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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삶을 떠나다1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 삶을 떠나다
시작하는 말
이스라엘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마카비 형제가 일으킨 하스몬 왕가 일시 독립외에는 항상 외세 억압에 시달렸습니다.
주전 200 여년 경부터 메시아가 도래하여 자신들을 구원하리라는 메시아 대망사상이 일어납니다. 이때 기록된 다니엘서, 제 4 에스라서 등을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예수와 대척한 서기관들 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통해 정치 군사 독립을 이루고 번영된 나라 세워지기를 희망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가 출현하여 하나님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백성들과 서기관들, 예수 제자들이 기대했던 하나님나라와는 다른 나라 입니다.
예수 사역과 가르침 중심은,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으니 변화된 삶으로(회개) 평화하라 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미래 천국을 현재로 가져왔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 죄인으로 지목된 세리, 병자, 부정한 사람, 악인들을 용납하여 평화하는 삶을 행동으로 보이시고 또 가르쳤습니다. 그분은 정결과 부정, 선인과 악인 차이를 허물었습니다.
악인에 2 종류가 있습니다.
1. 사회체재에 낙오하여 소외된 악인 입니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도 악인이라 생각하고 기죽고 삽니다.
이들에게 잘못이 왜 없겠습니까만, 특이하게도 예수는 한 번도 꾸짖는 일 없이 이들을 용납하고 구원합니다.
2. 사회 기득권층으로서, 부패하고 탐욕하는 악인인데 자기들 스스로는 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교만하여 도덕으로나 재물로 자기들 수준에 못미치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예수는 이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채찍도 휘두르고, 그 신앙심 출중하고 고상한 교양인들에게 뱀 새끼들이라고 쌍욕합니다.(마태12:34) 우리 식으로 개새끼 입니다.
예수는 세대 가치를 쫒지 말고 영원이 주는 계시를 따라 살도록 여러 계시를 사역과 말씀 그리고 비유를 통해 가르칩니다.
예수는 지금 이땅에서 구원받은 삶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 성당은 영혼구원과 내세 천국에 대해 가르칩니다. 삶에 대한 가르침은 사회 일반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제시한 계시가 아니라 도덕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는 예수가 제시한 사랑과 평화, 새 생명 약동이 그리스도인 삶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죽으신 20 여년 후에 바울 서신이 쓰이고 , 이로부터 20 - 30 년 후에 복음서가 쓰입니다.
바울은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직접 목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예수 사역과 가르침 실제 현실에 대한 증언인데 반하여, 바울 서신은 예수그리스도가 일으킨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실현되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증언 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에 하나님나라를 증언했기 때문에 나라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를 전복시키는 반역 운동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 입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 의에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게 하나님나라 입니다.
바울은 예수가 부정과 정결, 선인과 악인 차이를 없엔 사실을 신학화했습니다. 그것을 부정한 사람과 악인에 대한 칭의(용납)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을 의롭다고 부른다는(호칭) 뜻이 칭의 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혈통이나 유대 법 따름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고 합니다.(로마3:28)
루터는 이러한 진술을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사람 혹은 올바른 사람이라고 부르신다고 오해했습니다.
신약성서엔 의가 옳음과 정의라는 뜻인 그리스어 '디카이오슈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터는 성서를 그리스어 용어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인이고, 그가 유대인들에게 한 말이므로 이스라엘 말 뜻을 찾는 게 적절합니다. 의는 이스라엘에 천 년 이상 사용된 다양한 뜻을 가진 '체다카' 입니다. 의(체다카)는 하나님 편에선 구원이고 인간 편에선 관계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이고, 우리가 부정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의롭다 부르는 것은 서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 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통해 유대인과 세계인 그리고 신앙인과 비신앙인 차이를 없에는 칭의(의롭다고 호칭하다) 신학을 세웠습니다.(로마3:21-31)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제는 혈통이나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간을 의롭다( 칭의,용납) 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납(칭의)하라 합니다.(로마서2:1, 4, 14:3 등)
그렇게 평화를 이루라는 말 입니다.(로마5:1) 이것이 로마서 핵심 입니다. 로마서에 용납, 받아들임, 의롭다함 등 용어가 42 번 나옵니다. 바울은 칭의 신학을 통해 유대인과 세계인, 신앙인과 비신앙인, 강한 자와 약한자 차이를 허물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평화하는 세상을 열었습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막고 있는 차이를 없에는 행위 입니다.
