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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 이해-서철원 교수

by 【고동엽】 2009. 5. 10.

 

요한계시록 전체 개요(제 1 권)

 

요한 계시록


 요한계시록은 모든 사건과 사물을 통해서 교회와 목회자들에 관한 교훈을 계시로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 1장 19절로 20절과 이사야 56장 9절로 12절의 말씀이다.계시록의 내용은 요한이 보았던 것이다.

 

 바울도 천국을 삼 층천까지 보았지만 기록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보았던 3층천을 설명하려면 계시록으로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말세의 종들은 비유와 비밀과 암호들을 분석하여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통하여 바른 종이 되는 길과 교회가 부흥할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기주의의 목회자는 사단의 종이 된 다는 엄숙한 경고를 보여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הַחִזָּיוֹן לְיֵשׁוּעַ הַמָּשִׁיחַ

 

 


 이 책을 요한계시록이라 했으나 사실은 1장 1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것이다. 계시란 베일을 벗기다 혹은 드러나게 하다를 뜻하는 ‘아포칼립토’로부터 나온 말이다. 즉 에베소서 3장 3절의 말씀과 같이 계시로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다. 창세전부터 신비이었던 것을 드러내신다고 해서 구약과 신약의 성경과 별도로 취급된 것이 아니라 신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주신 종들 에 관한 비밀들을 요한에게 종합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은 같은 내용으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말세 사건 중 많은 부분 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드러내어 폭로하신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에 많은 선지자들 을 통하여 예언된 부분을 예수님께서 다시 예언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9절과 마가복음 13장 24절은 말 세 사건을 우주의 대변혁으로 묘사해서 몇 마디로 요약해 놓은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도 같은 것이다.

 

이사야 24장 21절로 23절과, 34장 2절로 5절과 51장 5절로 6절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 사건과 같은 내용으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의 대혼란으로 묘사한 구절들이다.하늘의 징조 마태복음 24장 29절의 환란은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고 했다.

 

 계시록 6장 12절로 14절 말씀도 같은 예언이다. 베드로 후서 3장 10절에 주의 날(재림의 날)이 임하는데 도적같이 오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사야 24장 21절로 23절에 여호와께서 만왕의 왕이 되실 때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되 죄수가 되어 옥에 갇혔다가 형벌을 받은 후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장로들 앞에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제 1 장

1장 1절: ‘지시하신 것’은 “에센 마넨”은 “세마이노” 알린다, 혹은 전달한다는 것으로 미래를 지시하신다. 예고한다는 제 1과로서 미리 알리신 것을 말하며 변경이나 취소치 않음을 분명히 하신다. 계시란 뜻하고, 표징, 증거, 이적, 상징, 징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시 하신 것이란 결국 상징적으로 보이셨다는 뜻이다. 즉 문자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계시를 한꺼번에 확실하게 보이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천천히 그리고 문자적이 아닌 상징적으로 풀어야할 것으로 주신 것이다.

 

예를 들면 재림의 때를 밤, 낮, 새벽 등으로 말씀하셨다. 문자적 해석은 엄청난 천재지변의 환난으로 무정부 상태를 연상케 하셨지만 이는 영적인 면이요 육적인 면은 아니다. 현재의 사회보다 조금 낳은 상태일 것이다(살전 5:1-3; 암 8:11-13). 이렇게 계시록은 상징과 암호로 기록되었는데 암호는 비유이다.
 
영적 환란이란 교회 안에서의 비진리가 진리와 싸우는 것을 말하고 땅의 임금이란 교회의 지도자가 제외될 수 없다.예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감췄던 비밀을 비유로 들어 내주셨다(마 13:35; 시 78:2). ‘입을 열어’와 앞에 ‘내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암호를 주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며, 비유로 감추인 것을 드러내실 때 하나님의 뜻을 밝히신다. 이는 구약성경을 인정하시고 구약 성경의 잣대로 신약을 기록해 가시는 과정에서 구약의 예언들을 신약에 와서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사실 설명을 그와 거의 근사한 값에 해당하는 비슷한 것을 설명함이셨다. 즉 하늘나라인 천국을 가지고 오신 분께서 천국은 이렇게 생겼다고 설명하실 때 깨닫는 자의 복이다. 불가견적인 천국을 말씀하실 때 아하 이것이 천국이다. 라고 깨달을 수 있도록 주신 말씀이 비유이다.


마태복음 13장 10절로 16절의 내용의 복은 보고 들음이 복이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하였느니라”(마 13:14-15).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음이 복 이다.

 

성령하나님의 역사로 비유와 말씀이 선포되어 정확하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는 예수님을 영접 치 않아서 세상의 방법으로 해석하니 미래가 염려되어 자기를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외면하게 되며 새로운 사람으로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마 13:13,15; 시 78:2; 마 4:34). 한마디로 믿는 자는 세상에서 망해야 살고 흥하면 죽는다지만 불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설익은 믿음도 세상에서 흥하고 천국에서도 흥하려고 하니 혼란이 온다.

 

보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9장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한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의 말씀은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경과 하나님의 일을 보고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으면 아래 세상의 눈만 있는 영적인 맹인인 이방인이다. 예수님을 믿고서 예수님을 보면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수님 시대까지는 성경으로 내세와 메시야를 보던 사람들이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내세와 예수님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는 못했다. 봉한 성경은 겸손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8장 16절에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고 하셨다.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니 소경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29장 10절에 “대서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하셨다. 여기 눈과 머리를 덮으신 이유는 사
 람의 계명을 가르침이다.
 
이사야 29장 13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여기 사람의 계명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간접 신성론을 보이신다. 이사야 9장 6절에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 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복음 10장 29절로 30절은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셨다. 복음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많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에 36회, 마가복음에서 4회, 누가복음에서 13회, 요한복음에서 16회, 복음서 외에 72회가 나오고 성경에서 232회이다.

 

1장 2절로 3절의 세 가지 복
본문은 요한이 예수님의 대한 증거를 다 보고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말씀 속에 감추어진 그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눈을 가진 자와 지킬 수 있도록 허락된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1장 4절로 6절의 교회에 대한 문안
 초대 교회의 일곱 교회에게 문안하는 인사의 형식을 갖춘다. 7은 완전 숫자로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 아시아에는 7교회 외에 밀레도, 아드라믓데노, 앗고, 드로아, 골로새, 히아라폴리스 등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니 완전 숫자의 의미로 완전한 교회의 문안이다.

 

1장 5절의 해방
 인류의 참 평화와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하는 줄로 믿는다. 그 분의 사랑은 그의 피를 흘리기까지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죄 와 사망이 영원히 상관없는 참되 자유를 누린다.

 

1장 6절 귀한 직분
 우리 같이 죄 많은 종들을 하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사명을 감당하는 길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최선이 나를 위함이 아니라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남아 있을 때 귀하다.

 

1장 7절 감추어진 예언
 본문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의 말씀은 구약 다니엘서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 이 말씀은 구약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의  배경이다. 예수님께서도 구름타고 오시겠다고 하셨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그런데 상징적인 말씀들은 암호이기 때문에 구름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신약 에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지만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림주로 불꽃 중에 강림하시고 심판하시며, 천하의 왕이 되시고 모든 성도의 신랑이 되시겠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그 말씀의 주제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본래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신다는 예언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된 것은 근본대로의 재림이다.

 

1장 9절 말씀과 증거의 밧모 섬
8절은 4절을 참고하고 9절에서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있음이 말씀과 증거로 확인된다. 2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 계시록과 증거 때문에 옥살이를 한 것이다. 사람의 삶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믿음의 자녀들은 환란이나 핍박이 온다고 마가복음 4장 17절에 말씀하신다(요셉이 어릴 적에 받은 약속이 응할 때까지 갖은 고초를 당함과 같이 시련을 이겨야 한다. 예수님도  고난으로 온전하신 인성이 되셨다(히 5:8-9).

 

 1장 10절 나팔 소리 같은 음성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포넨 메갈렌 호스 살핑고스”인데 나팔 소리 같은 숭고한 음성을 뜻한다. 민수기 10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팔을 불어야 할 규례를 주셨다. 회중을 모을 때나, 진군할 때, 대적과 싸울 때와 즐거운 날이나 각종행사의 절기에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되 이 규례는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출애굽 신앙에서 출발한 사상으로 사단의 지배아래 있던 이스라엘의 죄가 영원히 속죄되고 자유가 선포되며 어떤 노예라도 모두 해방을 받는 날을 기념하는 나팔을 불어라고 하셨다.
 
본 절의 나팔소리의 암시는 안식일을 확대하여 안식년을 지키며 더 나아가서 희년(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모든 약속이 모형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이라는 기쁜 해를 정점으로 하여 거룩한 해라고 하셨던 그 모든 안식일에 대한 약속을 이루어주신다고 하신 그 해에 나팔을 불게 하신 것이다. 하늘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 때 들리는 소리이기도 하다(출 19: 16, 19).

 

 1장 13-16절 인자 같은 이
 인자란 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자칭 사용하셨는데 본문에서는 그 ‘인자’와는 다른 인자이다. 비슷한 이란 말씀으로 인자를 방불한 이를 말한다. 히브리서 7장에서 멜기세덱을 설명할 때 의의  왕, 살렘 왕, 평강의 왕,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어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이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분이라 했다. 필로는 이분이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는 방불하지만 다른 분이다.

 

히브리서 6장 20절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 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라고 하셨다. 본서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서 7장 13절로 28절의 말씀을 보면 세분이 나온다. 인자 같은 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13절, 지극


 히 높으신 자 18절과 22절에서 세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영광과 권세와 나라를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때의 시대적인  배경이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 되시는 때를 말씀하는 것 같다.

 

세 분의 관계
 다니엘서에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게 되는데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사역자임을 볼 수가 있다. 말세에 짐승이 나와서 성도를 괴롭히고 싸워서 이길 때(21-22)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원통을 풀어줌)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성도를 위한 싸움의 사역자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일을 대행하는 사역자이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는 원어로 “아티크 요민”인데 영원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많은 매우 늙은 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분이 땅에 내려와 만인의 죄를 대속 하신 제 2위의 성자 예수님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역자로도 볼 수 있다.이와 같은 사실에서 인자 같은 이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께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상속 받는 또 다른 인자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말씀하실 때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다(요 14:16). 예수님께서 다른 인자와 구별하시기 위하여 인자 앞에 정관사를 붙여 그 인자라고 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 14:14-16절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즉 인자 같은 이가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이(利) 한 낫을 갖고 추수 심판을 하려고 구름 위에 앉았는데 또 성전으로부터 나온 천사가 인자 같은  이에게 낫을 휘둘러 추수할 것을 명령 한다.

 

그렇다면 그 인자 되신 예수님이 심판하려고 낫을 가지고 오셨다면 그 어느 천사가 감히 명령을 할까? 그러므로 그 인자 같은 이가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천사가 인자 같은 이에게 추수할 것을 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6:2절의 흰 말 탄자와 계 19:11절의 백마를 탄자는 심판주의 모습이 아니다. 심판 주께서 싸우며 또 이기려고 한 표 현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말로 신성 모독이다. 모든 것의 생사화복이 그분께 있어야 전능자이다.

 

그러나 계시록 19장 12절에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는 아는 자가 없고”를 보라 재림 메시야 우리 주께서 친히 오셨다면 이름을 숨기거나 자기 밖에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는 백번 양보해도 예수님 의 본질이 아니라 그 사역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스가랴 14장 1절로 9절에 예수님이 오시는 배경과 천하의 왕이심을 드러내셨다. 이사야 63장 1절로 6절에서는 에돔에서 오시는 심 판주로 화려하고 큰 능력으로 오심을 말한다.

 

계시록 1장 6절과 짝이 되는 말씀은 하박국 3장 3절에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또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신다는 말씀은 이사야 63장 1절의 “에돔 에서 오며 홍의 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실 때와 같이 양쪽 다 심판 주께서 두 장소에서 오시는 것과 같은 그런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데만, 바란 산, 에돔, 보스라가 갖는 각각 그 지역의 뜻이 하나의 예언의 암시로, 예언의 폭을 더 넓게 간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장소가 같은 나라인 에돔이라는 데서 심판 주께서 오신다는 것은 심판 주께서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실 수도 있다.

 

스가랴 6장은 계시록 6장과 짝이 된다. 말세에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얼룩진 말 등을 탄자들이 말세를 심판하는 모습이 나온다. 스가랴에는 말에 탄자들은 없지만 이들은 온 세상에 주 앞에 모셔셨다가 나가는 것이라고(슥 6:5-6)했다. 이 네 필의 말을 스가랴 6장 9절 이하에서는 네 사람을 예표한 사람에게 금 면류관을 씌우고 예언을 하게 하셨는데 그 내용은 ‘순’이라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게 되는데, 그는 결국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위의 1절에 에돔에서 오는 심판 주와 여호와 하나님과는 본문에서 엄연히 구분하면서도 ‘그는 내니’라고 하시는 것은 심판 주 인자 같은 이가 주 하나님의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만민을 밟는(6) 전 세계적인 심판의 때, 심판의 방법은 포도주 틀을 밟는 것(욜3:13; 계 14:19, 20과 병행 구절) 그 심판주가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인 에돔의 큰 도시 보스라에서 온다는 점, 하박국 3장 3절에도 심판 주께서 데만(에돔의 주요 도시)에서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돔과 시내 산 사이의 산이 많은 지역)에서 오신다고 했다.


그래서 예레미야 4장 11절로 13절에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 보라(똑똑히 두고 보라는 뜻) 그가(심판주) 구름같이 올라오나니 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는 심판 주께서 이방 지대에서 오시기 때문에 저 하늘에 있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다니엘 7장 13절을 성경 원어를 살피면 재림 메시야께서 ‘구름 타고’가 아니라 “하늘 구름으로 한 인자 같은 이가 오시리라”이다. 즉 구름과 관련된 사건으로 말씀 하신다. 이때 구름은 인봉된 또 하나의 암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가 구름 같이 올라 온다’는 말씀을 한 것이다.


하박국 3장 3절로 15절은 이사야 63장과 짝이 되는 말씀이다. 9절에 주께서 활을 쏘시는 모습도 스가랴 9장 14절의 심판 때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내실 것이라”고 한 말씀과 병행된 구절이다.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며(13)와 천사의 머리를 창으로 찌르셨다(14)는 말씀은 에덴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후에 하나님께서 옛 뱀(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에게 하신 저주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이다. 15절에서 주께서 심판하신 그 대상을 바다라고 하셨다. 왜 바다를 밟아서 심판하셨는가? 파도가 일어나기 때문에 파도를 밟으신 것이다. 이는 심판이 불신자와 신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고 인봉된 암호의 말씀이다(물=말씀 파도=변질된 말씀).

 

그 선지자(요 1:21, 25, 6:14)
요한복음 1장 21절에 “또 묻되 그러면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부터 모세에게 약속한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다(신 18:18).

첫째 그리스도냐? 둘째 엘리야냐? 셋째 그 선지자냐의 물음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게 약속한 예언이다.

 

이 세분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성취되었고, 엘리야 역시 길을 평탄케 하려고 왔고(눅 1:13-17, 24-31),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했다(마 11:11-14). 그런데 그 선지자는 아직 오시지 않았다. 계시록 11장 3절로 12절에 그 선지자의 활약이 기록되었는데 1260일 동안 예언을 한다. 환란 기 삼년 반 동안 전하면 누구든지 해하려고 한다. 성경은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하며 이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귀한 분들이라고 하였다. 혹은 두 감람나무와 두 금 촛대라고 한다(슥4:1-14).

 

엘리야의 환생
 선지자 중의 한 분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말라기 4장 5절로 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이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들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셨다.

 

구약에 엘리야가 예수님의 증언대로 세례 요한으로서 다시 와서 사명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본문에 말씀한 내용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본문 1절에 말씀한 대로 교만한 자와 악한 자를 마른 풀같이 살라버리는 그런 심판의 때를 말씀하신 것인데 초림 메시야 때는 그러한 극렬한 풀무 불 같은 심판의 때는 아니었다.


말라기 4장 1절도 풀무 불 같은 날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초개로 비유했지만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셨다. 말라기 4장 5절로 6절의 배경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인 말세 대 심판 때의 일이다. 그 때에는 요엘 2장 31절의 말씀같이 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이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초림 메시야 때는 그런 무서운 심판이 아님이 확실하다. 예언의 특성은 깨닫지 못하면 반복적으로 예언하는데 시대를 따라 예언하셨던 것이다.

 

어린 양
 계시록에서 두 선지자 중 한 분이 출애굽 당시 모세가 애굽에서 그 재앙을 행하던 것과 같은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하는 것은 모세의 심령과 능력으로 오신 분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도 인정하실 때 요한복음 5장 4절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로 언급 한 바 이스라엘이 그 선지자를 기다리는 사상이 있다. 누구인가?

 

계시록 15장 2절로 3절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의 말씀에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라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 어린 양은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과 다른 양이다.

 

복음서의 어린 양(암노스)=보통 양, 계시록의 어린 양(아르니온)=보통 양에 미치지 못한 아주 어린 양이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요한복음과 다른 양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니온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직접 통치가 아닌 사명을 받은 ‘인자 같은 이’의 사역이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모세가 애굽에서 공주의 아들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을 설명하기를 11장 26절에 “그리스도의 능욕”이라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 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오실 그 선지자를 모세가 그리스도의 능욕을 받은 그 심령과 능력으로 왔다는 것이다.

 

인자
 시편 80편 17절에 보면 “주의 우편에 앉은 자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가 나온다. 이분은 주의 우편에 앉은 제 2위의 하나님이시다. 잠언 8장 31절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했는데 여기 ‘내’는 지혜이요 인자들이 함께 있었음을 밝힌다. 그러니까 창조 전에 인자라는 사람들이 여려 명이 있음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 인성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말 한다. 욥기 38장 7절도 하나님이시며 인자이신 예수님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자가 많이 있거나 천사 혹은 예수님으로 통하는 고급 천사가 있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심
 다니엘 7장 13절로 14절에 인자 같은 이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게 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5장 27절로 28절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의 해석의 요지는 예수님이 심판하시지 않고 인자됨을 받은 사명 자가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직접 하시면 이상하거나 기이히 여길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 12장 47절에서도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 하노라’고 분명히 하신다.

 

1장 17-18절 죽은 자 같이 되는 경우
 사도 요한이 ‘인자 같은 이’를 대할 때 그 발아래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 것은 흙으로 만든 인간이 거룩하고 귀한 영체를 대할 때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려워 죽은 자 같이 된다. 다니엘도 힛데겔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뵈옵고 죽은 자 같이 되었다(단 10:8-10).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창조의 근본”이라고 할 때 이 근본이라는 말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태초가 아니라 먼저 있었던 선재의 함축으로서 시작을 뜻하는 것과 같이 인자 같은 이가 나는 처음이요 라는 말씀 역시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그런 처음과 나중을 뜻하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단지 유구한 세월을 지나오다가 어느 지점에 와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처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인자 같은 이는 계시록 21장 1절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으로서 나는 처음이요라고 하는 것이며 또 나중 이니라 는 말은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가신 것과 같이 인자 같은 이도 전도서 1장 4절의 말씀대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라는 말씀 따라 그 언젠가는 또 한 세대가 지나가는 그 끝에 가서는 인자 같은 이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들어갈 때를 나중이니 라고 이르는 말이며 하나님께는 나중이 없고 영원만 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 받는 장자들이 그 차례를 따라 생기는 현상들이다. 사람들의 가정에는 장자가 둘이 있을 수 없다. 우리 주 하나님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장자들이 수없이 많다. 히브리서 12장 22절로 24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의 말씀은 하나님의 도성에 있는 구조와 및 그 구성원들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 장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곧 산 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산 자의 의미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할 때 ‘곧’이라는 뜻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같은 뜻으로 연결 지어지는 말이므로 산 자라는 뜻은 곧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산 자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로 정의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문이 말씀하시는 산 자라는 뜻은 숨을 쉬고 활동하는 자체를 ‘산 자’라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온 장자들만이 산 자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고 하셨던 것이다. 문자대로 직역하면 영혼들이 장사(초상)하겠는가? 예수님이 호흡 있는 자들을 보실 때 죽은 자와 산 자가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로 장사 하게 하고 너는 생명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기업을 이어받은 산 자의 행위요 그러한 자가 산자이다.

 

1장 19-20절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
 일곱 별=일곱 교회 사자, 일곱 촛대=일곱 교회로 요약되지만 문자적인 의미로는 하늘의 별과 땅의 목회자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촛대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등불과 교회라면 시 적으로 표현함 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별과 촛대로 말씀하시면 종들과 교회의 암호로 알자. 비밀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계시록의 핵심열쇠이다.

 

계시록의 핵심
 첫째: 1장 19절의 ‘본 것’과 ‘기록하라’를 실천하니 계시록이 되었는데 저자 이름을 붙이니 요한 계시록이 된 것이다.
둘째: 본 것은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시간적으로 구분해서 기록한 것이다.


셋째: 1장 20절에 19절에서 본 것을 한 꺼풀 벗겨서 그 내용물을 보이신 것인데 예를 들면 밤송이를 보았다면 이제는 입에 들어갈 수 있는 밤을 보이신 것이다. 즉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느니라의 말씀이다(19절에서 볼 것이 아닌 본 것이다). 이를 요약한다면 교회와 목회자의 비밀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를 세계 정치로 풀거나 3차 전쟁으로 해석하면 되겠는가?

 

그렇다면 주의 종들의 비밀이 무엇일까? 목회자의 활동사항이다. 문제는 활동이 모두 암호이기 때문에 재림 때까지 각기 제 길로 가고 고치지 못하므로 심판에 이르게 된 무서운 말씀이다. 암호가 아니면 종들은 선택교리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편의 사자들도 사단편의 사자와 같이 암호라는 비밀이 붙어 있다. 계시록에서까지 누가 참 종이고 사단으로부터 온 종임을 구분할 수 없기에 비밀이다. 예레미아 23장 21절로 22절에 보내시지 않은 종들이 있다고 했다.

