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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6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6
5. 죄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신과의 관계로 인식하는 종교국가이고 그리스는 인간 문화를 가장 발달시킨 인간 중심 세속국가 입니다.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은 기독교 죄개념이 그리스 인간 중심사상과 결합되며 혼선을 일으켰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 죄개념은 빚이나 의무와 같습니다. 죄 문제를 살펴보고 이어서 그리스 사상과 연계된 문제를 봅니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죄를 범한(하마르타노,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는 게 옳은 가하고 묻자 70 번을 7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하시며 다음의 비유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종이 주인에게 수 백억 원(만 달란트)을 탕감받았는데 정작 그 종이 자기에게 몇 십만 원(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를 주인이 듣고 빚 탕감해 준 것을 무효화했다는 이야기 입니다.(마태18:21-34)
신앙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용서를 받고 사는데, 정작 이웃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용서를 회수해 갈 수 있다는 경고 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가 빚이나 의무와 같으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개념은 사회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난 것을 말하고 개인의 죄를 말할 때는 구체적으로 일어난 상대에 대한 잘못 입니다.
이것이 그리스 사상과 결합하면서, 도덕화되고 일반화 되었습니다.
더불어서 성서의 구체화되어 있고 사실적인 빚이나 의무가 모두 일반화되어 죄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피해 대상이 없는 도덕 문제나 신앙 규칙 전반에 대해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합니다.
그 결과로 다음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1. 죄용서를 신과의 문제로만 인식합니다. 즉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상대는 빠집니다.
2. 신에게 죄용서 받음을 몸과 영혼의 변화로 인식합니다. 즉 자신이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3. 자신과 다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나 비 신앙인을 죄인이라 하며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1 번과 2 번은 다음회 용서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합니다.
이번 글은 3 번에 집중합니다.
한국사회는 신분의식이 뚜렷한 사회 입니다.
신라는 옷 색갈로 백성들의 신분을 구별하였고, 고려는 문반과 무반이 사회를 주도하는 귀족사회이고, 조선은 양반과 상민이 뚜렷히 구분되는 신분사회였습니다.
이것이 동학혁명, 6.25 전쟁을 거치며 단숨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엔 아직도 신분을 가리고자 하는 의식이 뚜렸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족보를 귀하개 여깁니다.
이러한 인식에 산앙인의 죄개념은 차별을 이루는데 제격 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1 세기 이스라엘은 극도로 분열된 사회 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분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견하시며 웁니다. 저들은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걸 몰라서 평화를 모른다.(누가19:41-44)
하나님나라에서 사랑하며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서로 죄인이라고 하며 증오하는 사회를 슬퍼하십니다.
세계 석학들이 유례 없는 한국의 분열된 민주주의를 염려합니다. 청년들은 경쟁에 지쳐 절망하고 소년들은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누란의 위기 입니다.
어째서 신앙인들이 분열의 위험을 모를까요 ?
예수가 유일하게 지적한 죄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개역개정은 실족하게 하면)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마태18:6-7, 공동번역)
예수는 정죄하여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을 죄짓게 하는 행위로 인식합니다. 차별받은 사람은 사회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약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시며(마태18:10) 하신 말씀 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예수 답지 않게 무지막지하게 저주를 퍼부은 말씀 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당시 엘리트 신앙인들이 죄인이라고 차별하고 배제한 약한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죄짓게 하는 사람 즉 살아가는 길을 막는 사람은, 바다에 그냥 빠지면 누가 건져줄지 모르니 목에다 커다란 맷돌을 걸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악담 입니다.
이어서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을 자르고, 죄짓게하는 눈를 빼어 버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실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예수 특유의 과장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타인을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악질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당시 극도로 엄격하게 법을 준수하며 별도의 생활을 하는 엣세네인들과는 대립이 없습니다. 엣세네인들은 성서에 아예 언급 조차 없습니다. 잘난체하며 별도로 자기들끼리만 살아서 남에게 죄짓게는 안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법을 완화하여 실생활에 적용하며 신앙 개혁운동을 하는, 윤리 도덕이 훌륭한 사람들이고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며 묵시운동을 일으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도덕성과 신앙심으로 인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경건한 신앙인들 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과 격렬하게 대립합니다. 예수가 이들에게서 본 죄악은 딱 1 가지 입니다. 그들이 약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며 죄짓게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정죄하여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신은 죄짓는 사람보다 죄를 짓게하는 사람을 더 싫어 합니다. 이것이 예수가 윤리 도덕이 훌륭한 신앙인인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을 그렇게 싫어한 이유 입니다.
현재의 사물들 간에는 합일하려는 생성의 일치가(union of becoming) 있습니다.
악의 본성은 이 생성의 일치를 방해하는 사물의 성격 입니다.(*1)
기독교 사상가 폴 틸리히와 자끄 엘륄, 철학자 폴 리꾀르 등은 죄의 근원적 의미를 분열로 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타인을 소외시키는 상황을 죄라고 합니다.(*2) 즉 화해하지 않고 정죄하여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죄 입니다.
