?필자가 볼 때는 이들 모두는 그 나름대로의 성경 해석의 틀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지엽적으로 그리고 단순 명제적으로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모두는 각자의 수준에서 파악한 성경내의 단순 명제들을 성경 전체의 진리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여기에는 인간의 불안한 종교 심리까지 가세되어 그 미숙한 진리 이해 수준을 더욱 고착시켜 버린다.즉 불확실한 세상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믿어버리고(이때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는 성경적 믿음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인간 욕망에 기초한 신념적 성격이다) 싶은 조급한 마음에서 성경의 단순 명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더이상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는 더 깊은 진리의 깨달음이 가능하지 않다.이러한연유에 의하여 각 교파는 자기들이 성경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러나 그 절대성의 포괄성과 깊이는 동일한 것이 아닌 것이다.전통신학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의 틀인 구속사적 논리의 지엽성 때문에 성경의 단순 명제들에 대한 부분적인 진리성은 파악했지만 포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구성에는 너무도 미흡하다.따라서 이런 수준의 절대성의 진리 주장을 가지고서는 오늘날 포괄적인 철학적 세계관의 도전을 방어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의 상황에 놓여 있다.전통신학이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의 수준과 내용이 너무도 미숙한 것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자유주의신학은 아예 노골적으로 신학의 절대성을 공공연하게 부정해 버린다.자유주의신학은 그 태동이 성경의 신적 기원과 절대권위를 부정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학의 절대성 논의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절대적 계시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적 정황 그 자체이다.그러므로 그 삶의 정황으로부터 신학적 사유(사실상 이는 엄격하게 말하여 신학적 사유가 아니다)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신학은 역사성과 상대성을 띨 수 밖에 없다.이는 위의 신학의 독자성 논의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자유주의신학은 시대별로 바뀌어온 철학의 변천을 따라 그 주장의 내용이 바뀌어 왔다.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 격인 슐라이에르마허 뒤에는 칸트와 낭만주의 철학이 있으며 예수전으로 유명한 슈트라우스 뒤에는 헤겔이 있고,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완성자라고 볼 수 있는 리츌 뒤에는 칸트가 있다.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한다고 등장한 칼 바르트 뒤에는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눈을 부릅뜨고 서있다.그러니까 바르트는 성경의 진리로써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존철학으로써 19세기 자유주의신학 뒤에 서 있는 칸트와 헤겔을 비판한 것이다.비신화화 신학의 기수인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고, 불트만을 비판하고 나선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는 맑스주의자이며 희망의 철학자인 블로흐가 조종하고 있다.과정 신학자의 논리적 체계는 과정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제공하고 있으며, 해방신학자들과 한국의 민중 신학자들은 이미 한물간 칼 맑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을 쫓아 포스트모던 신학이 생겨난다.좀 희화적인 이야기이지만 필자의 짐작으로는 이제 동양사상의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시대적 조류로 보아서 앞으로는 공자 신학이나 노자의 道의 신학 아니면,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無와 空의 신학도 나올 조짐이 보인다.이는 단순히 짐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논의를 들여다 보면 충분히 현실화가 가능한 추측이다.여기서 우리가 꼭 지적하고 지나가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이토록 자유주의신학은 시대의 조류를 따라 변천하는 상대성을 띠고 있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당대에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이다.도대체 그 설득력의 원천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여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목하 우리가 논의하는 신학의 절대성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진리가 절대적으로 옳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의 추종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그러나 실제는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며 진리의 절대성은 진리 자체의 진리스러움에서 그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지 그것이 가지는 세상에서의 효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드러나는 효과로 말하자면 언제나 거짓이 대세를 이루는 것이 이 어두운 세상의 법칙인 것이다.문제는 그것의 효과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도둑놈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많은 물건을 훔치는 방법이며 병든 사회에 효율적으로 잘 적응하는 자는 병든 인간인 것이다.자유주의신학은 당대 철학의 영향아래 이루어지며 그 철학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제, 즉 어떻게 해야 이땅에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만들수 있겠느냐 하는 인간적 욕망의 문제를 당대의 정황과 관련하여 건드린다.그래서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추종하는 것이 진리스럽다는 통속적 진리관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신학의 인본주의적인 주장이 그 당대에는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자연스럽게 행세하게 되는 것이다.요컨대 자유주의신학의 보편적 설득력은 그 주장의 진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의 욕망의 내용과 일치하며 그것을 부추기기 때문이다.그리고 시대의 상황이 바뀌면 슬그머니 새로운 시대의 문제로 관심을 바꾸면서 새로운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자기 변신을 도모하는 것이다.이것이 자유주의신학이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에는 진리의 불변성과 절대성을 결여하고 상대적으로 변천하는 오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당대에는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설득력의 요체인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마7:13)과 관련하여 진리의 절대성과 그것의 검증 방법에 대한 보다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진리성의 검증은 결코 많은 사람의 동의에 달린 것이 아니다.오히려 많은 사람이 일시에 어떤 주장에 대해 열광할 때는 참된 진리의 감각을 가진 지혜로운 자는 그 주장의 진리성에 대해 의심해 볼 것이다.종교개혁자 루터는 그 당대에 모든 사람이 교황의 거짓 가르침을 추종하고 있을 때 그는 그 가르침을 의심했다.그리고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외로웠지만 거짓을 향한 용맹스럽고도 위대한 거부를 감행했다.모든 사람이 인정치 않아도 성경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것이 외로운 개혁자 루터의 확신이었고 성경신학을 주장하는 우리의 입장이다.깊은 진리일수록 그것은 많은 사람이 단기간에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그 깊은 진리를 전파하는 데는 오히려 미숙한 진리 이해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수준으로는 당장 이해가 되지 않기에 오해를 받기가 쉬우며 바울이 말한 대로 해산의 수고가 따를 수밖에 없다(갈4:19).그러나 그 수고는 결코 고통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그 수고가 새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기 때문에 찬란한 기쁨으로 뒤덮인 고통인 셈이다.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신이 성도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면서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골1:24)우리는 지금까지 신학의 절대성과 관련해서 전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의 입장을 검토했다.전통신학은 절대성의 주장은 있지만 그 절대성의 내용이 구속사적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너무도 미숙하며 빈곤하여 포괄적인 세계관을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으며, 반면 자유주의신학은 절대성의 주장은 포기하지만 당대의 보편적 설득력은 철학적 세계관에서 확보하여 거짓된 영향력을 행사함을 확인했다.이 양자 와는 달리 성경신학은 신학의 절대성의 주장을 포괄적인 세계관의 정립 수준에서 언급한다.성경신학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성경의 많은 단순 명제들을 분리 나열함으로 그 진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성경신학은 성경이 많은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통일된 의미, 즉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하여 완벽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포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성경의 모든 명제들은 언약과 성취라는 구조에 의하여 정리 포섭되며 이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이고 따라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논리로 파악한다.이 언약사적 논리는 성경을 관통하는 절대적 골격임을 주장하는 것이다.이는 박용기목사가 최근에 저술한 성경개론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다.성경신학은 언약사적 논리의 절대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이 논리에 의해 정립되는 성경적 신관은 올바른 인간관과 역사관 그리고 우주관을 함축한다.이것이 바로 전 포괄적인 기독교의 절대적 세계관이다.성경신학은 세계의 가치와 목적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세계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적 의미를 지닌다.여기에는 사단의 존재나 인간의 범죄까지도 당연히 포함된다.여기서 선과 악을 주관하시는 기독교의 일원론적인 세계관이 확립되는 것이다.그리고 세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에 있는 것이다.성경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 목적을 철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이 세상안의 피조물 자체에서 찾지 않는다.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이를 깨달은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존재함을 확신했다.이로써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육신적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요컨대 성경신학은 성경의 절대적 진리성을 확신했고, 그 구체적인 언약사적 논리를 발견함으로써 그 진리성을 입증했다.그리고 그 진리는 세계를 전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세계관적 논리를 확립시켰다.