 

뿌리지 않았는데 싹이 나온 가라지가 있다. 문제는 그들이 시 들어 버리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도하고 열심을 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참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15절에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종교 지도 자들의 소속을 밝히실 때 ‘너희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마귀의 행실을 한’(요 8:44)다고 말씀하셨다. 무섭고 놀라운 말씀이다.

 

회개나 고칠 생각이 전혀 없는 저주 상태이다. 그들에게 마귀의 종이라는 비밀이 붙어 있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성공적인 목회자, 세계적인 성공자로 존경 받는 종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암호는 마귀니라(요 6:70)하셨다. 택함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께 직접 3 년 동안 배웠어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깨닫자. 결론은 말세에도 초림 예수님 때와 같이 재림 때에 주의 종들 중 상상을 초월할 위대한 종들 중에 마귀의 사자가 있다고 교훈해 주신 것이 일곱별의 비밀이다.

 

제 2 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먼저 일곱 교회가 실재한 교회인 것은 많은 문헌들에서도 입증이 된 사실이다. 핵심은 세계적으로 흩어진 교회인 개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신, 불신자).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와 주의 종이 되는 기준이요 본인들의 신앙상태를 점검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1-7)
칭찬 받은 것은 행위의 수고이다. 인내,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 거짓 사도를 가려낸 것, 주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것,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품고 게으르지 아니함 등이다. 우리가 부끄러울 만큼 장점이 많은 교회이다. 2절에 악한 자와 자칭 사도를 드러냄은 어려운 일이다. 물리적으로 악함이 아니다. 성격이 포악하거나 나쁜 죄를 짓는 자는 스스로 드러내니 어려울 것이 없다. 우리 같으면 악한 자를 용납지 않으려면 산 속에서 혼자 살기 전에 좋은 수가 없을 것이다. 에베소 성도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으면 양의 탈이 가짜임이 밝혀졌을까? 이리를 드러냄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리에게 찢기고 상하여 죽을 때에 드러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린도 후서 11장 13절로 15절을 읽었어도 누가 나는 가짜 종이다. 마귀의 종임을 알릴 자가 있으며 양심적일 수 있을까?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이일을 해낸 것이다. 6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속셈을 알았다. 1장에서 3장에 이르는 일곱 교회를 타락시키는 악의 세력이 인격체이거나 비 인격체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날 또 다른 이름들이다. 즉 니골라 당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이세벨이 주는 교훈 등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게 하며, 일곱 교회를 타락시킬 요인을 말씀하고 있다. 십계명과 율법을 볼 때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서운 것 같이 크고 무서운 죄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이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대신 받으려는 악한 범죄를 성경의 지식과 신령한 안목으로 물리쳤다.


그렇지만 에베소 교회가 잘못이 있으니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처음 사랑이란 원문을 살피면 “텐 아가펜 수 텐 프로텐”으로써 ‘그대의 처음 사랑’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가페의 처음 사랑을 소유했다가 버렸다는 말씀이다. 중생의 기쁨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서 촛대를 옮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촛대가 무엇인가?
촛불을 꽂아 받쳐 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계시록의 제목과 같은 19절로 20절의 말씀을 비춰보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를 옮긴다는 것이다. 즉 말세론적인 의미로는 타락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교계에서 불러냈지만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나도 너를 버려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말씀이다. 처음 사랑을 영원까지 있게 하자.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겨야 할 사항들이 많지만 본서에서 말하는 이김과 상대와 보상을 알아보자.

 

생명과를 주심(7)
계시록 22장 2절에 생명수 강가에 있는 생명과가 12가지 열매를 맺는데 이기는 자는 그곳에서 살며 그 과실을 먹게 된다는 말씀이다(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계시록 20장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까지도 집어 삼키는 마지막 불 못인 지옥을 일컬어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된 자만 이 곳을 면하게 된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심(2:17)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좋은 것을 주셨는데 받은 자만 안다는 것으로 출애굽 때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이 소개되었다. 이 양식을 먹은 자가 가나안에 입성한 것처럼 만나의 암호인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 영의 양식인 말씀이 지시한 ‘호 로고스’가 만나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열매를 먹고 영생할 것과 그 성에 들어갈 조건이 계시록이 이루어지는 때에 믿는 자 안에서 예언의 계시록을 제하는 자인가? 모두 소유한 자인가에 따라서 죽고 사는 심판이다. 계시록 자체로도 생명의 말씀으로 감추어진 만나인 것이다.

 

흰 돌을 주심
 스가랴 3장 6절로 9절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지킬 예표의 사람을 ‘순’이라고도 하며 또 바꾸어서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는 그런 예표의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고 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그 때에 한 돌이라고도 하고 또 그 돌에 일곱 눈이 있는 그러한 신령한 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말하기를 반석 즉 돌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8절로 19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천국 열쇠를 맡은 자는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또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런 권세 자를 이름 하기를 ‘베드로’라고 하셨다.

 

원문은 ‘페드로스’인데 이는 큰 암반이나 암벽에서 떨어진 작은 바위 돌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한 것과, 로마서 9장 33절에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하실 때 반석은 ‘페트라’이다.


이 페트라는 암반이나 암석을 말 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베드로는 큰 반석에서 떨어진 작은 바윗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실 때의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페트라’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반석은 베드로의 반석이 아니라 ‘페트라’인 말세에 나타날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을 받은 자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다(베드로의 신앙고백 보다 확실한 흰 돌).


그런데 이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을 받은 자 외에는 알 사람이 없다(계 2:17)고 했다. 이는 계시록 19장 1절로 16절에 심판 주이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신 분께서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는데 마치 흰 돌 위에 새긴 새 이름의 경우와 같이 재림 메시야도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다고(19:12)했다.

 

그래서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을 받은 사건이나 심판 주께서 가지신 이름을 자기밖에 모르는 안타까운 사정이 모두 한 분을 가리키는 “인자 같은 이”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자 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어찌 모든 성도들이 모르겠는가? 하나님께서 감추인 메시야의 사건이라 인자 같은 이 외에는 심판 주가 누구인가를 아는 자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반석과, 천국의 열쇠와, 풀기도하고 매기도 하는 절대자와 같은 권세는 어디까지나 베드로를 예표 하여 말세에 나타날 사건이다.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는 돌
 눈이 달린 이 돌은 어린 양을 상징한 돌이다.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말씀하신 본문의 양이 갖는 성품을 이사야 9장 6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일곱 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그러니까 ‘페트라’인 반석에 박힌 일곱 눈으로 상징된다. 에스겔이 하늘의 신령한 영체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소리를 ‘전능한 자의 음성과도 같으며’라고 했다(겔 1:24). 곧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어마어마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 분들의 둘레에는 눈이 가득하다고 했다(겔 1:18).

 

계시록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히 갖춘 성수라는 뜻과 같이 여기 일곱 눈도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볼 수 있는 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눈이 가득하다는 것 역시 일곱 눈을 가진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신령한 눈을 가진 분이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보내심을 받고 이 땅에 오게 된 어린 양인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일곱 영은 어린 양이라고 했는데 계시록 1장 4절에서 5절 사이에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 영은 서로 다른 신령한 영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 메시야는 그 인자가 아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인자 같은 이”가 대신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거듭 말씀하신다.


사도요한도 요한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을 대언 자 즉 보혜사 ‘파라클레톤’이라고 했다(본문과 요14:16, 26, 15:26, 16:7에만 파라클레톤이라고 기록함).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한 ‘또 다른 보혜사’가 파라클레톤이다. 예수님과는 다른 또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성령님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 일이 있는가? 요한복음 16장 7절로 8절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라기보다 일곱 눈이라고 하고 일곱 영이라고도 하는 계시록의 어린 양의 표현이다.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 권세를 주심(2:26-28)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위의 권세를 받으려면 이기는 자가 되고, 맡기신 말일 역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이 놀라운 약속은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27절은 마치 심판 주를 삼겠다는 말씀이다. 시편 2편 5절로 9절에도 철장 권세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특별히 7절에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셨는데 이는 말세지말에 만왕의 왕을 나타내시는 그 날이 오늘 날이다.

 

왜냐하면 계시록 12장 3절 이하에 큰 붉은 용이 머리가 일곱이며 뿔이 열이나 되는 사단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짐은 주의 종들이 변질되어 사단에게 굴복할 때 해를 입은 여자(계 2:1)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심판 주께서 사단이 말세 교계를 짓밟는 그 때에 해를 입은 여자를 통하여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낳는 그 때가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때인 것이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8)
새벽 별은 계시록 22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새벽 별을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지신 여러 이름 중에 하나를 주신다는 데 곧 예수님의 이름을 받은 자를 뜻 한다. 인자 같은 이가 예수님의 이름 중 하나로서 새벽 별의 이름을 받고 예수님께서 하실 그 사명을 수행 한다는 말씀이다.

흰 옷을 주심


 계시록 4장 4절에 하늘 보좌에 둘러 서있는 24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7장 9절로 14절에 구원 받은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여러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옷은 7장 14절에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 옷이라고 했다. 이 옷은 사람의 옷과 다르게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옷이기 때문에 그 흰 옷은 구원의 옷을 말한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여섯 번째 약속
 계시록 3장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인데 하나님의 집을 지탱하는 귀한 몫을 함과 같이 귀한 사역자를 삼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일곱 번째 약속
 계시록 3장 21절에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계심과 같이(눅 22:69, 20:43; 막 16:19, 14:62, 12:36; 마 26:64, 22:44) 이기는 자를 자기와 같이 보좌에 앉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보좌는 왕의 권세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 권세의 자리에 함께 앉게 되면 그 이기는 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자 같은 이가 이기고 이겨서 그 권능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
2장 9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의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부요하다는 말은 고린도 교회와 상통한 말씀이다(고후 6:9-10).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으므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부요하다는 것이다.

 

십일 동안 환란을 받음(8-11).
다니엘이 우상 종교에 더럽히지 않으려고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 열흘간의 시험 같이 말세에 교회의 삼분의 일이 우상 종교로 변질될 때 그들로부터 나오는 변질된 만나를 안 먹는 기간이기도 하며, 열흘이라는 수는 땅에 속한 숫자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최소한의 성수를 열이라 정 한다(소돔의 최소한의 성수인 ‘열 명’이 없음과 리브가를 선택할 때 ‘며칠을 머물게 할 때 적어도 열흘’이었다( 창 18:32; 느 4:12; 창 24:55 ). 그러므로 십일 동안 환란을 당하는 다니엘서의 표현은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삼백 삼십오 일 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는 그 환란의 정한 기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시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좌우에 날선 검
에베소서 6장 16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계시록 1장 16절 “그 오른 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하셨고 또한 계시록 2장 16절과 19장 15절과 21절에 ‘입의 검’을 말한다. 이는 전쟁 때 사용하는 검이 입에서 나오니 더욱 말씀의 검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싸움 자체가 일반 세상적인 전쟁으로 세계 제 3차 전쟁의 싸움이 아니라 진리와 비 진리의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
 버가모 교회는 우상의 도시에 세워졌고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본문 9절에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를 현대로 바꾸면 자칭 성도라고 하나 실상은 성도가 아닌 사단의 회라고 하신 것이다. 13절에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말일 교회는 결국 사단과 함께 거처하는 혼합된 교회란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 사단이 자기의 보좌를 놓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데 변질된 교회는 사단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섬김이 아닌 사실상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축복 사상으로 빠지도록 유혹하고 있다. 축복 사상은 하나님과 더불어 금송아지를 자연스럽게 섬기도록 유도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때 아침과 저녁에 제물을 바치며 많은 고생을 했지만 우상을 섬겼던 것이지 하나님을 섬김이 아니다(암 5:25; 행 7:42).

 

금송아지 신앙
 성경이 말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예배는 불신앙의 생활로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복지라고 하는 천국을 향한 노정기를 모형 한 것이다.금송아지 신앙이란 출애굽 한 성도들이 시내산 밑에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과 송아지를 함께 섬기던 그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출애굽 성도들이 금으로 만든 사실은 다른 이방신상을 만들려고 목적하는 데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격하시킨 변질된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다.

 

그 동기는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아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자기들을 보호할 하나님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그 욕구를 표현한 것이 금송아지이다. 주변에 이방인들이 소를 섬기는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금으로 만든 차원 높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소’하면 생각나는 잘못된 우상 신을 확실하게 잊어버리고 ‘소’하면 우리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생각나도록 바꾸고 싶었던 발상이었다(출 32: 4).

 

그리고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내일은 송아지의 절일이 아니라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공포까지 했지만 그들이 알지 못한 다른 실재의 악한 영이 마음속에 침투한 것이다. 이 사상은 여로보암에게 이어져 날로 확장되었다. 이는 신약에 예수님을 찾던 민족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 예수님을 찾음과 같다. 오늘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아래 육신의 부와 행복을 추구한 사상이 담긴 금송아지 예배로 전락할 때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예배를 받으실 전을 건축할 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으라고(출 25:8)” 하셨던 것이다. 이는 인간 창조의 뜻이다. 본문의 버가모 교회는 혼합주의 예배인 금송아지를 섬겼던 그 결과로 희생과 제물을 사단이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일의 교회가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과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사상이 순수한 신앙을 변질시킨 결과로 교회 안에 사단의 위가 있다는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
 이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고루 갖춘 모범적인 교회인데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므로 책망을 듣게 되었다. 두아디라 교회도 황금주의 축복사상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성경에서 교회를 여자로 말씀하고 있다. 즉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와 매를 가는 여자와 시온의 딸들로 상징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로 데려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버려둠을 받는데 이는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자칭 선지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아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을 모형 하는 것이며 실상은 그 영적 근본이 다른 세계의 사단의 사역자로서 원수 마귀가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교역자를 교회 위에 덧뿌린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여자와 대조를 이룬 사단 편의 여자로 내세운 이세벨이다.

 

사단의 깊은 것을 모르는 두아디라 교회(계 2:24-25).
본문 중 사단의 깊은 것은 사단의 행동이 있기 전의 전략을 말하고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는 니골라당으로 말씀하셨다. 버가모 교회에게는 발람의 교훈이라고 하셨는데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차칭 선지자 이세벨이라고 하셨다. 모두 다 사단의 전략을 표현하지만 영의 눈은 캄캄해도 충성된 교인들은 큰 환난을 통과하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있는 것이라도 굳게 잡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제 3 장

* 사데 교회
3장 1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로 표현할 만큼 소망이 없는 교회이었다. 서머나 교회는 토몰루스(Tmolus) 산의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요 부요한 도시에 성도들이 많아 명예와 명성을 좋아 하지만 진실과 참된 신앙은 찾아볼 수 없는 교회이었다.

 

1. 죽은 교회이다.
여기 죽었다는 말은 이름만 교회이지 세상의 기준에 맞춘 교회이며 외적으로 성도이지 내적인 상태는 성도가 아님을 말한다. 조직교회에서 형식적으로 세례교인과 유형적인 직분들이 있을 뿐이지 신령한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권속이 아니었다. 기도에 있어서도 골방기도가 없으며, 구제는 강조되어 돕고 있으나 탐욕이 많고, 예배는 있으나 의식과 형식에 그쳤으며 세상과 하나 되니 하나님과 단절되어 죄악도 합리와 하는 교회가 사데 교회이다.

 

2. 회개하라
 하나님은 아주 버리신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듯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희미한 신앙 속에서 회개의 역사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이는 뜻을 스스로 돌이키라는 것이요 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전환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3. 승리자도 있는 교회이다.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예복을 더럽히지 않고 주와 동행자가 있었다. 죄악을 이긴 자는 영광의 흰 옷을 입는다는 약속이 있었다.


4. 결론
 물질에는 부요한 자요 부족함이 없었지만 신앙생활은 미온적이요 헌신도 예리한 감각도 없었다. 책망과 경제적 권면을 받은 교회이다.

 

 * 빌라델비아 교회(3:8-10).
사데 동남쪽 28마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업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는 작고 연약한 듯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교회이다.

 

1. 칭찬받는 성도들(마음, 행실. 생활).
적은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으며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칭찬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셨다.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으며, 마태복음 5장 10절의 말씀과 같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이었다. 그리고 인내의 말씀을 지키되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궁핍한 중에 그리고 유혹이 많아도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지켰던 교회이다.

 

2. 받은 약속이 있는 교회이다.
열린 문을 두셨는데 충성된 종들에게 주신 축복의 문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신 문인데 양의 문, 은혜의 문, 전도의 문, 천국의 문과 달란트를 주셨으니 잘 감당하자.의인에게 승리와 개선을 주시지만 악인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고 그 끝이 비참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곧 의인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굳은 약속이다. 시 험의 때를 면케 하리라 혹은 시험을 만나도 베드로가 옥에서 나온 것처럼(행 12:7-이하) 혹은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당당히 나온 것처럼(행 16:26절 이하) 시험의 때에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3. 성전 기둥 되게 하심(3:12).
이는 하나님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며 흔들리지 않고 든든한 교회가 될 것을 약속하심이 기둥이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두 기둥에 야긴과 보아스가 있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성전에 모든 것을 갖추고 천국과 이 땅에서 인정하는 자가 되고 기둥의 사명을 잘 감당하자.

 

4. 결론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곳이니 항상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단들을 배격하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고 진리에 순종하여 봉사해야 한다. 성경대로 살아서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가는 교회는 영원무궁토록 보장해 주신다.

 

 * 라오디게아 교회(계 3:15-19).
현대 교회에 심각한 교훈을 주는 교회이다. 이는 신앙적 빈곤과 외적인 요소와 오만함으로 가득 채워진 교회이다. 그러므로 부패, 타락한 교회로서 신앙적으로 병들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도 깊은 잠에 빠진 교회요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다.

 

1. 토하시겠다는 교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기회주의자도 아니요 이중성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병들어 죽게 된 시체와 같은 교회이며 환자와 같은 교회로서 진리의 예리한 칼도 상실하였고 뜨거운 충성도 상실하였고 환난에서 일사각오나 생동력도 상실한 무기력한 교회는 토하시겠다는 것이다.

 

2.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17).
자신들의 부족한 신앙생활을 가장 위대하고 독실하게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회이다.
1) 곤고를 알지 못함: 죄와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롬 7:24). 불의와 짝하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2) 가련한 것을 모른다. 신앙생활이 죽어가는 상태에 빠졌는데(사 41:17)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3) 가난한 것을 모른다. 영적 가난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 없다. 이는 육적인 부요가 준 신앙의 빈곤이다.
4) 눈이 소경된 교회이다: 영안이 없어서 분별력을 상실한 신앙상태를 말한다. 곧 죄악을 통찰할 수 있는 기력을 상실한 교회이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신앙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함이다(마 5:3, 8).
 5) 벌거벗은 교회이다: 회개하지 않아 죄 사함을 받지 못하여 부끄러운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교회이다. 죄의 수치를 모르는 교회요 하늘의 천국 백성의 신분을 상실한 교회이다.

모두는 죄를 용서 받아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입는 옷으로 새롭게 갈아입어야 한다.

 

3. 최후의 사랑을 권면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했다. 이는 예수님만을 의지하고(고후 1:9) 살아가므로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시 19편 8절에 계명=순결, 눈=밝게 하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므로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4. 결론
 칭찬이 없는 책망의 교회는 믿음과 행위와 생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의 뜻을 좇아가는 생활인 것이다. 우리는 겸손과 부족감에 가득한 생활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벗어나자.

 

제 4 장
 지금까지 1장에서 3장까지가 요한 계시록의 서론 부분으로 만일에 교회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부분이다. 그리고 4장은 사건이 마친 이후에 있을 천상의 승리의 축제와 및 그에 따르는 상급과 서열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현재가 아닌 세상의 모든 환란이 끝나고 그 이후에 영계에서 ‘마땅히’ 될 일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말세의 사단의 전략과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밝히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과 에스겔서는 많은 부분이 짝을 이루고 있다. 본문 4장 6절로 8절의 ‘네 생물’은 에스겔 1장과 3장과 10장에 나오는 ‘네 생물’과 같은 생물을 소개한다.

 

네 생물
 이 생물들의 이름을 에스겔서 10장 15절과 20절에 ‘그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 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네 생물의 또 다른 이름이 그룹들이다. 이들은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를 덮고 있는 그 그룹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룹들 사이에 계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에 나오는 네 생물은 네 개의 날개를 가졌는데 계시록의 생물은 여섯 날개를 가짐으로 서로 다른 생물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네 생물의 얼굴이 첫째는 사자, 둘째는 송아지, 셋째는 사람, 넷째는 독수리 같다고 했으나 에스겔서 1장 10절의 생물의 얼굴과 같다. 하지만 에스겔 41장 18절로 19절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생물(그룹)로 되어 있다. 통일성이 없는 사실 속에서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를 이해 못한 우리들에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나 또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설화까지라도 자료로 삼아서 신령한 세계를 설명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사자라 함은 땅의 송아지는 순종으로 주인에게 필요와 강인함, 독수리는 공중의 왕, 얼굴이 사람 같다는 뜻은 에스겔 1장 5절은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 했다. 사람의 형상인데 기능을 말하자면 이러이러한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 1장 13절에 와서는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의 표현과 계시록


4장 7절은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은데” 라 함은 보기는 했어도 바르게 묘사할 길이 없어서 같으며, 또는 같고, 혹은 모양이라는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보았지만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없어서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생물들이 모두 입이 있다는 사실과 말을 할 때에는 입을 사용치 않다는 사실이다(겔 3:12-13). 계시록이나 에스겔에서 다루는 말세의 사건 중에 천국 인을 칠 때 사람과 천사가 인을 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겔 9:1-7; 계 7:1-4).

 

생물의 직능
 에스겔의 생물은 폭풍과 큰 구름 속에서 불이 번쩍 번쩍이고 그 빛이 사면에 비취는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곧 이렇다고 했다(겔 1:4-5, 24, 10:5). 즉 사람은 사람인데 아직 인간계에 나타나지 않은 영계에 속한 사람이다.