죄는 인간의 소외 상태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개념 입니다.(*3)
기독교 죄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개념은 소외 입니다.(*4)
기독교 죄의 핵심은 사회의 범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반역 입니다. 따라서 불법인데,(요일3:4) 인간 세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입니다.(*5)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게 죄인데, 예수는 신과 인간이 화해하고, 인간 서로 간의 화해를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바울, 칼 바르트) 하나님의 뜻은 경건이 아니라 화해 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화해보다는 변질 예방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즉 순수성을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합니다. 변질을 막고 순수성을 지키는 사상은 플라톤이 세웠습니다. 그는 하늘의 본질은 순수하고 하늘의 그림자인 땅은 타락으로 파악합니다. 플로티누스는 이러한 타락을 신성화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신플톤주의라고 합니다. 신성화 사상은 신플라톤주의 핵심사상 입니다. 이것이 5 세기에 아우구스티누가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때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화해가 아니라 순수성을 지키는 경건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화해에 관심 없는 한국 교회는 예수가 주님이 아니고 플라톤이 주님 입니다.
19 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죄를 윤리 도덕 문제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신플라톤주의를 답습한 고대 기독교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 죄란 윤리 도덕 문제가 아니라 존재 현상 입니다.(*6) 즉 신앙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가에 있다는 말 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1 세기 유대인보다 윤리 도덕 수준이 현저히 낮으면서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차별하여 배제하는 것은 유대인들을 훨씬 능가합니다.
경건한 신앙인들이 타인을 죄인으로 지목하는 순간 그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빠집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마태12:31-37) 하나님의 뜻은 화해에 있습니다.
태극기부대를 이끄는 전광훈 목사는 경건한 신앙인 입니다. 검소하고 물욕이 없습니다. 강남 대형교회들의 부패를 보며 청교도 영성훈련을 세워 전국의 목사 수천 명이 교육받았습니다. 전광훈 목사가 모르는 것은 화해 입니다.
설교자 유진 피터슨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배제하는 죄는 특히 신앙인들이 걸리는 경건병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J C 베네트는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신앙의 타락이라고 합니다.(*7) 물론 세상을 차별하고 정죄하는 경건을 말합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을 세상과 분리해 세상을 정죄하는 태도는 세상과(World) 세대(Age)를 구분하는데 실패했기 때문 입니다.
(로마서 12장)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부에 대한 집착, 형제와의 재산 싸움, 과소비, 약한 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갑질은 일상으로 하면서 영화, 대중가요, 스포츠, 오락, 게임 등은 세속이라 하며 멀리하는 신앙인은 실패한 신앙인 입니다.
도둑님은 세상이고 도둑질은 세대 입니다.
이제까지 죄에 대하여 이야기한 필자의 목적은 다음 말이 하고 싶어서 입니다.
스스로 죄인 틀(framework)에 갇혀서 자기비하나 겸손한 척하여 세상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말고,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졌거나 비 신앙인을 정죄하여 배제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는 인간성을 잃은 행위이고 아름다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 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이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 입니다.
죄를 가볍게 보려는 태도나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신 대속 기독론을 부정하는 태도는 올바른 그리스도인 자세가 아닙니다. 대속 기독론과 구약을 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는 꼴 입니다. 대속 기독론은 다음회 용서란 무엇인가와 그 다음회 십자가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합니다.
죄가 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과 그 죄의 조종으로 범죄하는 것 사이의 구별이 사실상 어렵습니다. 바울의 진술을 봅니다.
탐내지 말라는 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 입니다. 죄는 이 계명(법)을 기화로 내 속에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로마7:8 공동번역)
법은 하나님 도구지만 죄도 법을 이용합니다. 도덕 결함뿐만아니라 이성과 법을 통해서 오는 탐욕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탐욕은 이성과 법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탐욕이 죄의 근원 입니다.
19 세기와 20 세기는 이성과 과학 만능 시대였습니다.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슴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인간 탐욕으로 인한 과소비는 기후환경을 악화하고 생태환경을 훼손하여 지구를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듭니다. 생산 증가가 목표인 자본주의 경제체재는 탐욕으로 인한 끝없는 무한경쟁으로 낙오자를 만들고 사람을 피로하게 하여 인간성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탐욕으로 인한 개인 죄와 사회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1. 도널드 W 셔번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입문 오영환 서광사 2010, 275p)
2. 폴 틸리히 조직신학 2 한들출판사 44-61
3. 자끄 엘륄 자유의 윤리 1 김치수 대장간 2018, 92p
4. 폴 리꾀르 악의 상징 문학과 지성사 양명수 2017, 94p
5. 헤르만 바빙크 개혁파 교의학 존 볼트 편 장호준 새물결플러스 2015, 641p
6. A J 맥컬웨이 폴 틸리히 조직신학 요약과 분석 한재범외 한들출펀사 2020, 38p
7. 조셉 플레처 상황윤리 김동수 규문각 서울 1968, 230-231
다음 회엔 예수의 죄용서가 무엇인가를 올립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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