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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3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3
2. 죄의식 문제
죄 개념의 시작
서양인에게는 기본으로 죄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다르게 서양인은 고대에 동물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 피 대신 동물의 피를 신에게 바칩니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역대하33:6)
고대의 죄는 채무 의식과 관계합니다. 빚진 감정이라는 말 입니다. 개인은 공동체의 덕으로 살아가는 데 개인의 잘못은 공동체에 채무 의식을 갖게 됩니다. 신앙인에게서의 잘못은 공동체에서 신에게 돌려지어, 신에게 채무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잘못을 죄에서 찾지 않고 어리석음에서 찾습니다.(마태5:22)
세계는 예수가 아니라 유대 의식을 따르게 됐습니다.(*1)
앞서 말씀드린 데로 이스라엘의 죄 개념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전 8 세기에 사회 지도층의 타락과 부패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식한 선지자들이 회개를 요청하며 사용한 용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서양인들의 죄의식은 인류 정신사에 긍정적 요소로 기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만인이 신 앞에 죄인이라는 성찰은 새로운 인간이해로서 인류가 평등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루터의 죄인됨의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여 결국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우울한 부정형 인간 입니다. 루터는 자신이 심판받을까에 데해 항상 두려워했습니다. 로마를 방문해서 교황청과 사제들의 타락과 부패를 보고, 무릎이 깨지면서 무릎 걸음으로 1 천 계단을 오르며 참회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신의 은혜를 찾은 반면에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음으로서 신의 은혜를 찾았습니다.
세상에는 부정형인 종교성 강한 사람과 긍정형인 종교성이 옅은 사람이 있습니다.(윌리엄 제임스)
모두가 같은 신앙관을 가질 수 없다는 뜻 입니다.
신약성서와도 다른 서양인의 죄개념을 동양인인 우리가 그들과 같은 개념으로 따라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예수 당시에는 죄개념이 사회의 기득권층인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자기들의 풍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서 죄를 발견했습니다. 안식일, 음식규정, 절기지키기에서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세리 등이 죄인이 되었습니다.(*2)
이제 죄 개념이 자기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기 위해 작동하는 기제機制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지배층으로부터 정죄와 차별로 고통하는 갈릴리 민중의 죄의식을 벗겨주기 위한 사역을 행하십니다. 죄인이라 지목받는 사람들에게 이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으니 평화하라는 설교 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가난한 민중들의 실존적 범죄를 한 번도 지적하지 않은 점을 주목합니다.
잘못하는 행위는 법적인 개념으로서 범죄이고,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 개념이고 관계적 개념 입니다.(*3)
호세아 등 선지자들이 인식한 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남으로서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진 것이 죄 입니다.(*4)
신과의 관계에 상응해서, 기독교는 반드시 신과의 관계를 이웃과의 관계와 상응해야 하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계의 문제가 죄임을 다루어 갈 것 입니다. 믿음을 신과의 관계로만 인식하면 냉수 떠놓고 비는 미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 부분은 죄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기독교의 죄의식
예수는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했고,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했다는 학자들(김세윤 등)의 해석은 분석하기 좋아 하는 학자들의 습관에 의한 오해 입니다. 바울은 로마제국 전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서 활동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그는 제국에 반역한다는 오해를 줄 하나님나라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고 있는 현실을 하나님나라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대속구원을 위해서 죄론을 세웠다는 것은 로마서를 잘못 해석한 데서 오는 오해 입니다. 바울은 죄를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세력으로 인식합니다.(로마7 장)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예수는 하나님나라 즉 우리 삶의 구원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대속구원을 말했다고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울에 대한 대표적 오해 입니다.