생물이란 장엄한 영계의 거성이 말일 역사에 계시록 6장에서 어린 양이 인봉된 말씀을 떼실 때마다 이 생물이 명령을 내리는데 그 명령에 의하여 네 필의 말과 그 말에 탄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입장에서 말일의 역사를 설명한다면 그룹이라고 하는 네 생물들이 말일 역사의 주역이다. 이는 계시록뿐만 아니라 에스겔의 대부분이 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는데 사람의 모양 같은 분이 앉 아 계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니신 것이 분명한데 에스겔은 이분을 가리켜 ‘주의 신’이라(3:12-14) 함을 볼 때 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신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분의 형상이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의가 불같고 사면에서 광체가 나며 그 사면의 광채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은데 이는 마치 여호와의 형상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받는 성도인 우리들이 속히 갖추어야할 본분인 것이다.


말일 사건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인데 그룹들이라고 부르는 생물의 사역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영의 세계에서 보고 설명하는 것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선지자라고 하는 두 증인과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 메시야는 인간의 세계에서 식별된 사역자들의 이름이다. 즉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 형태로 설명하였다. 처음은 영의 세계에서의 형태로 설명하고, 다음은 인간 세계의 사물로 설명할 비유와 상징으로 했다.

 

제 5 장 : 안팎으로 쓴 인봉한 책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의 인봉된 책을 어린 양이 되시는 재림 메시야가 6장에서 떼시는데 책의 내용이 공개되어 사실로 옮겨질 때 지구상에 대 환란이 몰아닥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인봉된 책의 내용에 앞으로 일어날 대 환란에 관한 일들을 일곱 인으로 봉합한 것이다. 이 말씀과 짝이 되는 구약의 배경은 에스겔 2장 9절로 10절이다. 에스겔이 설명할 때 첫째 애가, 둘째 애곡, 셋째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고 했다. 즉 슬픈 심정을 읊은 노래이며, 큰 소리로 우는 것이고, 재앙은 하늘의 변동과 땅의 이상으로 인한 온갖 불행한 변고를 말하는 것이다.

 

안팎으로 쓰인 책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책은 문명의 발달이란 혜택으로 좋은 종이 위에 안팎으로 글을 인쇄하여 사용하지만 그 때는 글을 기록하는 것이나 보관이 어려웠다. 양피나 파피루스로 두루마리 형상인데 한 쪽만 있다. 그런데 본문에 책은 양쪽에 가득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 말씀의 책은 통상적인 예를 벗어나 안과 바깥에 글이 기록되었다는 말씀이고 이는 가리워진 뒷면에도 글이 있어서 안쪽만 보는 자들에게 인봉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곱인 으로 봉합하여
 놓으셨기에 세상 적으로는 풀어질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풀리지 않을 말씀으로 인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힘 있는 천사
 힘 있는 천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힘이 적은 천사도 있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과 마리아와 다니엘에게 말세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여 소식을 전했던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도 있다(눅 1:19, 26; 단 8:16, 9:21-27). 그리고 다니엘에게 말일 사건을 알리려고 온 사자가 곤경에 처할 때 천사 장 미가엘이 말세에 활약할 것을 말씀하셨다(단 10:12-14, 12:1,) 다니엘의 예언은 계시록에 하늘의 전쟁으로 성취된다(계 12장 7-9).


이와 같이 말일 사건이 영의 세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천사 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의 싸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천사 장 미가엘에게는 그의 사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천사
 성경에 나온 천사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천사만 해도 한 계층의 천사가 아니고 여러 계층의 천사들이 등장함을 볼 수 있다. 7장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네 천사가 있는데 땅이나 바다나 각종 나무를 해롭게 할 권세를 가졌는가 하면 같은 7장에서 또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오는 천사도 있다(계 7:2).

 

이 천사는 땅이나 바다를 해롭게 할 네 천사에게 명령을 하는 천사인 것을 보게 된다(계 7:1-3). 또 19장 10절과 22장 8절에 나오는 천사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허다한 천사를 만나보았지만 이 두 곳에서 만난 천사는 어떤 천사와도 달라서 감히 우러러볼 수가 없어 사도 요한이 땅에 엎드려서 경배를 하려 했다. 사도 요한이 어찌 1계명과 2계명을 모르겠으며 아무에게나 경배를 하겠는가? 이는 천사가 다른 천사보다 분명하게 뛰어나서 엄청나게 존귀하여 경배할 만하기에 스스로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
 구약 성경에 천사라는 원어는 ‘말아크’인데 대리로 파견한다는 의미의 사자를 뜻한다. 헬라어로 쓰여 진 신약의 천사 ‘앙겔로스’는 소식을 가져오다 에서 유래된 말로서 이 역시 사자, 특히 천사를 의미한다. 특별한 것은 구약 성경에 시편 8편 5절에 나오는 천사만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같이 ‘말아크’ 즉 사자와 천사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다.

 * 지금부터 천사와 사자의 활동을 살펴보자.


1. 축복을 주는 여호와의 사자(창 16:7-10).
위의 본문 중에 말하는 ‘내가’란 누구일까? 분명히 여호와의 사자인데 하갈에게 그의 자손을 축복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로서의 언행이나 심부름 하는  전달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전능자로서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여기 ‘내가’ 즉 사자 자신이 직접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있는 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사자의 언사가 마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선지자가 자신이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이 대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를 분별하려면 말씀 전체를 살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이란 말씀을 하고서 대언을 하고, 사자 자신의 의사를 말씀하는 것과는 구별 하고 있다.


사자가 대언하는 장면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 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대언할 때는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구분한다. 또한 하갈이 창세기 16장 13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뵈옵고는 혼자 하는 말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즉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가 11절 하반에서 ‘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씀을 듣고 감격해서 그녀가 하는 말이 나 같은 여종은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신 줄 알았더니 여호와께서는 나 같은 종의 사정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말씀을 전해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할 때 나의 사정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다. 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는 하나님을 뵈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예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생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2. 벧엘에서의 하나님(창 31: 11-13)
여호와의 사자가 인간들의 입을 빌리지도 않고 직접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뵈옵고 하는 말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1-22).’ 함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여호와의 특별한 사자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3. 야곱의 신앙고백 속의 사자(창 48:15-16).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자손인 손자들에게 축복을 비는 엄숙한 장면인데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한 사실이 그대로 이루어져 장자권이 므낫세에서 에브라임에게로 옮겨가는 중요한 장면에서 야곱이 지금까지 기르시고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사자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곱이 알고 있는 보통 사자라는 일반적인 사자가 아닌 ‘벧엘의 사자’ 곧 벧엘의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손자들의 축복을 간청할 때 사자에게 간청한 사실이 잘못 말한 것이라면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야곱이 축복하는 장면에서 현대 성도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례도 있음을 알자(사자가 하나님과 동시에 역사하시는 과정이 아닌가로 추리할 수 있다).

 

4. 모리아 산의 여호와의 사자(창 22:11-12).
위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의 아들인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한 것으로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람에게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한 말씀이다. 그 사자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럼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할 때 ‘내게’가 누구인가? 여호와의 사자가 아닌가?

이와 같이 여호와의 특별한 사자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천사와는 다른 분이며, 자신이 하나님 중의 한 분이라고 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모리아 산의 제물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사자는 단지 심부름하는 정도로 알았는데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 제물을 자기가 받은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신 것이 분명하겠지만 제사 행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과 동시에 행동을 취하거나 하나님 같이 행동한다는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분은 22장 1절로 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같이 있었던 고급 사자일 것이다. 혹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의 말씀도 위임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약 성경의 원문에서 하나님의 호칭이 ‘엘로힘’이다. 이는 신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 호칭할 때는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들이 되는 것이다(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이신 성부, 성자, 성령님을 말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번민은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매우 힘든 것은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복수로 하나님들로 해석해야 한다)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의문점이 풀리지 않는다. 천지 창조를 엘로힘이라 하여 하나님들의 창조가 의문이고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옛날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익히 아는 그 하나님이신 것이다.

 

5. 발람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사자(민 22:31-33).
불의의 삯을 받고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던 선지자 발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사자가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를 따르지 않아 패역한 선지자라 할 때 여호와 앞에서 패역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자 앞에서 패역하다 함이 우리 상식에는 옳은 것이다.

 

우리가 범죄 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세상 법이 있고 그 법을 범하면 그 나라 제도에 대하여 범죄 한 것이며, 임금이 법이면 그 임금께 범죄 함이 되는 것이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면 형제와는 상관이 없고 아버지께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 패역했으면 여호와께 패역함인데 어찌하여 그 사자를 말할까? 밝히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본문의 사자가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특별한 분이라서 위임받은 하나님 같이 처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볼 때 루시퍼라는 사단이 얼마나 고급 천사이며 그의 권한이 얼마나 큰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넘어진다면 받은 자의 교만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각양 은사가 있는데 더 좋은 것을 바라보며 이미 주신 은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6. 선민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의 사자(삿 2:1-4).
본문의 사자가 선민 이스라엘을 자기가 애굽에서 구원해 주웠고, 언약도 그 분이 세우고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고 한다. 여호와의 사자 혹은 천사라고 하면 단순히 우리를 돕는 직분을 가진 천사만 생각할 수 있지만 특별한 사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알거나 대접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한다고 칭찬 받을 수 있음을 알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계실 수는 없으며 피조물인 천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급 천사가 나타나면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도 요한도 경배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다.

 

7.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출 3:1-8).
주석가들은 본문의 사자를 어떻게 보았을까 살펴보자.

1) 여호와의 사자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한 천사이다. 풀빛 주석은 언약의 사자 또는 삼위일체의 제 2위의 하나님으로 본다.
2) 하나님을 대리하신 분
 여호와의 사자란 말은 하나님을 대리하신 분인데 동시에 역시 하나님 자신으로 자처하셨다. 그리고 나타나신 모습은 사람의 모습으로 장차 신약에 나타날 성육신하실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라고 생각된다(영음사판 박윤선 저, 성경 주석 창세기 출애굽기 433페이지)고 말했다.
위의 주석가들도 여호와의 사자를 ‘언약의 사자’로 또 제 2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귀한 분이 천사로 활약을 하느냐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그리스도라고 하면 이단으로 몰린 수 있어서 피한 것 갔다. 본문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왜 명백한 사실을 확신 있게 말하지 않고, 그렇게 본다. 혹은 생각된다. 라고 했을까? 천사 중에는 축복을 주기도 하고 예배까지 받는 사자도 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계 5:5)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의 책은 일곱 인으로 인봉 되였는데 그 인봉된 책을 떼시는 이는 오직 유대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요한계시록 22장 16 절에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단순한 육적인 혈통 관계에서 일어날 사건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윗의 뿌리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말씀인데 그 예언을 분석해 보면 초림 메시야와 재림 메시야의 두 시대의 사건을 하나의 예언 속에 겹쳐서 예언하신 말씀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 11:1-5).
본문의 시대는 다윗 왕의 아버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새의 뿌리나 다윗의 뿌리나 육적인 혈통으로 볼 때는 같은 뿌리가 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윗글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때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12)”고 하였다. 이사야 11장 1절에 두 가지의 예언이 있는데 ‘줄기에서 한 싹’과 ‘그 뿌리에서 한 가지’이다. 이는 초림의 메시야(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성취하심)와 재림의 메시야(낮은 상태의 몸을 하나님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심)인 것이다(빌 3:21; 롬 8:23; 요1서 3:2; 고후 3:18). 이렇게 싹이나 가지의 두 사건이지만 결실은 가지에서 결실할 것을 말하고 있다(요 4:36-37). 그러므로 결실은 땅 속에 묻혀 보이지 않다가 그 어느 때인가 작정해 놓으신 그 때에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뿌리는 보이지 않은 가지이다. 그리고 뿌리가 땅에 감추어진 것 같이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감추셔서 찾지 못했던 혈통(아담 같이 창조되지  않고 동정녀를 통한 출생을 말함)을 드러나게 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이다.

 

멜기세덱의 혈통(히 7:1-3)
여기 멜시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역사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일로 자기 사병을 거느리고 연합군을 치고 돌아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던 일이 있었다. 본문에서 소개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며, 또 살렘(시 76:2)왕인데 평강의 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분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서 마치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분이라고 했다.

 

이 분은 신의 세계에 존재이면서 이 세상에 동시에 있는 양면의 삶을 사시던 분이다. 그런데 이분은 아브라함 당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항상은 언제나 존재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즉 이러한 사명을 가진 자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잘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의 안목으로 볼 때 항상 있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 2장 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예수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성도)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의 말씀은 육체를 따라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모두 거룩함을 입어야 된다. 육의 자랑이 없어지고 뿌리의 용어를 사용하심은 다윗을 지으신 이를 알고 예수님이 뿌리이심을 믿어야 한다.

 

계시록 5장 6절 어린 양이 섰는데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보좌 사이에의 원문은 “엔 메소 투 드로누”인데 ‘그 보좌 가운데’ 이다. 그리고 ‘섰는데’의 ‘헤스테코스’는 ‘히스테미’인 ‘두다’ ‘놓다’ ‘세우다’ ‘고정시키다’ ‘확정하다’ 임명하다의 현재 완료 분사로서 본문이 말씀하시는 그런 분위기 때에 어린 양이 여러 보좌들이 있는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는 그 보좌에 임명되어 확정되는 순간을 말씀한다.

 

그리고 네 생물과 장로들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어린 양은 하늘의 신령한 영체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를 하시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네 생물들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데라는 뜻은 생물들과 장로들 사이에서 나오셨다는 뜻도 된다. 이때의 환경이 4장 1절 하반절의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라 했으니 현재가 아니고 미래인 이 후에 확정되는 때인 것이다.

 

어린 양이 책을 취하심
4장에 이어 5장도 역시 대 환란을 앞에 두고 천상의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폭풍 전야는 음산하지만 대 환란을 앞둔 천상은 재림 메시야이신 어린 양을 위하여 새 노래를 거문고에 맞추어 24장로들과 4생물들이 함께 부르는 축제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어린 양이 인봉된 책을 떼실 때 말일 역사는 시 작되게 되고 사단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앞둔 천상에는 축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이 인봉을 떼어 감추어진 말씀이 공개될 때 말일 역사가 전개되는 것은 결코 심판으로 죽음만을 전제하는 그런 참혹한 것이 아니라 참 성도들과 더불어 천상천하에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5장 1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인봉된 책을 어린 양이 취하신다. 이때에 비 로서 어린 양도 말세 비밀이 기록된 책을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서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어린 양도 그 책을 받기 전에는 그 책의 내용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어린 양’이 인봉된 책을 취하시는데 이 내용과 짝이 되는 에스겔 2장 8절에서 3장 3절에 이르는 말씀에는 인자라고도 칭하는 에스겔 선지자가 그 책을 취하여 먹고 그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와 동일하게 병행된 요한계시록 10장에서는 사도요한이 그 책을 가져다가 먹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그 내용을 다시 예언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즉 어린 양이 인봉된 책의 인봉을 떼고 그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나 에스겔 선지자나 사도요한이 그 내용을 먹고 다시 예언하는 것이 실상은 말일 사건을 전하는 모형으로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는 말씀이다.

 

계시록 5장 8절 기도와 찬송이 열납 되는 과정
 성도들의 기도는 네 생물과 24 장로들의 손에 있는 금 대접에 담겨지면 향기로운 제물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찬미를 드리려고 거문고를 가지고 있는 천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8장 3절로 4절에 성도의 기도가 금향로에 담겨져 천사의 손에 들려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기도와 찬송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제물인 것이다. 히브리 기자는 13장 15절에서 ‘찬미의 제사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였던 것이다.

 

제 6 장
 일곱 인의 재앙(1-2).
본문에서 대 환란이 시작되고 세상은 그 끝에 다다르려 한다. 대 환란은 일곱 인을 때는 재앙(계 6장-7장)과, 일곱 나팔 재앙(계 8장부터 14장), 일곱 대접의 재앙(계 15장부터 18장)의 세 가지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재앙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곱 번째 인(계 8장 1) 일곱 나팔(계 11:15)로 발전되고 일곱 번째 나팔은 일곱 대접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과 그 근본 사건의 내용은 같은 내용들이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의 표현하는 형식을 달리 하면서 그 재앙의 내용을 폭넓게 암시해 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일곱 인 재앙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일곱 나팔 재앙에서 함께 계시하는 것을 보았다.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순서적으로 보아서 해석할 것이 아니다. 본서는 어디까지나 사건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또한 이 재앙의 특색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었던 책으로(계 5:1)

 

일곱 인으로 봉합된 말씀인데 인을 뗄 때마다 말씀이 공개되면서 나타나는 환란이다. 즉 말씀과 관계가 있는 재앙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핵심이 되는 1장 19절로 20절의 원리대로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에 관한 환란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은 종들과 교회이기 때문에 영계(교회)에서 일어나는 환란이요, 내용은 그 재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환란들은 마지막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이 사람들을 죽이더라도(계 6:4, 8) 이는 영혼에 관계된 사건이며 문자 그대로 양식이 아니다(암 8:11). 땅의 짐승도 어린 양이신 메시야를 모방한 새끼 양(계 13:11)이 그리스도로 위장한 영계의 혼란을 말한다(계 13:11-18).

 

왜냐하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제단 아래 순교자들이 자기들의 피 흘린 원한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할 때 ‘땅에 거하는 자를 심판하시’라고 호소하는 말에서 지금까지 인을 떼실 때 있었던 재앙으로 심판을 받아 사람들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며 또 양과 염소,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따로 구별하여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심판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교자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피의 값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계시록 6장 10절은 한 집에서 참 진리 위해 흘린 피를 찾음. 둘째 인부터 여섯 번째 인으로 하늘과 땅의 각종 재앙들은 땅의 괴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처럼 기록되었으나 16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씀을 보면 큰 재앙이 도착했다는 뜻이지 진노의 큰 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3장 8절로 12절도 재난의 시작이라는 뜻인데(계 6:4).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버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때이다(단 2장 41절로 43절의 느부갓네살이 꿈에 보았던 금 신상에서 열개의 발가락 시대에 분쟁을 말한다).


외형적으로 완전한 발가락이지만 실상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상이나 인종이 섞여서 출발하므로 콩가루처럼 헤어져서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가 교회라는 집 안에 있다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 되지 말고 콩가루처럼 분쟁으로 나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2:49-53). 그리고 분쟁의 내용이 남과 남의 사이가 아닌 가족끼리 싸우며(52-53)싸우는 그 불을 무엇 때문에 던지기 위해 오셨을까? 불이 붙기를 원하실까? 서로 죽이는데 내어 줌을 원하실 것인가는 문자적인 환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더라도 말세에는 교리적으로 천국과 지옥에 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믿음과 교회를 바르게 선택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한국 교회에 참 진리가 들어나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신다.

 

네 생물(계 6:1)
본문에 일곱 인 중에 하나의 인을 떼는데 그 인은 어린 양이 떼시고, 명령은 사역자인 네 생물 중의 하나가 한다. 육의 안목으로 사역자는 어린 양이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으로는 네 생물의 사역이다. 그들의 위대성과 그의 떼는 네 생물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 생물의 위대성과 장엄함에 대한 설명은 제 4장에서 배웠다.

 

계시록의 짐승인 말
 본문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심판하실 때 말을 타시고 활약한 것으로서 예언서에도 말씀하셨다(합 3:2-15). 하박국 3장 8절에서 ‘주께서 말을 타시며’와 12절에 ‘밟으예수님은 창조주요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인데 왜 싸우고 싸우시겠는가? 그러 므로 계시록의 ‘인자 같은 이’는 인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수행 중인 피조물이다.


계시록의 어린 양은 ‘아르니온’이요(양에 미치지 못한 아주 어린 양) 복음서에 어린 양은 ‘암노스’이다(건강한 양으로 재물에 합당한 양). 계시록 19장 11절로 12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고 재림의 메시야를 말한 것 같으나 아니다.

 

 머리에 이름이 쓰였는데 아무도 모르고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것이며, 그는 자기가 맡은 사명을 수행한 자로서 외로운 투쟁을 하는 중이므로 ‘이기고 또 이기려고’하는 것이다. 만약에 재림 메시아로 해석한다면 예수님과 싸울 상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이는 창조주와 전능의 능력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와 재림 메시야의 마지막의 싸움은 없는가?


심판이라는 그 싸움은 있다. 다니엘 8장 25절에 ‘그가 꾀를 베풀어 제 손으로 궤휼을 이루고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평화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의 말씀이 있다. 곧 세상 끝에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재림 메시야께서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한다고 시편기자도 2편 1절로 9절에 말씀했다.

 

특별히 시편 2편 6절에 ‘나의 왕’ 즉 만왕의 왕을 시온 산에 세울 때가 계시록 14장 1절에 어린 양과 144,000명의 성도들이 시온 산에 서있는 배경이다(계 7:4). 시편 2편 9절에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스리라 하시도다.’ 했고, 계시록 12장 5절에서도 만국을 다스릴 남자인 재림 메시야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라 했다. 그리고 계시록 19장 11절로 16절에도 만왕의 왕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할 것이라고 시편 2편 2절에 기록되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론을 전개할 때 하나님께 불리한 이론은 이론적 이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셋째 인의 가격 결정(계 6:5, 6).
어린 양이 셋째 인을 떼실 때 내 생물 중 하나가 검은 말과 그 탄자에게 맡긴 임무는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가치 평가를 한다. 우리들은 모든 가격 평가가 사람 들 중의 누구 혹은 자연스럽게 가격이 형성 된 줄로 알고 있으나 천상에서 모든 가격이 결정된 후 이 땅에서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밀과 보리의 가격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온 네 생물들의 명령에 따라 결정된다.


그 생물은 검은 말과 그 탄자인데 손에 저울을 가지고 가치 평가를 책정한다. 양과 질을 확실하게 판단한 심판의 기준이 있다. 그리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헤치지 말라’는 뜻은 무엇일까? 왜 그 많은 것 중에 두 가지를 헤치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러므로 계시록이 상징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름과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셋째 인의 주제는 저울이다. 본문의 저울은 말세에 재림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심판의 저울이다. 다니엘 5장에 바벨론의 왕 벨사살이 귀인 일천 명과 잔치할 때 성전의 기명으로 술을 마시다가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기록하니 모두가 놀랐고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다니엘 선지자가 세어보고 저울로 달아보니 부족하여 가른다는 뜻이다.

