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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시대가 열리다2

by 【고동엽】 2021. 10. 2.
믿음으로 사는 시대가 열리다
2. 믿음과 행위
믿음은 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가치체계인 문화, 종교, 이념, 사상, 도덕, 과학, 법률, 교육 등을 총칭하는 법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지 숙고하면서 예수가 제시하는 계시를 따르는 삶이 믿음 입니다. 믿음과 행위와는 긴장 관계가 1 도 없습니다.
믿음의 국어 사전 뜻은 믿는 마음 입니다. 기독교 사유는 사전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사전은 편집자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감상, 음악 감상, 통증 지각, 맛 보는 것 등은 생각하는 의식 영역이고 믿음, 이해, 지식, 의도 등은 의식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경향들로서 행위 영역이라고 합니다.(*1)
믿음은 어떤 성향을 갖는 것인데, 그것을 나타내는 전형적 신체 표현은 없습니다.(*2)
희망은 충족된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충족된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나타내는 의견이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어떤 생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 입니다.
믿음은 어떤 견해를 갖는 성향인데, 그 성향은 행동과 말로 나타납니다.
우리 마음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여지가 있습니다. 재고 또 재도 여전히 여지는 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는 확신이란 없습니다. 확신이란 단지 의심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3)
계산법을 배운 사람만이 잘못된 계산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확실한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의심할 만한 이유를 아는 사람만이 의심할 수 있습니다.(*4)
성직자가 교인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독재자가 우민화 정책하는 것과 같은 이유 입니다. 통제하고 지배하여 결속력 강화하려는 목적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성으로 납득되지 못한 믿음은 쉽게 무너집니다.
의심하지 않는 곳에는 진전이 없습니다.
지적 삶이 실제적이지 못하고 오직 내적 본성을 드러내는데 그친다면, 그 지적 삶은 자신이 그 지식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5) 종교 지식을 성스럽다고 별개 지식으로 아는 건 오해 입니다. 종교 지식도 여러 지식 가운데 하나 입니다.
자기 지식이 여러 지식 가운데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지식은 악성 지성주의(vicious intellectualism) 입니다.(*6)
바른 신앙 고백이 바른 행위를 이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헛소리 입니다. 그럴듯한 신앙 고백하는 사람이 포악하거나 탐욕 행위하는 사실이 역사에서나 현재에도 비일비재 합니다.
이념은 탐욕 앞에 무기력합니다. 이념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 재물을 얻기위해서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뀝니다. 진보 이념에 투철했던 진중권과 서민이 아무런 설명 없이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불의한 극우 권력 첨병 노릇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이념이 되어서는 안되고 내 몸에 체화體化되어야 하는 이유 입니다.
종교개혁 신학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 신학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신뢰 입니다. 이들은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회개와 확신하는 믿음을 별개로 구분했습니다.
후에 이들에 대해 저항하는 항론파 알미니안 주의가 출현하는데, 알미니안은 믿음을 회개와 구별하지 않고 동화시켜서 믿음이 구원을 결정하는 하나의 행위로 삼았습니다.
웨슬리안들은 로마서 9 장 6 절 '이스라엘에 주어졌던 하나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다'를 근거로, 그들에게 주어졌던 '행위에 의한 구원'이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7)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를 따랐던 감리교 웨슬리는 알미니안을 모두 따르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과 같이 믿음과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회개를 구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 죄를 보다 더 강조했습니다.(*8)
웨슬리안의 감리교가 가톨릭과 같이 행위가 구원에 역할이 있는 것으로 고백하지만, 감리교를 포함한 개신교 전체 믿음은 이념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신학의 가장 큰 비극은 믿음이 행위와 삶을 떠나서, 교리 교백이 믿음이 된 것 입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하고 정신을 물질 위에 둔 이래로 믿음이 이념으로 된 현상이 고착되었습니다.
믿음 구원인가? 행위 구원인가?
가톨릭은 행위 구원이라 하고 개신교는 믿음 구원이라는 논쟁을 5 백 년 동안해 오고 있습니다. 가톨릭 행위 구원은 마지막 날 심판 때 구원에 맞는 말이고 개신교 믿음 구원은 지금 현재 삶의 구원 입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하면서 싸웁니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데요, 어처구니는 맷돌 손잡이 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맷돌을 사용해야 하는데 손잡이가 없는 상황 입니다.
