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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형성과 방법론-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 중심 2/배경식

by 【고동엽】 2021. 10. 31.

신학의 형성과 방법론-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 중심 2


바르트의 신학은 그의 신학 연구와 저술들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인다. 이것들을 전 후로하여 네가지의 신학적인 발전을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로마서 강해 저술 이전의 자유주의 신학 연구와 인간 중심적 신학, 로마서 강해 저술시기인 신 중심적 신학, 교회 교의학에서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그리고 그 이후의 성령론적 신학이다.

그의 신학을 순종의 신학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익한 종이기에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을 올바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성령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신학의 주제로 가져온 바르트의 신학작업은 구미신학계에 100 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도록 공헌하였다.

 

 

 

6. 창조론

 

 

 

창조는 신앙인가 아니면 신화의 영향을 받은 다른 것인가? 이 물음은 오늘도 남아있는 문제이다.

 

 

 

1) 쉴라이어마허

 

 

 

쉴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기사의 사실여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다음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1)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기원되었다. 2) 세계의 기원은 하나님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3) 신의 활동력은 일시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변화의 조건이 된다는 것 등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기사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행 17:24, 롬 1:19-20). 종교개혁자들은 창조기사를 사실 기록으로 보기는 하였으나 루터는 비유적인 설명을 반대하였고 칼빈은 이론적으로 이것을 말하기를 회피하였다.

 

창조의 기사가 창 1장과 2장에 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우리의 절대의존의 감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런고로 우리의 교리가 될 수도 없다. 교리는 성경에 있음으로 교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으로 경험 할 수 있을 때에 생명있는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결국 세계는 신의 창조가 아니라 자연의 발생 과정에서 생겨진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있게 하는 "능동적인 자연으로서의 자연"(natura naturans)을 말한다. 이는 실체 및 자연을 신과 동일시하는 스콜라철학에서 온 이론으로 스피노자에게서 나타난다.

 

 

 

2) 바르트

 

 

 

창 1장-11장까지는 상징적 혹은 신화적이며 창 12-50까지는 역사적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로 칼 바르트와 게하르트 폰 라드이다. 이들은 창조를 역사적인 이야기로 본다.

 

바르트는 창 1-2를 신화적으로 연관을 지어 해석하였다. 바벨론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ch)라는 서사시는 신년축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신의 어머니 티야마트를 무찌른 마르두크신은 티야마트를 양분하여 하늘과 땅으로 만들고 신들 중의 하나를 제물로 바쳐 그 피로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마르두크의 역할을 그 당시의 왕이 극적으로 대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조설화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적인 창조의 역사이다.

 

바르트는 사제문서(P문서)에 사용된 창조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 )는 신적인 창조에만 사용하는 것으로서 무에서의 창조라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 크티제인( )과 같은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제2차 적인 창조를 하실 때도 이 말을 사용하였다(창 1:21, 27, 5:1, 사 45:7, 12, 54:16, 암 4:13, 고전 11:9, 계 10:6).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세계와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주장한다. 우리가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자체를 보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행동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이다.

 

창조 이해의 출발점은 그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해방하는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과 능력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은 창조적인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확인하였다.

 

성경에서 "만들다"를 의미하는 단어들은 아사( , machen, herstellen, arbeiten, erzielen)와 포이에인( ) 그리고 야차르( , bilden, formen, gestallten), 프랏소( )등이다. 이 단어들은 이미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드는 제 이차적 창조와 섭리를 의미한다.

 

 

 

그러면 바르트에게서 창조가 갖는 신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a free act of God)와 선한 의지의 결단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해 자유스러운 존재이시다. 자신의 내적인 자유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자유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구원으로 나타나셨다.

 

2)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이다(창 1:1; 사 40:12; 44:24; 45:12). 만물은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창조되었다(out of the father, through the son, by the Holy Spirit). 존재(being)는 성부로부터, 상상이나 이념(thought or idea)은 성자로부터, 생명(life)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3) 창조는 하나님의 시간적인 행동(temporal act of God)이다.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사물의 시작을 말한다. 창조 전에는 시간도 물질도 없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나 창조는 하나님의 시간적 사역이다. 어거스틴은 세계가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되었다고 한다. 창 1:1은 세계가 시작을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참조. 마 19:4, 8, 막 10:6, 요 1:1-2, 히 1:10, 시 90:2, 102:25).