 

이 말씀의 내용대로 바벨론 왕국은 그 날이 새기 전에 페르시아에 점령되었다. 그런데 그냥 점령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어보고 달아보셨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농장에 밀과 보리를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저울로 달아보신 후에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같은 뜻을 가진 말씀으로는 계시록 11장 1절에 ‘지팡이 같은 갈대’로 성전과 제단뿐만 아니라 그 안에 경배하는 사람들까지 척량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온다. 척량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재는 것인데 사람까지 척량하라는 말씀은 저울로 사람을 달아보고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청황색 말과 탄 자(계 6: 8)
말세의 심판이 4가지 방법으로 드러나는데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인다. 이 재앙은 에스겔 14장 21절에 그 배경을 둔 재앙이다. 에스겔서의 재앙과 묵시록의 재앙이 순서 배열이 약간 다르게 나타난다. 계시록의 네 필의 말은 스가랴 6장에 그 배경을 둔다. 에스겔 14장에 재앙이 내리는 원인을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기 때문’이라고 3절과 7절에 기록하셨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은 우상이 마음에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레미아도 6장 19절에서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하였다. 즉 마음에 들이는 우상! 보이지 않은 생각의 우상이 있던 것이다. 물질 축복의 우상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제단과 순교자(6:9-11).
순교자들이 당한 이유를 두 가지로 들어낸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증거이다. 이들의 순교에는 조건이 다르게 나타난다. 일반적인 순교자들은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할 것인데 본문 9절에는 ‘제단 아래’ 있다. 일반적으로 제단은 성전 안에 있는 것인데 하늘나라인 성 안에는 성전이 없다고 했다(계 21:22). 이 제단은 어떤 제단일까? 제단의 원문은 ‘희생의 장소’와 ‘도살의 장소’를 의미한다. 문자대로 출애굽 시대나 솔로몬 시대에 만든 제단이 아니라 제단이 말하고 생각하는 제단이다. 무생물이 아니다.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는 생물체로서 제단이다. 계시록 16장 7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의 말씀은 제단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 사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단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의 제단이 일곱 인으로 봉합된 상 징의 제단이지 옛날 성전 안에 있던 물리적인 제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사명을 받은 자를 말한다.제사직분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6장 20절에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며 그 직분이 영원히 갈리지 아니한(히 7:24) 영계의 제사직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영혼들이란 용어를 왜 사도요한이 했을까? 본래 사람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요한은 영혼이 제단 아래 있다고 했을까? 이 제단이 하늘나라의 제단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계시록 15장 8절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순교자도 환란이 끝나기 전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데 어떻게 제단 아래 있다고 했을까? 그리고 본문 11절에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수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의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께 호소를 드렸더니 그 때 흰 두루마기를 주신 것이다. 육체를 떠난 영이 무슨 옷이 필요한가? 옷은 육을 입은 자가 추위와 더위를 위하고, 몸을 위한 수단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속옷을 입은 연후에 입을 옷이다. 이사야 61장에 2절에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의 말씀 중 신원의 날이라고 하는 원수 갚는 심판의 날을 전파하는 그 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상급으로 주시는 두루마기는 ‘의의 겉 옷’을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참된 의인이 되었다는 거룩한 예식과도 같은 것이다. 이사야 61장 10절은 ‘구원의 옷’이라고 했다.그러므로 본문의 순교자라는 것은 살아 있는 순교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직분을 맡은 제단 아래에서 주 하나님께 호소를 올리는 장면을 보면서 말씀한 것이다.


교회의 빛이 흑암으로 변함(6:12-14).
위의 본문과 병행 구절들을 살펴보자.
‘그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그 때에 그 환란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막 13:24, 25).‘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 2:20).‘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위의 말씀을 보면 복음서에 '달이 빛을 내지 아니 하며를 사도행전에서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고 했고 계시록은 ‘피 같이 되며’라고 했다. 베드로후서는 복음서와 다르게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 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이사야 24장 21절로 23절에서 계시록의 배경을 설명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위의 이사야의 예언은 성격이 다르다. 신약에서 달이 피같이 되며, 혹은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를 이사야는 달이 무색 하며 라고 했다. 즉 달과 해가 대할 낯이 없어 매우 부끄러워하고 이다. 공동번역에는 달이 창백해지고 해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리로다. 라고 했다. 요엘 선지자는 이 말씀 ‘만인이 송구하여 마음에 두렵고 거북하며 미안하여 무리의 낮 빛이 하해 졌다(6)고 표현하였다(요엘 2:1-11).


요엘이 2장 10절에서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의 표현은 하늘이 무서워서 떤다는 표현을 한 것은 문자적인 하늘이 아니라 상징적인 하늘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모스는 5장 20절에서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 남이 없음이 아니냐.’의 뜻은 사물을 비추는 빛은 있어도 세상이 진리의 빛이 없어서 캄캄하다는 것이다. 이사야 34장 2절로 5절은 계시록 6장의 징조와 아주 흡사하다. 특별히 4절에 보면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 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의 말씀 중 ‘하늘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함은 문자적으로 저 하늘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레미야도 4장 23절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하늘들의 표현은 진리의 빛을 잃은 교회를 가리킨다.


계시록 12장 11절로 12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의 말씀 중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의 뜻이 무엇인가? 교회와 하늘은 그 뜻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예언서에서는 같은 뜻의 말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 18장 20절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셨다. 하늘을 인격체로 그리고 선진들과 함께 재림의 심판으로 원통함을 풀어줌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이 하늘은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원통한 일을 당하 고 사는 인격체라는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의인화된 하늘과 땅
 이사야 1장 2절에 귀를 가진 하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이사야 45장 8절에 의로움을 내는 하늘(시 97:6).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예레미아 2장 12절에 놀라고 떨며 두려워하는 하늘.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편 19편 1절 96편 11절. 148편 4절; 사 49장 13절 등이 있다.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핵심 내용이 1장 19절로 20절인데 그 내용은 일곱 교회의 사자와 일곱 교회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확정지어 명백히 하셨다. 그러므로 비중 있는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반듯이 종들과 교회로 한정된 말씀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교회와 종들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즉 말세와 말세 교회의 사자인 목회자들에 관한 비밀을 기록한 예언서이다. 결코 우주의 대변혁을 말씀한 예언이 아니다. 계시록 6장 13절 말씀에 ‘저 하늘과 그 안에 있는 별들이 무화과가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문자대 로 생각 한다면 이 지구상에는 한 사람도 살지 못 할 것이다.


계시록에 하늘의 별들이 선과일이 떨어지듯 무수히 이 땅에 떨어진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현대 과학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에게나 먹혀들 이야기이다.  지구보다 몇 배 혹은 천배나 큰 유성들이 어떻게 지구에 떨어지겠는가? 태양은 지구보다 30만 배나 크고 별들은 태양보다 600배 이상이다. 하나의 은하계는 10.000.000억 개의 별들을 거느리고 있는 우주가 일천억 개가 있고 태양을 가지고 있는 은하계가 삼천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별 하나만 지구에 스치고 지나가도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핵분열이 일어나서 산산조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칼세이건 저 P, 198-199).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이 땅에 별들이 무수히 떨어졌는데 아직 산과 굴과 바위틈에 사람들이 살아 있다. 계시록 7장 3절에 별들이 무수히 떨어진 후에 주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역사가 나온다. 인을 치는 것은 말세의 사건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과 별들은 온 세상을 밝혔던 하나님의 교회의 종들을 말 한다. 참된 진리를 마지막까지 지킨 종들이 말세에 드러나게 될 때, 무늬만 종교인들인 비진리가 발견되므로 비 진리의 사명이 빛을 잃었다는 말이다.
 
 
이사야 30장 25절로 29절의 말씀에 시대적 배경은 여호와의 진노가 불붙듯 하여 멸하시는 타작마당의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눌 때 키로 심판하심을 ‘크게 살육하는 날(28)’이라고 하고 또한 ‘망대가 무너질 때’(25)라고도 한다. 여기 망대는 교회를 상징하고 알곡은 택한 자를 상징한다.

 

계시록 6장 12절로 14절에 ‘여섯째 인을 땐 후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대풍에 선과실 떨어지듯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29절과 마가복음 13장 24절에서 교훈하실 때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다. 계시록 배경 후 해와 달과 별들에게 생기는 큰 변화는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발생한 사건이다. 환란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7절로 29절까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성도들끼리 서로 대적하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때이다. 그 환란으로 진리와 비 진리의 싸움으로 큰 환란이 있은 후에 거짓  방주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을 비추는 해, 달, 별들의 사명자로 자처하다가 본색이 들어나서 심판을 받게 됨을 말 한다.


흔들리는 세계(계 6:15-17).
본문에 나오는 각종 귀족들은 선민 계급 사회의 모든 계층을 총망라한 말이다. 선민을 대표하는 이들을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우한 자들이다(눅23:28-31). 즉 선민과 이방인을 구분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푸른 나무들이 산과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대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낮 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 리우라고 소리 를 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자칭 이스라엘이라 하는 자들이 재림하실 때 산과 바위의 틈에 숨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부끄러운 얼굴을 붉히며 하는 말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보시지 못하도록 자기에게 무너지기를 바라고 덮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어린 양의 진노에서 피하려고 소리친 것이다.


제 7 장

 네 천사(계 7:1)
 7장의 네 천사는 6장에서 네 생물의 활동을 통하여 보여주시다가 다시 7장에서 교훈하실 때 네 천사의 활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네 천사와 네 생물은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각종 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잠정적인 조치이고 인을 마치면 6장에서와 같이 각종 환란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에 붙지 못하게 하심(1).
환란을 받은 대상을 인격체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인을 치기까지 땅, 바다, 나무를 헤치지 말라고 하셨을까? 기가 막힌 대 환란에 무생물인 자연이 그렇게 중요해서 인 맞지 못한 사람을 뒤로하고 관심을 갖을까? 본서는 거의 상징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관심은 생명이다. 미가서 6장 2절에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렘 22:29).’ 미가서 6장 2절에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했고, 시편 98편 3절에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계시록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진저......’(시 96:13), 계시록 12장 16절에 ‘딸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하심은 무생물이 아닌 인격체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다.


바다
 하박국 3장 10절에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시편 24편 2절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의 말씀은 만세 반석 위에 세운 교회를 바다라고 한다. 에스겔 28장 2절에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척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의 말씀을 보면 바다의 중심은 하나님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용과 사단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시편 74편 13절에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했고 이사야 27장 1절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외에 다른 성구(합 3:15; 계 1:9)에도 많은 곳에서 영적인 세계를 암시하며 그 전쟁을 준비 시킨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적그리스도가 새끼 양의 탈을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무(슥 11:2; 마 3:10, 7:17-19; 눅 3:9, 6:43-44).
이스라엘로 비유된 나무: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 렘 11:15-16). 심판 때 성도로 비유된 나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더라’(눅 23:31)메시야로 상징된 나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놓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 할지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2-24)’의 이 말씀은 이사야 11장 1절의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한 싹과 가지가 나서 결실하여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강림하는’ 것이라고 기록된 것으로서 재림 메시야를 상징한 나무이다.

 

만국을 소성시킬 나무: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말씀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생명나무의 잎이 만국을 소성케 한다는 말은 큰 병을 앓고 있다가 치료되면 정신이 돌아와서 회복된 것으로 말하면 안 된다. 에스겔 47장 12절에서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표현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사람들이 병들어서 약을 사용한다면 그곳은 이미 천국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인(계 7:2-3).
알곡과 쭉정이를 심판하기 전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역 사를 말한다. 이들은 극심한 환란에도 해를 받지 않는 성도들이다. 이들은 재림 메시야와 함께 시온에 서게 되는 144.000명이다(계 14:1).


요한복음 6장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로 확정지어 설명해 주셨다. 사명 자를 상징으로 십사만 사천이다. 양식은 인자되신 예수님께서 주시고 다른 분이나 인간은 양식이 될 수 없다. 누가 자기 몸을 양식이라고 줄 수 있겠는가?


인 맞은 자(계 7:4).
야곱의 아들 수대로 12지파인데 단 지파(창 49:16-18)가 빠지고 그 자리에 므낫세가 들어온 이유는 야곱의 예언 속에 빠진 이유가 있다. 장자는 르우벤(창 29:32, 35:23)인데 유다가 먼저 소개된다. 야곱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후손의 예언임과 동시에 훗날에 영적 이스라엘의 후손에 관한 예언이다(계 2:9, 3:9; 롬 2:29). 이중적인 예언 속에 단에게 한 그 예언은 초대교회와 오늘날 말세 교회에게 주신 예언이다(일곱 교회, 금 촛대).


단지파의 ‘단’과 같은 뜻으로 가룟 유다가 있다. 사도이지만 그는 처음부터 마귀이다(요 6:70).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란다고 말씀 하심은 유다가 회개할 기회이다. 그러나 자기 아비의 길을 선택했다.


십사만 사천(4)
이 숫자는 12지파에 12.000명씩 인 맞은 수를 곱한 수가 144.000이다. 즉 12지파 곱하기 12.000은 144.000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의 기본수는 12이다. 성경에는 12라는 수가 많다. 12제자, 새 예루살렘성의 12진주문과 12지파 등은 언제나 완성과 완전을 뜻한다(12라는 기본 숫자는 3과 4를 곱할 때 12라는 지상의 완전 숫자가 나온다. 3과 4를 합할 때도 완전 숫자가 나온다). 여기 12를 12로 곱하면 144이다. 이후 영적인 공식 하루가 천년을 적용하면 144.000이 된다(벧후 3:8). 영적인 공식은 일이 천이 될 수 있고, 천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천을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 숫자가 상징적인 숫자이다.


상징적인 숫자가 말하는 뜻은 예루살렘 성의 성취 수이다.
계시록 21장 10절로 27절에는 새 예루살렘 성을 설명하고 있다. 빠르게 보면 천국의 규모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은데 스다디온(1 스다디온은 약 180m)으로 척량하면 12.000 스다디온으로 약 160 km인데 규빗(1 규빗은 약 45cm)으로 척량하면 144규빗이니까 이상한 일이다. 같은 성을 무엇으로 계산하느냐로 크기가 다르다.스다디온으로는 4백리가 되고, 규빗으로는 100m도 못되는 이런 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성의 모습이 온갖 보석으로 쌓였고 정금이며 각종 보석으로 꾸몄다고 하지만 상상을 하면 감옥이나 다름이 없다. 문자대로의 성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일곱 대접을 가졌던 천사중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신부 인 어린 양을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 준다니까 눈을 뚝 뜨고 보니 신부께서 오신 것이 아니고 위에서 ‘성’ 하나가 내려온 것이다. 사람인줄 알았다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즉 어린 양이신 아내를 아름다운 성으로 표현한 것이다(계 21:9-11).
 

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어린 양의 아내가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고 그 신부의 자격에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표현할 때 값진 보석들로 표현한 것이다. 장, 광, 고와 규빗, 스다디온, 온갖 보석과 숫자들은 완벽하고 합당한 신부 감을 말한다. 12와 12를 곱하면 144인데 하늘의 영적 공식인 1.000을 곱한 수가 144.000이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인을 맞은 자들인데 영생의 양식을 나눠주는 자들인 것이다(요 6:27). 그러므로 말세에는 인 맞은 자들이 또 영생의 양식을 준다(계 22:17).
 (예수님을 믿어 영생의 양식을 먹은 자들이 인맞은 자들이다)영의 양식인 생수를 주시는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가 55장 1절 이하에서 예언했고,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요 4:13-14) 생수의 교육을 시작하셨으며 명절 끝 날에 생수( 곧 성령님)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요 7:37-38). 말세에 종들에게 또 다른 인을 치신다(계 7:3)
 

해 돋는 데로부터
 요한 계시록 7장 2절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곳으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예레미야도 51장 33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의 시대는 우상 종교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전을 헐고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 술을 마시던 때를 말씀 하심인데 ‘딸 바벨론’이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51장 36절에도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신’다는 말씀은 성도들의 앙갚음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성도를 괴롭힌 자가 아닌 바다와 샘물에게 벌하신다.
 
 
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인데 예레미야의 바다는 앞에 정관사가 있는 그 바다이며 51장 42절에 ‘바다가 바벨론에 넘친다’고 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이곳은 바다와 수 천리 떨어진 넓은 육지에 도시를 어떻게 물로 넘친다는 것일까? 암호이다. 51장 53절에 ‘암호의 딸 바벨론에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다는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즉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는 심판의 타작 마당이 된 바벨론을 말한다. 계시록 8장 8절로 9절에 불 붙는 산 같은 것도 예언서에 나오는 그 특성을 가진 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 51장 2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는 하나님께서 산이 불타는 것처럼 온 세계를 멸하신다는 것을 말 한다. 그리고 말도 못하는 산이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라고 해석하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여기 산은 사단과 그 무리들을 말하는 암호로서 적그리스도의 교회와 사단의 목자이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변질된 목회자를 불 탄 산이라 하신다.
 

셋째 나팔과 쑥별(10-11)
쑥별이 강들과 여러 물 샘에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는 재앙인데 이는 예레미야 23장 5절로 15절의 성취이다. 배경은 재림 메시야가 오시는 때이다. 이사야 11장에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와서 결실할 그 메시야 사건과 짝이 된다. 즉 재림 메시야께서 왕 중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독한 쑥물을 먹여 심판 하심을 말씀 하신 것이다.


큰 별(10)
큰별은 계시록 1장 20절에 밝힌 계시의 핵심적인 원리이다.
그 원리에 따라 별은 주의 사자인 목회자인데 비밀이 붙어 있는 자이다. 육안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사야 14장 12절에 사단을 ‘계명성’이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셋별을 금성이라고 하는데 그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계시록 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셨다. 새벽 별을 다른 말로는 샛별인데 귀한 자리에 있던 그룹(겔 28:14)이 욕심 때문에 사단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계시록 8장 10절에 하늘의 큰 별이란 하늘에서 신령한 빛을 밝히던 쟁쟁한 별이 변질됨이고 이 세상에서는 기복 사상으로 변질된 목회자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굉장한 목회자가 나타나 말씀을 상징하는 강물과 물 샘에 나타나니 강물과 물 샘은 기복신앙이라는 쓴 물이 나타났다는 말씀이다(예레미야 23:5, 6).


넷째 나팔(12)
해 삼분의 일, 달 삼분의 일, 별들의 삼분의 일, 그리고 7절에서 땅의 삼분의 일, 수목의 삼분의 일, 8절은 바다의 삼분의 일, 9절에 배들의 삼분의 일, 10절에서 들의 삼분의 일이라 하셨고, 어디에 비유를 하든지 삼분의 일이다. 즉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인데 핵심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삼분의 일이 변질됨을 말한다.


제 9 장
* 황충의 난(1-12)
예수님으로부터 열쇠를 받은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는 다섯 번째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서 무저갱을 열어 볼 때 황충이 나온 것을 보여 준다. 크기가 약 5cm이며 날개는 10cm로서 귀뚜라미 과에 속 하고 떼를 지어 움직인다. 출애굽 할 때 내린 황충은 푸른 풀이나 채소와 곡식을 먹었지만 계시록의 황충은 이마에 인을 맞지 않은 사람의 영혼을 해한다(4). 이러한 황충이 지나가면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황무지로 만든다는 교훈이다. 무저갱을 열어 자기 일꾼들을 풀어서 악행을 시작 하는데, 하나님께 위임 받은 한계는 넘지 못한다(계 17:17). 계시록 6장에 하나님 편의 사자인 4필의 말을 설명하듯 황충들이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은 현상이다(계 9:7).


하나님 편의 말들도 문자적이 아닌 상징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사명 자이었듯이 황충도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과 같고,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쓴 것은 계시록 6장 2절에 흰 말을 타신 분이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이기려고 하는 하나님 편의 사역자와 대조를 이룬 사단편의 사역자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위장을 위해 면류관을 쓰고 있으나 메시야가 아니라는 암시이다. 이것은 무엇이다 가 아니라 무엇과 같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또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 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소리 같으며’ 라고 하였고 ‘또 전갈과 같은 꼬리의 쏘는 살이 있어’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은 암시가 있다.


1. 진리의 싸움에 사단이 예비한 종,

2. 진짜 면류관으로 속이려는 금 같은 면류관은 가짜 왕이라는 것,

3. 얼굴이 사람의 얼굴 같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란 뜻(단 7:4),

4. 여자의 머리털을 가졌다는 말은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가 아닌 변질된 목회자와 교회,

5. 그 이(치아)가 사자의 이 같음은 그 짐승을 황충으로 묘사한 것(단 7:7, 19; 계 13:),

6. 철 흉갑의 황충은 계시록 9장 16절의 마병 대와 황충은 같은 존재인데 이름만 다른 것이며 황충이 수백만의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은 마병대가 이만만을 연상케 한다. 욥기 41장 1절로 2절에 사단의 군대로 묘사한 악어가 보통 창으로 뚫을 수 없는 악어의 무장으로 비유했다. 낚시와 노끈으로 이길 수 없듯이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실하게 제압 된다.

7. 황충들의 날개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소리와 같음은 하나님 편의 네 생물의 그룹이 움직일 때의 소리로 위장하여 대조를 이룬다(겔 1:24).

8.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은 황충의 환상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이만만(이억이란 많은 군대)의 군대들의 말들의 꼬리에서 나오는 힘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계 9:19).

계시록 9장 11절에서도 황충을 밝힐 때 히브리 음으로 ‘아바돈’이라 했는데 이는 멸망이란 개념이나 음부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며 ‘아볼루온’은 멸망을 의인화 한 것이다. 즉 비 인격체를 인격화한 것으로 관념화된 파괴자인 사단을 말 한다. 이들이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를 가졌다. 다섯 달의 개념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얼마간의 기간을 말한 것이다.


