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하나님 영광을 현시
영원하고 무한한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존재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었으니, 하나님 옆에 기존의 물질이 있어서 그것으로 만물을 조성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무에서의 창조를 처음부터 당연하고 확실한 것으로 가르친다. 이교사상은 무에서의 만물창조를 알지 못하고 세계가 영원부터 존재하고 그 안에 신적 존재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말하거나, 만물 자체를 신(神)으로 보는 범신론의 형태를 취하여 신과 만물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였다. 천지창조를 조금은 아는 고대 중동 특히 바벨론의 신화에 의하면 주신 말독(Malduk)이 그의 대적 티아맛(Tiamat)을 쳐죽이고 그의 피와 시신(屍身)으로 현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천지의 발생은 신의 선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 원수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방의 다신교 세계에서는 신들이 인간세계에서처럼 주도권 쟁탈을 벌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주도권을 장악한 신이 그 다음 조치로 천지창조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은 잡신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인간의 상상력의 투사일 뿐이다. 이에서 조금 진보한 것이 소위 신과 물질의 동등 영원성을 주장하는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의 우주론에 나오는 천지창조이다. 여기는 물질이 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물질은 유래처가 없어 신과 동등하게 영원하여, 신이 물질 위에 그의 지배권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도 영원히 흘러가는 형태로 있어서 신이 물질을 어거할 수는 없으나, 기존한 물질을 변용시켜 현 우주로 치장하는 일은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신의 섭리와 경륜이 있을 수가 없어서 물질세계의 영원 유동(流動)에서 나오는 운명이 세계를 지배한다. 이 필연적인 운명 앞에는 신들도 전적으로 무력해서 인간들에게 닥치는 불행이나 재난이 운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신들도 인간의 불행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당하는 재앙이나 불행을 보고 자비나 긍휼을 베푸는 것이 불가능하다. 많이 여행할 수도 없었고, 육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만상을 관찰할 수 없었던 고대인들도 이 우주의 크기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헤아릴 수없이 크고 넓어서 그 시작과 끝을 잴 수가 없었고,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음을 알게 되니 이 거대한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무로부터 발생했다고 믿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거대한 천체들과 삼라만상 앞에 신비와 두려움만을 느껴 신들로 경배하기에 바빠 합리적인 혹은 바른 사고와 추리를 우주의 발생에 관해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고 할 것이다. 거대한 우주가 인간들의 작은 심사를 위압하고 또 치니 두려움과 공포가 앞서고 다른 사고와 반성을 갖기가 어려웠다.
본래가 아무리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라고 하여도 우주의 기원이나 그 크기는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해야 바를 것이다. 지금처럼 자연 위에 인간이 세력을 크게 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마음껏 관찰하고 탐구할 수 있어도 현대의 문명 이기로도 가상적으로 계산된 크기의 우주를 7퍼센트 밖에 관찰하지 못하며, 현 은하계의 연대와 크기의 계산도 다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별들 간의 거리계산도 거의 확정적인 근거가 없는 상상적인 거리의 추측일 뿐이다. 천체를 연구하는 일을 수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수백 년 진행해 오고,또 최첨예 기구들을 동원해서도 거대한 우주 앞에서 천문학자들이 계산할 수 없는 한계를 봉착하고 겸허해 한다면, 옛날 현인들도 그들의 지혜의 섬광이 섬뜩이기는 했어도 무지한 궤변만을 산출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해야 바르다. 우주의 기원이나 크기에 대한 현대의 계산과 연구도 얼마 후대에 가서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이고 계산하는 머리로는 해결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우주의 기원과 크기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그러면 우주의 발생에 관한 바른 지식은 우주의 발생 근원으로부터 와야 바르다. 조물주가 이에 대한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바르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성경 창세기와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나타나있는 우주의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계시에 의하면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이고, 기존물질의 변용이 아니어서 물질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곧 전능한 그의 힘의 역사의 결과이다. 만물은 무에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무에로의 창조이다. 왜냐하면 만물이 있기 전에는 무를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른 것으로부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유래되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존재에서 만물이 흘러나오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신의 존재에서 흘러넘쳐 나오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가설은 이교세계에서나 가능한 유출설(流出說)이다. 희랍 철학의 마지막 완성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가 이런 가르침을 베풀어 인간의 구원을 신과의 본질적인 융합 내지 합일에서 구하는 범신론적 신비주의를 창출해냈다.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창조를 이루신 것이 아니다. 여기는 창조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일이어서 창조가 필연적이고 하나님의 존재에 의한 필연적인 귀결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밖에 전혀 새롭고 전혀 질적으로 다른 존재를 설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 다른 존재의 설정에 대한 계획이나 경륜을 다른 데서 도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기 스스로 하시고자신으로부터 하시는 하나님, 곧 자족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 안에 창조에 대한 경륜을 가지셨다. 우연한 기회에 혹은 어떤 시점에 창조에 대한 모든 계획과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창조에 대한 경륜, 곧 계획과 작정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은 자족하시는 존재이실 뿐 아니라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시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실 것을 뜻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갖고 계시는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와 손의 열매를 바라보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식 안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뿐 아니라 지혜와 권능으로 이루실 창조에 대한 모든 계획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실현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창조의 시발자요, 유래처요, 계획자이시며, 실제 수행자이시다. 그의 의식, 곧 그의 지혜가 모든 계획을 다 수립하셨고, 그의 전능이 모든 계획을 다 수행하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시니 무한대한 우주와 그 모든 미세한 부분들을 다 고안하셨고 창조 후 그들의 진행 과정도 다 작정하셨다. 창조후 그 피조물들이 따라서 움직일 법칙과 궤도와 그 사물 본성들을 다 고안하셨다. 