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회이해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통상적으로 호칭하는 이 "에클레시아"는 '개교회'(Local Church) 곧 지역교회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개교회란 일정한 지역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육체적 연합체 : Physical unity)을 말한다. 성경은 항상 지상의 교회들을 개교회와 연관하여 언급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의 집합체 혹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선포하면 발생한다. 이 선포에 의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으로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믿은 신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를 구성한다. 따라서 교회를 말씀의 창조물(creatura Verbi)로 본다.
교회는 복음의 선포로 발생하고 로마교회처럼 교황이 있으면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의 선포에 의해 발생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고 선포하면 사람들이 이 선포를 받아드리는데 그것은 이 선포에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없이는 예수를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할 수 없고 그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 피흘리셨다고 선포해도 아무런 효과를 낼 수가 없다. 따라서 복음이 선포될 수 없는 것도 성령께서 그 선포에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전도자로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도록 역사하는 직임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선포에 역사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구주로 받아드리고 회개하게 한다. 이 회개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신앙고백한다. 이 신앙 고백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복음의 선포에 성령의 역사없이는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 예수를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 성령이 선포를 받아드리게 역사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변화시켜 사람들을 회게케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므로 그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인들로 만든다. 이렇게 회개한 자들을 교회가 되게 하는데는 또 성령의 다른 역사 곧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성령의 역사로 신앙고백자들이 교회가 된다.
구약에서 교회의 칭호는 에다 (eda)와 카할 (qahal)이었다.
에다는 아마 니팔(Niphal)에서 지정된 처소에서나 혹은 지정에 의해 모이는 것과 지정된 때와 처소에 모이는 것을 의미하는 어근 야아드 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에다는 집회 혹은 회중 (an assembly or a congregation)을 지시한다. 카할은 그 어원이 (qadash)이고, 그 어원은 (qad, cat)로 세상에서 혹은 이방족속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를 통상 어원적으로 '불러내어 모여진 단체'라고 정의한다. 70인경 (LXX)이 이 명칭을 (ecclesia)로 번역하였고 혹은 로도 번역하였다.
신약에 와서도 같은 말로 썼다. 쉬나고게 ( )는 (함께)+ (인도하다, 가져오다)의 합성어로 유대인의 종교적 집회나 혹은 그들의 공예배를 위하여 집회하는 건물을 제시하였다. 엑클레시아는 (out of)+ (call)의 합성어로 보통 불리움 받는 단체, 하나님이 불러내신 단체 (the called out)으로 해석한다.
교회의 명칭이 라전 계통에서는 이 ecciesia를 쓰고 게르만 계통에서는 ecciesia를 쓰지 않고 church를 쓴다. 앵글로 색슨계는 church, 독일에서는 Kirche, 화란어로는 Kerk인데 이것은 희랍어에서 유래되었다. 교회는 주께서 그의 피로 사셨기 때문에 주님께 속한 것 혹은 주님의 소유의 뜻이다. 그런데 이런 어원적 정의로만은 교회의 본질에 합한 바른 정의로는 부족하다.
지역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교제를 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므로 교회가 교회된다. 이 연합은 성령께서 하사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한다. 이 연합은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이어서 모든 구원 은혜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진술이 교회에 타당하다.
이 연합은 물질적인 것이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이 연합으로 그리스도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한 피와 한 살을 이루게 된다. 이 연합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목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자기에게 결합하사 자기의 몸이 되게 하신다.
이 연합은 신비한 연합이어서 사람의 눈에 식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누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런 면에 있어서 교회에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가시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자들만이 중생하였고 성령으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 곧 성령이 교회의 생활 원리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립하므로 교회가 성령의 거소 혹은 성전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만이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 성령은 없고 활동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교회의 구성을 중보자의 설립보다 앞세우고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실려고 하셨기 때문에 선택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 성립의 근본 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이 연합이 사람들을 서로 교제하게 하고 교회로서 존속하고 활동하게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하나님의 구원의 적용이 핵심이어서 칼빈이 가장 경탄한 요목이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번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자들이 교회 밖으로 벗어나가 구원에서 탈락이 불가능하다. 이 진리가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은혜의 주권성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한 구원에 동참하고 성령의 주장하심을 누리며 살게 된다.