여섯째 나팔(13-15)
위에 13절에 명령을 하는 금단은 계시록 16장 7절에 언어 생활을 하는 제단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영체들인데 8장 3절 에서는 일곱째 인을 뗄 때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의 향을 받아서 드린 그 금단의 네 뿔이다. 금단은 제단보다는 한층 더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영체들을 말한 것으로서 고급 영체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하고 고급스러운 제사장들인 것이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
 여섯째 나팔 소리와 함께 유브라데에 결박된 천사들의 결박이 풀리는 것은 16장 12절에 ‘여섯째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더라.’와 병행 구절이다. 요한이 반모 섬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던 그 시대의 세계를 이스라엘에서 볼 때 서쪽으로는 유럽을 끝으로 생각 하였고, 동으로는 인도 일부를 아는 것을 전체의 세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강은 이집트의 나일 강과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스 강이 제일 큰 강이었다.

 

즉 세계의 제일 큰 강에 네 천사가 결박되었다는 말은 사명자인 네 생물인 천사들을 물로 표현한 뒤 하나님의 말씀(요 4:13-15)의 세계에 묶여 있다가 하늘의 허락으로 결박에서 풀려 활동한다는 말씀이다. 16장 12절에서는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했다. 계시록의 왕은 일곱별을 지칭한 종들이다(벧전 2:9). 여섯째 나팔이나 여섯째 대접이라고 하는 것을 쏟을 때 강이 말라지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이 강물이 거세게 밀어 붙여서 네 천사도 때가 오기까지는 그 강가에 묶여 있던 형편이었다. 이 천사들이 일시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인다. 죽는 자들은 변질된 종교 안에서 삼분지 일로 심판을 예비한 자들이다.
 

꼬리에 달린 말(계 9:16-19)
계시록 9장 17절에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 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의 말씀을 살피면 머리가 사자, 꼬리는 뱀, 입은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는 말(짐승)이다. 여기 사자의 머리는 다니엘 7장 4절에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의 말씀 중에도 사자와 같다고 하는 짐승이다.

 

본서 19절에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 하더라’의 구절이 10절에 황충의 꼬리를 말하면서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황충의 꼬리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황충을 말하면서 이만만의 말들을 말할 때에 그들이 꼬리에 해하는 기구를 가졌다는 암시는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처럼 간교한 사단인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것을 하나님 같이 된다고 꾀인 뱀같이 그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그 사실이 잘 보이지 않음을 꼬리로 표현하고 잘 보이지 않아 망설일 때 해친다는 교훈으로 깨어 있게 하시는 계시이다.


계시록 20절로 21절에서도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 하더라’는 마지막 환란에도 사람들이 회개치 않는 것은 출애굽 때 애굽의 왕과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께서 내리는 재앙을 보고도 끝까지 굴복치 않는 것과 같이 말세에도 똑 같이 그 환란의 끝이 와야 사단과 그의 사자인 적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손을 들게 된다는 무서운 말씀이다.


계시록 제 10 장 힘센 천사
 힘센 천사는 구름을 입고,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밝고, 그 발은 불기둥 같았음 보여준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구름을 타고 움직인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재림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셨는데 본서에는 힘센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광경이 하늘에는 무지개가 있었다. 계시록 4장 3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에 무지개가 둘려 있는 것과도 같고 라고 했고 에스겔 1장 22절로 28절에서 주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 네 생물이라고도 하고 그룹이라고도 하는 엄청난 천사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장엄한 영광의 형상을 갖춘 힘 있는 천사가 본장에 나타난 천사이다.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계시록 1장 16절에 재림 메시야 되신 인자 같은 이가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과 같은데 여기에 힘 있는 천사도 그 얼굴은 해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1장 15절에는 그 재 림 메시야의 발이 마치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의 대조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본문의 힘 있는 천사를 재림 메시야로 해석하였다. 우리도 계시록 일장에서 천사의 문제를 살펴보았듯이 천사는 모두 하나 같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사자로서 일을 하시는 천사 중에 야곱에게 본인을 소개하는 천사가 있다.

 

창세기 31장 11절로 13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천사 중에는 그 하는 사역 상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대행을 하는 천사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요한계시록의 인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는 칭호인 인자가 아니라 ‘인자’와 같은 인자인 것이다. 또 어린 양 역시 복음서의 어린 양은 성경 원어에 작은 양의 표시로 ‘암노스’인데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이 ‘아르니온’으로 어린 양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어린 양으로 기록되어 복음서의 어린 양과 계시록의 어린 양을 선명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즉 본문에 힘 있는 천사가 재림 메시야 적인 인자 같기 때문에 인자가 아니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또한 지극히 작은 어린 양인 아르니온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지극히 겸손하심과 지극히 작은 양은 만민에게 구원을 주시는 제물로 합당치 않음을 강조한다.


작은 책(계 10:2-3)
성경 원어에는 일곱 우뢰라 했는데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 어서 ‘하이 헵타 브론타이’이니 그 일곱 우뢰들이다. 그런데 그 일곱 우뢰들이 각각 제소리들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뢰들이 각각 특색이 있어서 소리를 내되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일곱 우뢰를 일곱 음성으로 부르고, 관습에는 주의 음성으로 간주한다. 계시록 5장에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던 것으로 안팎에 글이 써있고 일곱 인으로 봉합되었던 책이 있는데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그 책을 취하여 6장에서 그 책의 인을 떼시므로 그 책은 비로서 펴 놓인 책이 되었다. 또 일곱 인으로 봉합된 극비 사항이 여기 힘센 천사의 손에 펴 있을 때 이 말씀이 공개되는 순간이므로 하늘과 땅을 진동하는 우뢰 소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계시록 10장 8절로 11절의 내용은 에스겔 2장 8절부터 3장 4절의 내용과 짝이 되는 병행구절이다. 요한 계시록의 대부분이 에스겔서를 모체로 하고 계시된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 역시 같은 사건을 사도 요한에게 계시한 것이다.문제는 사도 요한이 말세 사명자의 모형으로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고 배에 채우며 그 말씀을 다시 예언하여야 할 사 명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수천 년 오래동안 저장했던 진한 포도주의 말씀을 먹을 때에는 입에 달기가 꿀과 같았고 사역을 감당하려 함에는 쓴 약 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오는 환란이나 핍박이 올 때에 그 말씀이 배에서 쓰게 되며, 고통이 따르게 된 것이다(마 13:21). 
 

일곱째 천사의 소리 내는 날
 여기서 일곱째 천사가 내는 소리를 그 나팔 소리와 같은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나팔 소리는 단순한 악기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계시록에 나팔 소리라고 하는 것을 심판을 위한 선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끝이 오는 것은 이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 즉 말세 복음의 소리가 다 끝이 나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룬다는 말씀을 계시록에서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했다(계 11:15). 
 


제 7 장 : 네 천사(계 7:1)
본장의 네 천사는 6장에 나오는 네 생물의 활동을 7장에서는 네 천사의 활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네 천사와 네 생물은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각종 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잠정적인 조치이고 인을 마치면 6장에서와 같이 각종 환란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에 붙지 못하게 하심(1).
환란을 받은 대상을 인격체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인을 치기까지 땅, 바다, 나무를 헤치지 말라고 하셨을까? 기가 막힌 대 환란에 무생물인 자연이 그렇게 중요해서 인 맞지 못한 사람을 뒤로하고 관심을 갖을까? 본서는 거의 상징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생명이다. 미가서 6장 2절에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렘 22:29).’ 미가서 6장 2절에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했고, 시편 98편 3절에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계시록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진저......’(시 96:13), 계시록 12장 16절에 ‘딸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하심은 무생물이
 아닌 인격체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바다
 하박국 3장 10절에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시편 24편 2절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의 말씀은 만세 반석 위에 세운 교회를 바다라고 한다. 에스겔 28장 2절에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척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의 말씀을 보면 바다의 중심은 하나님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용과 사단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시편 74편 13절에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했고 이사야 27장 1절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외에 성구(합 3:15; 계 1:9)등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양의 탈을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무(슥 11:2; 마 3:10, 7:17-19; 눅 3:9, 6:43-44).
 1. 이스라엘로 비유된 나무
‘대서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 렘 11:15-16)’

2. 심판 때 성도로 비유된 나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더라(눅 23:31)’

 

3. 메시야로 상징된 나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놓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 약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 할지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2-24)’ 이 말씀은 이사야 11장 1절의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한 싹과 가지가 나서 결실하여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강림하는’ 재림 메시야를 상징한 나무이다.


4. 만국을 소성시킬 나무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말씀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생명나무의 잎이 만국을 소성케 한다는 말은 큰 병을 앓고 있다가 정신이 돌아와서 회복된 것을 말한다. 에스겔 47장 12절에서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표현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사람들이 병들어서 약을 사용한다면 천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계 7:2-3).
알곡과 쭉정이를 심판하기 전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역 사를 말한다. 이들은 극심한 환란에도 해를 받지 않는 성도들이다. 이들은 재림 메시야와 함께 시온에 서게 되는 144.000명이다(계 14:1).

요한복음 6장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로 확정지어 설명해 주셨다. 사명 자를 상징으로 십사만 사천이다. 양식은 인자되신 예수님께서 주시고 다른 분이나 인간은 양식이 될 수 없다. 양식이라도 자기 몸을 줄 수 있겠는가?


인 맞은 자(계 7:4).
야곱의 아들 수대로 12지파인데 단 지파(창 49:16-18)가 빠지고 그 자리에 므낫세가 들어온 이유는 야곱의 예언 속에 빠진 이유가 있다. 장자는 르우벤(창 29:32, 35:23)인데 유다가 먼저 소개된다. 야곱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후손의 예언임과 동시에 훗날에 영적 이스라엘의 후손에 관한 예언이다(계 2:9, 3:9; 롬 2:29). 이중적인 예언 속에 단에게 한 그 예언은 초대교회와 오늘날 말세 교회에게 예언이다(일곱 교회, 금촛대). 같은 맥락으로 가룟 유다가 있다. 처음부터 마귀라이다(요 6:70).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란다고 했다.


십사만 사천(4)
이 숫자는 12지파에 12.000명씩 인 맞은 수를 곱한 수가 144.000이다. 즉 12지파 곱하기 12.000은 144.000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의 기본수는 12이다. 성경에는 12라는 수가 많다. 12제자, 새 예루살렘성의 12진주문과 12지파 등은 언제나 완성과 완전을 뜻한다(12라는 기본 숫자는 3과 4를 곱할 때 12라는 지상의 완전 숫자가 나온다. 3과 4를 합할 때도 완전 숫자가 나온다). 여기 12를 12로 곱하면 144이다. 이후 영적인 공식 하루가 천년을 적용하면 144.000이 된다(벧후 3:8). 영적인 공식은 일이 천이 될 수 있고, 천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가 상징적인 숫자이다.

 

상징적인 숫자가 말하는 뜻은 예루살렘 성의 성취 수이다.
계시록 21장 10절로 27절에는 새 예루살렘 성을 설명하고 있다. 빠르게 보면 천국의 규모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은데 스다디온(1 스다디온은 약 180m)으로 척량하면 12.000 스다디온으로 약 160 km인데 규빗(1 규빗은 약 45cm)으로 척량하면 144규빗이니까 이상한 일이다. 같은 성을 무엇으로 계산하느냐로 크기가 다르다.


스다디온으로는 4백리가 되고 규빗으로는 100m도 못되는 이런 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성의 모습이 온갖 보석으로 쌓았고 정금이며 각종 보석으로 꾸몄다고 했지만 상상을 하면 감옥이나 다름이 없다. 문자대로의 성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일곱 대접을 가졌던 천사중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신부 인 어린 양을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 준다니까 눈을 뚝 뜨고 보니 위에서 성이 내려온 것이다. 사람인줄 알았을 것이다. 즉 어린 양이신 아내를 아름다운 성으로 표현한 것이다(계 21:9-11).


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어린 양의 아내가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신부의 자격이 완벽함을 표현한 것이다. 장, 광, 고, 규빗, 스다디온, 온갖 보석과 숫자는 합당한 신부 감을 말한다. 12와 12를 곱하면 144인데 하늘의 영적 공식인 1.000을 곱한 수가 144.000이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인을 맞은 자들인데 영생의 양식을 나눠주는 자들인 것이다(요 6:27). 그러므로 말세에는 인 맞은 자(예수님을 믿어 영생의 양식을 먹은 자)들이 또 영생의 양식을 준다(계 22:17).
영의 양식인 생수를 나눠주는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가 55장 1절에서 예언했고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요 4:13-14) 시작하셨고, 명절 끝 날에 생수( 곧 성령님)를 주실 것을 전하셨던 것이다(요 7:37-38). 말세에 종들에게 또 다른 인을 치신다(계 7:3)


해 돋는 데로부터
 요한 계시록 7장 2절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헤하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인’은 어떤 이름일까? 천사가 왜 동쪽에서 가지고 왔을까? 이 예언의 모체가 되는 다니엘서에 느부갓네살의 꿈에 본 신상의 계시의 내용은 그 당시로부터 말세에 이르는 모든 역사와 종교의 모습을 상징한다. 열 발가락 시대는 우상화된 종교들을 심판함을 뜻하는데 쳐부수는 심판의 돌이 산에서 뜨인 돌이 우상을 친다(단 2:45). 계시록에서는 인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동쪽에서, 다니엘에서는 산에서이고 이사야는 ‘판단하며 판결하시는 이’가 여호와의 전이 서 있는 산이 한다는 사상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온 사상인 것이다.


에스겔은 43장 4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간’ 다는 것이고 하박국 3장 2절로 15절과 이사야 63장 1절로 6절은 심판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위치에서 볼 때 해 돋는 방향인 ‘데만’에서 오시고, 이사야 30장 25절로 33절은 원방에서 오시는 모습인데 모두 맥이 같은 사상이다.

 

이사야 30장 27절에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 혀는 맹렬한 불같으며’의 말씀 중 여호와가 오시지 않고 이름이 오신다. 오늘 천국 가는 길도 예수님의 이름만 오셔서 구원에 이른다. 요한복음 5장 43절에도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왔다 갔다 하시지 않으시고 우 주에 거대성으로 계신다. 그리고 심판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온다.


동방 독수리(46:10-11)
 10절에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른다.’는 것은 이 세상 끝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먼저 보이심을 말한다. 그 내용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불러온다. ‘동방’의 원문은 계시록과 같이 ‘해 돋는 곳’이다. 즉 먼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를 부르신다. 동방은 먼 곳이요 독수리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동방 사람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와 관계된 해석을 하지만 바른 해석이 아니다.


구원 받는 흰 무리(계 7:9-17)
흰 무리는 9절 서두에 ‘이 일 후에’ ‘인’치는 사건 후에 나오는 무리들이다. 인을 맞고 나오니 흰 무리가 아니라 인 맞은 자와 상관이 없는 흰무리이다. 12지파에서 나옴이 아닌 민족이다. 14절은 큰 환란에서 나온 자이다. 배경은 스가랴 12장 9-14절과 13장 1절이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했다.

 

 이 말세 현상들은 스가랴 12장에서부터 13장과 14장으로 연결된다. 각 장들을 살펴보면 12장은 9절에 예루살렘을 치는 것인데 말세지말의 사건이다.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멸망될 사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음’이 아니다. 침입자들이 패배를 당하는 상황이다. 이 때의 침공이란 진리의 싸움으로 회개운동이 크게 벌어지는 이유를 스가랴가 12장 10절에서 ‘그 들이 그 찌른 바 그 를 바라보고’ 애통하는 회개의 때이다.

 

재림 메시야 때에 진리가 확실하게 들어나면 세속적인 기복사상으로 변질된 교회에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터지고 새롭게 되어 큰 무리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요엘 2장에서도 영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다(롬 9:29). 문자대로라면 우리와 예수님 그리고 구원과 상관이 없다.


제 8 장 : 금향로와 일곱 나팔(1-5).1절에 일곱째 인을 떼니 30분 동안 조용하더니 일곱 나팔 가진 천사들이 나왔다. ‘인’의 해석이 나팔로 진행된 것이다. 7개의 나팔은 ‘인’과 같은 내용을 풀어간다. 즉 말세 사건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30분동안 고요한 시간은 세상의 시간이 아닌 하늘의 시간을 말한다. 열 처녀의 비유에 보면 ‘졸며 잘 새’의 시간일 것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통하여 천국이 가까웠다는 나팔을 불어서 설교하게 한 것이다.


제단과 금단
 여기에서 ‘단’을 옛날 성전에 있던 성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늘의 것을 보고 그림자 같은 모형을 만들었다면 이 단은 실재의 단이다(히 8:5; 출 25:8). 계시록 21장 22절에 ‘...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셨다. 제단이 인격체인 것이다. 때문에 사명 따라 상징으로 표현하므로 제단이 사람같이 말을 하며 행세하는 제단이다(계 16:7, 13:14). 계시록 8장 3절에 ‘또 다른 천사가 왓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이다. 인격이신 분이 받으신다는 결론이다. 인격이 없으면 ‘놓더라’이지만 인격이 있으므로 ‘드리고자’로 표현 했다. 성도의 기도를 받지 않으면 이런 표현이 없을 것이다. 
 

첫 번째 나팔(6)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나팔’을 불어 안식일을 정해주었다(레 23:3, 24). 그리고 칠일 단위와 별개로 매년 7월 1일을 ‘나팔’을 불게하고 성회로 모여 나팔 절을 지켜 죄를 사 했다
(민 29:1, 25:9). 요엘 2장 1절에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기록을 보면 나팔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관된 나팔이며 안식일의 실체가 되는 날이다.


나팔 재앙(7)
여기 나팔로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짐의 재앙 은 요엘 2장 29절로 32절 예언이 성취됨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는 말씀의 배경이 요엘 2장 31절 말씀이다. 요엘 2장 30절에 ‘피와 불과 연기’의 이적이 계시록에 천사의 나팔소리에 피 섞인 우박이 내려서 땅의 3분의 1이 타서 죽고 수목과 풀도 죽는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은 멀쩡하였다는 말씀인가? 땅, 나무, 수풀은 모두 사람을 가리킨다.


우박 재앙
 이는 이사야 28장 17절 예언의 성취인데 계시록 16장 17절 이하에서도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사람들에게 쏟아진다고 했다. 한 달란트는 약 60kg에 해당한 무게이다. 우박 사건으로 출애굽 할 때 7번째의 재앙으로 내렸던 것이다(출 9:23-26). 그 후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수 10:11; 시 78:47; 사 28:2, 30:30; 겔 13:11, 38:22; 학 2:17). 이렇게 선민을 괴롭힌 애굽인과 심판의 수단으로 하여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한다(사 28:17)고 하신다.
 

거짓의 피난처
 노아에게 홍수 때를 준비하여 산에 방주를 만들게 하여 피난처가 되게 하셨듯이 말세에도 피난처가 있는데 거짓 피난 처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교회가 피난처인데 세속주의로 변질된 교회는 거짓의 피난처이다. 이러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소탕하시겠다는 것이다.


불붙는 산
 예언서에 산들은 상징이거나 암호이다. 계시록도 암호로 되어 있다. 본문도 산이 아닌 같은 것 즉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란 사실적인 산이 아니다. 우리가 주변을 살펴보자 산과 같은 것이 어디 있는가? 예레미야도 51장 33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의 시대는 우상 종교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전을 헐고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 술을 마시던 때인데 ‘딸 바벨론’이란 이해하기 어렵다. 암호이기 때문이다. 51장 36절에도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신’다는 말씀은 성도들의 앙갚음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바다와 샘물에게 하신다. 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인데 예레미야의 바다는 앞에 정관사가 있는 그 바다이며 51장 42절에 ‘바다가 바벨론에 넘’친다고 했는데 바다와 수 천리 떨어진 육지 깊숙이 도시를 어떻게 넘친다는 것일까? 암호이다.

 

 51장 53절에 ‘암호의 딸 바벨론에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다는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즉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는 심판의 타작마당이 된 바벨론을 말한다. 계시록 8장 8절로 9절에 불 붙는 산 같은 것도 예언서에 나오는 그 특성을 가진 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 51장 2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는 하나님께서 산이 온 세계를 멸함을 말한다. 그리고 말도 못하는 산과 하나님의 관계가 대적의 관계라고 해석하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여기 산은 사단과 그 무리들의 암호로서 적그리스도의 교회에 목회자이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변질된 목회자를 불 탄 산이라 하신다. 
 

셋째 나팔과 쑥별(10-11)
쑥별이 강들과 여러 물 샘에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는 재앙인데 이는 예레미야 23장 5절로 15절의 성취이다. 배경은 재림 메시야가 오시는 때이다. 이사야 11장에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와서 결실할 그 메시야 사건과 짝이 된다. 즉 재림 메시야를 왕 중의 왕이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독한 쑥물을 먹여 심판을 하심을 하셨다.


큰 별(10)

이는 계시록 1장 20절에 밝힌 계시의 핵심적인 원리이다. 그 원리에 따라 별은 주의 사자인 목회자인데 비밀이 붙어 있는 자이다. 육안으로 구별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사야 14장 12절에 사단을 ‘계명성’이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셋별, 금성이라고 하는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계시록 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셨다. 새벽 별을 다른 말로는 샛별인데 귀한 자리에 있던 그룹(겔 28:14)이 욕심 때문에 사단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계시록 8장 10절에 하늘의 큰 별이란 하늘에서 신령한 빛을 밝히던 쟁쟁한 별이 변질됨이고 이 세상에서는 기복 사상으로 변질된 목회자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굉장한 목회자가 나타나 말씀을 상징하는 강물과 물 샘에 나타나니 강물과 물 샘은 기복신앙이라는 쓴 물이 나타났다는 말씀이다(예레미야 23:5, 6).


넷째 나팔(12)
해 삼분의 일, 달 삼분의 일, 별들의 삼분의 일, 그리고 7절에서 땅의 삼분의 일, 수목의 삼분의 일, 8절은 바다의 삼분의 일, 9절에 배들의 삼분의 일, 10절에서 들의 삼분의 일이라 하셨고, 어디에 비유를 하든지 삼분의 일이다. 즉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인데 교회의 삼분의 일이 변질됨을 말한다.
 

