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5
4. 바울은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바울의 독특성
우리의 목표는 죄에 대하여 성서가 증언하는 바와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말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찾는데 있습니다.
바울의 중요한 죄 이해는 2 가지 입니다.
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5:20)
2.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법)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로마7:8)
이번 글은 이 엄청난 진술에 대한 해설이기도 합니다. 표현되는 의미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입니다. 나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은 이 본문에 대한 나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아야 마땅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세기 유대교에는 죄의식이 팽배했지만 예수가 갈릴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 약자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기쁨과 평화를 심은 이래로 성서 저자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죄인식은 없었습니다.
성서가 쓰이고 천 오백 여년이 지나서 고대 그리스어인 성서를 신학자들이 현대 독일어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이 빗나갔다는 의미로서 '잘못'이라는 뜻의 사회 언어 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신학화 해서 종교 언어인 죄라고 번역했습니다.
단어 자체에는 죄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잘못'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의 결핍' 즉 도덕 결함과 의미가 다릅니다. 도덕 결함은 주류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양쌓기의 실패지만, '잘못'은 사회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며 이렇게 저렇게 저지르는 나쁜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가 가르쳤다고 한 주기도문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마태6:12, 누가11:4)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은 고대 그리스어 '오페일레테스'인데 '빚진자'라는 말 입니다. 즉 우리가 그들에게 빚이 있다는 뜻 입니다.
누가가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한다는 '죄'라는 말은 '하마르티아' 입니다. '하마르티아'의 뜻이 잘못이므로, 즉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누가의 올바른 번역은 우리가 부모나 사회로부터 빚진 거를 갚았으니 하나님도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옵시고 입니다.
더구나 마태를 번역한 '죄'는 '빚'이나 '의무'라는 '오페일레마' 입니다.
즉 마태의 기도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빚진 것을 갚았으니 하나님도 우리의 빚을 탕감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우리가 이렇게 성공하여 잘 사는 것은 사회의 덕으로서, 사회에 빚이 있기때문에 사회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갚았으니,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도 용서해 달라는 기도이고,
마태는 하나님께 진 우리의 빚도 탕감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주기도문할 때 마음이 좀 찔리는 사람이 있겠습니다.
여기에 오늘날과 같은 죄 개념은 없습니다.
필자가 하려고 하는 말은 성서가 잘못이라고 한 말을 번역자들이 해석해서 죄라고 번역했다는 것 입니다.
필자가 성서의 죄를 잘못이라고 바꾸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고대와 종교개혁시대를 거쳐 해석된 성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시대에서 성서의 뜻을 올바로 찾자는 말 입니다.
그동안 필자는 '하마르티아'(잘못)를 습관으로, 아무 문제의식 없이 죄로 번역했습니다. 이번 죄론을 쓰면서 성서 저자들은 잘못이라고 썼는데, 5 세기 불가타역이나 16 세기 에라스무스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죄로 번역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신학자도 아닌 한 설교자의 당돌한 주장 입니다. 페친 여러분과 신학자, 설교자, 연구자들의 댓글 의견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1. 바울이 말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에서의 죄도 '잘못'을 말하는 '하마르티아' 입니다. 즉 '잘못'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뜻 입니다. 사회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에 은혜가 임한다는 기쁜소식(복음) 입니다.
서양철학사에서 예수는 운동가이고, 바울은 인류 정신사에서 새로운 사상을 일으킨 사상가 입니다.(렘브레히트 서양철학사) 철학자 폴 리꾀르는 바울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를 바울의 독특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인간의지로 구원할 수 없고 신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인류 최초의 사람 입니다. 그가 은혜를 주창한 이유는 인간의 교만을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엡2:9) 교만은 약자와 가난한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동인 입니다.
퀸 앨러리는 인간의 지배하려는 의지가 악의 기원이라고 합니다.(*1)
악이라고 하는 사회 용어가 종교 언어인 죄가 됐습니다.
2. 죄가 나에게 탐심을 이루게 했다에서 죄도 '잘못'인 '하마르티아'인데, 바울은 '하마르티아'를 사람처럼 의인화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죄를 우리 인간의지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가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요한3:17 누가13:1-5) 마지막 날의 심판에서는 자기의 행위로 심판받으므로(마태16:27 로마2:6)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회개) 말씀하신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죄가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고 어떤 사람은 피해갈 수 있는 도덕이나 질병으로 보지 않습니다.(로마3:9,23) 즉 죄는 모든 사람에 해당되는 보편성 입니다.(로마5장)
죄가 우리의 잘못을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내재되 있는 씻어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가톨릭은 인간의 죄를 용서받는 고백성사를 만들었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교회를 떠나면 죄로 인해 망하거나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어서도 지옥간다고 겁박합니다.