로마교회는 교황과 연합하므로 교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사람과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람과 잘 연합하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다.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기관이라고 한다.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한 전투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죄악과 싸우는 공동체이다. 개인의 죄악을 대항하여 각자가 투쟁하지만 죄악과의 연대성을 갖고 쉽게 유기적으로 번지므로 교회가 죄악과 투쟁한다. 또 나아가 교회 밖의 사회의 악에 대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가 자체 거룩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한은 성화가 완결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악과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천상교회는 승리한 교회이다.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안했으므로 영광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지만 지상에서 겪는 투쟁은 없고 안식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시고 그의 피로 구속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심으신 자들의 집합체 혹은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으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새 사람되게 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다 심으시고 접붙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연결시키신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된 자들, 그렇게 모인 자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심은 예수그리스도가 자기가 이루신 구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들은 개별적으로 살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의 교회로 살게 하심이다.
교회가 한낱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생명의 유기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일치시킬 수 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교회를 잔해하고 핍박할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행9:4) 하심으로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을 주께서 자기 자신을 핍박한 것으로 말하여 자기와 교회가 하나임을 밝히셨다.
머리는 지체없이 있을 수 없듯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자기의 지체인 자기 교회 없이 계실 수 없고 또 그렇게 계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그 생명의 원천으로 하고 그 머리로부터 생명과 모든 은사와 축복을 공급받아 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께 종속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생겨나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기 때문에 교회론을 말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해서 전개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의 근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받아 그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 한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혹은 결합을 가리켜 신비한 연합 (unio mystica) 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라고 한다. 이 unio cum Christo로 communio sanctorum 즉,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다.
이 연합을 성령께서 이루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져오심으로 성령이 교회의 생명과 생의 원리로 와 계신다. 그러므로 이 연합은 물리적, 기계적인 연합이 아니고 이 결합이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신령하고 실제적인 연합이다. 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신비한, 신령한 연합이어도 추상적인 것, 공허한 것이 아니고 이 결합이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신령하고 실제적인 연합이다 (unio spiritualis et realis). 이렇게 영으로 연합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리스도가 사는동일한 생명으로 교회가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말로 다 바르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연합이지만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 한 몸되게 하는 실제적인 연합이다.
이 연합 때문에 교회가 되고 이 연합을 성령께서 이루시므로 교회는 성령의 거소이고 성전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흩어져도 교회는 없어지지 않는다. 교회에 그리스도의 영이와 계시므로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연결을 깰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고 주의 영으로 역사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교회에 어려움이 들어와도 대부분의 경유에 교회가 깨어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상처를 입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받은 후에 교회가 매우 침체하고 활력을 내기 어렵지만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져오신 성령께서 교회의 생명으로 교회에 계시고 또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계시고 역사하시는 교회가 참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이 연합이 교회로 거룩한, 한 교회이게끔 하고, 또 보편 교회를 이루게 한다. 우리 개혁교회는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쫓아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무에 들어가서는 예배와 성도의 교제 그리고 전도와 봉사의 직무가 있는데 이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생긴 것이며 아울러 그분의 명령으로 우리에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의 사역의 결과로 그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는 의무인 것이다.
로마교회는 교황이 교리와 윤리의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한 권세를 활용한다. 그러므로 교황이 있으면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으면 그리스도가 있다. 모든 것을 거꾸로 전개하였다. 교회에 연합하면 구원에 이르고 교황에 충성하면 구원이 확실하고 구원에 이른다. 그런 가르침은 성경에 없는 로마교회의 유전일 뿐이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지상교회의 권세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들이 거듭났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세례를 베풀며 심지어 교회에 이름을 등록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구원받았다는 비성경적인 교리를 만들었다. 지역교회는 성서적으로 볼 때 타당한 것이지만 로마카톨릭 처럼 지역성과 지상성을 너무 강조하면 영적인 교회의 권위가 무시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오류는 곧 교회가 아니라는 결론에 까지 이르게 된다.
로마교회는 성례를 구원의 은혜의 필수적인 매개로 보아서 교회가 성례를 집행하므로 마력적으로 구원을 전달한다고 보았다. 성례는 집행만 하면 자동적으로 은혜가 전달된다. 그러므로 말씀과 무관하게 성례를 집행한다. 마력적으로 성례를 집행하여 집행 그 자체에서 은혜가 전달된다. 따라서 구원의 전달은 교회의 배분에 달려 있다. 사제가 식사를 하면서 성례를 집행하면 구원 은혜가 전달되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성례는 말씀과 분리해서 시행하면 죽은 성례가 되어서 아무런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성례는 귀로 듣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므로 말씀과 함께 집행될 때에만이 성례가 본래의 직임을 다한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은혜의 방편이나 성례는 그 자체로는 완전한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느지를 선포하고서 그 구원의 확인을 위해서 성례가 집행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와 루터교회와 달리 권징을 교회됨의 지표로 삼는다. 말씀의 선포로 거의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권징을 교회 성립의 필수적인 구성요건으로 보지 않지만 권징이 필요하다. 권징을 하지 못하면 교리와 교회의 거룩을 지킬수가 없다.