제 9 장 황충의 난(1-12)
예수님으로부터 열쇠를 받은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는 다섯 번째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열어 볼 때 황충이 나온 것을 보여 준다. 크기가 약 5cm이며 날개는 10cm로서 귀뚜라미 과에 속 하고 떼를 지어 움직인다. 출애굽 할 때 내린 황충은 푸른 풀이나 채소와 곡식을 먹었지만 계시록의 황충은 이마에 인을 맞지 않은 사람의 영혼을 해한다(4). 이러한 황충이 지나가면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황무지로 만든다는 교훈이다. 무저갱을 열어 자기 일꾼들을 풀어서 악행을 하는데, 하나님께 위임 받은 한계는 넘지 못한다(계 17:17). 계시록 6장에 하나님 편의 사자인 4필의 말을 설명하듯 황충들이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은 현상이다(계 9:7).


하나님 편의 말들도 문자적이 아닌 상징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사명 자이었듯이 황충도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과 같고,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쓴 것은 계시록 6장 2절에 흰 말을 탄분이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이기려고 하는 하나님 편의 사역자와 대조를 이룬 사단편의 사역자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위장을 위해 면류관을 쓰고 있으나 메시야가 아니다라는 암시이다.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과 같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또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 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의 쏘는 살이 있어’
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은 암시가 있다.
 
1. 진리의 싸움에 사단이 예비한 종,
2. 진짜 면류관으로 속이려는 금 같은 면류관은 가짜 왕이라는 것,
3. 얼굴이 사람의 얼굴 같다는 말은 사람이 아 니라 짐승이란 뜻(단 7:4),
4. 여자의 머리털을 가졌다는 말은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가 아닌 변질된 교회와 목회자,
5. 그 이(치아)가 사자의 이 같음은 그 짐승을 황충으로 묘사한 것(단 7:7, 19; 계 13:),
6. 철 흉갑의 황충은 계시록 9장 16절의 마병 대와 황충은 같은 존재인데 이름만 다른 것이며 황충이 수백만의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은 마병대가 이만만을 연상케 한다. 욥기 41장 1절로 2절에 사단의 군대로 묘사한 악어가 보통 창으로 뚫을 수 없는 악어의 무장을 비유했다. 낚시와 노끈으로 이길 수 없듯이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압이 된다.
7. 황충들의 날개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소리와 같음은 하나님 편의 네 생물의 그룹이 움직일 때의 소리와 대조를 이룬다(겔 1:24).
8.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은 황충의 환상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이만만의 군대들의 말들의 꼬리에서 나오는 힘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계 9:19).


계시록 9장 11절에 황충을 밝힌다.
히브리 음으로 ‘아바돈’은 멸망이란 개념이나 음부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아볼루온’은 멸망을 의인화 즉 비 인격체를 인격화한 것으로 관념화된 파괴자 사단을 말한다. 이들이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를 가졌다. 다섯 달의 개념은 얼마간의 기간을 말한다.


여섯째 나팔(13-15)
위에 13절에 명령을 하는 금단은 계시록 16장 7절에 말을 하는 제단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영체들로서 8장 3절 에서는 일곱째 인을 뗄 때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의 향을 받아서 드린 그 금단 네 뿔이다. 금단은 제단보다는 한층 더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영체들을 말한다. 이러한 영체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들인 것이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
 여섯째 나팔 소리와 함께 유브라데에 결박된 천사들의 결박이 풀리는 것은 16장 12절에 ‘여섯째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엣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와 병행 구절이다. 요한이 반모 섬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던 세계는 이스라엘에서 볼 때 서쪽으로 유럽을 끝으로 하고 동으로는 인도 일부가 그 때로서는 전 세계로 알고 있던 때로서 큰 강은 이집트의 나일 강과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스 강이 제일 큰 강이었다.

 

즉 세계의 제일 큰 강에 네 천사가 결박되었다는 말은 사명자인 네 생물인 천사들이 물로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요 4:13-15)의 세계에 묶여 있다가 하늘의 허락으로 결박에서 풀려 활동한다는 말씀이다. 16장 12절에서는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했다. 계시록의 왕은 일곱별을 지칭한 종들이다(벧전 2:9). 하나님 편의 종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 여섯째 나팔이나 여섯째 대접이라고 하는 것을 쏟을 때 강이 말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이 강물이 어떻게 거세든지 네 천사도 때가 오기까지는 그 강가에 묶여 있던 형편이었다. 이 천사들이 일시 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인다. 죽는 자들은 변질된 종교 안에서 삼분지 일로 예비한 자들이다. 
 

꼬리에 달린 말(계 9:16-19)
계시록 9장 17절에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 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의 말씀에 머리가 사자, 꼬리는 뱀, 입은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는 말이다. 여기 사자의 머리는 다니엘 7장 4절에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의 말씀 중에도 사자와 같다고 하는 짐승이다.

 

본서 19절에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 하더라’의 구절이 10절에 황충의 꼬리를 말하면서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황충의 꼬리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황충을 말하면서 이만만의 말들을 말할 때에 그들이 꼬리에 해하는 기구를 가졌는데 암시는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이 사단인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것을 하나님 같이 된다고 꾀인 뱀같이 간교한 교훈으로 그 정체를 숨기고 있다. 그 사실이 잘 보이지 않음을 꼬리로 표현하고 잘 보이지 않아 망설일 때 해친다는 계시이다.


계시록 20절로 21절에서도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 하더라’는 마지막 환란에도 사람들이 회개치 않는 것은 출애굽 때 애굽의 왕과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께서 내리는 재앙을 보고도 끝까지 굴복치 않는 것과 같이 말세에도 똑 같이 그 환란의 끝이 와야 사단과 그의 사자인 적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손을 들게 된다는 말씀이다.

 

제 10 장 : 힘센 천사
 힘센 천사는 구름을 입고,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밝고, 그 발은 불기둥 같았음 보여준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구름을 타고 움직인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재림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셨는데 본서에는 힘센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광경이 하늘에는 무지개가 있었다. 계시록 4장 3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에 무지개가 둘려 있는 것과도 같고 라고 했고 에스겔 1장 22절로 28절에서 주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 네 생물이라고도 하고 그룹이라고도 하는 엄청난 천사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장엄한 영광의 형상을 갖춘 힘있는 천사가 본장에 나타난 천사이다.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계시록 1장 16절에 재림 메시야 되신 인자 같은 이가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과 같은데 여기에 힘 있는 천사도 그 얼굴은 해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1장 15절에는 그 재림 메시야의 발이 마치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했다.이러한 유사성의 대조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본문의 힘 있는 천사를 재림 메시야로 해석하였다. 우리도 계시록 일장에서 천사의 문제를 살펴보았듯이 천사는 모두 하나 같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사자로서 일을 하시는 천사 중에 야곱에게 본인을 소개하는 천사가 있다. 창세기 31장 11절로 13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천사 중에는 그 하는 사역 상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대행을 하는 천사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요한계시록의 인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는 칭호인 인자가 아니라 ‘인자’와 같은 인자인 것이다. 또 어린 양 역시 복음서의 어린 양은 성경 원어에 작은 양의 표시로 ‘암노스’인데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이 ‘아르니온’으로 어린 양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어린 양으로 기록되어 복음서의 어린 양과 계시록의 어린 양을 선명하도록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런즉 본문에 힘 있는 천사가 재림 메시야 적인 인자 같기 때문에 인자가 아니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또한 지극히 작은 어린 양인 아르니온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작은 책(계 10:2-3)
성경 원어에는 일곱 우뢰라 했는데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하이 헵타 브론타이’이니 그 일곱 우뢰들이다. 그런데 그 일곱 우뢰들이 각각 제소리들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뢰들이 각각 특색이 있어서 소리를 내되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일곱 우뢰를 일곱 음성으로 부르고, 관습에는 주의 음성으로 간주한다. 계시록 5장에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던 것으로 안팎에 글이 써있고 일곱의 인으로 봉합되었던 책이 있는데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그 책을 취하여 6장에서 그 책의 인을 떼시므로 그 책은 비로써 펴 놓인 책이 되었다. 또 일곱의 인으로 봉합된 극비 사항이 여기 힘센 천사의 손에 펴 있을 때 이 말씀이 공개되는 순간이므로 하늘과 땅을 진동하는 우뢰 소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계시록 10장 8절로 11절의 내용은 에스겔 2장 8절부터 3장 4절의 내용과 짝이 되는 병행구절이다. 요한 계시록의 대부분이 에스겔서를 모체로 하고 계시된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 역시 같은 사건을 사도 요한에게 계시한 것이다.문제는 사도 요한이 말세 사면자의 모형으로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고 배에 채우며 그 말씀을 다시 예언하여야 할 사 명을 부여받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수천 년 오래 저장했던 진한 포도주의 말씀을 먹을 때에는 입에 달기가 꿀과 같았고 사역을 감당하려 함에는 쓴 약 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오는 환란이나 핍박이 올 때에 그 말씀은 배에서 쓰게 되며 고통이 따르게 된 것이다(마 13:21).


일곱째 천사의 소리 내는 날
 여기서 일곱째 천사가 내는 소리를 그 나팔 소리와 같은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천사들의 나팔 소리는 단순한 악기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하는 말씀을 계시록에서는 나팔 소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끝이 오는 것은 이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 즉 말세 복음의 소리가 다 끝이 나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룬다는 말씀을 계시록에서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했다(계 11:15).


제 11 장 : 갈대 척량의 비유
 본문 1절과 2절에 갈대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였다. 계시록 21장 15절로 17절에서는 금 갈대로 새 예루살렘 성을 척량하는데 본문에서 성전 마당은 이방인에게 내어준 것임을 확인시키며 척량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 밖이 아니라 성전 안에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성숙했는가에 관심이 있다. 알곡으로 익었다면 추수를 명령하는 의미인데 전능하신 분이 알고 계시지만 우리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일 것이다. 에스겔도 40장에서 미래의 성전을 장대로 척량했고, 스가랴도 2장 11절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지는 배경의 보여줄 때 한 사람이 척량 줄을 잡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본다. 아모스도 세 가지 환상에서 황충, 불, 다림줄이라는 척량 줄을 백성 가운데 베풀고 심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척량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이요 선민들에게는 알곡 상태로 재림을 고대하기를 바람이다.
 
 
그리고 3절로 12절은 하나님 편의 사역자가 인격체를 가진 사람 둘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천사와 생물과 말과 황충 등이 등장했다. 10장까지는 영계의 일로서 설명한 것이었지만 11장은 인격체를 가진 두 증인이라고 하는 두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사명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안의 계시이다. 이에 사단의 편에서도 사역자가 나오는데 뒤에 보면 17장과 18장 여자로 나오는 음녀와 짐승이 사단의 사역자로 등장한다. 본문의 두 증인들은 삼 년 반 동안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친 분들이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이는 스가랴 4장의 온 세상의 주 즉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섬기던 자들이 삼 년 반 동안 회개 운동을 전개한 배경이다. 실상은 기름 부은 두 사람이다. 이러한 마지막 사명 자들은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 신으로 된다고 스가랴 4장 6절에 말씀을 하심은 아무라도 마지막 사명자라고 자처하는 망령된 자가 없기를 바라신 것이다.
 

두 증인
 특정한 인물로 3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할 때 방해자가 없고 있다면 입에서 불이 나와 소멸한다고 5절에 밝히신다. 이들은 하늘을 닫아 비가 없게 하고, 물이 피로 변케 하며 여러 가지 재앙으로 세상을 치는 분들로 6절에 소개되므로 엘리야 선지의 아합 왕의 아들 아하시야의 군대가 엘리야를 헤치려고 잡으려 할 때도 엘리야로 불을 내려 군대를 사름과(왕하 1:9-12) 삼 년 반 동안 비가 없음과(왕상 17:) 모세가 애굽에서 물을 피로 변하게 한 사건(출 7:19)을 재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두 선지자를 죽인 성(11:7-12)
인류의 역사에 크고 작은 전쟁이 많지만 두 사람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이 없음을 볼 때 영적 전쟁을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을 말한다. 문제는 본문의 전쟁으로 죽는데 그 성을 말씀하실 때에 롯이 살던 소돔 또는 애굽이라 했다. 이사야 1장 10절에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잘못을 향해 꾸짖으시며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했다. 선민들을 종으로 삼던 애굽을 상징으로 말할 때 기생 라합으로 비유했다(사 30:7). 또 새 하늘과 새 시대에는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며 제단이 있을 곳이며, 만민의 복의 기관이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다(사 19:19-25). 즉 이방세계의 교회를 말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누가복음 13장 33절에 말씀하셨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곳도 예수님과 같이 제사
 
 
 여섯 번째 대접 재앙과 여섯째 인 재앙과 여섯 번째 나팔 재앙과 함께 말세 환란이다. 계시록 9장 13절로 15절에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 들이더라”라고 했다. 여섯째 나팔은 결박한 네 천사가 놓임을 받고 여섯째 대접은 강이 말라 자유롭게 되는데 왕과 천사들로 표현한 것은 하나의 사건에 사명 자들을 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사야 11장 1절로 5절에는 “이새의 줄기와 가지에서 각각 한 싹과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며,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여 그가 심판을 하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고 그 입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며 공의로, 성실로 허리띠를 삼으리라”고 했다. 6절로 9절에 에덴이 회복되어 천년 왕국이 시작되며, 10절로 16절은 이 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때에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나 만민의 기호가 된다는 것이다. 15절로 16절은 메시야 앞에 모인 이유가 유브라데 강을 건너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즉 영적인 출애굽을 교훈하신다.


아마겟돈 전쟁(계 16:13-16).
본문은 위의 사건과 다르며 사단편의 사역자인 왕들을 모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편에 사역자인 “동방에서 왕들의 길이 예비 되더라”는 사건은 이사야 41장 2절로 4절의 예언의 성취인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킨 때이다.

 

이 예언의 일 단계 성취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을 해방시킨 고레스 왕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4절 태초와 나중에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 니라고 하실 때 나중에 있을 자인, 재림 메시야 때의 사건을 예언하신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예언이 이중 삼 중적으로 계시되었다. 사단의 사역자들도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해 참 백성을 치려고 모인다(미 4:11-12). 그들은 개구리 같은 영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6절에 보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했고 1절에서는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했고, 어떤 무기를 들고 서로 싸웠다는 상황 설명이 없다.


이어서 일곱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는데 성전 보좌에서는 공기 가운데 대접을 쏟은 사실을 잘 되었다고 한다(17). 마지막 재앙으로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지진이 일어났는데 천지개벽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지진으로 큰 성이 3갈래로 갈라졌고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는 큰 성 바벨론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큰 지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 징조의 하나로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7) 라고 하신 예언의 성취이다(암 8:11).


아마겟돈으로 사람을 모으는 사건은 흔히 말하는 삼차전이 아니다. 학자들은 그러한 지명이 없고, 원문을 살피면 ‘할 므깃도’라고 한다. 즉 므깃도 산인데 지도상에 평야로 되어 있으며 산이 없다(사 13:1-16). 그러므로 여섯째 대접 재앙은 온 천하 무리들을 산으로 모아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이라는 은어의 뜻을 가진 교회 안에서 진리의 문제로 심판하시기 위한 싸움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박 재앙
 이는 출애굽(출 9:22-26)과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의 땅을 점령하려고 할 때 하늘의 우박이 선민 이스라엘을 도와 적군의 무리를 죽이는 재앙으로 내렸던 우박이다(수 10:11). 그러므로 우박 재앙이란 이 곳에서 저 곳인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심판의 재앙으로 사단의 편의 군대를 치시는 우박인 것이다.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는 우박
 성경은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고 질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거짓 피난처인 거짓 교회를 우박으로 심판하신다.


주의 종들을 통하여 싸운다.
그 우박이 내리는 시기를 이사야 말씀의 배경을 보면 28장 22절에 “온 땅을 멸망시키는 때”라고 했다. 이 우박이 쏟아져 거짓 피난처를 소탕할 때는 이사야 28장 21절에 배경이 다윗이 블레셋과 싸울 때 여호와께서 그 싸움에 직접 개입하셔서 블레셋을 격파한 것과 같게 하신다고 하셔서 21절에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신다.”고 하셨고 또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을 쳐 무찌를 때와 같이 하신다는 말씀으로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신다.”고 하셨다. 이 두 전쟁을 사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직접 개입하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때와 같이 말일에도 주의 참 종들을 통하여 심판 때에 거짓 피난처를 소탕한다는 말씀이다.


우박은 전하는 도
 이사야 28장 19절에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우박 재앙은 결국 “참 진리의 이치”를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박’이 문자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가 아니라 참 진리가 거짓 진리의 피난처를 소탕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28장 2절에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세에 재앙으로 내리는 우박은 주께로부터 출발하여 사명자의 참 진리의 이치가 능력의 말씀이 되어 거짓의 피난처에 약100근이나 되는 무서운 우박으로 변하여 내리친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철장 권세자의 그 입의 권세로 세상을 치는 것을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이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말씀 하실 때와 우박 진리와 같이 두렵다는 말씀이다.
 

유행하는 우박
 이사야 28장 19절에 우박 재앙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다고 했다. 즉 우박이란 참 진리의 이치가 되므로 유행하는 것이다. 계시록 6장에 흰 말을 타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신 재림 메시야께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장 11절에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함은 재림 메시야가 한판의 승부를 하기까지는 연속적으로 우박이 있고 그 우박은 예수님 편에 있는 자는 영생을 주고 반대편의 교인들에게는 거짓 진리에 있으므로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8장 14-15절에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니엘 8장 23절로 25절에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왕이 있다”고 하셨고, 시편 2편 2절에서도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기름 받은 자 메시야를 대적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왕과 관원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변질된 군왕들과 관원들을 말한다.


제 17 장 : 많은 물에 앉은 큰 음녀의 심판
 여기 음녀와 붉은 빛 짐승과 그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뿌과의 관계는 여기서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는 음녀의 숨겨진 얼굴을 계시하신 것이다. 음녀의 숨겨진 얼굴이 아무리 깊숙이 감추어 있다고 하여도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뜻은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말씀을 E깨닫는 공식의 설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17:9-10). 의 말씀은 짐승의 일곱 머리가 실상은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고 또 일곱 왕이 된다. 그러므로 짐승과 여자는 똑 같은 존재라는 간단한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는 계시록을 푸는 열쇠이다(계 1:19-20).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계시록 1장의 별은 : 교회의 목회자요.
촛대는: 교회이며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 짐승, 일곱 머리, 열 뿔은 하나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계와 영계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계시록 17장 18절에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고 했는데 이는 여자라고 했지만 일곱 산 위에 앉은 여자, 또 일곱 왕 위에 앉은 여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일곱 산은 은어이고 산 위에 군림하는 세력이다. 일곱 왕들의 위에 군림하는 세력도 된다는 말씀으로 예언서의 ‘산’이 가지고 있는 암호는 사명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 68편 14-16절에 “전능하신 자가 열 왕을 그 중에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려는 산과 그 산을 시기하여 보는 높은 산들이 있다고 하셨으니 문자대로의 산이 아니라 은어를 사용한 하나님 편의 사명자의 산도 있고, 사단 편에 속하는 산도 있기 때문에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는 말씀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왕이라는 단어도 은어를 사용한 사명 자를 뜻한다. 하나님 편이나 사단 편이 사명 자라면 참 교회와  변질된 교회를 의미한 것이다(17: 1-6).


여자가 앉은 물(15절).
15절에 여자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을 말할 때 쓰인다. 즉 별과 촛대인 교회와 목회자들에 관한 말씀이므로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이라고 표현하시고 교회 위에 앉은 음녀의 세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물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한다. 즉 음녀가 변질된 말씀으로 미혹한 것으로 우리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변질된 교회의 특징
 먼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을 섬기지 못하게 하지만 1차적으로 실패했을 때에 2차적으로 믿음의 목적을 흐리게 하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을 누리고 살게 하며 믿음의 대가로 영생과 복락을 꿈꾸며 모든 행위를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천국과 이 땅위에 있는 축복에 메임을 받게 한다. 이는 사단의 역사요 변질된 교회의 모습이다. 참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데로 천국을 가고 싶어서 예수님을 믿음이 아니요 그 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천국에 가며, 이 땅에서도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을 이용하는 꼴이 된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부활로 재림의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성도이다. 즉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계심이 아니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성화도 이방 종교의 도식이다. 실제 예수님도 아니요(동양인이신 예수님) 그 화상에 신성을 옮겨올 수가 없기 때문에 신성이 없는 예수님은 거짓 예수님이신 것이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그분의 신격을 격하시키거나 경외심이 없다면 몰염치이요 이방종교인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남아 있음이 최고의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이란 뜻은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아래 세상의 물질로 변질시키지 말고 참 교회와 참 성도되어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시편 1편 1절을 읽을 때 거짓 교회 성도는 복 있는 사람을 축복이 많기 때문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지만, 참 교회 성도는 복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악인의 꾀를 좇지 않음이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문화권을 누리지 못하며 거지 나사로 같아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성공과 자녀들의 축복과 미래보다 예수님을 닮아감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 속에서 보혈의 권세가 나타나 영생의 향기를 토하는 것이다.


음녀의 행위(2절)
“땅의 임금들”이란 세력이 있는 대통령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 족속을 말한다(계 17:2). 물 위에 앉은 여자도 문자대로의 여자가 아니다. ‘이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했다’(계 17:18). 즉 ‘큰 성’이란 큰 성과 같은 세력을 가진 큰 교회와 교권의 세력을 말한다. 17장 12절에는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모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의 말씀은 열 왕이 임금의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임금처럼 행세하는 왕으로 가짜 왕이라는 것이다.


음녀는 음행의 포도주로 미혹한다(2).
 2절 음행과 포도주에 취함이란 배금주의와 말씀을 상징하는 포도주이다(사 55:1). 계시록에서 변질된 말씀을 음행의 포도주이요 축복 사상과 배금주의는 음행의 포도주인데 성도들을 미혹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로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진노의 포도주 잔(계 16:19)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뀐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 51장 7 절로 8절에 “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황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의 말씀은 모든 교회로 그의 금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고 미쳤다고 했다. 가죽 부대나 항아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잔에 있으니 황금만능주의와 축복사상에서 나오는 포장된 포도주는 참포도주와 혼합된 것으로 사람의 눈에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책망과 심판을 면치 못하며 예루살렘의 죄를 책망한 것이다.