그의 지혜가 무한하므로 거대한 천체들 뿐 아니라 그것들안의 미세한 조각들이 잘 결합되고 조화되어 그것들의 본성을 이루고 그 본성에 맞게 움직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각 사물의 크기와 그 본성과 법칙과 우주에서의 위치를 다 계획하고 작정하셨다. 또 가장 미세한 먼지와 물질형태를 다 계획하고 작정하셨다. 다 그의 무한한 지혜에 의해 계획되고 작정되었으므로 생물이나 무생물이거나 간에 그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거기에 또 기기묘묘한 세계가 전개되고 진행되고 있어서 감탄과 경탄을 유발함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작정하여 그것들을 자기 밖으로 나타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유래되게 하신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이어서 계획과 설계를 세워도 그 계획들이 자기 밖에서 실현되려면 그렇게 하기 위한 재료와 도구가 자기 밖에 있어야 한다. 이미 있는 것들을 활용하여 성취하지 자기가 무에서 그런 재료와 도구까지 산출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달라 자기의 계획과 작정을 실재가 되게 하기 위해 기존물질의 활용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해 내셔야했다.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의 경우와는 달라 하나님의 그렇게 아심이 사물을 곧 그렇게 있게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곧 자기 밖의 실재로 구현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이 구현을 위해 단지 말씀만 하시는 것으로 충분하고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창조 말씀이어서 그 말씀이 창조력을 갖는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설계를 구현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 창조 말씀은 존재케 하는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권능을 가지시므로 그 말씀하신 것을 하나라도 이루시지 못하시고 실패하시는 법이 없다. 말씀하신 것은 즉각 실재화 되었다. 그의 무한한 권능이 그 말씀에 동반되어, 그 발하신 말씀이 즉각 발생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지혜가 밖으로 실재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창조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서도 자기창조 진행을 보시며 만족하셨다. 왜냐하면 그 조물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결정(結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가 종결되었을 때에도 그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시며 만족하셨지만, 창조의 진행과정에서도 그것들을 보시고 기배하시며 만족하셨다. 이것은 6일 창조 기간에 하루 창조가 끝났을 때마다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심에서 증명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지혜와 권능의 산물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즐기신다. 하나님은 이 자기의 지혜와 권능을 즐기시기 위해 창조를 진행하시고 이루어내셨다. 하나님은 이 자기 만족과 즐김을 위해 창조를 이루셨다. 피조물들을 보시고 즐거워하심은 그 조물들에 자기의 지혜와권능이 나타나 있고, 또 그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 하나님 자신에로 반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피조물에게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반사됨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 자기의 창조를 보실 때마다 거기에는 자기의 지혜가 가득하고, 또 그 지혜가 번쩍번쩍 빛을 발하며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만족하시며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이 자기 만족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고 운행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현시되고 반사됨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우주는 그러므로 그 전체로 또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반사한다. 따라서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은 우주를 자기의 영광의 무대로 자기 앞에 두셨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고 반사한다. 가장 큰 천체에서부터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빛나고 그의 권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우주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현시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영광의 현시 이상(以上)을 바라셨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찬송과 영광 반사를 알고 의식하면서 이 영광을 증거해 주는 자를 바라셨다. 이 우주의 합창과 영광송에 동참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주는 자를 바라셨다. 또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그 세력들에 맡겨두시지 않으시고 친히 보살피시며 운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자를 바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송이 수 천 수 백만의 가슴에서 배가(倍加)되고 확대되기를 바라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지혜로 이 만물들을 만들어내셨는지를 사물들을 탐구하므로 자기의 지혜를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자를 두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실제로 창조된 피조물을 탐구하여 봄으로써 그 탐구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을 감탄하고 찬송할 수 있기를 바라셨다. 즉, 하나님의 영광의 증인을 갖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런 조물을 만드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의 증인이 되고, 그의 지혜와 지식을 탐구할 수 있으려면 그런 존재는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과 비슷한 면을 갖는 존재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했다.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순종하고, 그 본성대로 움직이는 일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 말을 주고 받을 수 없고 교제할 수없다. 다른 피조물들의 경우는 일방 통행이라고 해야 바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양방 통행을 할 수 있는 존재, 곧 하나님과 말을 주고 받고 의논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방해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만드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그런 존재를 자기의 복사로 곧 자기를 그대로 반사할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드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복사물 혹은 형상이어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방해서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떠맡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존재, 곧 지 ·정 · 의를 갖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모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반사체를 아담 곧 사람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자신의 복사를, 곧 형상을 만드시는 일을 보통 피조물들을 지으시듯 만드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짓기 이전의 모든 만물은 말씀으로 "무엇이 있으라," 즉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내라"고 명령만 하심으로써 6일 창조를 이루셨다. 그러나 지금 만들려고 하시는 조물은 특별한 조물이요, 하나님의 복사물이요, 형상이 될 것이므로 특별한 창조 과정을 밟으시기로 하셨다. 그것은 곧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렇게 하기로 자신과 의논하셨다.