권징은 우선 윤리적인 면에서 시작하므로 윤리만을 그 전 대상으로 알기 쉬우나 윤리의 영역에서 권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리도 바로 지킬 수 없다. 권징은 교회가 전투교회로서 지상에서 죄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시행되어야 할 사항이다. 아직 완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릇된 가르침과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 행동을 고치는 교회의 자체 정화행위이다. 이러한 권징은 지상교회가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한다.
이 한계는 곧 지상교회가 가지고 있는 지역에서의 위치도 자각하게끔 해준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져야 하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 이지만 지역사회에서의 순결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수단 인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서는 칼빈은 교회분리와 통일에 관한 문제점을 논함에 있어서 그 기준을 교회의 본질과 순결에 직결시켜 생각한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교리는 반드시 모든 역사에 대한 신앙의 주관성의 교리를 동시에 취급함으로써 종교개혁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밝히 분석할 수 있고 여기에 교회의 통일과 분리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옳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칼빈에 있어서 "신의 주권"의 문제는 그의 모든 해석원리의 열쇠와 같이 되고 있다. 그는 그의 기독교강요 제1권 제17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그의 집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림에 있어서 아버지로서의 간섭과 배려를 특별한 증거를 통하여 나타내신다."고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개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기본요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칼빈은 속사도 시대의 교회에 대하여 신약교회와 동등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대교회의 신약적 형태는 무지한 인간들의 무감각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점차 오염되고 마침내는 결과적으로 중세기의 부패 교황권과 같은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칼빈은 인식하고 있다.
이때의 기독교는 기존교회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이들과 분리되면서까지 복음에 충실한 사도들로 말미암아 활기를 띄게 되었고 이와 같은 신앙의 대중화와 신도들의 교회로부터의 이탈은 역설적으로 교회의 순결성이 훼손되는 현상을 가져왔는데 즉 이들 이탈 성도들은 당시 교회의 열성교역자들과 마찰을 일으켜 때로 교회 안에는 이들을 잡아가려는 불순자들이 함께 혼재하는 오염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투옥하는 외식자와 이단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써 여기서 교회의 개혁으로의 종교개혁에 대해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을 부여한 칼빈의 사상적 근거를 우리는 발견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가 그 본래 사명에서 이탈된 변절자로 그 복음의 지위를 포기하여 버렸을 때에 일어나는 운동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기관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신의 주권적 간섭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져야 정당하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않된다.
칼빈은 교회의 통일을 강조함에 있어서도 또한 특출한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인정하게 된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4권에 나타나 있는 교회통일의 개념은 그가 얼마나 그 시대의 교회의 통일을 갈망하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교회의 조직은 결국 교회의 자율성 문제이다. 이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의 정치적 차이점이기도 하다. 개혁교회의 정치관은 결국 칼빈의 정치관에 영향입은 바 큰데,(교회정치) 루터는 교회의 정치를 정부의 손에 위임하였지만, 칼빈은 정치적 세력으로부터의 교회의 독립을 위한 교육에 노력하였다. 그가 교회정책의 근본착안점으로부터 생각한 것은 첫째 모든 선택의 하나님에 말씀에 표현된 대로 되어야 하며 둘째 사도적 초대교회의 본을 따르려는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칼빈은 교회자율권에 대하여 강조 했는데, 제네바 실정에 대해서 칼빈이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교회의 자율성이었다. 교회는 그 위탁된 일을 수행함에 있어 성례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그것에 필요한 교회훈련의 실시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율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 칼빈의 불변의 신념이다.
신앙 사항에 관하여는 교회가 최후 결정권을 가진다. 이것이 칼빈의 근본적인 주장이며 오직 그 때문에 그는 책벌권, 교역직 선출권, 교리의 결정권 등을 둘러싸고 시의회와 격렬한 대립을 계속한 것이다. 1541년 이래로 교회법규도 결국 칼빈이 의도한 바대로 중세로마교회와 같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계층적인 상위우월을 부정하는 것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신법의 구상화로서 자연법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에 대해 교회의 신성불가침권을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그 신앙을 지키고 바른ㄴ 신학을 유지하며 교회가 거룩을 지키기 위해 정치를 행한다.그러므로 장로파 제도의 근본 원리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세의 원천이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개혁주의 교회는 직분을 중요시한다. 이 역시 칼빈의 영향이 크다.
