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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16 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다

by 【고동엽】 2021. 10. 2.
16 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다
믿음 장에서 우리 목표는,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작동하지 않게 된 원인과 과정을 찾아 가는데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목표에 맞추어 과정을 다시 조망하고 종교개혁 신학 문제를 설명합니다.
1. 1 세기 신약 성서시대를 마감하고 2 - 3 세기부터 신학화 작업이 시작됩니다. 신학이란 자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신앙을 학문화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4 세기까지는 성서 정경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는 여러 단편 글들이 예배시 읽혔습니다. 이때 신학은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아니라, 기독교를 세계에 전도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임을 밝히는데 주력했습니다.
2. 4 세기에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성서 정경화가 이루어지집니다. 복음서 4 편과 하나님 의가 강조된 바울 서신들이 성서가 되고, 디다케, 바나바서 등 선과 도덕, 교훈 즉 인간 의가 강조된 주옥같은 글들은 외경이 됩니다.
5 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이 정립됩니다. 이 신학이 현재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에 정립했다고 합니다. 이때도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사역과 가르침 중심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이 종교화한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 주춧돌이 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 본성 회복이 구원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가 아니라, 신플라톤주의를 따라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을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인간 본성이란, 불교는 참나 혹은 불성이고 힌두교는 아트만 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신성화 입니다. 이에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 신 모방(imago dei) 산학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예수교)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약하고 볼품없고 실패한 듯하여 예수 닮는 건 모양빠지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레서 신학은 멋지고 강한 신플라톤주의 신을 닮습니다. 이 신이 유대교 신과도 비슷해서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스 신인, 신플라톤주의 신은 지배하고 통치하며 순종을 요구하는 강력한 신 입니다. 기독교 신앙인 폭력성이 예수를 닮지 않고 신플라톤주의 신 혹은 유대교 신을 닮는데서 나왔습니다.
신플라톤주의 신이 최고 선善이므로 기독교가 성화(정화) 길을 택합니다.
성서는 예수를 모범으로 따르려는 모범 기독론이 다수 입니다.
성서를 따르지 않고 플라톤을 따른 결과 입니다.
또 하나는 선善과 관계해서 인간 타락을 강조하기 위해 죄가 기독교 신학 중심이 됩니다.
죄도 성서에는, 십자가에 대한 해석으로 극히 일부 진술(마가10:45 마태26:28)이 있을뿐이고 거의 전부는 예수께서 제시한 계시를 따르는 삶으로 구원받는 이야기 입니다.(죄 이야기는 별도로 자세히 논구합니다)
세계 모든 종교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어떻게 살아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얻느가에 대한 증언 입니다.
성서는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은 없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은 자기가 선함을 찾기 때문에 반드시 선하지 않은 사람이 지목되어 차별과 배제가 발생합니다.
예수사랑은 나쁜 사람, 부정한 사람, 죄인을 용납함으로써 화해와 평화를 이룹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면서,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삶 변화를 이루는 신학을 하지 않고 신플라톤주의 사상인 인간 본성 회복을 위한 신학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초기나 현재를 불문하고 이점을 주목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 입니다.
3. 13 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현존하는 가톨릭 신학이 정립됩니다.
토마스는 이성과 믿음을 종합했습니다. 신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 입니다. 그는 이성과 믿음, 자연과 초자연, 신학과 철학 두 길을 확연히 구별했습니다. 토마스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국 이성이 믿음과 분리되어 믿음과는 별도 무신앙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교회 가르침을 수용하는 의지 문제가 되었고, 토마스 자신은 이성으로 믿음을 이해하려고 구분했지만 후대에 와서 오히려 믿음이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1)
이때도 신학이 성서신학이 아니라 철학이었기 때문에 예수사역과 가르침은 대두되지 못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땅으로 오셔서 무엇을 했는가에 주목하지 않고 신이 누구인가, 우리가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주목했습니다.
당연히 토마스 신학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습니다.
4. 14 세기 윌리엄 오캄에 의해 보편은 이름으로만 존재한다는 유명론이 일어납니다.
