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사는 시대가 열리다
4. 믿음은 삶의 변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의를 이루기 위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새 피조물이다.(고후5:17-21)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몸 변화가 아닌 삶 변화
새 피조물이란 몸이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 세대 가치를 쫓지 않고 예수가 제시한 계시를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거듭난 사람이란 성격(character) 변화가 아니라 존재 변화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라는 이상한 우월의식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그리스도인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 입니다.
도덕심으로 무장한 바리새인 우월의식과 같습니다. 우월의식으로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라는 인식은 다른 종교사상이 기독교로 유입되었기 때문 입니다.
인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우주 근본인 브라만과 개인 중심인 아트만이 같다는 사상이고요,
동학 천지인 사상도 하늘과 땅 사람이 같다는 사상 입니다.
기독교에 유입된 그리스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최고 선善 입니다.
신에게서 멀어질 수록 악하기 때문에 인간은 선善을 통해 신에게 가까이 가는 게 구원 입니다. 즉 인간 신성화神聖化가 목표 입니다.
이러한 모든 종교사상은 하늘 근본과 같기 위해 인간 몸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 철학자 폴 리꾀르는 인격(personality)은 변화하지만 성격(character)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 DNA는 변하지 않습니다. 선친께서 저 장로 성질머리는 성령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탄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한 고백은(빌3:7-8) 예수 만나기 전에 이성으로 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에 대한 고백이고요, 이성으로 하나님을 믿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포악했는지를 돌아본 회상 입니다.
바울은 인간 한계를 인정하고 신 은혜를 구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 하나 내 속에 죄가 나에게 악을 행하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라고 절규합니다. (로마7:14-25) 그는 모든 종교와 사상이 인간성 제고에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인간 한계를 절감하고 신 은혜를 구한 최초 사람 입니다.
바울은 몸 변화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A 슈바이처, 불트만) 자신이 예수 만나서 어떻게 변했다는 진술도 전혀 없습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에겐 우월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은 부르심 받은 그대로 지내라' 고합니다.(고전7:17-24)
바울이 말하는 변화는 몸 변화가 아니고 삶의 변화 입니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면 그들이 불쾌해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과 웨슬리가 세운, 믿음으로 성화聖化된다는 신학은 그리스 철학인 신성화神聖化 개념이 기독교에 유입되어서 일어난 현상 입니다. 루터는 성화를 말하지 않았습니다.(알트하우저)
내가 성화聖化되었다거나 성화되어간다는 인식은 우월의식을 줄 수 있습니다.
몸 변화가 아닌 삶 변화라면 우리 어떤 삶이 변화해야 할까요?
자본주의 삶
자본주의는 기독교에서 발생했습니다.(막스 베버) 그리고 이제 자본주의는 제의 종교가 됐습니다. 인류는 토지 생산에서 기업 생산이 주는 삶으로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기업은 생산이 중단되면 망합니다. 생산 증대를 위해서 끊임없이 소비를 촉진합니다. 이 제의는 영구적으로서 휴식도 자비도 없습니다.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쉼 없는 경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 모두가 피로에 쓰러집니다.(한병도)
자본주의 제의는 죄로부터 구원이 아니라 죄 자체를 생산해 갑니다. 종교로서 자본주의는 변혁이 아니라 세계 파괴가 목표 입니다.(*1)
자본주의는 풍요와 번영외에는 관심 없는 종교 입니다.
이성과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믿는다고 공언한 가치와 모순되게 행동합니다. 자기 행동을 가족이 살아야 한다는 등 여러 명분 속에 숨지만, 자신이 신앙생활 한다는 명분에 숨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나 성당에 가고 때로는 경건 생활을 하지만 서슴 없이 이익을 쫓습니다. 삶의 안전 장치가 종교만한 것이 없습니다.
형제간 재산 싸움을 여러번 경험했는데 경건한 신앙인일수록 탐욕으로 불화하는 정도가 강함을 보았습니다. 재물보다 형제 우애가 더 소중하다고 권면하니 웁니다. 그러나 회개해서 우는 게 아니라 재물 포기를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워 웁니다. 울면서도 양보하지 못하니 말 입니다.
키르케고어는 거짓 신에게 기도하고 헌신하여 결단하는 이교도가 참 신에게 헌신 없이 자기 만족을 택하고 정통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보다 낫다고 합니다.(*2)
내가 낙오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은 삶에 대한 의미와 기본 질서가 붕괴될 때 옵니다.(*3)
불안은 실존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제거될 수 없습니다.(*4)
삶의 용기는 두려움으로 예상되는 그 부정성을 받아들이려는 태도 입니다.(*5)
믿음은 그 부정성을 받아들이도록 도웁니다.