 

Ⅴ. 양자의 구조적 차이점 분석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와 분석을 토대로 하여 이글이 최종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구속사적 전통신학과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구조적 차이점의 전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자가 '부분적' 차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구조적' 차이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이글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긴요하다.

 

부분적 차이라는 것은 논의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방향은 일치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요소가 더 추가되거나 생략되어지는 차이점을 일컫는다.

그러나 구조적 차이라는 것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는 논의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들의 차이가 아니라 논의의 목적과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즉 전체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하에서는 이점을 가능한한 부각시켜 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하여 이글에서는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양자의 구조적 차이를 대비시키고 성경신학적 입장이 얼마나 성경적인가를 정당화하겠다.

 

첫째, 성경 해석의 목적에 관한 차이점이며 이는 신관의 차이로 귀결 된다.

 

구속사적 전통신학에 의하면(이하에서는 전통신학으로 칭함) 성경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의심없는 전제로 받아들인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다.

전통신학은 이런 관점에 의하여 성경을 바라보았으며 그 결과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성경 해석의 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인간 본위적인 접근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접근은 고통과 문제 상황속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해야 구원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이방 종교의 성격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과연 기독교의 성경 진리가 이방 종교의 인간 구원의 논리와 같은 차원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논리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구속사적 해석의 틀에 의하여 성경이 해석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왜냐하면 신학의 체계가 인간의 구원, 즉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철학의 체계와 동일한 차원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지적해 온대로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명제에 의해서 포섭되거나 망라되지 아니하는 훨씬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이하에서는 성경신학으로 칭 함)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의 계시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인간의 구원이란 그 영광의 계시를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인간 구원의 논리적 전제인 인간의 타락까지도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 계시의 방편으로 간주한다.

도무지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타락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을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허용한 케이스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확고한 깊은 뜻 가운데서 타락을 섭리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능력을 드러내기(계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로마서가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에서는 성경 해석의 목적을 전통신학에서처럼 인간 구원의 도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드러 나신 하나님의 영광 계시이며 이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둔다.

이 말은 성경에 인간 구원의 도리가 없다거나 그것이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위한 여러 가지 방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이상에서 언급한 구속사신학의 역사적 기원이 되는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적 사고는 매우 건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의 성경관이나 신학관은 그 당시의 구교의 것과 비교해 본다면 너무도 혁명적이며 성경적 태도를 견지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은 루터의 이신칭의에 집중되는 구속사적 입장을 넘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을 정립해 가려는 태도를 지녔음을 그의 주저 기독교강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건전한 신학적 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신학작업은 사도신경적(사도 신경은 전형적인 구속사 논리를 대변한다. 신앙고백이 구속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리를 좇아가게 되었고 그 후대의 개혁신학자들은 점차 구속사적 논리의 극복을 염원했던 칼빈의 의도는 점차 퇴색되고 오늘날의 구속사적 교의신학으로 고정화되어 갔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전통신학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성경신학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 계시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는 수단-목적이 뒤바뀌어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성경 해석의 틀과 목적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오게 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신관의 차이로 귀결된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인본주의적인 논리와 신관을 갖게 되고, 후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해 존재하는 신본주의적 논리와 신관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계시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보다 더 궁극적 혹은 상위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보다 더 상위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을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인본주의라고 부른다.

 

둘째, 성경의 논리적 틀에 대한 차이점이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성경에 나타난 논리적 틀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틀로 파악된다.

이는 위에서 본대로 성경 해석의 목적을 인간의 구원으로 전제할 때 생겨나는 틀이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셨으나 인간이 잘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고 인간 스스로도 타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시킬 방도로서 그리스도 사건을 예비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 사건은 인간의 구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훼손당한 창조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통적 개혁신학의 움직일 수 없는 교리적 틀로서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전승되어 내려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구속사적 틀 안에서 논의되어 왔던 전통적 언약 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때의 언약 사상은 우리가 이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틀 안에서 논의 되어온 언약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다.

행위언약이라는 것은 선악과 금령으로 대표된다.

이는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복과 저주가 주어지게 된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이 행위언약을 범함으로써 타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은혜로 구원하기 위하여 은혜언약을 체결하게 된다.

전통신학에서는 최초의 구원을 위한 약속 즉 원시복음을 창세기 3:15절에 나타나 있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아브라함 당시의 이삭의 제사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제도로 계승되어 왔다고 본다.