열 뿔은 열 왕이니(12)
이는 괴상한 짐승이 아니라 성품의 본질은 짐승이고, 사람의 세계에서는 여자라고 하는 교회 위에 군림한 변질된 교회를 말한다. 사도 요한이 이것을 보고 본장 6절에 ‘기이히 여기니’라고 말 했 다. 변질된 교회들은 성도의 피에 취한다. 예레미야도 6장 2절에 “기이한 여자”를 “묘한 딸”로 표현하였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세상 여자에 관한 계시를 보았으면 어찌하여 기이히 여기겠는가? 음녀가 음행을 하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의 피로 사신 신부의 교회가 음행을 하니 귀가 막힐 노릇이다. 이리의 탈로 우상 종교로 미혹하다가 말세가 되면 양의 탈을 쓰고 몸 된 교회에 와서 사단의 사자로 성도들의 피에 취하고 있으니 놀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한 뜻을 이루기까지(17)
말세에 짐승이 나와서 표를 받게 하고 교회를 유린하는 한 뜻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6절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의 말씀은 사단의 사자들도 자기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 때가 있고 그 때를 하나님의 허락으로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제 18 장 : 큰 장사꾼 바벨론
 바벨론은 종교를 가장한 장사꾼의 세력이다. 11절 이하에 상고들이 상품을 사는 자가 없어서 울고 있다. 이는 말세에 바벨론과 함께 종교 재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삼분의 일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다. 변질된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전하기보다 성공적인 삶과 소원성취와 자기 배를 섬기게 한다. 바벨론의 설교를 계시록 18장 23절에 “...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론하지만 실상은 점쟁이들이 하는 복술이라는 것이다.
 

많은 물가에 거하며 재물이 많은 자(15-19)
시편 77편 19절에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의 말씀처럼 저 푸른 바다에 정말로 주의 첩경이란 지름길이 있을까? 바다라고 하는 교회 물이라는 교회에서 구원의 방부를 운전하는 뱃사공은 목회자이므로 그 바다에 치부하였다는 말이다. 에스겔 28장 2절에 “... 내가 하나님의 자리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했고, 시편 24편 2절에도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였도다.”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상징의 바다는 하나님의 자리인 교회인데 그 바다에서 일어난 말세 교회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계시록 18장의 내용이다.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주 고객은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바벨론의 상품으로 치부한 자들이라고 했다.


그 상품들을 여러 가지를 열거한 중에서 맨 마지막에 기록된 종들과 영혼들이라고 했는데(계 19:13) 이는 바벨론이라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사고파는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51장 12절로 13절에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숫군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람의 한정, 네 결국이 이르렀도다.”했는데 역사상의 바벨론은 육지 한가운데 있는데 본문에서는 많은 물가에 거하는 나라로 말씀하신 것은 역사상의 바벨론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타락한 말세 교회라는 바벨론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 선장, 선객”은 모두가 타락한 말세 교회와 관계를 맺고 사는 목회자와 교인들을 상징한 말이다.


제 19 장 : 음녀의 심판
 본장 1절에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음성은 천상천하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의 음성을 가리키는데 할렐루야 4창이 나온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1창(1절) 할렐루야: 우리의 완성된 구원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과 능력을 찬양 드리는 것이다.

2창(3절) 할렐루야: 그 음녀의 심판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 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심판에 대하여 찬양 드리는 것이다.

3창(4절) 할렐루야: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신 약속이 진실하게 이루어짐에 대하여 24장로들과 4 생물들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분께 경배함이다.

4창(6절) 할렐루야: 전능하신이가 통치하심에 대하여 할렐루 야로 찬양을 드린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송을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영광을 드렸는데 응답하신 말씀은 5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여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할렐루야 찬양을, 본인 자신 말고 “우리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 말고 다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경배 드리는 무리들과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라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중보자의 위치에 계신다는 것이다(단 7:9-27).


어린 양의 신부의 옷(6-8).
혼인 잔치가 다가오니 예복을 입어야 되는데 세마포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는데 누구든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속에 예복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예복과 등불로 기다림에 갖출 것은 끝났는데 문제는 오시기 직전에 기름병과 기름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행실 중에 예수님만을 위한 기름병과 기름이 있어야 한다. 이사야 64장 6절에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했다. 즉 벗어버려 할 옷과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가 아닌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옳은 행실이 요구된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즐겁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
 마태복음에서(22:14)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청함은 누구든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말하고 택함은 반드시 참여함을 교훈을 하신다. 계시록의 청함을 원문을 살피면 “케크레메노이”란 말인데 초대하다의 완료를 뜻한다.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초대받음을 말하므로 본문의 청함과 마태복음의 택함을 입은 것과 같다. 이제 선택의 기회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절대권 아래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불러낸 것이다(이사야 25:6-8).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
 엄청난 천사를 만나 여러 가지 환상과 그 해설을 듣던 사도 요한은 제 2 계명에 기록된 “또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를 유대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배웠겠지만 요한이 절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고급 천사인가를 가늠케 한다. 그는 종이라고 말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거는 직언이 아닌 대언의 영이라고 한다.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은 아니다. 8절에서와 같이 계시록의 특별한 어법이다. 즉 예수님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보았던 것으로 이해된다(계 1:2).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증거라는 것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환상인 요한계시록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말씀은 “요한 계시록의 대언을 받은”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증거 함이 아니고 증거를 소유한 자 즉 가진 자라는 말이다. 바울도 내가 예수의 흔적을 증거 하였노라고 하지 않고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말 한 것을 볼 수 있다. 해석하면 사단의 세력인 용과 싸우는 종들은 밧모 섬의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예수님을 증거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 때문에 순교함이다.


재림 메시야의 싸움
 재림주이시며 심판 주이신 왕께서 백마를 타고 심판하심은 하박국 3장 8절로 15절에 있는 여호와께서 말을 타시고 밟는 심판주의 예언을 다시 예언한 것이다. 말을 타시고 심판하심은 6장에서 네 필이 하나님의 사역자를 뜻하는 말로서 참 진리를 가려내면서 싸우는 전쟁이며 진리로 판정난 후 심판주의 입에서 나오는 권세의 말씀이 사단의 사역자들을 불로 사르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새들의 고기 잔치(17-21)
하나님의 심판을 다른 면으로 표현할 때 “새들을 위한 잔치”라고 한다. 심판 때에 죽은 자의 시체가 얼마나 많든지 그 시체를 장사지내는 데 일곱 달 동안이나 그 시체를 장사할 것이라고(겔 39:12)했다. 에스겔 39장 4절과 17절에 그 새들을 위한 잔치가 “산 위에 예비 된 큰 잔치”라고 하셨고, 또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고 했다. 이 말씀에도 아마겟돈 므깃도 산에서 싸움이 바도 새들을 위한 잔치이며, 다른 말로는 아마겟돈의 싸움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하는 것이다.


제 20 장 : 천년 왕국
 천년 왕국이란 계시록 외에는 없다. 왕국의 내용에 대한 성격만 말씀하셨다. 우리는 천년 왕국과 144.000에 대하여 상고해 보자.

 

1. 천년왕국의 문제
1) 미국과 한국 교회의 천년전기와 세대 론의 경향
 박형룡 박사님의 조직신학 책은 벌콥의 조직신학을 기초로 서술했는데 천년전기에서 는 자유롭게 하시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인 무 천년설의 자리에 천년전기 론으로 대치하셨다. 미국에도 보수교회 80%가 천년 전기론 입장이다. J. N. Darby라는 사람이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법을 세웠는데 그때 성경해석으로 채택한 법이 소위 문자적이고 세대론 적인 해석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전도 여행을 가서 미국 보수주의 교회들에게 그 세대 론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 후에 스코필드라는 좋은 제자를 만났고 스코필드는 “스코필드 관주 성경”을 만들어 세대 론의 각주를 달았다. 그래서 미국의 종말론은 세대 론에서 보완된 천년 전기 론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구레인 박사가 평양 신학교에서 무천 년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이후 건너온 선교사들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천년 전기 론을 가르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는 미국과 한국이 천년 전기 론을 가르치는데 이는 장로교회의 핵인 웨스트민스터 신앙을 고백할 때 종말론은 웨스트민스터를 따르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2) 무 천년기론과 천년기론의 비교
 종말의 도식에 있어서 무 천년하고 천년기하고 어떻게 다르냐? 간단하게 말하면 무 천년은 예수님의 재림, 부활, 그리고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재림은 공중 재림, 지상 재림, 부활도 천년 전의 부활, 천년 중간의 부활, 천년후의 부활, 심판도 천년 처음에 심판, 천년 중간기의 심판, 마지막의 심판, 그런 것이 아니라 심판은 한번이요 부활도 한번, 재림도 한번,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중간에 천년기가 끼어 있지 않다. 천년전기는 계시록 20장 1절로 6절을 기초로 천년 왕국이 있을 것을 주장한다. 20장 7절에서는 사단이 나와서 그 세력이 커지니 천년기가 종결되고 그 후 에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고 하는데 재림과 부활과 심판이 복잡하다. 그렇다면 무 천년이란 언제 생겼느냐? 천년 전기 론이 있었을 때 무 천년이란 말은 없었다. 다만 예수님의 재림,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는 것을 믿고, 전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세대 론과 천년전기가 일어나서 자기들의 이론을 주장하니 성경적으로는 천년 기가 없고 무 천년이라고 반박하자 자연스럽게 무 천년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 천년이란 2천년 공교회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종말론에 한번의 재림, 한번의 부활, 그리고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현재의 하나님의 영적 왕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직접 넘어간다고 주장한다. 즉 실제적인 숫자로 천년 기간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의 권세를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의 표준적 종말론과 로마교회의 종말관도 무 천년기이다.


3) 천년기설의 배척 이유
 천년기론은 공교회의 태도가 아니다. 공교회의 고백도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공교회는 무 천년을 고백해 왔다. 그래서 교리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세파와 세속에 동화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작은 분파들에 의해서 천년 기가 시작되었다. 칼빈도 천년 기에서 주된 요점이 무엇이냐? 에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원한데 천년기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지상 재림 천년에 한계를 두는 것은 불가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천년기론에 의하면 구원에 실패해도 또 한번의 기회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은 자들을 다시 구원하시는 것이 중요하느냐?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이 중요하느냐? 그리고 많은 말을 하면 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오해가 있을 것으로 알아 더 이상 논하지 않았던 자가 칼빈이다.

 


배척이유
(1)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다. 천년에 국한함이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수태 때 천사가 그의 아비 다윗의 왕국을 그에게 주리니 그의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 왕권에 사단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고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도 다스리신 예수님의 통치를 알아야 한다. 처음 천년 기를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 왕권을 천년에 국한했다. 이단이란 시비를 통해 깨닫고 수정을 했고, 그 수정된 천년 기는 지금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왕권아래 있음을 고백한다.

 

 (2)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가 천년 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들어간다는 이론의 반박.
그들에 이론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무너진다 하니 불가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신적인 직접적인 통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피조물의 세력에 의해서 창조주의 통치가 중단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어찌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피조물의 대항에 의해서 중단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천년 기는 바르지 않다.

 

 (3)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어서 낙원의 표준에 부착할 뿐 아니 라 그 영광을 능가한다.
그런데 천년 전기 론에 의하면 여기서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처소로 옮겨진다고 하니 이것이 불가하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니 이 회복된 장소가 우리의 거소인데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천년기가 바르지 않다.

 

 (4) 세대 론과 천년기론은 피 제사의 복귀를 말한다. 왜 피의 제사를 복귀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는 일이 세대론 자들의(스코필드 7세대 구분) 주장처럼

 

1. 무 흠 시대라는 처음 낙원에서는 선악과로

 2. 양심시대인 에덴 동쪽에서 정부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 때는 양심에 의해서, 그래도 안 되니

3. 니므롯 때부터 아브라함의 소명 이전까지

4. 인간 정부에 의해서 정부의 세력으로 한번의 시취 기회를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 후에는 약속, 언약 시대이기 때문에

 5. 아브라함의 약속 때부터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까지는 약속을 믿음으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약속을 믿지 않아 실패해서 시내 산 언약을 주었고 그것이 율법시대이어서 그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얻는데 그 율법에 실패하니 마지막에는

 6. 은혜시대라 해서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7. 마지막에 천년 왕국이 오는 것이다.


위의 7세대 론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짐승이라는 피의 제사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단번에 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세우신 계획을 준비하시고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을 준비하시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스라엘과 우리가 동일한 가운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궁극적이요 또 종말론적이다. 다른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큰 구원이 없는데 천년 전기 에서는 피 제사로 복귀한다는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 구속이 간주곡으로서 은혜시대에만 효력이 있고, 재림하시면 그 때는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 유대인의 그 제사법으로 피 제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이 택한 백성이니 언젠가는 돌아올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피의 제사라는 도식은 확실하게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내신 유일한 구원이고(엡 1:3-4) 마지막 구원이다. 피 제사의 복귀는 이단적인 이론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이 하고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천년기론을 정당한 것으로 받을 수 있는가?


2. 천년 후기설
 천년 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한다. 천년왕국은 현재 우리가 사는 복음시대에 나타난다. 두 종류의 설이 있다. 점차적인 세계 복음화로 복음의 능력과 권세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사회제도와 조직을 변화시켜 복음의 지배가 이루어진 풍부한 영적 축복의 사회적 시기가 마지막에 천년 동안 전개되고 그 다음에 사단이 쫓겨 가고 짧은 기간의 배도, 악의 세력과의 무서운 싸움으로 최종적인 투쟁이 있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 일반적 부활 최후 심판 등의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이사회를 복음의 능력으로 개조시켜서 정말 의와 공평히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복음주의하고 같은 것이다.

 

그래서 라우신 부시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사회 복음주의가 천년 후기 설을 주장했다. 그 때에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경제문제만 기독교적으로 해결되면 종말이 올 줄로 알았다. 복음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며 모두 사랑이 많아 돕기를 쉬지 않고, 외국에 보조를 하고 살기 좋은 미래를 만들어가니 천년 후기 설을 좋아 하게 되고 신학자들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호소력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사회 진화론으로 흘러 천년 왕국이 복음 전파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도입되지 않고, 교육과 사회 개혁을 통하여 인간 스스로가 새 시대를 가져온다고 한다. 결국 의와 화평이 지배하는 축복의 시기가 천년이라는 것이다.


3. 천년 후기설의 비판
1)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이스라엘 자체를 택하시고 세계의 지배권을 주고, 세계의 영화를 다 보게 함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하나님께 봉사케 하고 택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 잘되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구원의 섭리에 의해 봉사자와 조력자인 도구로 서 있고, 세상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을 출산할 어머니와 같은 모태와 태반으로 삼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세상의 구원자를 보내기 위함과,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섭리와 구속 경륜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출산과 세계를 향한 복음전파는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다한 증거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마친 이스라엘을 버리시느냐?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버리신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오셔서 특권이 없어지고 복음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똑 같이 구원의 대상으로 서 있는 것이다.


2) 구원이란 복음을 믿음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의 재림 때 그 영광의 광채를 보고 이스라엘이 회심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권세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맞지 않고 섭리에도 전적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능히 구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세력을 보이시거나 물리적인 행사에 의해서 구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파는 유다에게 보여 주셔서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안보시면 좋겠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재림을 보고 그 때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능력이 아니란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로 17절의 말씀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들을 이 복음으로 구원하시고 다른 것으로 하시지 않으신다. 나사로를 심부름시키려는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라는 복음으로 구원된다고 분명히 하셨다.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3) 그리스도의 통치
 천년 동안 예수님의 권세로 직접 다스리시는데 직접 신적인 통치를 하는 그 일이 사단과 그의 군데에 의해서 악한 자들, 즉 피조물들의 공격에 의해서 창조주의 통치가 끝나는 것은 이론적 이단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 신앙인의 자세이다.


4) 영화된 성도
 영화한 성도와 죄인이 어떻게 죄와 죽음이 날뛰고 있는 지상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을 못한다. 영화된 성도와 죄인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 우리는 영체가 된다. 불신자들은 계속적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로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들은 회사를 다니며 결혼도 하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 하나는 영체로 하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망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니 같이 있어도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대해 주시고 다른 방법으로 같이 계시니 이해를 못한 것이다.


5) 보편 부활
 의인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년의 간격과 세 번, 네 번의 부활과 심판을 말하나 성경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말하고 심판의 일시성과 동시성을 말한다. 천년 기간을 주장한 자들은 의인은 부활하고, 성도만 변화하며, 악인은 불변한다고 가르친다. 양과 염소를 고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하신다. 모두를 한 번에 그것도 종말론적으로 행하신다.


6) 교회는 다윗의 왕국의 회복
 선민들은 다윗 왕국의 영광스러운 재건이 메시아의 날에 이루어진다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가 심판과 구원의 완성이 아닌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거절하자 재림 때까지 연기하면서 구약의 선지자도 모르는 교회를 간주곡으로 세우셨다는 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초림도 인류 구원을 위한 궁극적 사역이 아니라 유대나라의 회복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길이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민족의 왕국이 아니라 신령하고 우주적인 것이 신약의 계시이다. 
 
 야고보가 이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하는 것으로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할 때 분명히 아모스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인용해서 “내가 후일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리니”라고 말 할 때에 그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킨 것을 야고보가 사도행전에서 해석하기를 예루살렘 땅에 옛날의 영화를 구하는 그와 같은 지상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방이 편입됨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도의 해석을 넘어갈 수 있는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궁극적인 사역인데도 불구하고 유대나라와 그 지상적 회복을 목적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궁극적인 혹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그릇된 것이다.


7) 복음의 권세
 교회도 간주곡으로 재림 때까지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복음으로는 대대적으로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재림을 보고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직접통치를 위한 재림으로 인류가 대대적인 회심을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고 일시적으로 만드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8) 이 땅은 선민과 새 인류의 영원한 거소로서의 창조이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땅에 영원히 거하고 교회는 저 공중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창조가 곧 우리의 거소이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라고 늘 강조했는데 우리 몸만 회복이 된 후 다른 곳으로 가고 이 땅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겨처럼 날려버린다고 했으니까 없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하니 모두 없어진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창조를 그렇게 완전히 정화하시니 그 과정이 그와 같다는 재창조를 말한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영화된 인류가 살기에 합당한 거소를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과 지구를 흔적도 없이 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했다. 즉 창조의 일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서는 모든 일이 끝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장막이 여기에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러면 천국이 저 위에 있는데 어떻게 여기에 같이 임하는가? 그 때는 공간의 제약이 철폐되니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온다. 지금 현재의 천국하고 지상의 도성하고 합치는 것이다. 두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진다.


9)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
 피의 제사 복귀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피의 제사에 복귀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무너뜨려야 가능한 것이다. 구약의 제사는 원본이고 예수님의 제사는 간주곡이라는 이론이다. 이는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근본에서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효력이다.


10) 세속적인 천년기의 소망
 어거스틴은 천년기설이 육욕적이고 현세적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했다.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속아서 천년 왕국, 잘 먹고 잘사는 영광을 보고 불신자들을 다스리고 그렇게 하자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성경을 다시 쓰기 전에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에 필요한 계시도 궁극적이다. 물론 종말에 가면 그것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새로운 성경이 다시 기록되지 않는다. 이상한 것은 위와 같이 무지한 말들과 설들이 왜 우리 가운데 있고, 그리고 연구만 하는 석학들에게 남아 있는지 참으로 묘한 일이다.


4. 여호와의 증인 지상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의 비교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면 여호와 증인과 무엇이 다른가?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온 세상이 다 받으면 이라는 조건이 있다. 모든 사람이 받으면 그때부터서 영생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불가능을 시도한 것이다. 맞지 않은 것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복음을 모두가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택한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다.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열심히 사는 것, 규모 있게, 질서 있게, 열정적인 전도와 새신자반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나 그들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세상이 영생하도록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히 정화하신다. 그러면 죄악이 완전히 제거되고 정말 새로운 생을 살게 된다.


5. 계시록 20장의 해석에 대한 문제(천년왕국)

1) 성경 해석의 원리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전체는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고 조명한다. 불분명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상징적으로 기록된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산문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 1절로 6절은 상징적으로 하늘의 광경을 말하고 있다. 지상적이나 국민적인 팔레스타인에 있게 될 왕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20장에서만 6번이나 천년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느냐? 며 천년 전기 론의 대표적반박이다. 그러나 횟수에 있지 않고 상징을 말할 때 상징적이라 한다.


2) 계시록의 숫자에 대한 해석
(1) 144,000의 해석
 그렇다면 144.000과 같은 원리도 글자대로 해석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민족만 해도 천만의 성도이다.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원을 받지 못했나? 박태선의 구원론은 시온성이란 자기 아래 144.000이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괘씸죄를 적용하면서 상징적으로 보는 눈이 뜨인 것은 이단이 도와준 것이다.또 다른 이론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숫자라고 하는데 그들이 국민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144.000으로 되겠는가? 어림도 없다. 144.000은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하고 신약의 12제자로 표시한 교회의 대표에 10의 완전수 세제곱을 한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 수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곧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의 총수를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된 다.


 (2) 24보좌의 해석
 하늘나라에 보좌가 24개 밖에 없다면 그 많은 성도들이 어디에 앉을까? 천국에 들어가기만 해도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고생시키려고 의자를 없게 하신 것일까? 아니다. 구약의 교회를 대표하는 12하고, 신약교회를 대표한 12 사도를 말하기 때문에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대표를 24 보좌로 말씀하신다. 곧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총수가 24 보좌라 한다.
 
 
 (3) 666의 해석
 지금도 문자대로 받은 사람이 있고, 혹은 컴퓨터가 적그리스도로서 666이라는 자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레네우스가 666을 해석할 때 적용될 수 있는 자가 많다고 했다. 느브갓네살, 초대교회의 네로 등이 있다. 현대신학에서는 히틀러, 얼마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키신저가 666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아랍과 이스라엘을 화해시켰기 때문이다. 아랍은 이스라엘의 적이니까 멸절해야 되는데 화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66의 해석에 대한 확실한 정답은 모르지만 육일 창조로 시작되고, 진행된 후 창조가 완성될 때 악의 세력을 대변한 상징적인 숫자가 666이라고 말한다.