하나님이 자신과 의논하시고 자기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의 권능과 엄위를 반사물로 혹은 복사물로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고, 의지와 감정과 판단력을 가져 하나님과 대화하고 의논할 수 있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방해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일부 떼어 맡기기로 하셨다. 그것이 바로 땅 위의 모든 생물들 곧 바다의 물고기, 공중의 새, 짐승들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들과 지구를 지배하게 한 것이다. 통치는 본래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이 통치권을 그에게 위임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자기의 대리 통치자가 되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통치자로 지으심으로 우주의 창조가 완성되고 종결되게 하셨다. 자기의 통치를 대신할 자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은 안식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리 통치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세워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모방해서 하면 하나님의 반사요, 복사물 곧 그의 형상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일하신 것처 럼 그도 그 지혜를 본받으면 하나님의 형상이요, 또 하나님께서 권세있게 일하신 것처럼 그도 힘있고 당당하게 일하면 그는 또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그는 위임받은 통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맞게 다스리면 곧 하나님께 물어보고 그 입의 말씀대로 다스리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바로 이렇게만 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의 반사요 복사물이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엄위를 가지신 것처럼 그도 통치권을 가졌으니 위엄과 권세를 나타낸다. 이렇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손에 우주 혹은 지구의 통치권을 맡기심으로써 우주의 운명도 그의 손에 맡기신 것이다. 아담이 어떻게 행동하고 선택하며 결정하느냐에 따라 우주의 역사의 방향과 진로가 결정되게 되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과 책임을 지고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영광의 무대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매일 생활에 있어서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다. 아담 자신이 친히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아담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우주 만물들도 하므로 아담은 이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또 주관하는 책임을 졌다. 즉, 그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봉사할 책임을 지고 서 있다. 아담이 해야 할 첫번째 책임과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또 만물의 찬양송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이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즉, 만물을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일이다. 아담에게 있어서제사장으로서의 책임이 첫째가고 제일 크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첫째 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들로부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그들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피조물과 특히 아담은 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이 책임을 저버리면 그는 벌써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자신을 찬양하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그들의 통치자인 아담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가장 의당한 것으로 정하셨다. 찬양대에 지휘자가 없이는 화음된 찬양이 나올 수 없고 불협화음만 나와 찬양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만물 위에 그 통치자로 세워졌다.
이 면에서 볼 때 창조는 성전의 구조를 갖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구는 사람들의 거소이지만 또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다. 지구 뿐만 아니라 전우주가 다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 처음 지어질 때부터 또 그 본성상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의 구조로 축조되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 찬양을 돌리는 일은 우주만물의 찬양에 자기 목소리를 합하는 것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이 우주를 다스려 그 신비를 캐내고, 하나님께서 만물들을 지으신 그 지혜와 권능과 그 도안을 발견해내고 이것을 인하여 감탄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면 그는 또 하나님께서 바라신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사장과 통치자로서의 임무가 상호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 26에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는 말씀의 '다스리게하라'는 말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듯 칼의 권세로 억압하고 통제하는 뜻만이 아니라, 사물들의 본성을 밝히 앎으로 그것들을 그 본성대로 알고 그에 따라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아담이 처음 통치권을 받았을 때는 지금처럼 사물들을 연구하여 비교하고 대조하며 분석하고 종합하여 학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안 것이 아니고 직관적으로 봄으로 그 본성을 알았고 또 그 지식에 의해 사물들 특히 생물들을 어거하고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19~20에 나타난 대로 아담이 생물들에게 이름을 주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준 이름은 그 사물의 본성에 완전히 상응해서 그 사물들의 이름들이 되었다.
아담이 직관적으로 그 본성을 바로 앎으로 생물들을 자기의 권위와 통치 아래 두어 어거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이며, 또 그 본성을 알고 다스리므로 사람과 생물들 간에 무슨 부조화같은 것이 전혀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의 지성과 사물들 주위가 어두워져 새로 만나는 사물들의 본성을 바로 직관적으로 알지 못하고 분석과 종합 등의 연구와 시행착오를 통해서 안다.
타락 전에는 아담이 이름 부르는 것마다 그 이름이었고 그 이름은 그 본성의 바른 표현이었으므로 동물들과 아담 간에 아무런 부조화나 괴리가 없이 유기적인 연결이 잘 되었고 잘 조화하여 아담은 완벽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의 통치자 곧 왕으로 세우시므로 사물의 본성을 잘 알뿐 아니라 그 본성들을 바로 앎으로 그것들을 활용하기를 바라셨다. 사물들의 본성을 잘 앎으로 그 창조된 현상대로만 알 뿐 아니라 그 현상을 넘어가 새로운 형태의 이용을 바라셨다.