이것이 마침내 그리스도 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구속사적 틀 안에서의 언약사상은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사후 조치'로서의 은혜언약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 섭리 경륜을 주장하는 전통개혁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저질러 놓은 문제를 사후 처리하시는 분으로 밖에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신학의 논리적 문제점을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모를리 없다.

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눈치채고 있었던 신학자는 다름 아닌 바르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간의 타락 사건에 대한 추후적인 하나님의 반응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육신은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한 경륜속에 든 사건인데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실수에 대한 응급조치적인 반작용일 수 있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치명적 약점을 가진 전통적 구속사신학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그 해결을 성경에서 찾지 못하고 헤겔식의 神人合一이라는 그릇된 주장에서 찾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에서의 구속보다 더 큰 것을 목표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세계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육신이 필요하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바르트의 주장의 전제와 배경이 되는 바르트의 언약신학의 골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리 짚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전통신학과 바르트신학에서 언약의 개념이 공히 취급되지만 이글이 주장하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개념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개념은 그것이 위치 하는 맥락, 혹은 구조에 의하여 의미가 부여된다.

언약이라는 용어는 전통신학에서나 바르트에게서 사용되지만 이글의 입장인 성경신학과는 구조가 다르므로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통신학의 논리적 궁색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인간의 타락 이후 응급조치적인 은혜언약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 (은혜)언약을 언급한다

(이점은 바르트가 전통신학 보다도 훨씬 나은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이후의 논리는 완전히 인본주의적으로 치닫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 보다도 언약의 관념에서 신학의 출발점을 찾는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창조를 시작하셨다.

창조는 독립적이며 실재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지 않는다.

창조는 언약의 행위들이 전개되어지는 하나의 무대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라고 했고 '언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전통신학의 구조가 창조-언약-타락으로 부터 언약-창 조-타락으로 바뀌게 되었다.

바르트가 이렇게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셨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구속사적 전통신학보다는 논리적으로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논의의 목적은 우리가 이 글에서 주장한 성경신학과는 정반대의 귀결을 갖는다.

즉 바르트의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통한 신인합일적인 인본주의적 동기가 깔려있으며 또한 그 언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계시의 방편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의 실현을 위한 방편이다.

더욱이 바르트 체계에서는 하나님의 성취의 내용이 없다.

그 자리에 인간의 주체적 결단이 개재된다.

이로부터 바르트 신학은 완전히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식의 인본적 체계로 뒤틀린다.

더구나 바르트의 이런 언약적 선택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유기를 인정치 않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사랑의 개념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이것은 결국 만인구원론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언약신학의 성격때문에 이 논리적 틀 안에서는 죄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지 않으며 단지 죄는 언약 관계때문에 신인연합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우발적 사건일 따름이다.

 

이와는 달리 전통신학에서는 죄는 심각하게 거론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곤혹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처럼 간주한다

(전능자이시며 선하 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죄가 존재하느냐에 대해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이 신을 변호해 준답시고 변신론(辯神論; theodicy)이라는 궁색하고 너절한 주장을 해왔다. 이런 변신론이 전통신학의 논의속에도 들어 있다).

요컨대 전통신학이나 바르트신학에 있어서 죄 문제의 해명은 정당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며 언약은 그것이 타락 이후냐 아니면 타락 이전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하다.

 

그러나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이들과는 다르다.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목적 삼는 것이 아니다.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방편이다.

성경은 언약과 성취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언약사의 논리적 틀은 다음과 같다.

먼저 창세전 영원한 예정이 계시세계에서의 언약의 기초가 된다.

이 예정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근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으며, 이렇게 택하고 버리는 양자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의 계시가 근본 목적이다.

그 과정에서 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 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예정의 목적이 아니라 예정의 한 결과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원한 예정을 기초로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되는데 그것이 창세기 1:28절이다.

그런 다음 그 언약을 그대로 이루어 버리면 인간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의 결과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고 그것을 범하도록 섭리하셨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게 섭리하신 뒤 언약의 자손이신 둘째 아담 예수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게 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의 논리적 골격은 전통신학에서처럼 인간의 타락과 구속이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예정에 기초하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가 기본 골격으로 우뚝선다.

그리고 그 언약과 성취의 골격 안에 인간의 타락이 섭리되고 언약 성취의 결과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창조 역시 언약과 동일 반열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시킬 무대로서 준비된다.

이를 전체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영원한 예정-창조-(은혜)언약(창1:28)-선악과 금령(행위 언약)-타락-성취-구속이다.

 

이 순서에서 언약과 성취가 근본 골격으로서 다른 항목과는 구분되게 중심을 이루며 나머지는 언약 성취사에 있어서 종속되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볼때 성경신학은 인간의 타락과 구속을 논리적 골격으로 이해하고 언약을 구속의 방편으로 이해하는 전통신학과는 완전히 주종이 바뀌어진다.

뿐만 아니라 언약을 창조와 타락 이전으로 보았으나 언약을 역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방편으로 간주하고 성취가 인간의 결단에 달린 것으로 보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논리를 가진 바르트와도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하나님이 성취하심으로 당신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신앙의 발생 근거와 형성 과정의 차이점이다.

 

위에서 대비되는 성경 해석의 목적과 성경의 논리적 틀의 차이는 결국 성도가 갖게 되는 신앙의 성격 차이로 귀결된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구약의 약속대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므로 확고부동하며 성도는 이를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 주장은 개신교에서 너무도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것일 뿐아니라 얼핏보아 성경의 부분적 내용과 합치하기 때문에 그것의 문제점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주장의 내용을 좀더 들여다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해온 대로 그리스도의 오심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목하 취급하려는 신앙의 성격 문제이다.

 

첫째 문제는 위에서 다루어 졌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둘째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성도는 이를 의심치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천년전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오셨음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성도가 믿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믿음에 인간의 의지적 요소가 들어가는 것으로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전적인 선물이라고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전통신학은 무조건 성경에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가르침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묻지 말고 믿어야 된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때의 믿음은 지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 무조건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문제점을 검토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첫째 문제로 거슬러 가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주장의 역사적 족보는 멀리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과 어거스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터툴리안(Tertullian, 160 220)은 "불합리함으로 믿는다" 라고 함으로써 기독교 진리는 논리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어야 함을 강조했고 이 견해가 어거스틴(Augustine, 354 430)에게로 전승된다.