유명론은 보편이 아니라 개체를 존중하면서 신도 별개 개체가 됩니다. 그래서 이성과 계시가 날카롭게 구분됩니다. 토마스는 이성과 계시를 종합하려다가 오히려 이성과 믿음을 구분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오캄은 노골적으로 이성과 믿음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순전히 권위에 순종하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2)
유명론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에게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이성과 믿음의 날카로운 구분은 루터에게 영향을 주어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개신교 중심 신학이 태동합니다.
특히 유명론 개체 존중이 하나님 존중과 연결되어서, 칼뱅의 하나님 주권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명론 이후, 이성 존중 시대가 열립니다. 데카르트가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 이후로 더욱 이성과 지성 존중 시대로 향하게 되어, 18 세기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거쳐 과학과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신앙 대상이 되는 무신론 시대가 열립니다.
비신앙인들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번영과 재물을 통해,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공정과 평등 사회를 통해 불안과 외로움을 해결하려 합니다.
5. 16 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를 구호로 삼았습니다.
루터의 믿음 구원은 은혜와 결부하여 완전구원으로 오해되었습니다. 성직자들에 의해 교회에 참여하고만 있으면 구원받는 거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성서는 성서 문자주의를 낳았습니다.
현대인은 과학 문명에 의해 사실인가 거짓인가를 구분하는 실증 사고에 익숙합니다. 고대 언어인 성서 언어는 사실 표현으로 기록되었지만, 모두가 상징과 은유(metaphor) 입니다. 고대인들은 사실 여부에 상관 없이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게 주요 목표 입니다. 그러므로 신약학자 불트만이, 성서에서 신화를 벗겨내고 실존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비신화화) 고대인 사유를 무시하는 행위 입니다.
상징은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폴 리꾀르)
성서 문자를 그대로 믿는다는 자세는 더 우스운 현상을 초래합니다. 성서 문자대로 믿는다는 사람 중에, 죄를 짓거든 한 눈을 빼거나 한 손을 자르라는 예수 말씀을 따랐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마태5:29 - 30)
자기들이 따를 수 있는 말씀만 골라서 따르면서 문자대로 믿는다고 우깁니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그 주장이 사실이 아니므로 거부하는 무신론자를 만듭니다.
유명론 영향받은, 칼뱅 주권신학은 하나님 권능, 지배, 통치를 강조하고 그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므로, 여기에 성서와 예수는 없습니다. 칼뱅이 삼위일체 신론을 싫어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신학을 살펴보기 전에 종교개혁 실상을 먼저 봅니다.
1.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토마스 뮌쩌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하여 '그들을 찔러 죽이고 태워 죽여라'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농민군 10 만 여명이 학살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년의 루터가 격렬한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것은, 그에게 인도주의자란 명예를 줄 수는 없어 보입니다.
2. 칼뱅은 제네바를 4 년 여간 강력한 교리와 도덕률로 신정정치를 행했습니다. 예배 불참자를 거리에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1553 년에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 그리스도인 7 천 여명을 학살했습니다.
한 때 칼뱅의 친구였던 카스텔리오가 가장 맹렬한 비판을 가했는데, 그는 이 잔악한 행위를 보고 '의심, 믿음, 무지, 지식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칼뱅의 광신을 논박했습니다.(3)
폴 틸리히는 칼뱅을 광신자라고 합니다.
30 년 간 종교개혁 전쟁으로 유럽인구 35 %가 죽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기 보다는 교황청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영주들의 정치혁명이었습니다.(김균진, 루터의 종교개혁)
우리는 누구를 영웅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뛰어난 지도자가 우리를 행복과 평화로 인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열렬히 선출하고 말년에 죽어라고 욕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믿음만은 누구에게도, 어떤 신학에도 의지말고 성서로 가서 그리스도예수 만나기를 권고합니다. 물론 좋은 성서신학자 글과 함께여야 합니다. 성서는 분명히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이지만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다음회에 종교개혁 신학 설명합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길희성 영적 휴머니즘 아카넷 2021, 227p
2. 같은 책, 229p
3. 피터 버거외, 의심에 대한 옹호 함규진 산책자 2010, 153,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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