하나님이 새것들을 만드셨듯이 그것을 모방해서 새로운 활용과 응용이 있기를 바라셨다. 이런 것도 다 아담의 통치권에 귀속되었다. 사물들의 본성을 아는 면에서는 아담이 하나님의 선지자이나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그의 통치권에 귀속한다.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새 것들을 만드셨듯이, 그의 창조 활동을 모방하여 이미 알게 된 지식으로 새로운 상황을 형성하여 진보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주를 모방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이 이렇게 자기의 창조를 활용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바로 이 활동이 하나님의 복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그 본성들을 알뿐만 아니라 사물의 모든 구성과 작용 법칙과 그 도안을 알아내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일이므로 하나님은 이 일을 기뻐하셨다. 사물들의 탐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현시해 드리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현시될 때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있는 한은 창조주의 지혜를 보고 감탄하며 그 지혜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 면에 있어서 아담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 것이다.
통치자로서 사물을 다스리고 탐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로의 탐사이고 모험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창조를 그 종류대로 분야별로 탐구할 때마다 거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현시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탐사 지역은 다 하나님의 지혜를 현시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며, 또 이것을 탐구하도록 우리에게 조물주께서 위임해 주신 책임의식이 함께 발동하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생물들의 조직과 그 활동방식을 연구함으로써 그것들이 어떻게 그같이 활동하도록 만들어졌는지 그 활동방식과 생존 목적을 알아내도록 하는 bionics란 학문이 신속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곤충들과 조류들의 생태를 더 쉽게 이해하고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학자이고 천체 물리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젝커(Carl frie-drich von Weizsacker)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즉 물리학자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안으로 만물들을 만드셨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탐구가 결국 조물주께서 어떤 도안으로 각 사물들을 만드셨으므로 우주가 전체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지를 탐구하는데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물들을 체계있게 연구하여 지식의 체계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이 지식의체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에 의해 형성되었으면 하나님의 지식체계의 복사 형태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 지식의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도 지식을 추구하며 획득한 지식을 하나의 유기체로 형성하려는 강한 성향을 갖는다.
각 학문들이 다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노력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들의 지식들을 하나의 체계로 이루기를 바랐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학문이 아직 미개하던 때는 철학과 신학 밑에 여러 학문들을 통합하고 통일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개별 학문들이 발전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룰 수 있도록 방법론이 정립되면 다 철학에서 독립하여 나갔다. 철학에서 가장 늦게 독립한 학문은 아마도 심리학일 것이다. 이제 철학에 고유 영역으로 남은 것은 논리학과 철학사와 존재론인데, 존재론도 재래 형이상학식으로는 다룰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모든 학문들이 상호 유기적 연관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이름 밑에 있는 학문도 그 지식의 양이 많고 분류가 많아져 하나의 통일 체계를 이루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학문의 생명은 유기적 연결에 있는 것으로 자각한 20세기 초엽 비엔나 학파라는 실증주의 과학 철학자들이 통일과학(UnifiedScience)을 시도하였지만 다 물거품 같은 허사였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됨을 파기했기 때문이요 죄의 결과이다. 따라서 현대학문들은 자기 분야를 절대화하여 타 학문들을 자기 학문에 종속시키려는 주의(主義,-ism)들을 생산하였다. 학문은 그렇게 한 체계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고 그 학문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우주처럼 유기적 연결을 해야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기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 본성에 넣어 놓으신 무한한 가능성들과 보화를 발굴해내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은 눈을 뜨고 다시 보면 발굴해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무한대로 자기 창조에다 심어놓으셨다.
이 가능성들과 보화들을 계발하여 활용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가능성들의 계발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를 마음껏 볼 수 있다. 이 가능성들과 보화들이 계발되고 활용됨으로써 인간의 생활을 헤아릴 수 없이 편리하게 하고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근세 과학의 발생 이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가져온 편리를 만끽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담겨진 가능성들의 계발과 활용에서 하나님의 창조주 모습을 인간이 가장 많이 반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성을 계발하여 활용함은 이미 있는 구체적 사물들이 아닌데, 구체적 사물 형태로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그 통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계가 바로 이 가능성들의 계발과 활용이다. 자연의 가능성들을 계발하고 활용하는데 종사하는 자들은 의식하든 못하든 또 자기들의 의지와 합치하든 반(反)하든간에 하나님의 형상의 면모를 나타낸다.