문제는 개신교가 구원을 현재 삶의 구원이 아니라 완전 구원으로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행위로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고대 마르키온이 했던 것처럼 아래 성서 구절을 지우고 자기가 성서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공동번역)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빌3:12 공동번역)
행위가 우리 구원에 영향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믿음을 통해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자랑이 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소왼된 사람들을 차별하여 배제하고 불화하기 때문 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최초 사람 입니다. 그가 하나님 은혜를 주창한 이유는 인간이 자신 공로를 자랑하며 자기 수준에 못미치는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여 불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에베2:9)
우리가 얻은 구원은 완전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을 통해서 사랑으로써 그 구원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좋은 관계에서(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삶 입니다.(로마14:17)
믿음의 성서 용례
신약성서에서 사용되는 믿음은 그리스어 '피스티스' 입니다.
이 말의 뜻은 신뢰와 확신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까지 믿음이라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히브리어에는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의미의 단어가 아예 없습니다.
구약성서 '에무나'가 신약성서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될때 믿음이라는 의미인 '피스티스'로 20 회, 진리라는 의미인 '알레세이아'로 22 회 번역되어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신실한 하나님을 '에메트'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에무나' 입니다.
에무나가 성서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면,
다윗과 사무엘이 성전 문지기를 임명하는데 각처에서 엄선된 212 명이 '에무나'해서 임명했다고 합니다.(역대상9:22, 26, 31)
'에무나' 용법이 신실한, 충성스런 임을 알 수 있습니다.(*9)
구약에는 믿음(에무나)이 의심하지 않고 신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실하가거나 충성스럽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바울 가르침을 다시 살펴봅니다.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로마3:28) 자신의 진술로 인해 행위가 무시되는 걸 염려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율법 행위는 할례, 음식규정, 절기지키기 등 유대인들이 하나님 선택백성임을 고수하는 행위에 한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한 후에 이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합니다.(로마3:31)
바울 우려는 교회 초기부터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관념으로 이해한 히브리서가 기록되고, 베드로 후학들은 바울 글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벧후3:16)
믿음이 행위와 별개로 이해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로마서가 기록된지 40-50 년 후인 1 세기말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야고보2:26)이라는 야고보서가 기록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과 야고보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야고보2:22)는 형식도 같고 내용도 같습니다.
바울이 행위를 무시하고 믿음을 강조했다는 인식은, 바울 이해의 대표 오해 입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훼했습니다. 바울이 행위를 무시하고 믿음을 강조한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 입니다.
루터는 당시 기독교가 인간 공로구원을 이유로 면죄부를 파는 등 부패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행위까지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권위 회복을 사회 변혁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사실상 정치개혁 입니다.(김균진)
후대 신학자와 목사들은 루터의 믿음에서 삶의 중심성을 외면하고 영혼구원에 대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키르케고어는 야고보서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소멸 징후를 보이는 유럽 기독교에 삶의 변화를 요청하기 위해서 입니다.(*10)
믿음과 삶
바울 신학자 권연경은 자신의 저서 「행위없는구원?」에서, 그리스도인 행위도 강조해야 하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논리적 괴리가 있다고 한탄합니다.
믿음을 행위와 구별하기 때문 입니다.
내가 만일 그를 만난다면, 기독교 믿음은 마음이나 생각 특히 이념이 아니라 행위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논리적 괴리는 없습니다.
믿음은 이론 주장이나 어떤 견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백을 시비하는 건 헛된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용납되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은혜가 나에게 작동하도록 허용하는 행위 입니다. 믿음은 어떤 견해가 아니라 어떤 상태 입니다.(*11)
우리는 믿음이란 나의 전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가운데, 내가 자유와 책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를 내 삶의 현실이 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심리철학적 소견들 2 이기홍 아카넷 파주시 2013, 28p
2. 같은 책, 65, 112p
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승종 아카넷 파주시 2016, 388, 458, 459, 561, 642p)
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심리철학적 소견들 2, 131p
5. 윌리엄 제임스 다원주의자의 우주 김혜련 아카넷 파주시 2018, 240p
6. 같은 책 35p
7. 제임스 패커 알미니우스주의 이스데반 CLC 서울 2019, 37-38p
8. 같은 책, 31p
9. 강사문 구약성경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서울장신논단 21집 서울장신대출판부 광주시 2013, 29-35p
10. 토니 킴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 윤덕영 홍성사 서울 2018, 10p
11.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예영 서울 2012, 17, 209p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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