어거스틴 역시 "알기 위하여 믿어라" 라는, 믿음이 인식보다 우선이라는 명제를 말한 이후 이것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아버지 격인 안셈(Anselm, 1033 1109)에게로 계승되고 이것이 중세 신학의 신앙의 성격을 대변하는 맹목적 혹은 암묵적 믿음(implicit faith: 이는 명시적으로 논리적으로 깨닫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의해 주입되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신학은 이를 정당한 기독교 신앙으로 승인하였다)으로 정착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인식의 우선적 권한 혹은 통로가 믿음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믿고 나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아주 그럴듯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기에 철저히 반 성경적인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강조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인해 보면 그것의 오류가 드러난다.

전통신학에서는 믿음을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통로 혹은 도구로 간주하지만 그것의 성경적 지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그 주장이 오류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제시된다.

도대체 성경 계시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그것 이전에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진리의 말씀을 모르고도 믿음이 성립된다는 결과가 된다.

성경은 결코 믿음을 계시를 통한 하나님 지식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믿음을 인식의 선행 조건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의 성격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실제 전통적 교의신학에서 믿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의지적 요소를 강조한다).

 

만약 그때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지식 이전에 주어진 것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내용이 없는 단지 진리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성경은 어디에도 믿음의 내용이 없는 다시 말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성경은 믿음을 진리 인식의 선행 조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인식의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성경적 믿음은 그 믿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도무지 성경은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순수 형식적 믿음을 말하는 곳이 없다.

이런 그릇된 신앙의 성격은 16세기 개혁신학자에 있어서도 엄격하고 근원적으로 비판 검토되지 아니한 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역시 칼빈은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기는 했었다.

즉 칼빈은 중세의 맹목적 신앙의 문제점을 의식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성경적 신앙의 성격을 언약과 성취라는 구조적 논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실제 칼빈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좇아 그 암흑기에 카톨릭과 대비해서 대단한 진리를 캐낸 것으로 평가해야 할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기독교적 믿음이란 인식에 근거한 것이지 맹목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그 신앙이 성령의 인침으로 된 것이라고 정확히 말했다.

단지 성령의 인침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앞의 주장 바로 다음에 우리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굳게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개념에 인간의 의지적 요소를 다소 인정했다.

따라서 이러한 칼빈의 신앙의 개념은 카톨릭의 그릇된 신앙의 성격보다는 훨씬 진일보된 설명이지만 온전한 설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믿음 안에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선물로서의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신앙 혹은 믿음에 대한 전통적 설명 방식은 결국 신앙과 이성은 상호 모순되고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낳았고 결국 후대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 두고 두고 기독교의 맹목성과 유아성에 대한 비판의 빌미를 제공했다.

즉 기독교란 진리의 일관된 객관적인 체계에 기초를 두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을 희생시키며 (the sacrifice of intellect) 단지 이 세상에서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믿음에 기초를 두는 저급한 종교로 인식되고 비판되어 왔다.

특히 자유주의신학의 태동은 전통신학의 맹목적 믿음을 비판하면서 체계를 중시하는 이성을 인식의 원리로 삼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 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신학은 전통신학의 모순과 문제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실존 신학인 20세기 불트만 신학의 뿌리는 근원적으로는 하이데거라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에 있지만 지엽적으로는 위에서 논의한 종교개혁 전통의 그릇된 믿음의 이해에 근거한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한 끝에 역사성은 확증될 수 없으며 그것을 당대의 신화적 사유의 반영으로 간주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은 신화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신앙적 의미는 확보할 수 있다는 실존철학적 논리를 전개했다.

이때의 신앙이란 역사적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절벽속을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결단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는 바르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런 의미의 신앙의 개념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계승되고 있다고 불트만은 간주하는 것이다.

즉 불트만은 자기 주장의 정당성이 종교개혁의 전통속에 있다고 하는 묘한 논리를 개진한 것이다.

전통신학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불트만은 전통신학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확증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고 몰아 부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신학이 갖고 있는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을 확대 수용하면서 자기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신출귀몰한 불트만의 논리 앞에 전통신학은 지금까지 성경적 논리에 의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즉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뚜렷한 성경적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반복하기만 했으며 불트만의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박의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암묵적으로 긍정적 지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의해 구라파와 미국의 신학계에서는 전통신학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오히려 철학에 기초하는 현대신학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격은 어떠한가?

신앙의 발생 근거와 형성 과정은 어떠한가?

성경신학에 의하면 신앙이란 하나님을 인식하는 선행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진리 인식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러면 진리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경신학에 의하면 진리 인식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전통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성을 중생시킴으로 성령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성경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참된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진리를 들음(깨달음)에서 생겨나는 선물이지(롬 10:17) 그것은 결코 진리를 듣기 이전에 인간에게 장치되어 있는 인식의 틀이거나 혹은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의 형식이 아니다.

 

이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여기서 성령께서 성경의 어떤 논리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확인 작업이 없이는 우리의 주장, 즉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 신비주의적인 주장으로 오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 과거 교회사에서나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예는 얼마든지 확인된다.

즉 객관적인 성경의 논리가 아닌 인간의 주관적 신념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성령께서 주신 신앙이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성령을 빙자하여 인간의 주관적 신념을 강화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는 누가 성령을 받았는지 외관상으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외관상으로 판단하고자 할 때는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기 때문에(고후 11:14) 오히려 더욱 기만당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누구의 주장이라도 그것이 성경의 내용과 합치하는 지를 검증해 보아야 한다.

 

성경신학이 말하는 믿음이 발생하는 성경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성경은 언약과 성취의 논리이다.

여기서 언약과 성취의 논리가 지니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통신학에서도 성경은 언약의 말씀임을 언급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의 성취를 언급하기도 한다.

심지어 언약과 성취는 자유주의신학자의 주장속에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필자가 볼때 그 말을 사용하는 의미와 의도는 모두 다르다.