이 우주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들의 계발이 대충 언제쯤 다 이루어질지는 계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세계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자연의 계발 속도가 더욱 급속해지고 그 종사자들의 수가 더욱 빠르게 증가 할 것이다. 근세 과학이 자연의 현상과 그 배후의 법칙을 발견하기 시작한 이래 방법론의 개선과 새로운 정립들이 많이 시도되어, 자연의 신비를 들여다 보는 눈은 자꾸 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타락에 의한 죄의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그 모사 형태로서 갖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에서 지우신 사명을 수행하며 그 책임을 일부 감당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 그 가능성들이 계발되고 활용되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현시되므로, 비록 그것을 탐구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지혜로서 찬탄하지 아니해도 그 현시로 인해 하나님은 영광을 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그 증인들의 눈 앞에 현시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과 문화활동은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그 종사자들은 이에 대한 의식이 없어도 하나님은 본래 자기의 창조에서 가지신 자기의 경륜에 있어서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현시는 오직 지식 활동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계발도 하나님의 지혜의 현시이다. 하나님이 이룩하신 우주의 조화와 통일, 각 사물들의 구성과 대칭, 조화, 그 목적 수행과 본성대로 움직임 등이 하나님을 미의 창조자와 원천으로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지만, 우리의 미의 표현활동은 대예술가 하나님을 그림자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이 소리의 형태인 음악이나 색깔의 형태인 미술이나 형상적인 표현인 조각이나 건축이거나 간에 다 아름다움의 표현은 예술가 하나님의 미적 표현활동의 모사라고 할 수 있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음악가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생산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신학자 칼 바르트(Kar1 Barth)의 지적대로 하나님의 창조를 그대로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연에는 조화와 통일 그리고 생명체적 연결과 통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미적 표현에 가까이 갈수록 아름다움은 더한다. 이런 미의 감상도 그 감상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미적 표현에 연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의 표현에 종사하는 자들도 그냥 그 미에만 도취될 것이 아니고, 그 미가 다 하나님께서 창조에 넣어 놓으신 것의 일부 계발임을 알고 예술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미를 통해서 수고하는 인생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또 미적 표현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위퍼의 지적대로 실락원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며 복락원의 아름다움을 바라고 표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토록 아담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사 자기 영광의 무대에 대리 통치자로 세우시고 자기의 영광을 증거하고, 그리고 반사되도록 하셨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이름을 갖기 바라셨고 그 이름의 명예를 지키시려고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므로 창조주로서 영광을 누리시려 하심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창조 의도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를 산출하심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탐구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인간이 일할 때 하나님의 처음 창조 경륜이 시행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게 된다. 여기서 모든 인간의 활동목적과 아담의 통치권을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하셨다.
인간의모든 활동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므로 하나님의 통치를완전히 실현해 드리도록 인간의 우주 지배권이 행사되기를 바라시고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창조가 자기의 나라가 될 것을 작정하셨다. 아담은 자기를 대신하여 창조를 다스리고 계발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찬양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셨다. 모든 아담의 후손이 다 동일한 본무를 수행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시고, 모든 창조가 계발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 인간이 다스리고 계발한 모든 문화활동의 과실들을 다 자기 나라에 편입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에 모든 풍성이 모여오므로 그의 지혜와 권능이넘치게 찬양되게 하셨다.
이와 같이 진행되므로 인간들의 활동이 진행되고 활발해짐에 따라 그의 영광도 더욱 풍성히 찬양받으시게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에서 그의 권능을 무한히 펴셨듯이,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그의 등치가 완전히 행사되어 모두가 다 하나님의뜻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찬송되게 하셨다. 바로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이 작정과 운명을 인간들이 잘 알고 이 뜻을 바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을 자기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아담은 이 사명,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자기 아내와 자기 후손들에게 바로 가르치고 해석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이 하나님의 작정과 해석을 아담은 늘 암기하고 반복해야 했고, 창조의 운명을 그렇게 해석했어야 했다. 자기만 그렇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창조가 자연 상태로 있을 것이 아니고. 계발되고 활용되어야 함을 바로 알아 힘써 계발했어야 했다. 이 계발과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열심히 진행되어야 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통치권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하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땅을 충만하게 채울 뿐 아니라 그것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이 작정 때문에 하나님께서 첫사람을 한 남자로만 만드시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사 그들을 결혼시키셨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많은 백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땅을 충만히 채우리 만큼 많은 자녀들이 생산되어야 했다. 땅을 충만하도록 하는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다.
