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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4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4
3. 예수는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실히 신앙생활하는 어느 부인이 나를 찾아와 상담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었는데,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가 어머니가 죄가 있어서 아들이 죽었으니 앞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며 웁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개인의 정죄뿐만 아니라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졌거나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여 불화합니다.
사회가 기독교에 대해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성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이상한 우월의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신학도 따른,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된 서구신학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개인의 신적 경험을 강조합니다. 내가 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를 떠나서 전체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서구신학은 놓쳤습니다.
어떤 이념이든지 고착화 경직화되면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통일성 안에서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자기가 믿는 이념이나 신념을 고집하며 배타하여 신앙인과 사회가 멀어지게 됩니다.
나는 기독교가 우리사회를 깨우는 소명을 마감하고 이제는 우리사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어가는 현실을 보며 이 글을 씁니다.
우리는 앞에서 니체가 기독교(세계)는 예수를 따르지 않고 유대교를 따른다고 지적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누가복음 13장)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로마총독 빌라도가 갈릴리의 저항세력을 학살하여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었습니다.
또 망대가 무너져 18 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병이 들거나 재난과 죽음이 죄가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 보기에도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께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의 대답 입니다.
1. 그들에게 죄가 없다. 굳이 있다면 사회가 연대하고 있는 죄로서 여러분보다 적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지금 물으신 것이 아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 생전에 이러저러한 생존의 죄가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죄를 묻지 않으시니 여러분도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 입니다.
2. 하나님이 죄를 지금 묻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새로운 삶(회개)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가 1. 정죄하지 않고 서로 용납함과 2.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예수를 따르지 않고 정죄하며 배제하는 유대교와 플라톤을 따른 이유 입니다.
1. 성서시대가 가고 2 세기 신학이 성립될 때
교부들은 예수가 왜 하나님인가와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그리스 철학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요한 관심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가 우리에게 어떻게 살으라고 한 내용은 잃어버렸습니다. 즉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2 천년 동안 하나님나라 신학을 잃었습니다.
2. 루터가 로마서에서 믿음의 원리를 계발했는데, 그것이 로마서 저자인 바울의 의도와는 다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혈통으로 선택했으나 이제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선택을 했으니(로마3:28)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서로 용납하고, 그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합니다.(빌2:12)
바울은 이제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칭의稱義를 만들었습니다.
루터는 이것으로 가톨릭의 공로로 구원받는 다는 공로구원관에 반대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믿음 구원관을 만들었습니다.
루터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칭의는 바울의 의도와는 다르게 완전구원으로 인식되고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상한 우월의식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닙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 입니다.(로마7:14-25) 우월의식과 죄인의식은 솔직하고 따뜻한 예수의 인간성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인간성 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자세는 세상과의 연대에 걸림돌이 됩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칭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로마3:22)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인데(로마3:30, 11:32)
루터는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으로 고백하여 바울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놓쳤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셨다는 칭의를 말한 1 차적 의도는 이제는 세계인도 하나님이 믿음으로 선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백성이라는 우월의식을 버리고 세계인과 평화하라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이것으로 다시 유대인과 같은 우월의식을 갖으니 통탄할 노릇 입니다.
바울은 이 칭의를 화해의 동력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납했으니 자유파는 경건파를 없신 여기지 말고 경건파는 자유파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로마14:3) 이렇게 용납에 관한 칭의가 로마서에 42 번 언급됩니다. 칭의 즉 상대를 의롭다하여 용납함의 결과가 평화 입니다.(로마5:1)
다시 죄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유대교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한 번도 죄를 유추해 내지 않고, 예수도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을 죄인이라 하지 않고 의롭다고 용납하시어 친구를 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말하는 죄란 원죄도 아니고 살아가며 일으키는 실존적 범죄도 아닙니다.
개신교의 날마다 죄인이라는 죄의 비관주의는 성서적 근거도 신학적 근거도 없습니다.(*1)
필자는 자신이 저지르는 실존적 범죄를 하나님과 상대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구체적 범죄도 지목하지 않은채 죄인 코스프레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의 뜻이지 예수의 뜻이 아님을 말하는 것 입니다.
예수는 평화를 반대하며 차별과 배제를 일으키는 불의와 폭력 행위를 죄로 봅니다.
예수는 사회가 죄인이라고 낙인 찍은 세리, 병자, 성 매매 여인, 가난한 사람들을 심하게 편듭니다. 그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그들을 버린 사회에 저항 합니다. 기득권을 만들어 자기들의 세계만을 위해 사는, 사회 질서를 세우고 지켜 가는 장로들과 세상을 돌보고 보호하는 직책을 맡은 대제사장들과 하나님나라가 오기를 대망하여 묵시문학을 일으킨 서기관들을 향하여 저항의 행진을 감행하여 그들의 손에 죽습니다.(마태16:21)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는 성직자들이 번성할 수록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성직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먹고 살며 마음을 죄악에 둔다고 합니다.(호세아4:7-8)
종교의 성공은 세상을 불편하게 합니다.
한국교회의 실정도 이와 같습니다.
교인을 개인 죄에 가두고 사회의 불의를 못 보게 하는 것은 세상과 화해하는 새로운 삶(고후5:17-21)을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행위 입니다.
교회가 죄인 의식을 퍼트리는 일은,
강한 자들, 사회적 안정을 이룬 자들이 사회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 감염병에 걸린자, 동성애자, 이혼한 가정과 그의 자녀, 자립할 수 없는 노인, 사회 진출에 실패한 젊은이 등을 죄인 취급할 수 있고 본인들 스스로도 죄인 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돌봄에, 성직자의 관심에 적대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가 서로 신뢰를 갖는 게 중요합니다.
상대를 죄인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 존중하여 사귀는 것이 우선 입니다.
개신교는 언제나 시선을 개인에 두고, 또 이 땅의 삶에 두지 않고 영혼구원과 하늘의 천국에만 두어서 구조적 죄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합니다.
종교개혁 칭의론은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 권리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선택한 칭의(용납)를 보지 못했습니다.(*2)
그 결과로 신앙인들이 세계의 사회경제, 자연, 생태계에 일어나는 불의에 침묵하게 됐습니다.
신앙인은 내가 가진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나에게 오는 힘(성령)으로 삽니다. 그 오는 힘과 함께 이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죄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약자와 가난한자를 차별하여 권리를 박탈하는 죄에 저항하고, 편리함과 익숙함, 습관화에서 오는 죄에 저항하는 것이 죄로부터의 자유고 믿음 입니다.
각주.
1.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영 김균진 대한기독교서회 2017, 198p
2. 같은 책 201p
다음엔 바울은 죄를 어떻게 생각하나를 올립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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