성경신학에서는 전통신학에서처럼 언약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인간의 구속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즉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를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언약한 것을 그리스도 사건의 그림자적 예표인 다윗을 왕으로 하는 유다 나라를 통해 이루셨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아담과 맺은 언약을 실체적으로 이루심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증했다.

 

이처럼 성경은 언약의 성취 사건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내용과 성도가 가지는 신앙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신학도 인간의 구속을 말하기는 하지만 언약과 그것의 성취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고 의도하는 목적은 전혀 다르다.

 

전통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구약에서 약속하신대로 예수를 보내주었으므로 그것을 성도가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낼 것을 약속하시고 신실되게 이루심은 하나님의 하실 일이지만 그것을 믿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구속사적 논리를 따르는 전통 교회의 설교의 대종을 이루는 것이 예수를 믿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도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하는 협박조의 내용도 섞어가면서 이루어진다.

(사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때의 믿음이라는 것은 진리의 확인에서 오는 참된 믿음이라기 보다는 협박에 강요된 억지 신념에 가깝다. 이런 공갈식의 설교도 의식수준이 높아진 현대인에게는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식상해하고 진저리를 내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논리는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전통신학과는 언약과 성취의 목적이 다르다.

그것은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온 대로 인간의 구속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에 따른 결과로 이루어진다.

둘째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증명했고 이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성취한 다음 그것을 성도 자신의 의지적 결단을 통해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는 다시 승천 직전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언약하신다(행1장).

그때의 성령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대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요16:13)이셔서 그가 하시는 일은 다름아닌 당신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듣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약속대로 역사상 그리스도가 오셨고 또한 예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셔서 지금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고 믿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의 결과이며 진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신지식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된 선물이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결단의 산물이 아니다.

남편의 신실한 행동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믿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성취가 성도로 하여금 믿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성경신학의 논리를 따르면 설교가 전통신학에서 처럼 믿으라고 촉구하고 강요하는 성격을 띠지 않는다.

오히려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신실되게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신ㆍ구약 성경을 통해 구조적으로 확증해 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설교가 그러하다.

언약대로 신실되게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확인이 되면 믿음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설교의 본령인 것이다.

"믿어 주세요"라고 노태우씨가 강조했지만 약속을 파기한 그의 신실되지 않은 행동은 우리에게 결코 믿음을 줄 수 없다.

믿으라고 백 번 강조하는 것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성경을 통해 한번 증거하는 것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한다.

도무지 성경이 말하는 선물로서의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으로 부터 오는 것이지 믿는 자 편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선물이 받는 자 쪽에서 생겨 날 수가 있겠는가?

선물이란 주는 편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까지 밝혀온 것은 알고 보면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인간 편에서의 주체적 결단으로 이해하는 모든 신학의 가르침(여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통신학, 바르트, 불트만이 모두 포함된다)은 잘못된 반성경적 가르침이다.

 

넷째, 세계관의 차이이다.

 

이는 지금까지 밝혀온 양자의 차이점에 대한 논의의 귀결로써 생겨난다.

모든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신관에 의해 형성되며 그것의 논의 방식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총체로서의 세계에는 사단의 존재가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철학적 세계관의 논의에서는 영적 존재로서의 사단의 존재는 거론되지 않는다.

이런 총체적 의미를 가진 세계관 논의는 결국 세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냐라는 논의로 귀결된다.

이렇게 볼때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의 차이는 세계관 논의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전통신학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이원론적 세계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때의 이원론이란 하나님과 사단이 이원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양상을 의미한다.

이런 규정에 대해서 실제 어떤 전통신학자들도 표면적으로는 극구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이글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표면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전통신학의 실제적 논의 내용이 그러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전통신학자가 자신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세계 그리고 사단까지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일원론적 사고를 갖고 있다면, 이 글이 앞으로 지적하는 전통신학의 이원론적 특징에 대해 진지하게 해명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은 명분상 일원론을 내세울 뿐 실상은 이원론자임을 자인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전통신학자들의 신학하는 태도의 문제점은 교리주의(dogmatism)에 의한 사고의 폐쇄성이다.

교리란 당대의 이단의 도전으로 부터의 방파제였지만 그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깊이있는 성경의 해석이 이루어짐으로 발전적 변모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리에 의해 해답되기 어려운 질문이 생겨날 때 그 질문은 기존 교리의 헛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 계기는 교리를 더욱 발전시킬 절호의 찬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전통신학자들은 오히려 질문자를 위험시하고 억압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교육적 계기를 활용하지 못한채 기존의 교리 안에 안주하고 말았다.

최고 최상의 권위있는 교리란 성경자체의 논리와 증거를 통한 진리 체계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리는 성경 자체의 논리에 의하여 부단히 검증 받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때 목하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이원론의 문제는 아마도 전통신학에서 새롭게 검증받아야 하는 최대의 문제 거리가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신학자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에 의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표방한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통신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인간의 타락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타락한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 구속사적 주장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해 보면 전통신학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원론적 경향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선한 창조를 해놓으셨는데 사단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타락이 죄를 세상에 도입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신학자들의 글을 보면 사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이 낭패케 되었다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한다.

이는 다름아닌 이원론적 사고의 뚜렷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사단에 의해 자신의 의도가 좌절되고 그래서 그 극복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로 파괴된 세상을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께 골치거리인 존재로 부각된다.

이것이 전통적 구속사(회복)신학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고 그 활동을 하나님이 막지 못 하시느냐는 질문은 자연히 생겨난다.

지금까지 전통신학은 사단이 천사가 타락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며(예외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는 사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 사단의 활동은 하나님의 허용이라고 한다.

도망칠 구멍을 만드는 기회주의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천사가 타락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사단을 제거시킬 수 없어서 허용하시느냐 아니면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느냐는 질문이 생겨난다.

질문이 이쯤 이르면 전통신학자들은 꼬리를 슬슬 감추기 시작하며 언제나 그러하듯이 해답이 궁할때 애용하는 신비라는 보호막을 친다

(어떤 신학자는 아예 신명기 성경구절: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인용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한다).

 

신비!

그것이 전통신학자들의 마지막 하는 말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려는 모호한 말뒤에는 교권적 칼을 숨기고 있다.