노아 홍수 후 기껏 8명의 사람만이 남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산능력이 있기는 세 가족뿐이었는데, 이 세 가족으로 홍수 후 빠른 시기 내에 온 땅에 사람이 가득 차도록 축복하시고 섭리하셨다. 지금은 세계의 인구가 50억이 넘어 지구가 감당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 나올 만큼 되었다. 인구가 증가하는 정도가 아니고 폭발하고 있어서 핵폭발이나 핵전쟁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 아우성이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졌다. 나라는 백성들이 자연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산하는 활동을 하며, 문화활동을 하는 공동체이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산하고 활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연구하고 탐구하여 그 법칙들을 알아내서 활용하고, 또 그 법칙을 응용하며 처음 창조 상태와는 다른 상태를 만들어내어 진보하고, 창조에 감추어진 무한한 보화들을 계발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찬송하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들 중에 더욱 풍성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이 더욱 충만하고 완전해지게 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함과 통치하고 정복하는 권세를 주셨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배가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창조를 계발하는 통치권이 부여되어있다. 그러나 창조 후 역사가 얼마만큼 진행되다가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창조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막고 좌절 시켰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자기 자신의 나팔을 위해서 다스리기로 작정하였고, 하나님을 반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거부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주를 다스리며, 창조를 계발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작정된 창조의 운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선포하지 않기로 하며,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 아래 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와 축복에서 끊겨지고 저주와 사망이 그에게 임하여 왔다. 이 사건이 첫 인류의 타락인데, 이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는 고통과 사망과 흑암 등의 적대세력을 하나님의 창조에 도입하므로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영육이 분리되고 그 유기적 연결이 해소되고 영혼이 육체에 지배되고 지성이 어두워지며, 의지가 약해져서 바른 선택과 판단을 못하여 하나님 아닌 것을 탐하고 바라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을 대하여 친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며 감사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또 찬란히 빛나던 창조도 그 빛이 시들어지고 광채를 잃게 되었다. 죄는 과격하여 그 파괴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은사들과 축복들을 다 박탈하게 되었다. 죄의 과격성이 제거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멸절되고 우주도 해체되어 황폐하여 황무지가 되게 되었다.
인간도 바보천치와 같은 상태에 있어야 해서 인간이 비록 생존한다 해도 창조를 다스리고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죄의 과격한 파괴력이 계속되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에 걸으셨던 자기의 영예와 영광이 훼손되고 창조의 목적과 의도가 좌절되고 낭패하게 된다. 조물주로서 하나님은 자기 창조에 이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으셨다. 왜냐하면 창조주로서 자기 이름의 명예가 크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의 과격한 역사를 막기로 하셨다. 죄의 과격한 역사를 억제하고 어느 정도 정상적인 창조 과정의 진행을 가능케 하는 조치를 취하셨다. 이 조치를 통상 일반 은총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이 일반은총이 역사하므로 아담에게서 다 거두셨던 여러 은사들이 다시 역사하고, 우주의 황패화가 중단되며, 죄의 과격한 역사가 제지되고 억제되게 되었다. 이 일반은총의 역사로 인간사회의 시민생활이 가능하게 되었고, 자연의 탐구가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 일반은총을 죄의 과격성을 억제는 하되, 죄의 뿌리는 제거하지 못하나 그 과격성이 그 극에 이르도륵 하는 것을 막아 다시 창조에 역사가 진행되도록 하고, 하나님 나라에로 진행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던 그의 사망선고를 말씀대로 하시기는 하셨으나, 사망을 집행하지 않으시고, 연기 하셨다. 아담이 죄를 짓고도 930년이나 살 수 있었던 것은 일반은총의 역사라고 해야 바르다.
죽음의 독이 아담 안에서 역사하기는 했으나 억제되고 제지되므로 그가 거의 천 년을 살 수 있었다. 일반은총의 역사로 전적으로 타락한 인류 세계에 진리의 파편들과 섬광들이 번쩍이게 되었고, 자연의 탐구와 계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반은총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화란의 아브라함 카위퍼는 일반은총의 역사가 타락 직후 아담과 하와의 숨는 일과 그 범죄 변명에서 벌써 작용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반은총의 역사로 죄의 과격성이 제지되지 못했더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면전에서 마치 사단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조롱하였을 터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기의 범죄를 변명하면서 자기의 죄과를 뉘우칠 수 있었던 것은 다 일반은총의 역사 때문이라 설명한다.
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역사로 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창조를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과정을 진행시키셨다. 아담과 하와를 집행유예 시켜 그들의 생명을 연장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백성들이 출산되게 하셨고, 출산된 인류들로 자연을 탐구하며 개발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공헌하게 하셨다. 진리와 지식과 지혜와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역사가 없던 이방민족들에게서도 찬란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일반은총의 역사 때문이다. 이 일반은총의 역사가 가장 확실히 약속된 것은 노아 언약에서이다. 노아 언약으로 하나님은 인류의 생이 가능하도록 자연의 질서들을 고정하고 확정하셔서 질서와 법이 있게 하셨고, 인류의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류를 속량하시고 창조를 하나님께로 회복할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역사가 진행되게 하셨다. 이 노아 언약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지되고 역사하며, 인류의 생이 가능하고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게 역사한다.
죄와 악을 억제하고 제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일반은총의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정부의 수립이다. 국가의 조직과 운용이 노아 홍수 후의 노아 언약의 체결로 비롯된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땅 위의 통치권을 허락하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칼의 권세로 세상의 막을 억제하고 시민생활이 가능하도록 한 강력한 조치는 국가 정부의 수립과 운용이다. 국가의 방백들은 선을 포상하고 악을 벌하기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요 봉사자들이다. 악이 억제되고 죄가 저지되어 질서가 서면, 비로소 시민생활이 가능하게 되어 인간의 문화활동이 가능해진다.