 

4)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능력을 말해준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표현은 외경 마카비 2서 7:28에 언급되어 있다. 세계는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범신론자들처럼 우주는 절대적인 필연도 아니다(엡 1:11, 계 4:11).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보여지는 그분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이다(시 33:6, 9, 148:5, 히 11:3, 롬 4:17, 행 17:28, 느 9:6, 골 1:16, 롬 11:36, 고전 8:6, 시 90:2).

 

무에서의 창조는 세계가 하나님께 의존적임을 나타낸다.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 이는 피조물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각 부분에 임재 하시고 영으로 역사 하시는 내재적인 신이시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는 충만이라 한다(시 139:7-10, 엡 2:2, 렘 23:24)

 

5)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고대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 종교개혁시대의 인문주의자들 그리고 18세기의 합리주의 자들이다. 창조는 구원과 연관되어 이해 할 수 있다. 태초의 창조는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며 종말에 새로운 창조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형성된 것(factum)이라기 보다는 되어야 할 것(fieri)으로 이해된다.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완성을 지양하는 시간의 과정이다. 창조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고유한 초월성의 현현(顯現)속에 있다. 하나님의 현현속에 피조물의 안녕과 평화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사 43:7, 60:21, 겔 36:21-22, 눅 2:14, 엡 1:5-6, 계 4:11, 골 1:16, 고전 15:28, 롬 9:17).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는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 모두 경건한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적 교육을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으며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그리스 철학과 칸트, 헤겔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신학적인 작업에 전념하였다.

 

쉴라이어마허는 바르비와 할레 대학에서 철학에 근거를 둔 신학을 연구하였다. 대학을 졸업후 자선병원과 궁중에서 그리고 베르린 성삼위일체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를 하였으며 할레와 베르린대학의 교수로서 철학과 신학 그 이외에 설교집 등 30여권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1822년에 출간된 그의 신앙론은 철학과 기독교를 조화하여 합리적으로 소개하려던 사변적인 작품이다.

 

바르트는 원래 스위스와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독일 지식인들과 결별을 선언 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하기를 원했다. 바르트는 베른, 베를린의 하르낙, 튜빙엔의 슐라터, 마부르크의 헤르만에게서 공부한후 스위스의 자펜빌에서 10년간(1911-1921) 목회하였다. 1921년부터 1935년까지 괴팅엔과 뮌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나치스에 의해 해직 당한 후 1968년까지 바젤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신앙적인 배경을 갖는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신학적인 입장은 처음에는 같았으나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가 앞에서 전제한 것처럼 신학의 주제는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God-talk)"이었으나 교회의 회의를 통해 제기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관한 논쟁으로 발전되었음을 보게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신학은 교의학의 전분야가 되었으며 13세기 이후부터 신학은 더 이상 "학문의 여왕(regina sicentiae)"이 아니라 철학, 법학, 의학 등 학문의 한 분야가 되게된다. 그 이후 루터와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신학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성경이 해석되고 오늘의 정통주의 신학이 되었다고 본다. 신학을 신-인-세계학(The-anthropo-kosmologie)이라고 할 때 정통주의에서는 분명 신에 대한 물음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답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대표적인 사람이 위로부터의 신학을 시도한 바르트이다. 기독교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하나님, 인간 존재, 우주의 본질, 신앙 그 자체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쉴라이어마허는 신의 물음보다는 먼저 인간의 문제를 중시한다. 플라톤이 말한 "종교란 무한자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자신이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던 모라비안의 경건성을 신학의 한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가 즐겨 쓰는 신학적인 용어는 "절대의존의 감정"(schlechthinnige Abh nigkeitsgef hl)이다.

 

 

 

쉴라이어마허와 바르트가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적인 명제를 내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에서 출발한다. 전자는 그리스 철학의 좌파적인 전통을 이어받는 스피노자의 영향을 그대로 답습하여 실존의 체험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범신론적인 사고를 가졌으며 이것을 헤겔의 변증법과 논리주의, 칸트의 윤리에까지 연결시켜 만들어 낸 합리주의적 신학작업을 하였다. 후자는 신학적인 작업을 처음에는 쉴라이어마허와 별 다를 바가 없이 시작하였으나 세계 제1차, 2차대전이 주는 실존의 문제와 인간의 죄성과 악함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신학적인 주제로 삼아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논리전개를 시켰다.