즉 기존 교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에게 내려칠 이단 정죄의 단두대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를 변호하고 감추려는 신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 모르겠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용기있게 말하는 것이 진리 탐구의 제일 조건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질문하는 사람을 위험시하는 옹졸함을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권장해 주며 함께 탐구하는 것이 진리를 탐구하는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건대 모든 질문에 대한 궁극적 해답의 체계가 아닌가?

특히 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설명이 없이 어떻게 죄에서의 구속이라는 명제가 확실해 지겠는가?

전통신학은 죄의 근본 기원문제에 대해서는 신비로 치부하고 현상적 설명으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사단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에 의한 타락으로 돌림으로써 사실상 이원론을 자인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죄 문제 만큼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원론적 구속사신학에 의한 세계관은 자연히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교회라는 기관으로 한정시킬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사단의 권세아래 놓여진 타락된 장소며 교회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기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적 기초로 전개되는 설교와 교육을 받는 성도는 언제나 교회와 세상이 이원적으로 대립 분열되어 있어서 양자 어디에 있든지 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교회 생활에 열심내면 세상을 등져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자면 교회 혹은 신앙 생활을 소홀히하게 되는 죄의식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갈등의 해소 방법은 두가지 부류로 나타난다.

 

첫째는 타락한 세상을 멀리하면서 교회로 도피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세상 직업이나 일들을 죄악시하고 교회의 일만이 하나님의 일로 동일시하며 세상에서 기독교인들만의 공동체를 꿈꾸며 그 안으로 도피코자 하는 심리를 갖는다.

 

둘째는 명목상의 크리스찬이다.

교회 일에 깊이 개입될수록 세상으로부터 소외될 위험을 느끼고 교회 생활은 형식적으로 영위하며 세상에서 비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타협하며 살아간다.

최근에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의 문제점을 의식하고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유행처럼 일고 있다.

이들은 소위 기독교 세계관의 일원론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를 들여다 보면 그들이 말하는 일원론이란 세상에서의 문화적 차원의 모든 영역이 기독교적으로 영위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논의일 뿐 신학적으로는 여전히 이원론적 구속사적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즉 그들의 신학적 전제는 여전히 앞에서 언급한대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창세기 1:28을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간주하고 그 명령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 가야된다고 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 해석의 오류를 밝혔다).

 

이 논의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건전성 즉 이원론적 신앙생활을 극복하자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극복의 신학적 전제를 여전히 구속사적 틀 안에서 찾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인본주의적 귀결에 이르고 만다.

즉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선한 세상은 사단에 의해 훼손되고 그 지배권 안에 들어갔으므로 구속받은 성도는 자기영역에서 기독교적 문화건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탈환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결국 사단에 의해 점령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인간의 문화적 노력에 의해 회복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을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문화적 노력에 의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신학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자유주의신학의 理想과 만나게 되는 엄청난 오류에 직면한다.

 

성경신학은 전통신학과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아래 사단이 놓여져 있으며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단은 전능자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부리시는 도구일 뿐이다

(욥기 1장, 출애굽기 등등).

 

인간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지 하나님이 예측하지 못했거나 막을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 사건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주권자가 되실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질문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로마서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긍휼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을 죄악 가운데 가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택한 백성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푸셨다.

그 은혜의 영광을 계시 세계에서 깨달아 찬미하게 하려고 인간을 죄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해 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는 인간의 구속 자체가 아니라 타락과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 (여호와)을 위하여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게도 하시고 또한 의의 길로도 인도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전통신학과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신학에서는 '사단의 장난에 의해 인간이 타락하므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구원을 시킨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인 반면 성경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단을 사용하여 인간을 죄악 가운데 가두셨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바로를 강퍅하게 하셨다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한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 하게도 하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기도 하시는 것이다(롬 9장).

누가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를 막을 자가 있는가?

이것이 성경신학이 주장하는 일원론적 하나님의 섭리이다.

 

흑암과 빛이 하나님께는 일반이며(시139:12) 천사와 사단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계시하기 위해 부리시는 도구인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다.

이런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질 때 성도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아가지 아니한다.

양자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위한 도구이다.

교회가 특별은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세상과 구분되지만 세상의 어느 영역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는 성도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교회로 도피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영합하여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가치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런 성경신학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이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이며 예배의 공간인 셈이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에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체계적으로 배우며 죄된 세상에서는 실제적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몸으로 확증해간다.

그래서 거룩과 속됨이 외형적 공간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내면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산에서도 말며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참으로 신령과 진정(진리)이 있는 곳이 참된 예배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도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을 배우며 경외하는 예배인 것이다.

이런 세계관의 정립에서라야 성도는 이 죄악 세상에서 죄악을 통해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배우는 절묘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 대적들을 포진시켜 놓으시고 하나님만을 의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문화적 차원에서의 일원론적 세계관를 주장하는 자들이 표방하는 기독교적 학문 공동체의 형성을 통한 기독교 문화 창달이라는 것은 이념상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도피적 행태일 뿐이다.

 

성경신학은 기독교적 문화의 성경적 기초와 개념을 그들과는 달리 설정한다.

창세기 1:28절을 문화명령으로 보는 것은 결정적인 해석의 오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여호와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인간이 이룰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루실 내용이다.

기독교 문화의 개념은 성경의 몇 구절에서 임의적으로 그리고 탈맥락적으로 인출될 성격이 아니다.

성경 전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하나의 명제로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라는 개념은 성경의 원리에서 연역적으로 그리고 그 의미상 종속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기독교 문화의 목적이 성경의 목적과 독립적으로 설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성경신학적 기독교 문화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인간의 능력의 계발을 목적삼는 철학적 문화의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기독교 문화는 성경의 계시진리를 깨달은 농도만큼 처해진 영역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때 기독교 문화의 목적도 문화창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영광을 실증적으로 깨달아 가는 것을 목적 삼는다.

 

다섯째 기독교 윤리관의 차이점이다.

 

전통신학의 인본주의적 특징은 윤리관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은 구속받은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간주한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불철저하고 그릇된 율법관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다음에는 거룩한 생활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의심되지 아니한 채 강요되어 왔다.