법이 세워지면 풍습과 습관이 생기고 평화가 세워지므로 사람들이 무정부 상태의 공포와 전율에서 벗어나 지각이 생겨나고 사리를 판단할 수 있게 되며, 이에 기초해서 적극적으로 윤리와 도덕을 정립하게 되고, 시민생활의 상호 교통이 가능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학문과 문화가 발달하고, 예술활동이 이루어져 인간사회가 풍요로워진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 자연을 탐구해서 얻은 진리와 지식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현시하는 일이므로 그 결과들은 하나님 나라에 편입된다. 학문이 발달하고 예술활동이 활발해지는 가장 훌륭한 길은 국가 부가 세워져 악을 억제하고, 죄를 제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도 국가 정부가 세워져 악을 억제하고 벌하며, 선을 포상하고 장려하며, 죄를 제지하지 않고서는 학문이 피어나지 못하고 예술이 꽃피지 못한다. 무정부 상태 아래서는 강간과 약탈과 살인이 생활의 방식이어서 사람들이 공포에 전율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침을 받아 마비되어 바른 판단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 상태보다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과 예술활동이 꽃피는 것 뿐 아니라 인류종족이 번식하고 시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도 국가 정부는 세워져 운용되어야한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국가 방백들에게 권위를 덧입히고 칼의 권세를 맡기시고 또 그에 상응하는 위엄과 부를 허락하셨다. 법질서 수립의 최선의 길은 국가 정부 제도의 확립이다. 국가 통치권의 발동 없이 법질서가 세워져 악이 억제되고 죄가 제지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는 질서의 나라인데, 이 면에 있어서 국가도 하나님 나라의 희미한 반사이고 또 하나님 나라에 봉사하는 기관이다. 또 국가 정부가 하나님 나라에 봉사한다는 진리는 복음서의 증거에서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후에는 세상 권세들이 다 그의 권세에 굴복하게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승천 직전에 천지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고 하셨고(마 28:18), 바울은 이 진리를 더욱 확대하며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0 하반절-22)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 다 그리스도의 손에 위탁되었고, 그에게서 유래하도록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통치권이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고, 또 그에 의해서 배분된다. 즉 국가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 되었다. 하나님의 이 섭리는 하나님의 직접적 구원 기관인 교회와 함께 국가 정부로 하여금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에 공헌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국가 사회에 법질서가 세워지고 죄악이 제거되면, 문화활동이 전개되어 창조에 심겨진 보화들이 계발되고 그러면 그 결과는 하나님 나라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이 면에 있어서 국가 사회는 하나님 나라에 수종드는 하나님의 종이다.
학문과 문화활동이 통상 일반은총의 지반에서 진행되고, 진보하여도 이 지반에서만 이루어질 때는 학문이 창조에 대한 바른 해석을 산출하지 못한다. 파편적인 진리들은 많이 도출해내고 현시하며, 현금 어떤 사태의 발생 과정과 그 원인은 잘 규명할 수 있어서 그것을 응용할 수는 있어도 자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많은 오류를 범한다. 일정한 연구가 종결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야 그 연구를 마감하는데, 그 해석이 많은 경우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연구가들도 다 자기 대로의 편견과 선입주견이 있고, 또 학문 이전에 자기의 종교적 입장과 태도가 있고 또 그 마음에 죄성이 있어서 자연과 세계에 대한 바른 해석과 판단을 내기가 쉽지 않다.
죄성의 영향으로 또 인간 지성에 어두움이 드리우고 있고, 또 연구대상들에게도 하나님의 저주가 있어서 빛을 제대로 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과 문화활동에 종사하는 자들도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활동자 들에게 다 요구하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므로,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의탁하는 길밖에 없으나, 창조에 대한 바른 사전 해석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 사회와 그 조직들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창조에 대한 해석들을 미리 다 해놓으셨다. 창조주로서 창조를 하시고 이 창조와 조물들에 대한 해석을 다 사전에 해놓으셨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의 앞에 놓여있는 대상들은 이제 해석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고 이미 다 해석되어진 것들이다. 창조주께서 창조된 것들에 대해 그 기원과 목표와 사명과 진행 과정을 다 해석해 놓으셨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 속에 그 해석들을 다 담아 놓으셨다. 그러므로 이 조물주의 해석을 받아 그 해석을 재해석해야한다.
모든 피조물은 다 창조주에 의존적이고 또 그의 말씀의 권위 아래 매이는 것이 그 본성이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이는 창조주이고 말씀을 들을 자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또 그 말씀이 창조주의 말씀이므로 그 말씀은 권위로 구속력(拘束力)을 행사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서야 하고 그에 복종해야 한다. 그의 말씀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 볼렌호벤(D. H. Th. Vollenhoven)의 주장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권위적으로 매여야 한다. 학문 활동자들 에게도 이 진리는 동일하게 타당하다. 인간들이 자기의 탐구 대상들에 독창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방적인 해석을 해야 하며 구성적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을 한다. 미국의변증신학자 밴틸(Cornelius Van Til)의 주장대로 유비적 해석(analosical interpretation)을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해석하신 것을 따라서 해석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서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이미 자기의 창조를 다 해석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대상들은 이미 해석된 체계들이다. 창조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에 대한 해석을 해놓지 아니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불합리하다.