계급 없는 사회는 마르크스 주장대로 계급간 투쟁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이미 메사아가 와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는데 있습니다.(*6)
메시아 세계, 즉 하나님나라는 현재 경험합니다.(*7)
예수께서 빵 5 개와 물고기 2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이 예수를 왕 삼으려했습니다. 자신들 삶을 책임져 줄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 입니다. 예수가 갈릴리 바다를 건너 피하자 대표단을 뽑아 따라왔습니다. 그때 예수는 '내가 생명의 떡이다'(요한6:48)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요한6:55-56)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대표단은 물론이고 12 명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떠났습니다. 예수는 남은 12 명에게 너희도 떠나려느냐 묻습니다.(요한6:67)
나는 성서에서 이 장면이 제일 슬픕니다. 민중들이 불쌍해서 배고픔을 해결해 준 것이 제자들을 잃은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제자들은 예수가 번영된 사회나 정의로운 나라 세우길 기대했는데 자기들 기대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그들은 영원 계시가 내 삶에 침투해서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신에게 실족합니다. 기존 가치체계에 부응하지 않는 신에게 실족합니다.(*8)
예수에게서 자기 욕망을 성취하려는 신앙은 자신과 함께 기독교도 멸망합니다.(*9)
이성과 계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11:28)
도와주려는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갑니다. 왜냐하면 도움받을 사람이 자기에게 오면 같이 살아야 하는데 같이살 수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같이 있으려고 자신에게 오라고 합니다. 그분은 도우려는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려고 합니다. 도우려는 사람에 차별이나 차등은 없습니다.(*10)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습니다.
이성은 실존 파괴 구조에 놓여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이성은 인간 유한성과 가치체계 갈등 구조에 놓여있습니다. 이성은 자율과 타율,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형식주의와 감성주의 사이에 있는 갈등 구조 입니다.(*11)
나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결과는 우리 이성에 한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전하는 일을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한(고전2:4) 말은 신의 계시를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뜻 입니다.
그는 예수에게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평화가 있다고 합니다.(빌4:7)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거친 20 세기는 이성에 최대 신뢰를 보낸 시기 입니다.
이제 21 세기 우리는 이성 한계를 절감한 바울을 주목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를(이사7:9 불가타 역)
인용해, 계시 도움으로 마음이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모토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합니다.(*12)
우리는 신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성으로 납득하는 길을 찾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그리스도가 제시히는 희망과 사랑, 평화에 참여하는 행위인데 그것은 언제나 탈 자아에 의해 즉 신 앞에 나의 이성을 내려놓을 때 수동으로 일어납니다.(*13)
계시는 기다리는 자에게 옵니다.
섬은 정박하기 원하는 배에게만 닻 내림을 허락합니다.(괴테)
삶의 구원
기독교는 인간 영혼에 무엇이 일어났으며 또 일어날 것인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즉 이론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 몸 부활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영혼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당시 세계관을 물리치고 그리스도를 통해 삶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믿음의 소산 입니다.
믿음은 인간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에 대한 하나의 기술記述 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고백은 실제 일어난 사건에 관한 것이며, 절망도 실제 일어난 일이고 이런 것들에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도 삶 해결이기 때문 입니다.(*14)
나는 여러분에게 죽음 후에 대한 문제,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윤회가 사실인지 등에 대해선 말해줄 수 있는 게 1 도 없습니다. 나도 모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서 평화가 있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현실이 바뀌지 않을지라도 말 입니다.
신을 믿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닫혀있을 삶 의미 유형들, 새로운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계를 보는 방식이며 삶을 평가하는 방식 입니다.
진리란 현실 삶에서 구현되어야할 어떤 실재 입니다.(*15)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고 합니다. 닥치고,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이라는 뜻 입니다.
기독교는 삶에 무한한 가치가 있으며 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종교 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온 가치변화를 위한 인간 결단 입니다.(*16)
다음회 부터는 기독교가 삶의 중심성을 잃어버린 원인을 찾아갑니다.
계속 성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1. 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김상운 난장 서울 2010, 117p
2. 메럴드 웨스트팔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 홍성사 서울 2018, 257p
3.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예영 서울 2012, 96p
4. 같은 책, 100p
5. 같은 책, 112p
6.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길 서울 2008, 356p
7. 같은 책, 367p
8. 쇠얀 키에르케고어 그리스도교의 훈련 임춘갑 다산글방 서울 2005, 121-125p
9. 같은 책, 216-217p
10. 같은 책, 15-34p
11. A J 맥컬웨이 폴 틸리히 조직신학 요약과 분석 한재범 김재현 한들출판사 서울 2020, 101, 125p
12. 폴 E 카페츠 그리스도교의 신 역사적 개관 김지호 도서출판 100 서울 2021, 94p
13.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9, 385-386p
1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이영철 책세상 서울 2006, 74p
15. 그리스도교의 훈련, 320p
16. 에른스트 트뢸취 기독교의 절대성 최태관 한들출판사 2014, 28p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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