여기에는 성경 전체의 복음에 대한 미숙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론과 인간관 등의 오해가 복합적으로 게재되어 있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은 도무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적 규범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으로 대변되는 시내산 언약은 그것 자체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그것은 시내산 언약 이전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삼대 언약의 전개 과정속에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그림자적 언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흐름속에서 시내산 율법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도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부각된다.

이런 파편적 성경 이해는 온갖 모순된 성경 해석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관점은 성경은 66권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과 성취를 통한 하나님 계시라는 일관된 내용으로 이루어 진 한권의 책으로 간주한다.

시내산 율법도 그러한 흐름안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 즉 율법은 얼핏 보아 구약 전체에서 지켜야 될 규범으로 틀림없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전통신학에서는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국가법으로 구분하고 의식법과 국가법은 그리스도가 지킴으로 성취했지만, 도덕법 즉 십계명은 항구적으로 성도가 지켜야 될 규범으로 지금도 유효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율법의 복음적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오류인 것이다.

이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가 인간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부족하며 인간의 도덕적 공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도덕주의적인 여지를 남겨 놓으려는 그릇된 견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설정한 자의적인 구분법인 것이다.

어디 성경에 율법을 그렇게 구분해 놓은 데가 있는가?

그리고 도무지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하는 명칭이 합당한가?

굳이 명명 한다면 십계명은 도덕법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종교법이며 이는 나중 그리스도가 지키실 언약적 성격을 지닌다.

 

이런 율법의 구분에서 카톨릭의 도덕주의적 반성경적 실체를 확인할 수가 있다.

도무지 카톨릭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지 않으며 십자가의 충족한 구원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율법을 지켜 그 공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반복음적인 가르침을 시행한다.

이런 그릇된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 율법의 구분을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이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수용하게 된 것이다(기독교강요 2 권).

 

칼빈은 카톨릭의 그릇된 인간관과 구원관은 비판했으나 십계명이 도덕법이라는 아퀴나스의 주장은 그대로 수용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만다.

이로부터 개신교는 카톨릭과 구원관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가지지만 윤리관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한 율법주의적 도덕주의적 색깔을 지니게 되었다.

이 율법주의적 질곡때문에 개신교는 초기 개혁때 가졌던 복음적 구원론의 생기찬 추진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고 지금까지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러면 성경은 율법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성경은 율법을 계명, 율례, 규례로 구분한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방편으로 기능한다.

계명은 근본 모법이며 율례는 배상법적 성격을 띠고 규례는 제사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명을 어길 경우(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킬 수 없었다) 규례 즉 제사를 행함으로 살 길을 얻게 된다.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언약하신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는 장차 율법을 못 지키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해 살게 될 것을 약속하는 언약적 복음적 성격을 띤다.

배상법인 율례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배상해 주실 것에 대한 언약이다.

계명 역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되는 것으로 이는 죄인인 인간이 수행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성취하실 언약이다.

이를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도무지 죄인인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수단이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이방 종교와 근원적으로 대비된다.

모든 이방 종교는 인간이 계율(율법)을 지킬 가능성이 있고 지켜서 의롭게 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율법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렇게 볼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도덕적 차원이 결코 아니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종교적 방편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적 복음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율법은 히브리서가 증거하는대로 오실 그리스도 복음의 그림자이다(히10:1).

지금까지 율법 해석은 역사적 해석에만 머무르고 그것을 그리스도로 연결하지 못하고 바로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직접 적용시키는 율법주의적 해석을 한 것이다.

이는 바로 구약은 전체로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라는 성경 해석의 신학적 대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신학의 입장이 위에서 논의한 성경신학의 복음적 주장을 받아 들이더라도 역시 남게 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즉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여기에는 그래도 생활의 규범으로써 율법이 필요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칼빈 역시 이 생각 때문에 율법이 오실 그리스도를 가르친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아퀴나스식의 도덕법으로 이해하는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미숙한 인간론과 성령론이 개재되어 있다.

 

전통신학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주체로 설정하고서 그 주체자인 인간이 객관적 규범을 지켜 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성령은 이런 인간의 노력을 보조적으로 도우는 지원자 쯤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는 이제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육신적으로야 우리 각자가 자기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신령한 교회의 지체인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 한분을 머리로 모시게 된 것이다.

따라서 나란 주체는 실제적으로 껍데기일 뿐이고 본질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내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이미 자신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자신(과거 죄의 종노릇하던 육신적 자아)은 죽고 우리 안에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살아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제 우리 자신이란 하나님 앞에서 개체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윤리적 성숙은 성도 자신이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주권에 달려있다.

위에 서 언급한 대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성도가 주체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 말 자체가 성립하질 않는다.

말이 안되는 말을 우리가 그동안 사용하며 그것 때문에 고통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성숙하게 살게 하시려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랑의 복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그 사랑의 힘이 지체인 성도로 하여금 가능하게 하신다.

 

성숙한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령이 성도의 윤리적 삶의 주관자이며 구체적인 실행의 원동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고 성도는 쓰임을 받는 도구이다.

바울은 이를 깨닫고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으나 그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고전15:10).

또한 바울은 자신의 미친듯이 이루어진 치열한 복음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힘이라고 말한다 (고후 5:14).

이런 원리를 깨닫게 될 때 성도는 아름다운 삶을 살면 살수록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 하게 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원리이자 목적이다.

이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전제하고 그것이 이루어졌을때 인간의 의를 자랑하는 철학적 윤리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전통신학이 참된 신학임을 표방하려면 인간의 의와 능력을 전제하는 종래의 율법관과 윤리관을 전폭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다섯 가지의 항목으로 살펴본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의 구조적 차이점을 확인했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양자의 차이는 부분적인 차이가 아니라 구조적인 차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글은 양자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성경신학적 논리와 주장의 성경적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Ⅵ. 결론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편의 논문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큰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 따르는 자세한 세부적 항목들은 점차 더욱 세밀하게 논의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주제에 대한 큰 윤곽을 드러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먼저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구속사적 전통신학의 역사적 태동과 그것이 역사적 전승 가운데 어떤 굴절과 그릇된 고정화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를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신학적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대안으로서의 성경신학의 발생 과정에서의 신학적 사유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이런 논의를 토대로 성경신학이 지닌 성경적 논리와 특성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양자가 지닌 구조적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검토했다.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그러나 결정적으로, 양자는 뚜렷한 차이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글의 논의에 따르면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성경의 전포괄적인 해석의 틀에서 구성된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서 성경의 부분적 내용을 근거로 정립된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당시 즉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혁신적인 진리 주장이었으며 중세의 암울했 던 상황속에서 많은 영혼들은 그 구속의 진리만으로도 영적 기갈을 해소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는 조그만 촛불 하나도 대단히 밝게 느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자들의 신학적 원칙들은 오늘날의 시대에도 너무도 건전한 면모를 띠는 것이 많다.