바울은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신학화, 윤리화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바울 신학을 자기시대 신학화, 관념화, 심령화 했습니다. 루터가 삶 문제를 영혼 문제로 변형시켰숩니다. 실은 루터보다 후학들이 실제 삶에 대한 문제를 영적 의미로 더 끌고 갔습니다.
우리는 우리시대 신학을 위해 바울 의도를 따라갑니다.
1 세기 성서시대를 사도시대라 하고 2 세기부터 속 사도시대 그리고 교부시대라 합니다.
2 세기 교부시대부터 하나님나라 사상이 실종됩니다.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성서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이지만 복음서와 바울서신 등이 예배에 사용되었는데, 신학은 딴길로 갔습니다. 성서 정립은 300 여년 후에 일어납니다
교부들은 그리스 철학을 통해 하나님 실존과 예수가 그리스도임과 신임을 설명했습니다.
교부들은 성서를 외면하고 그리스 철학으로 기독교를 설명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4 세기 성서가 정립된 이후에 성서는 철저히 외면되고 16 세기 종교개혁으로 다시 성서가 믿음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외에 땅에 있는자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하십니다.(마태23:9)
교부는 교회 아버지 입니다. 첫 신학부터 예수말씀을 어기고 교회 지도자를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교부들이 성서를 외면한 증거 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교부들과 고대, 중세 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어떻게 삶을 버리게 되었나를 찾아갑니다.
우리는 이들 신학 전반을 탐구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들 신학 중에서 삶 문제를 잃은 원인과 과정을 찾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당은 성소수자, 비정규직 근로자, 사회 약자와 개혁자를 좌파로 정죄하고 차별하여 배제합니다. 예수는 부정한 사람과 악인을 용납하여 평화하는데, 플라톤은 선과 악을 분명하게 분리하여 악인을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한국 교회 성당에 하나님나라 사상이 실종되어 이러한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주님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플라톤 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예수 사역 사례에 비추어 보면, 실은 자기들이 악인이면서 남을 악인이라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우습고 슬픈 현실 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신학과 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을 찾아갑니다.
믿음이 예수 사역과 가르침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지 않고,
믿음이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즉 교리와 이념에 있게 된 원인과 과정을 찾습니다.
반 기독교 사상가 니체는 기독교가 삶 의지를 부정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하면서 기독교에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1) 니체는 인간성과 의지 회복을 주장한 사상가 입니다.
기독교가 삶 중심성을 잃은데 대한 통찰 입니다.
우리는 신 존재 확신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이 나의 말과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믿음 입니다.(*2)
'너희는 약함에 의해서만 강해진다' '자랑이나 자부심을 품고 살아서는 안된다'(고후12:9) 같은 이 세대 가치와 다른 형이상학 가르침이 내 삶의 구체적 정황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을만하고, 그것을 다른 대안보다 선호할 때 믿음 입니다.(*3)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신과 인간 관계에 집중한 내향성(introversion) 종교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신과 관계만이 아니라, 오히려 나와 타자와 관계가 신과 관계를 입증한다는 예수 가르침에 주목합니다.(마태25:40) 기독교는 외향성(extraversion) 종교 입니다.(*4)
즉 기독교는 나와 타자와 관계를 통해 신앙하는 종교라는 뜻 입니다.
예수는 새로운 지식을 전해준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새로운 삶을 스스로 실현해 보이고 또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5)
예수는 진리를 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하시는 분이라고 하면,
1. 예수그리스도가 진리를 소유한 것으로 이해되어 소유하지 않았을 때도 있기 때문이고,
2. 가르침이 법이 되어 아무 현실이나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 입니다.
예수 자체가 진리 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진리라는 말은 이 땅에 모든 현실을 관통하는 진리는 없을 뿐만아니라, 모든 현실에 예수 가르침 중에 어느 하나가 기준이 아니라는 의미 입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그리스도 전체를 기준 삼으라는 뜻 입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1.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이상엽 지식을 만드는 지식 서울 2016, 125, 159p
2.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강주헌 모멘토 서울 2010, 150p
3. 윌리엄 제임스 다원주의자의 우주 김혜련 아카넷 2018, 18, 28p
4. 돈 큐빗 문명의 위기와 기독교 대서사 안재형 한국기독교연구소 고양시 2020, 102p
5. 칼 야스퍼스 니체와 기독교 이진오 철학과 현실사 서울 2006, 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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