 

 

 

그는 칼빈의 후예로서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철학자 들인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덱거의 추종자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변증법적으로 표현한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다. 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위기의 신학, 스위스학파라고 불리 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바르트의 30년에 걸쳐 쓴 노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1932-67)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신학의 토대를 둔다. 중심과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는 "진짜 하나님이시며 진짜 사람"(vere Deus vere homo)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해를 출판 이후 변증법적 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불트만, 고가르텐, 틸리히 등이 참여하였다. 학술잡지 『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를 창간하여 신학 전개를 하였다. 시대의 사이라고 번역이 되기도 한다. 변증법적 신학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쉴라이어마허의 신관은 내재신론적이다. 그의 신은 세계와 질적으로 동일하다.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신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으로서의 신이다. 초월적인 신을 부정하는 범신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인간의 오관으로 경험하면서 거룩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보기보다는 영과 육의 갈등이다. 인간안에 주어진 내적인 능산적인 자연과 외적인 만들어진 자연의 부조화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이런면에서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인간으로 대치하고 신학을 인간학으로 변형시킨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실재성과 계시의 필요성 그리고 성경의 권위,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이다. 이것을 바르트는 뒤집어 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밑으로부터의 신학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바르트의 하나님만이 "하나님 그분"(Gott, der ist)이시다. 이 말은 인간과의 차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Gott ist ganz Andere)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을 근거로 하여 신학을 정립하는 것은 바르트 에게는 불가능하다.

 

 

 

창조에 대해서 쉴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단지 세계가 하나님의 기원을 갖는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과 지속적인 변화를 인정한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창조의 기사인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감정으로서의 경험을 강조한 나머지 세계의 창조는 자연 발생적임을 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볼 때 창조의 사건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행동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고백된 것이라고 말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행위이며 시간적인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쉴라이어마허는 만물에서 보여진 신성을 보면서(롬 1:20)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제기하였으며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로서(창 1:1, 사 40:12) 무로부터의 행위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이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 있다. 성경은 인간과 세계와 관계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 종교, 정치적 상황은 모두 다르다. 인간과 세계의 다양성과 문화에서 보여지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해석하기 위해 폭 넒은 신학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런면에서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관한 신앙적 해석학이라고 할 수있다. 특히 쉴라이어마허에 있어서 해석은 문법적이라기 보다는 심리학적 이해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이었다.

 

 

 

특히 신에 대한 이해를 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과정과 변화로 이해하려는 상대성적인 시도에 대해 쉴라이어마허의 자연과학적인 "능산과 소산(Naturans et Naturata)"의 신 이해는 과학속에서 종교를 찾으려는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신학적 사고와 이해의 폭을 넒혀 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통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자유주의적인 방법이다.

 

그는 신학을 "기독교적 경건의식에 관한 기술적인 학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신학 연구에서 전제되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규범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을 보게된다. 그가 흔히 사용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은 하나님과 공존하는 경건의 의식작용을 말한다.

 

 

 

바르트의 신학은 말씀과 계시의 신학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신학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학은 시대적인 신앙의 체계를 논리적으로 서술한 것인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면에서 바르트는 신정통주의라는 신학을 가능케 하였다.

 

 

 

신학에서 자유주의와 신 정통주의와의 만남은 성경해석의 방법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가능하다. 동시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헤겔의 변증법과 칸트의 윤리에 기초한 합리성을 받아들여 성경을 해석한 것과 전적인 타자이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의존의 감정을 신적으로 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사건에 의해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정 반대적인 입장을 갖는 것이다.

 

 

 

신학을 신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고 전제하면 바르트의 입장에 서야 함은 당연하나 신학이 인간과 세계를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체계화시키려면 쉴라이어마허의 아래로 부터의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바르트의 신학은 쉴라이어마허에게서 보여지지 않는 계시의 부분을 보충하여 주었으며 쉴라이어마허는 정통주의가 갖는 성경 중심적인 신학적인 틀을 깨어서라도 인간과 세계와 문화의 문제에게까지 갈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하여 준 셈이다. 특히 자연신학과 하나님의 선교라는 문제를 개신교신학의 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쉴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방법론이 공헌하는 바가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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