하나님 주권사상, 성경의 절대 권위, 예정론과 이신칭의 등은 우리에게 남겨진 주옥같은 진리들이다.

그러나 후대의 개혁신학은 개혁자들의 건전한 신학적 원칙에 토대를 두고 더욱 성경의 진리를 확인하고 더 깊이 발견해가는 신학적 진전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오히려 개혁자들이 남겨놓은 건전한 면모는 퇴색해가고 오히려 문제점은 강화되는 신학적 퇴보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뚜렷한 증거가 구속사적 교리로 성경을 축소시켜 버린 예이다.

 

칼빈의 주저 기독교강요를 보면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의 논리를 구성해 보려는 노력은 엿보인다.

그러나 후대의 신학자들은 점차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목적 삼아, 인간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는 분으로 교리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전통적 교의신학의 구속사적 골격이다.

구속사적 전통신학은 이미 구라파에서 18 19세기를 거치면서 발흥한 자유주의신학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질문과 도전 앞에 방어할 말을 잊어 버린 채 신학계에서 뒤안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통신학자들의 유일한 변명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적들의 도전은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지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를 통해 입증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이백여년 동안 전통 신학자들이 성경 자체의 전체적 논리를 확인하는 신학적 작업보다는 전승된 교리를 맹목적으로 수호하고 거기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역사적 문서임을 증명 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신학자들보다는 훨씬 더 방대한 성경의 연구자료가 확보되고 그들의 잘못된 전제를 입증하려는 현란한 논리들을 개발해 왔다.

그 여세가 20세기 오늘에까지 이르러 구미의 신학계 더 나아가 세계 신학계에는 전통신학자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운 처량한 실정이 되어 버렸다.

 

이제 신ㆍ구약을 연구하는 주경신학이나 성경신학에서는 성경이 역사적 문서라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 되고 말았다.

구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폰라드식의 전승사 비평(구약이 역사적 전승의 모음집이라는 문서설적 입장)은 기본 가정이며 신약의 연구에서는 불트만의 양식사 비평은 극단적인 예로서 비판하지만 편집사 가설(각 성경은 기록자의 신학의 반영이라는 주장, 우리는 이를 절대적으로 배격한다)은 이미 전통신학적 입장에 있는 신약 신학자에게도 일반화되었다.

특히 성경의 영감은 신학적 논의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독단적 가설 정도로 치부되는 실정이다.

몇몇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신학자에게서 아직도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이 주장되지만 그것을 증명할 성경적 논리가 없다.

유일한 논리가 구속사적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론에서 확인한대로 만약 성경의 골격을 구속사로 보게 되면 그것은 성경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논리적으로 너무도 많은 의문의 여지를 갖고 있다.

조금만 신앙적으로 근본을 추구하는 사람과 만나면 해답을 할 수 없는 허술하고 부분적 논리인 것이다.

전통신학은 이처럼 성경적 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해답되지 아니하는 취약점을 노출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는 구속사라는 것이 빌미가 되어 그들의 온갖 그릇된 주장을 확대시켜 나가는 예상치 못한 원인 제공을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그렇게 애타게 여기고 그것이 당신의 사역의 근본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멸망자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인본주의적 논리를 전개해 간다.

 

그 귀결이 바르트의 화해와 사랑의 하나님이며 만인구원론이다.

이때의 사랑의 개념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도덕적 관념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철저히 인본적신학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혼의 구원만을 의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원까지 염두에 두시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의 탄생을 가져 왔다.

이것은 최근 더욱 발전하여 모든 종교도 구원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근거를 전통신학은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이게 되면 전통신학은 구원의 하나님을 너무 축소시키고 있는 편협성과 집단 이기주의를 드 러내는 형국이 되고 만다.

말하자면 구속사라는 전제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약점이 잡힌채 끌려 다니는 꼴이 된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구속사적 논리와 편협된 세계관을 가지고는 자유주의신학의 도전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 사상의 물밀듯한 거센 신학적 도전에 대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이 글이 밝히고자 한 성경신학은 이런 전통신학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의 자체 논리와 증거를 통해서만 신학을 구성했다.

성경신학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구속사의 전제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계시라는 점에 착안했고 성경에는 언약과 성취의 논리가 수미일관하게 붙박혀 있음을 확인했다.

언약과 성취를 통해 성경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명하는데 그 목적을 두는 것이다.

그 내용상의 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구속은 성경의 근본 주제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신실하게 성취하는 과정에 이루어지는 지엽적 주제이다.

전통신학은 가구 안에 집을 넣으려는 본말 전도의 논리를 전개한 격이다.

가구는 집안에 들어갈 한 요소에 불과하듯이 인간의 구속은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여러 방편 중에 하나에 해당한다.

이렇게 정립할 때에라야 우리의 믿음이 인간 안에서 생겨나는 결단이 아니라 신실하게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증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성경신학의 논리적 체계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기독교적 세계관의 포괄성과 근원성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의 만사 만물의 운행은 동양의 자연철학자(기철학)들의 말대로 자연 스스로의 생성적 힘의 발현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이 모든 인본주의 역사가들이 이해 하는대로 인간의 주체적 결단에 달린 것도 아니다.

이런 견해들은 세계를 피상적으로 관찰한 결과일 뿐이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만물은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6).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무궁한 하나님의 영광 선포 그 자체에 있다.

종교 개혁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있을 뿐이다.

이를 깨닫고 전무후무한 인간의 부귀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하나님을 모르는 해아래 삶의 헛됨을 지적하고 그의 영광을 보고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고백했다.(전12:13)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 다. (시19:1)"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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