기독교 신학이 정립된 대략 4 세기에서 6 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부들의 관심은 복음서가 증언하는,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죄와 은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5)
기독교의 죄론은 5 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민중의 기독교를 기득권층인 지배층의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민중의 폭발적 지지를 받던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판정하고 로마당국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을 이끌었습니다. 도나투스파가 한 때 배교했던 사제들을 거부하고 지주들에게 반항했기 때문 입니다. 죄 개념은 역사상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누르는 이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의 이땅에서의 구원 사역을 기독교가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즉 하나님나라 신학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구원이 이땅에서, 지금 우리의 삶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구원이라는 우주적 관념적 구원으로 구원관을 바꾸었습니다.(*6)
다시 말씀드리면 그동안 기독교가 사용한 죄는 하나님나라 구원, 즉 종말구원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대속구원에서 사용되는 용어 입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을 그리스의 영혼불멸설을 받아 들여 현재 삶의구원이 아니라 영혼구원으로 인식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철학의 '신성화(theosis)' 개념에 따라 인간의 본성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지점까지 끌어 올려 놓는 것을 구원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가 세례 후의 변화를 몸의 변화라 합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성화와 가톨릭의 정화가 나왔습니다. 이로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우월의식이 생겨서 세상 사람을 죄인으로 차별합니다. 세례 후의 변화는 삶의 변화가 맞습니다.
2.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신에게로 가려는 의지에 따라서, 죄를 선善의 결핍으로 인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보는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잘못된 행위인 범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고, 죄를 의지의 문제로 파악해서 기독교에 혼선이 오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현대 신학자들이(김세윤 김영한 등) 죄가 하나님께로의 '구부러진 의지'라고, 의지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입니다.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을 이어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이 신 앞의 겸손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죄인 신학을 세웠는데
오늘날은 죄인 개념이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정죄 이념이 되었습니다.
한국 신앙인의 죄의식
한국인은 서양 사람들과는 다르게 죄의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제사는 동물의 피로 죄를 씻는 제사가 아니라 밥상을 차려 놓고 신과 함께 먹으며 즐기는 제사 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 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참회를 가르칠 수 없다, 그들은 죄를 모른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원죄도 없고 죄의식도 없는 한국 민족에게 죄를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좌의식, 이대로 좋은가
죄의식으로 도덕적 상태를 유지하려는 열정은 정작 자신들의 죄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7)
자신들 밖의 범죄를 지적하여 차별해야 도덕이 성립되기 때문에 , 그 행위가 관계를 깨뜨려 죄가 발생하는 줄 모릅니다. 그들 자신이 평화의 길을 모르는 죄인 입니다.(로마3:17)
죄의식이란 특정한 희망을 이루기 위해 자기가 수행한 행위에 대해서 내적으로 스스로 내린 유죄 판단 입니다. 강박신경증 환자는 죄의식을 고도로 발전시킨 결과인데,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도덕적이고 양심적 입니다. 즉 죄의식이란 양심의 불안 입니다.(*8)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처럼 극도의 부정형인 종교성 강한 사람은 신에 의해 죄의식을 떨칠 수 있지만, 긍정형인 사람은 오히려 죄의식이 그 죄된 행위를 계속하게 하는 동력 입니다. 죄의식을 없애면 그 죄된 행위는 곧 무의미해 져서 중단하게 됩니다.(*9)
바울은 사랑의 빚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말라고 합니다.(로마13:8) 아무에게도 에는 신도 포함됩니다. 채권자는 형벌을 가하고 채무자는 움추립니다. 신과의 관계와 인간 서로의 관계에 채권 채무의 관계를 갖지 말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삶 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과 희망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고전13:13)
희망은 결여缺如되어 있는 곳, 즉 모자라거나 갖추어 있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있습니다.(*10)
신앙인의 희망이 죄의식에 있지 않고 지금 그리스도인이 받은 하나님나라 백성됨에 있다는 말 입니다.
각주
1.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책세상 395-448p
2. 서님동 민중신학 탐구 동연 259p
3. 폰 라드 창세기 주석 한국신학연구소 129p
4. 톰 홀랜드 바울신학 개요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81-182p
5. 로저 E 올슨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6p
6. 서남동 22-23, 55p
7.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한길사 154p
8. 지그문트 프로이드 종교의 기원 열린책들 122-123p
9. 테리 이글턴 유물론 갈마바람 95-96
10.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영 대한 기독교서회 125p
글을 마치니 Arte 방송에서 베토벤 교향곡 9 번 4 악장이 흐릅니다.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장미빛 오솔길로 나아 간다 •••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어라~~.
다음엔 예수의 죄인식을 씁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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