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기독교 죄에 대하여 10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 죄에 대하여 8
십자가가 중요한 이유는 신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 입니다. 예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옛 질서와 관계를 끊고 예수가 제시하는 새 질서와 관계하기를 요청합니다.
7 - 3 십자가는 우리를 억압하는 옛 질서에 대한 저항 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제자들은 말렸습니다. 그때 예수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마태16:21)
예수와 토론할 때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주로 등장하는데 예수가 이사람들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권력자들입니다. 장로와 대제사장들은 정치 경제 사법권을 가진 실력자들이고, 서기관들은 주전 3 세기부터 묵시문학을 일으킨 사람들로서, 백성들에게 메사아 대망 사상을 일깨우며 희망을 주는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지배계급에 의해 착취 당하는 갈릴리 민중 편에 있지 않고 지배계급을 섬기며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선 사람들 입니다.(*1) 한편, 서기관들에 제 4 철학그룹이 있는데 이들 중 단도(시카리)를 소지하고 군중 속에서 실력자들을 찌르고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시카리파도 있습니다.(홀슬리)
갈릴리 사람들은 90 % 이상이 소작농이고, 그들 지주는 예루살렘에 사는 지배층 입니다.
권력층과 부유층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재산 그리고 자신들 행위가 신성하고 정당한 것임을 입증하는 후광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2)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당한 사람들을 부정으로 간주하고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정결예식에 쓰는 항아리에 술을 만들어 주고, 하혈하는 부정한 여인이 만지는 것을 허락하고, 정결 상징인 손 씻고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는 정결과 부정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력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을 도둑 소굴로 만들었다고 일갈합니다. 차별 상징인 성전 기능을 정지시킨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맹세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지배문화 종식 입니다.(마태5:33-3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맹세하고, 딸은 아버지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맹세하며 복종했습니다.(민수기 30 장)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갑자기 시작한 집단 생활에서 서열과 복종 관계를 정해 사회를 이끌었습니다.
맹세는 예수 시대에 와서 지배층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하나님 말씀 순종하라며 억압하는데 넌더리가 나서 하나님에게도 맹세하지 말고 아무에게도 맹세하지 말고 스스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말을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예수 가르침일 뿐만아니라 지도자들이 자신이 하나님 일꾼이므로 순종하라고 합니다. 결국 자기 말에 복종하라는 겁니다. 구역장도 순종하라고 해서 구역 바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종은 유대교 교리고 기독교는 사랑 입니다.
저항하지 않는 자유는 보호받지 못합니다.(칼 슈미트)
예수는 힘 없는 저항으로 지배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왜 권능 신이 무능력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7- 4 십자가는 신의 비움 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이 인간이 되심은 우리가 하나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입니다.
즉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신은 인간 오만을 참으셨습니다.(*3)
신의 무능은 인간 자유와 관계합니다.
이스라엘이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을 고백하지만 그들 신은 전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국가는 외침에 시달렸으며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고 로마에 의해 국가가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신앙심은
2 천 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국가를 건설하여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들 신의 무능은 은폐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의 무능은 계시됩니다.
아들로 나타난 신은 신 속성을 비움으로써 인간 한계를 수용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 십자가는 스스로 실패함으로써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적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상실케 했습니다.(*4)
2. 신의 자기비움(케노시스)은 신성 포기 또는 자기 비하 입니다. 이런 비극적 자기 비하를 통해서만 오만한 인간성을 폭로합니다.
전능한 신이 무능하다고 할 때 인간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고통받는 자와 연대하는 것만이, 인간 상실과 실패에서 진정한 신의 구원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능한 신이 무력하게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평화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옵니다. 지나친 풍요와 번영은 소비 과잉을 낳아 자신과 세계에 불행을 낳게 합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면 풍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권력자가 쓰러지고 부유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만연한 이유 입니다. 권력, 지배, 풍요는 인간 오만의 정점 입니다.
인간 오만은 신의 무능에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이 스스로 전능을 제한하심은 인간에게 주는 선물 입니다.
본래부터 신의 비움이라는 '케노시스 신학'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당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일찍이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김교신 등이 교회 직제와 조직 그리고 세력이 주는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교회와 성당은 예수는 예수고 우리는 번영되고 화려함을 쫒아 간다 입니다.
예수 비움을 외면한 오늘 교회와 성당은 허장성세를 쫒다가 스스로 몰락하고 있습니다.
7- 5 십자가는 신이 우리 고통에 함께하심 입니다
예수는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고 적들로부터 조롱당함으로서 고난에 참여합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먼 곳에서 인간 고통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들하나님은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의 버림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합니다.
신이 인간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인간 고통에 함께 함으로써 우리에게 고통을 감당할 길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아파하십니다.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다'(렘31:20 기타모리 가조 번역)
용서는 상대 행위를 잊는 것이며, 그 잊음은 본인에게 아픔이고 그 아픔조차도 나타내지 않음이 용서 입니다.(*5)
십자가 하나님은 풍요와 성공에서만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실패와 궁핍과 절망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 임을 증거합니다.(*6)
본회퍼 목사는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합니다.(*7)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8: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기도하십니다.
예수가 고난을 당하셨다고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자처하는 것은 예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고난을 자처하는 신앙은 오체투어하는 티베트 종교 입니다. 기독교는 사랑하며 기쁘고 평화하게 사는 게 하나님 나라 삶 입니다.(로마14:17)
보통은 십자가와 부활을 합해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부활로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의도 입니다.
나는 십자가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으로 인도하는 복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번영과 강함을 추구하다 어느정도 정점에서도 망하고 마는 사례가 무수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낮은 자리가 복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1. 리처드 A 호슬리 서기관들의 반란 박경미 한국기독교연구소 고양시 2018, 295p
2. 게르트 타이센 기독교의 탄생 박찬웅외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2018, 209p
3. 로저 E 올슨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2009, 199p
4. 자끄 엘륄 자유의 윤리 김치수 대장간 논산시 2018, 305p
5. 기타모리 가조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이원재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8, 74-75p
6. 리처드 보컴 예수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형일외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9, 450- 451p
7.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영 김균진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2017, 205p에서 인용
긴 죄론 글에 함께하신 페친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논란 많은 죄론을 무사히(?) 마쳐서 기쁩니다. 다음엔 믿음에 대해 씁니다. 사랑과 죄론은 잘(?)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요. 그 앞의 글들을 보니, 두서도 없고 다소 어렵게 썼습니다. 체계를 세우고 보강하여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이번엔 긴 호흡으로 차분히 길게 갑니다. 이번 글은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원 부탁드립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으로 사는 시대가 열리다 1  (0) 2021.10.02
시작하는 말  (0) 2021.10.02
기독교 죄에 대하여 9  (0) 2021.10.02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8  (0) 2021.10.02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7  (0) 2021.10.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