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케케묵은 신념인 펠라기우스주의로 종결되고 만다.
19세기의 부흥사들은 보스턴에 아성을 두고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을 맹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부흥사들도 인간의 본성과 권위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찰스 피니는 인간이 원죄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믿었으며,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전도자와 회심하는 자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제목의 설교가 그의 인기 있는 설교 제목
가운데 하나였다.
이 설교는 1700년대 중반에 있었던 대각성 운동의 설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설교였다.
그 후에 부흥사였던 샘 존스는 "여러분의 자신의 마음을 바꾸라.
여러분이 자신을 회심시킬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중생케 하신다."라고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신념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결단을 내리면, 나는 중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은혜와 협력해서 일하는 자유의지가 바로 신생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극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다.
이런 종류의 펠라기우스 주의는 4세기에 주장된 이래로 전체 서구 교회에서 정죄받았던 주장이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종교개혁의 주장을 뒤집어 엎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주의자들도 보수주의자들도 그 주장을 회복하지 않았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부흥과개혁사, p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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