6. 계시록 20장의 해석
1) 사단의 결박과 감금
 본문은 천사가 하늘에서 쇠사슬로 사단을 결박한다.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도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끊어버렸다. 헐크만 돼도 끊어버릴 것이다. 사단은 얼마나 힘이 강하겠는가? 제일 강한 쇠는 스텐이고 불에 녹지 않는 쇠는 없다. 하늘의 제철소에서 가장 강한 쇠를 만들어 묶는다고 하자,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라 묶는다고 하지만 사단은 영물 어떻게 묶겠는가?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특히 숫자와 나라들에 관해서 모두 짐승으로 표기함은 로마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나라들을 짐승으로 표시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정확 무 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니 글자대로 믿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함부르크에 가면 미가엘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사단을 묶지 않고 천사 장 미가엘이 방패를 들고 창을 잡고 사단을 짓밟고 있다. 그런데 그 방패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그 창도 십자가 모양인데 헥토르가 사용했던 유명한 창으로 사단을 누르고 있다. 미가엘과 사단에 대한 무지이다.


미신적인 사단의 놀음에 속을 때 교회에서부터 속은 것이다. 사단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의 권세가 깨뜨려질 때 사단을 정복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방패와 창이 아닌 피를 조각해 놓을 것인가?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능력보다 본체론적인 예수님이 사단의 무장을 해제한 것이다. 백번 피를 흘려 죽어 주셨어도 예수님이 안계시면 사단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미신 행위에 속지말자.

 

예수님이 계시고 그 피의 권세는 사단으로 더 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게 하니 그는 쫓겨난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모른다. 예수님을 영접한 심령에 사단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거소가 불분명함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느냐의 질문과 같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민족들을 미혹하니 천년동안 감금함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권세로 사단의 권세를 제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동안이냐?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동안은 사단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며 교회를 전체적으로 박멸하지 못한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천년동안이라는 기간은 피를 흘리시고 사망권세를 이김부터 재림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만국을 미혹치 못한 것이다. 무저갱이란 끝이 없는 함정인데 어디에 준비해 두셨을까? 천년동안 내려가는데 어떻게 가두었을까? 영체도 머리끝이 쭉 올라가고 무서운 곳의 함정일까? 모두 세상기준으로 보여준 상징이다. 사단은 만국을 미혹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복음의 권세로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교회를 박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천년 왕국의 의미이다. 그러면 묶는 것은 무엇이냐? 물리적인 사슬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권세이다. 세대 론과 천년전기 론의 맹점이 공포 불안을 안겨주는 심판을 말하나 공포를 이기는 복음에는 약하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통치의 동참
 그리스도의 왕권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목 베임 받은 자들로 순교자들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인데 이를 첫 부활로 말한다. 그리고 거기 본문에 분명히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지, 부활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니 아직 그들이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지 산자의 상태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이 살아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한다.

 

둘째는 성도들의 경우인데 우리가 지금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어떻게 역사해서 좋아졌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세계 역사가 변한다. 소원을 성취해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예정해 놓으셨는데 왜 기도 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을 왜 기도하는가? 급하니까 한다. 좀 느긋해 져서 인내심을 길러야 되는데 성격이 급해 기다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기도는 안 해도 될 것과 빨리 달라는 것이며, 내년에 받을 것을 앞당겨 받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듯이 역사하신다. 예정과 경륜과 어떻게 조화 하는지는 지금 여기서 생각할 수 없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역사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만 상관해서 기도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3)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나오는데 첫째 부활은 무엇이고 두 번째 부활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무 천년 자들이 천년 전기론 자들에게 많이 공격을 당한다. 왜냐하면 둘째 부활은 글자대로 둘째 부활로 받는데 첫 부활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죽은 자들 특히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들어가 동참하는 것이다. 2. 중생을 첫 부활로 한다. 천년기간 동안 첫 부활이 있고 끝나고 마지막 두 번째 부활이 있는데 여기 중생을 부활이라고 하니 영해를 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영해한 다는 말은 들어도 이는 바른 신학인 것이다.


4) 1.000년
 천년이란 10의 완전수를 세 번 곱한 것이다. 즉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이 선포되는 기간을 말한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 권세 잡은 자들이 피 때문에 모두 발아래 복종케 했다. 144.000도 문자대로 받고 그 뒤에 허다한 무리를 셀 수도 없으니 셀 수 없는 것이 상징적이니 허다한 무리를 무시해야 될 것이 아닌가?


5) 만국을 미혹한다.
사단이 풀려난 다음에 만국을 모아 미혹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도록 진행된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도 지금 전 세계적으로 전체의 인류가 단합해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멸하려고 하는 일은 아직 진행되고 있지 않다. 숫자를 보면 기독교가 많은 것 같아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모두 무늬만 같은 기독교라 자기의 무늬가 드러날까 봐 위장하려고 언제 어떻게 핍박하면서 사단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기독교를 향한 대적은 이방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잘 알고 종교 의식인 예배당에서 예배만 잘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변화되어야 한다. 시대가 어려우면 계시록 강해가 많고 그 여파는 곧 재림 하시니 예수님 만날 준비만 하는 성도가 있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천년 기간에 대한 소망을 빼버려야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온갖 보석의 집으로 기복신앙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언제 섬기고, 예수님께 언제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살 것인가?


6) 요약
 천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의 권세가 성행한 시기이다. 사단을 묶을 강력한 쇠사슬은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쇠사슬은 복음의 권세를 말한다. 즉 사단이 무저갱에 감금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의 권세로 사단을 무장으로부터 해제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왕 노릇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서 다스리고 기도와 도고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7. 부활
1) 부활의 횟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보편적인 부활이다. 모두 부활을 한다. 차등이 있어 먼저 부활하고 뒤에 부활하고 그렇지 않다. 예외 없이 부활을 한다. 부활을 몇 번에 나누어 함이 아니다. 천년 기 시작하기 전에 부활하고 중간에, 마칠 때 부활함이 아니다. 한번의 부활로 모든 부활이 이루어진다.


2) 부활의 의의
 지금은 창조의 회복이지만 부활되면 창조의 완성이다. 즉 부활이 무에서 새롭게 창조로 된 것이 아니라 죽었던 것이 새로 사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구속이며 미완성에서 완성이 부활인 것이다.
 
 
3) 부활의 성경적 증거
 부활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함께 왔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활하셨다. 구약에는 포로 후기 선지자들 대표적으로 에스겔과 다니엘에 의해서 개인 부활이 등장한다.
 

4) 부활의 보증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기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성도의 부활의 보증인데 그가 몸의 머리로서 부활하셨고, 머리는 몸의 부활의 확증이며 필연적이다. 전신 마취에 있어서도 머리에서 말초신경까지 모두 깨어난다(조금 늦게 깨어나는 기관이 있을 뿐이다).그런데 우리가 부족하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발한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 그렇다면 그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 값으로 죽어 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 계실 때 예수님을 살리신 영이시다. 즉 나를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그리고 천국까지 확실하게 인도할 보증으로 오셔서 계신다(부활과 구원의 보증으로 계심). 바울은 부활을 교훈할 때 예수님께서 첫 열매이요 마지막 전체 추수를 보장하며 그 보증금으로 우리 안에 계심을 말한다.


5) 부활의 성질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보증은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이 있을 것을 말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신체의 구속을 포함한다(죽으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들어간 동일한 몸이 동일하게 부활하셨듯이 우리의 부활도 신체적 구속이 포함되며 그리스도께 붙은 자들의 신체적인 부활의 보장이다).


몸과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하나 그 원소들의 동일성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몸도 세포가 7년마다 완전히 교체되어서 7년 전의 추억을 남겼던 세포는 없어진 가운데 동일한 기억을 가진 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참고가 된다. 그렇다면 부활할 때 얼마나 성숙하느냐? 지적 도덕적 능력이 완전 성숙에 이른다. 얼마만큼 올라가느냐?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요한이 죽은 것 같았던 상태까지 영화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부활하면 인격과 몸의 동일성 때문에 서로 식별할 수 있고 소개가 없어도 앎이 발생하며 몸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성질로 변화되듯이 영혼도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영적인 능력을 갖게 된 높은 상태의 갱신이 이루어진다.


6) 부활의 종류
 옛날에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나 현대인들은 죽음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주장한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나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은 죽음은 무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이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다. 안식파와 럿셀파도 악인의 전적 멸절을 믿어 악인의 부활을 부정한다. 그리고 선인의 부활을 말함이 상을 받기 위해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의 부활은 영생을 위함이고 악인의 부활은 영벌의 심판을 위한 것이다. 즉 의인은 구속과 영화의 행위로 그리스도와 부활체가 같아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영생할 수 있는 상태이다. 악인은 자기 영과 몸의 부활로 극형을 초래하게 되는 수치의 부활이다.


7) 부활의 시기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 및 세계의 종말과 때를 같이 한다. 최후 심판 직전에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연결된 한번의 부활이요 한번의 심판이다.이중 부활 설: 천년 전기론 자들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년동안의 간격이 있다고 믿는다. 세대 론의 부활은 예수님의 공중 재림 시, 7년 후의 지상 재림 때, 천년 통치 기간과 천년 통치가 끝날 때 등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23절로 28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이고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더욱 복을 받을 상태에 있음을 논리적인 순서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4절로 18절을 인용하면서 부활이 몇 번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순서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비중이 큰 것부터 시작한다. 즉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자들 중에 사도들, 순교자들이 먼저 부활할 것이라고 우선권을 말하는 것이다. 계시록 20장 4절과 6절에는 목 베임을 받은 자들로 되어 있다.

 

부활한 자들로 되어 있지 않고 목 베임을 받은 자들로 되어 있다. 부활이 아니고 아직 죽은 자의 상태에 속해 있다. 즉 육체의 부활이 아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이것이 첫째 부활인데 천년 동안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천상의 장면을 지상의 장면으로 그리고 환상을 이 땅위에 일어난 일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왕권의 통치가 지상의  정치적 통치가 아니라 복음의 권세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금세기의 최고의 학문이다. 일회적 보편적 부활을 놓치지 말자.


8. 최후의 심판
1) 최후 심판의 근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세상을 종말 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 언약의 체결자로서의 책임을 모두 보고하게 되어 있다. 언약의 책임자로서의 계약을 맺었으니 그 결말을 보고 해야 한다. 자기 생을 보고할 책임이 있다. 표준이 나오지만 심판의 근거는 바로 이 언약의 체결에 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조직신학자는 없지만 이것이 바르다. 또한 심판이 있을 것을 양심이 증언 한다. 왜냐하면 언약 체결 때문이다. 모두는 죽으면 심판을 받는다. 이는 인간 심리의 깊은 확신의 하나이다. 구약에서도 이것을 말하며 신약에 더욱 명백하다. 주변에서 왜 이럴 때 하늘의 심판이 없을까? 의 대답은 현세의 심판이 없는 것을 보니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야 한다.


2) 최후의 심판과 그 성격
 부활한 자들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한다. 그리고 심판이라고 하는 뜻이 항상 형벌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심판은 형벌을 받을 자와 축복 받을 자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함께 심판이 진행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그 구속으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형벌하심으로 구원이 종결된다. 더 이상 구속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며 믿는 것이 아니고 끝이다.


3) 심판자와 그 보조들과 심판의 주체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자됨을 위하여 심판권이 주어졌다고 말씀하셨다. 곧 구속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심판주로서 인류의 역사를 종결한다. 이 명예는 그의 속죄 사업의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님께 귀속되었으며 이 것도 예수님의 승귀의 일부가 된다. 성육신과 구속을 이룸으로 받으신 대권이다. 이 대업을 천사들이 참여 하며 성도들도 어떤 부분과 역할을 담당할 것 같다.


4) 심판의 대상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동시에 선함과 악함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 때 최종적인 선포 전에 죄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도들의 궁극적인 칭의가 순식간에 선포된다. 심판대에서 받은 칭의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았던 칭의로서 최후 심판에 받을 칭의를 미리 앞당겨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것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최후의 심판은 개인의 전 생활뿐 아니라 민족적 공과도 모두 계산해서 심판을 받는다. 바울은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줄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냐고 했다. 그러니 사단과 악한 천사들, 악령들, 귀신들이 심판을 받을 때 우리도 동참하여 심판의 정죄를 한다. 선한 천사들도 우리들에게 삼판을 받을 것인가? 그 때 종이 될 서약일지 모른다.


5) 심판의 시기와 기간
 전 인류와 전역사가 심판을 받기 때문에 최후 심판은 세상의 종말에 부활과 함께 부활 직후에 이루어진다. 천년 전기 론과 같이 두 번 그리고 천년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그것도 길지 않은 시간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미 부활할 때 영광에로 부활과 사망과 지옥의 수치에로의 부활이 모두 구분되어졌다. 하나님의 전능이 부활할 때 절대 형벌과 상급의 등급을 동시에 정하신 것이다. 세대론 자들과 같이 몇 년 혹은 몇 십년동안 심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리를 모르는 결과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심판의 시기가 재림하고 부활 직후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되기 이전이지 계속해서 오래 동안 진행됨이 아니다. 즉 시간이 영원하고 통합되기 전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흐름이 정지된 상태에서 천년이란 일 년의 천배라는 개념과 의미가 없다.


6) 심판의 표준
 성도들과 죄인의 심판 표준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다. 이방인은 자연법에 의해, 유대인은 구약 계시에 의하며, 신약 성도들은 이 계시와 함께 복음의 요구에 의해서 된다는 것은 의문이다. 이러한 것은 세대 론의 잔재가 들어옴이다. 궁극적인 모든 심판의 표준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때문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이복음의 선포가 있다. 즉 옥의 영들이 알게 됨을 말 한다.


7) 개혁신학의 윤리
 오늘날 성도들의 잘못된 생각은 죄를 많이 범해도 회개하면 된다는 것이다(루터교회의 주장인데 성화는 말하지 않는다). 모두 믿음으로 용서를 받고 또 범하고 은혜로 구원을 받으니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루터 교는 칭의가 강조되니 용서만 강조되고 죄를 이기는 힘을 강조하지 못한 맹점이 있다. 개혁교회는 모두가 그리스도에게로 심어 졌다. 그리고 그 거룩한 생명으로 산다.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이종되어 졌고, 그 곳에 뿌리를 박고 그의 지체로 접목되었다. 이것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으로 살고 연합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원천에서 그리고 거룩한 터전에 살면서 죄를 이기고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 개혁교회이다. 때문에 개혁교회에서 윤리가 강조된다.

 

제 21 장 :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계신 장소도 특정한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눅 17:20-21). 본장에서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성이 지극히 귀한 각종 보석으로 꾸며지고 열 두 진주문과 그 성은 정금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성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계 21장 9절에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 준다는 천사가 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새 하늘’ ‘새 땅’이란 불순종하는 자들이 없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사단과 죄와 사망이 없고 악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이사야 11장과 65장 내용대로 지상의 낙원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치장은 어린 양의 아내의 영적 모습이다. 온전한 성도들의 모습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사는 것이다.


계시록 22장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계 22:1-2; 겔 47:1-12 )
본장의 생명수 강이나 에스겔의 생명수 강이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으며 또 그 나무가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의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에스겔서에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했다. 생명 강과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참신한 하나님의 말씀과 신령한 양식을 전하는 사명을 뜻한다. 요엘 3장 18-19절에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고 했다. 요엘은 이러한 일이 만국을 심판하실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일어날 사건이다. 그러니까 요엘 3장 18절과 19절은 심판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흘러내릴 생명수 강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엘이 애굽은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라고 했을까? 에돔이나 애굽이 왜 말세에 등장할까? 많고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있는데 근본도 없는 나라 에돔이 나타나는가? 이는 에서의 별명으로서 믿음의 조상을 모시고 태어났지만 그가 팥죽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특권을 우습게 여기고 장자의 명분을 판 대가로 하늘나라와 장자의 기업에서 탈락된 저주의 모형이다(히 12:16). 그리고 예언서에서 암시적인 애굽은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했다. 즉 하나님을 알고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이 변질된 모습을 은어로 애굽이라 한다. 이런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도 선민 가정의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기며 배로 하나님을 삼는(빌 3:19) 배금주의로 혼합된 그들은 새롭게 될 수 없고 황무지가 된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애굽은 계시록 11장 8절에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을 영적으로 말할 때 애굽이라고 한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러므로 세상 물질을 좋아하는 축복사상으로 혼합주의가 된 애굽이라고 하는 말세 교회는 황무지가 되고 황무한 들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된다는 내용을, 에스겔서는 생명수 강이 흘러서 강이 흐르는 곳마다 번성하며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지만(겔 47:8-9)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라(엘 47:11)고 하신 것이다.

 

에스겔서는 “진펄과 개펄”로 표현하셨고, 요엘서는 “애굽과 애돔”으로 상징하므로 육지에서 온갖 잡탕이 썩어서 모인 집합체인 것이다. 이렇게 세상 물질로 혼합된 혼합주의의 교회는 생명수 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다시 살아나지도 못하고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사해 바다와 같은 소금 땅처럼 된다는 말씀이다.


성도의 겉옷 두루마기(22:14)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는 성도의 옷을 크게 두 종류로 말씀하였다. 이사야 61장 10절에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임하시며 의의 겉옷으로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의 말씀에서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이 강조되었다. 구원을 받은 자가 갖추는 옷 그리고 구원을 받은 자가 의를 갖추는 모습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사실을 더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의의 옷은 구원의 옷 위에 더하여 입는 겉옷이라고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옷을 “두루마기”라고 한다. 이 의의 겉옷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 옷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예화에서 잔치 집에 온 손님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을 했는데 예화에 보면 그를 결박하여 바깥 어둠에 내어던지게 한 것이다(마 22:2-13). 이 예복이 겉옷으로 의의 겉옷을 말한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가 입혀지지 않으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입하지 않음을 말한다.


의의 겉옷 두루마기를 빠는 시기
 재림 메시야이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마 25:5)라고 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기롭다고 하는 처녀와 함께 똑 같이 잠에 깊이 빠져 있었다.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깜짝 놀란 신부들이 등불 소동을 벌인다.

 

이 때에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했고,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결론이다. 생명수 강이 가는 곳 마다 소성함을 입는다는 말씀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랑이라 맞으라, 할 때 각인이 메시야를 볼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라고 했는데 누가 찔렀느냐? 소돔이라고 하는 교회와 애굽이라고 하는 변질된 교회가 그를 찔렀으며 한다. 그 찌른 교회가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 주를 볼 것인데 재림 전에 회개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요엘 2장에 큰 회개의 운동이 있은 후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요엘 2:28-32).


구원의 문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됨이 문들을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문이 되심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0장 7절로 9절에 “그러므로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 같이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런데 왜 구원의 문들이라고 밝히시면서 많은 문들이 있다는 것일까? 첫째 구원을 성취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오 둘째 예수님께서 성취하신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들어오도록 협력하도록 부르신 사명 자를 가리킬 때 구원의 문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사야 12장 1절로 3절에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저네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 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위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려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 리로다”의 말씀은 구원을 얻은 우물이 하나가 아니라 “구원의 우물들”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2장 13절과 17장 13절에는 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생명의 물인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요한복음 4장 4절로 14절에 말씀하셨다. 즉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권세를 문들이라고 는 말세 사명자의 문들을 통하여 들어가며 구원의 우물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계시록 11장에서는 “두 증인” 또는 “두 선지자”로 말씀하셨고, 오바댜 1장 15절에는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인 심판 때를 배경하고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끝맺는 부분에 “구원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를 사용하여 구원자들이라고 하신다. 21절에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위에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는 구원자들을 보게 되는데 구원자들이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그 성에 들어갈 권세를 문들통하여 얻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87편 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 하시는 도다”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고 곤란하다. 보석 같은 것을 사랑하지 왜 문들을 사랑할까?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그의 사명자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성밖에 있을 자(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5절 말씀에 개들이 먼저 성 밖에 있음이 이상하다. 일곱으로 분류했는데 모두 사람이고 ‘개’라는 동물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사람보다 수천마리의 개들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을까? 개라는 동물이 왜 등장할까? 의문이다. 성경에 서 제일 나쁜 표현을 했던 동물이 뱀과 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몸에 좋다는 것이 아닌가? 보신탕으로 수난을 당하는 개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먼저 성밖에 있을까? 본문의 개들은 몰각한 목자들을 말한다. 이사야 56장 9-12절에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 느니라”라고 했다.

 

 이 개들은 몰각한 목자들, 즉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바로 이해하는 일이 없는 무지한 목회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은어로 인봉했기 때문에 쉽게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윗 왕도 말하기를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라고시편 22편 16절에 말했다. 또 22편 20절에서는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 하소서”라고 했고 기도에서도 성도를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의 무리들을 개들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들이 첫 번째로 성밖으로 나가는 순서이다.

 

신부 시대(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여기 신부가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치고 있다.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큰 소리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고 하였는데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렘 2:13; 17:13) 생수를 주시는 역사를 하셨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영혼의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요 4:12-14; 요 7:37-38).


이렇게 말세에 성령과 신부가 생수를 주는 때가 온 것인데 이는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성령과 신부가 역사하면서 생수를 주는 것이지만,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성령님께서는 영체이므로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신부인 사람이 생수를 나누어 주는 때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표현한 성경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4:6-7절에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심판하실 시간이 다 되어가는 그 무렵에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가 나라와 각 민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 영원한 복음은 성경 전체를 통해 이곳 한 곳에만 나온다. 그런데 이 영원한 복음이란 역사이레 한 번도 전해진 사실이 없고 심판 직전에 그 천사를 통해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전해질 복음이다. 이 영원한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성령과 신부가 주는 생명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수천 년간 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그 때가 바로 지금 문 앞에 다가온 것이다. 재림을 알리는 가슴 떨리는 복음을 기다리면서 말씀 위에 굳게 서고 오직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에 앞장서서 죄를 이기는 면역성으로 신부로 단장하는 성역 역행되는 모든 것을 끊고 아멘 오시옵소서를 외치면서 칭찬을 기대하는 성도가 되자.(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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