지배자는 죄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오늘날 죄는 성직자들이 신앙인을 억압하는 기재器才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삶의 힘을 얻고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는 것 외에는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고(로마14:17) 이것이 구원 입니다. 죽은 후의 문제는 나는 알지도 못하고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지 나는 1 % 도 거기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속아오고, 또 이용당해 왔을까요 ?
종교가 생긴 이래로 지배층과 성직자가 결탁하여 약한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해 왔습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성직자인 브라만이 제 1 서열이고 전사인 크샤트리아가 제 2 서열 입니다.
인류의 발전은 지도자에 의해 이끌려 왔습니다. 명령자들은 자신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법이나 정의, 심지어 신의 명령을 실행하는 자로 꾸미거나 공공의 복리를 위해 하는 것으로 꾸밉니다.(*2)
1. 기독교의 죄론을 계발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황궁의 교사 출신으로서 로마제국의 안정과 질서를 꾀하는 신학자 입니다. 그는 제국을 위해서 민중 기독교인 도나투스파를 학살하는 결정을 했습니다.
2. 대속 기독론은 11 세기 안셀무스에 와서 더욱 강화되는데, 그는 십자군 전쟁을 위한 병사 모집을 위해 대속기독론을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아버지 하나님이 만족하셨다는 만족설을 계발하여, 우리도 예수를 따라 의를 위해 죽어서 하나님을 만족 시키러 가자며 십자군 병사를 모집했습나다. 기독교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썼다는 대 수도원장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이러한 대속기독론으로 격문을 써서 십자군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3.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인 16 세기까지는 진보가 새로움울 찾는 것이 아닙니다.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진보 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중세의 스콜라신학을 버리고 고대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을 비판 없이 수용했습니다.
칼 융은 자연에 담겨있는 정신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우리가 소위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갈릴레오의 예에서 보듯이 역사적 편견에 의해 가리워져 있음을 한탄합니다.
그는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슬프지만 불행히도 사실이라고 합니다.(*3)
필자가 성서 근거를 제시해도 열린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기존 죄론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사실을 보고도 기존 인식을 바꾸지 않는 이유를 노벨상 수상자인 프랑스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보를 뇌가 직접 접하는 것이 아니라 중추신경계가 뇌 의식에 정보를 전달하는데 , 이미 자기에게 수립된 규범에 맞게 틀지워서 변형하고 암화화해서 전달한다. 즉 외부 정보는 그것 자체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의 정보에 맞게 변형되어 온다.(*4)
죄와 법으로부터 자유
바울은 죄를 용서받거나 씻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라고 합니다.(바울이 죄론을 만들었다고 칭송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죄는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며 인간을 기만하는데 법을 통해 들어와서 그 법을 옆으로 제쳐 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통적인 도덕질서 뿐만아니라 이성도 제 구실을 못합니다. 이것이 죄의 목표 입니다.(*5)
세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은 법을 통한 구원 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법대로 살면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위대성은 법은 하나님의 도구이지만 죄도 법을 이용한다는 깨달음 입니다. 즉 그는 죄가 법을 이용해 우리를 범죄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법의 효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법이 가진 정죄와 배제의 기능을 믿음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 즉 그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은 정결규례를 일상화 함으로써 그 법을 지킬 수 없는 사회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했습니다. 기득권 층 안에서도 서로 지키는 규례를 다르게 주장하며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법은 해결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합니다.
유대인의 법치주의는 순혈주의가 되고 배타주의가 되면서 죄인을 만들어내는 기제機制 mechanism 가 되었습니다.(*6)
바울은 예수가 제시한 이웃 사랑을 하면 법을 다 이룬 것과 같다고 합니다.(로마13:8,10 갈5:1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질서인 법이 주主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주主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탈 가치화이고 가치전복價値顚覆 입니다.
이것이 세계 모든 종교와 다른 일대 혁명 입니다.(*7)
우리가 이렇게 죄에 대해 탐구해 나가는 것 자체가 죄로부터 자유하는 길임을 인식하기를 기대합니다.
주석
1. 퀸 앨러리 악의 기원 이가형 시공사
2.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김정현 책세상 155 p
3. 칼 G 융, 볼프강 E 파울리 자연의 해석과 정신 연암서가 2015 101 p
4.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조현수 궁리출판 2010, 62p
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2 새물결플러스 468p
6. 김진호 리부팅 바울 삼인 2013, 229p
7.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55p
다음엔 죄란 무엇인가를 올립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7 (0) | 2021.10.02 |
---|---|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6 (0) | 2021.10.02 |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4 (0) | 2021.10.02 |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3 (0) | 2021.10.02 |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1 (0) | 2021.10.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