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8
7-1. 예수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삽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가다
로마 네로 황제가 죽고 장군들의 추대로 베스파시우스 장군이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분세탁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앞 못 보는 사람 눈을 뜨게 하고 굽은 손을 펴게 하는 기적을 베푼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신의 아들로 신격화 되었습나다. 그가 세계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역사가와 시인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복음(기쁜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폭력으로 이루는 로마평화는 가짜고 예수평화가 진실임을 고백했습니다. 당연히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또한 그분의 가르침이 복음(기쁜소식) 입니다.
예수는 갈릴리 일대에서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정결예식에 쓰는 항아리에 술을 만들고 예루살렘 성전항쟁을 통해 성전 기능을 정지시키는 일 등은 기존 가치체계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 입니다.(요한2-3장)
예수는 갈릴리에서 하나님나라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여정을 시작 합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죽으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소식을 더 널리 전파하기 위해 갔고, 그러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1)
그러나 나는 예수가 죽으러 갔다고 생각 합니다. 죽으러 간 게 아니라는 해석은 알버트 슈바이처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실패했다고 말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에 의한 해석 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어떤 가시적 성과 내기를 기대했기 때문 입니다.
떡 5 덩이와 물고기 2 마리로 5 천 명 이상을 먹인 사건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넘어로 피신하자 대표단을 뽑아 쫓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은가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 대답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사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이상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가 세력을 모아 무슨 일을 시작할 기미가 전혀 없는 것을 알고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고, 예수는 묵묵히 떠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모두 떠나고 12 명만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는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고 묻습니다.(요한6장)
나는 복음서에서 이 장면이 제일 슬픕니다.
예수는 30 세 정도까지는 평범하게 살다가 하나님나라 사역은 13 개월에서 36 개월 사이의 어느 기간 만큼만 사역했습니다.
사역 기간을 정확히는 모릅니다.
예수는 세력을 모으거나 어디에 정착해서 무슨일을 도모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요구하는 급진적 가치 전환은 당장 실시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가시적 어떤 성과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데, 예수가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는 어떤 체재나 공동체가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삶을 통해 이루어가는 평화의 나라 입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어떤 사회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혁명이나 사회개혁 운동과 다릅니다.
예수는 정의롭고 번영된 나라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가롯유다를 포함한 제자들의 기대를 더 이상 미루어 갈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가 예상되기 때문에 제자들은 가기 싫어 했습니다. 망설이는 제자들을 도마가 독려하여 예루살램으로 떠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를 막기 위해 베드로는 항변하고, 예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지람을 듣습니다.(마태16:21-22)
더 이상 하나님나라 운동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죽음으로 완성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예수는 왜 신인가
1 세기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한 청년을 우리는 신이라 부릅니다. 부분은 전체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물의 색이 수시로 변한다면 우리는 그 사물 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신은 고정체가 아니므로 우리가 산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2)
우리는 예수에게 계시된 모습에서만 신에 대해 압니다. 예수가 신인 것은 기적을 행했거나 사람들의 불치병을 치유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 입니다. 필자가 말하는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가는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삶에서 구원 즉 기쁘고 평화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로마14:17) 나는 죽음 후 상태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 구원 상태에 있다면 죽어서도 구원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산행 기차를 타고 있으면 부산에 도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입니다.
신(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요1:14)
신이 역사에 개입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 자신이 인간이요 우리 중 하나 입니다.(*3)
루터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신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는 하늘로 실체화된 신 개념은 파기하고 예수로 계시된 신만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4)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유는 충격 입니다. 성육신한 그 신은 연약하고 무능력해 보이며 실패로 보이는 신 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려고도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않습니다.
신이 자신의 힘과 권리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을 따라서 개인으로나 사회 정치로나 이기심과 폭력성, 소유욕과 지배하려는 충동을 버리는 포기는 마조힘적 자기학대가 아니라 더 풍성한 평화의 삶을 위한 포기 입니다.(*5)
성서시대를 이어서 신학을 발전시킨 교부들은 예수의 인간 삶과 수난에 계시된 하나님 정체성을 인식하는데 실패했습니다.(*6)
우리가 신을 생각할 때 신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른 태도 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이유에서 신이라 부릅니다.(*7)
예수는 우리의 모범 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종교개혁 신학의 최대 비극은 믿음이 올바른 고백에 있다고 한 데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를 머라 고백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죽음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설 선지자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가 소잡고 잔치한 후에 부모와 입 맞추고 자신을 따르도록 허락했습니다.(왕상19:19-21)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 장례 치른 후에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마태8:21-22)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따르려면 아버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따르는 길은 우리의 가치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질서의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옛 질서의 죽음이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망 입니다.
서론이 길어져서 본론은 다음회로 이어집니다.
저항, 비움(케노시스), 고통의 십자가와 희생양 의미에 대하여 씁니다.
1. 김근수 예수평전 동녘 2021, 254p
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심리철학적 소견들2 아카넷 2013, 81p
3. 슬라보이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김정아 길 2008, 222-223p
4. 에른스트 블로흐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박설호 열린책들 2009, 118p
5.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강주헌 모멘토 2010, 40p
6. 리처드 보컴 예수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형일 안영미 새물결플러스 2019, 14p
7. 에른스트 블로흐, 23p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고 평화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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