그런데 이 사전 해석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의 독창적 해석을 하려고 함으로 많은 오류를 범하고, 그 해석이 곧 폐기되고 방기되는 운명을 겪는다. 또 이 왜곡된 해석을 가장 바른 것으로 주장하려고 하니 주의(主義, -ism)가 되어 타학문들을 억압해서 바른 진보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이즘(-ism)들이 정치 세력과 야합하여 세력을 행사하게 될 때는 독단주의가 되어, 그 이즘에 다른 모든 학문분야들을 맞추느라고, 인접 학문들을 억압하고 비틀어서 고유 영역들의 법칙과 본성들을 살리지 못하고, 비틀어지게 하므로 타학문들을 화석화하고 유희화(遊戱化)한다. 이 예가 동구권에서 공산주의를 절대 진리로. 가장 바르고 정확한 학문으로, 가장 훌륭한 이론으로 주장하여 다른 모든 학문과 예술활동들을 다 거기에 맞추어 해석하고 체계화하느라고 독재와 압제가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 그것이다.
자유주의 세계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유사한 현상들이 있다. 진화론이 모든 학문들이 기초하고 서는 기초로, 기본틀로 여기고 다른 해석법과 방법론은 비과학적이라고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는다. 또 어떤 철학이나 새 학문이론이 득세하면 다 그것을 이즘화(-ismize)해서 거기에 맞추도록 노력하고, 이 유행에 따르지 않으면 시대착오적인 눈으로, 혐오의 눈길로 바라본다. 이런 오류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로 돌아가는데 있다. 하나님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일이 절실하다. 하나님은 창조와 인간 세계에 대한 모든 해석을 다 그의 말씀인 성경에 담아 놓으셨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해석을 받아들여 그 빛에의해 자기들의 연구 대상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을 펴고 거기에 있는 글자 그대로를 옮겨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 도예베이르트(Herman Dooyeweerd)의 주장대로 성경의 중심 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에서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된 많은 해석이 제시되어 있다. 이 해석들의 빛 아래서 모든 연구의 대상들에 대한 해석들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바른 해석을 하는 학문들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기관의 설립이 또 필요하다. 서양의 대학들이 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세워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학문을 탐구하고 가르치며, 학문의 영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 대학을 설립한 경우가 종교개혁 이후에 몇 번 시도되었다.
첫째는 종교개혁 당시 말씀의 사람인 개혁자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를 바로 세우고 전파하기 위하여 제네바 대학을 세웠다. 그 후 약 3백 여년이 지나서 화란의 대정치가이고 신학자인 아브함 카위퍼가 고등학문 영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백 여년 전인 1880년 암스텔담에 자유개혁대학을 세워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아래 세우려고 하였다. 이 개혁운동의 결과로 설립 후 50여년에 자유대학에서 개혁철학 혹은 기독교 철학의 체계가 처음으로 수립되었다.
그 이전에도 않은 신학자들이 로마 교회의 비방과 조롱에 대항하여 기독교 철학 곧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우리의 신앙의 중심 주제에 기초한 철학을 수립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었다. 그러나 개혁신앙의 터 위에 기독교 철학을 체계화하기는 1920~1930년대 볼렌호벤과 도예베이르트에 의해 처음이었다. 로마 교회는 개신교 신앙 특히 개혁신앙은 인간의 전적부패를 가르치므로 건실한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을 세울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카위퍼가 자유대학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 아래서 반 세기 동안 열심히 학문에 진력하니 기독교 철학을 수립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각 학문 분야에서도 기독교 신앙의 원리 곧 복음으로 혹은 복음의 정신으로 학문을 전개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주도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학문을 하면 새로운 학문 분과들의 방법론과 새로운 해석이 마력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맞는 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 조명을 받으며, 힘다해 연구하며, 전능자의 도움을 부단히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이 가르친 바른 해석과 방법을 얻게 되고 바르고 참된 학문들의 진보를 이를 수 있게 되어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우며 그 나라를 확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모든 학문들의 연구 결과들과 인류 생활에의 공헌들도 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룬 업적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속량되어야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납되고 영속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구속되지 못한 것은 영원한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구속된 인류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구속된 창조가 하나님의 거소가 되며, 구속된 인간의 업적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치장하는 장식들과 돌들로 활용될 것이다. 결국 학문과 모든 문화활동들도 다 구속되어야 바른 학문이 되고, 구속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현 창조의 존속과 유지, 그 위에서 진행되는 모든 인류 사회의 생활과 그 활동들도 다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용납받고, 용인되며 또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현 창조를 지키며 보존했고, 또 그의 구속 때문에 보존되어 왔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 때문에 모든 인류 사회의 생활과 활동이 가능하도록 창조주로부터 허락되었으며, 또 그로 인해 가능해졌다. 그러므로 창조에 속한 것들은 속량되어 완성의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실제로 학문도 그리스도의 구속 아니면 진행되고 열매 맺을 수가 없다. 다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용납하셨고, 그 연구의 대상들이 유지되게 하셨으며, 또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창조와 학문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피에 의해 그 결과들이 속량될 것이다.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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