칼빈의 교회는 직분을 중심한 교회이다. 칼빈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말씀과 성례이기 때문에 즉 말씀을 올바로 듣고 성례를 올바로 행하며 그리고 권징에도 올바르게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시행될 때 직분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를 위하여 그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직분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할 정도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대변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칼빈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직분은 고결하며 동시에 필요한 기능이라고도 하였다.
1541년과 1561년의 교회헌법에 보면 칼빈은 네 가지 형태의 직분을 말하고 있다.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이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은 기독교 강요 1543년 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직분의 제일 첫 형태는 목사이다. 칼빈은 목사직을 에베소서 4장 11절의 주석에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목사란 양무리를 돌보는 일이 맡겨진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또 그는 "나는 목사들이 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반대할 의사가 없다." 고 하였다.
그는 오히려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며 지지하는 기관으로 마련되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 범위 내에서는 칼빈이라 할지라도 아직도 정교의 완전한 분리라는 사상에 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기도한 것은 실은 국교회의 범위 내에서의 교회의 자율성이었다. 교회의 조직에 있어 비상직원과 통사직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므로 우리는 직원의 소명에 대하여 보다 더 깊이 상고 할 필요가 있다.
칼빈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성화'에 대한 강조이다. 루터는 이신칭의가 그의 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그에게도 성화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성화의 강조는 칼빈에게 와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순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둘 다 성령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로 보았다. 그의 제네바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한 대단한 관심과 추구를 보여준다. 그의 목회는 감독들의 통해 성도들이 철저하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관리했고, 교회는 치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의로워진 자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로워진 자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의 의로움을 입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위필드 (B. B. Werfield)는 칼빈에 대하여 말하길 "칼빈은 삼위일체의 교리사에서 제2위이신 성자의 존재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주장한 것이 가장 위대하다. 즉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형이상학론은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의 인식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를 말씀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고 하였다
특히 그는 성령의 신학자라고 할만큼 성령의 역사에 깊은 교리를 교회에 주었다. 기독교 전통 속에 표현되어 있었던 형이상학론은 칼빈에게 있어서도 문제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개념으로 궁극적인 요소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것은 천상적 현상과 지상적 현상으로 설명하였다.
칼빈의 형이상학론은 중세 교회인 카톨릭 교회에서 주장된 사상과 대립적인 입장이다. 카톨릭 교회는 천상적인 것으로 지상적인 국가가 천상적인 교회에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칼빈은 세속적 국가의 정치의 권한은 종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 신성화 될 수 있음을 고조하고 있다.
그에 의해 주장된 이러한 사상은 특별 은혜와 이에 대비할 일반 은혜와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두 개념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론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거나 인간의 주권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 자체에는 영적 지배와 시민적 정치적 지배의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영적 지배의 요소는 신령한 영적 생활이고 시민적 정치적 지배의 요소는 현세적 육적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양자에 대하여 칼빈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구별시키고 양자를 혼동시키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는 양 개념의 공존과 양 개념은 신주권 하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양 개념을 무엇보다도 대비상황으로 보았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간 이성에게도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론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단면이다.
칼빈의 목회 철학에 있어 근간이 되는 것은 인식론적 측면에 있어서의 성경의 절대권위 사상이라 하겠다. 칼빈은 절대적 권위가 있는 말씀의 이해는 인간 이성의 판단을 중심할 때 이해력을 높이는 실제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에 있어서 루터보다 더 명확했다. 루터는 성경 66권 가운데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 등 성경의 일부에 대하여는 신학적 비평을 하면서 정경성을 의심하였으나, 칼빈은 성경66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경으로서의 절대 권위를 부여했다. 즉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영감, 곧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며 칼빈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성경에 부여한 것이다.
칼빈은 또한 기자들을 영감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성경 독자의 심령에 역사하여 내적 증거로 확신을 주며, 성경의 권위가 인식됨을 주장했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중시하고 성경66권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칼빈신학의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청도교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이의가 전혀 없다. 칼빈의 성경관이 축자영감이냐 아니냐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의 갈등 가운데서 제기된 문제이다. 칼빈 시대에 이런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칼빈은 성경의 영감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이성도 이미 타락으로 인해 부패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오직 성경말씀 안에서만 이해되는데 부패한 이성이라도 그 성경을 읽는 중에 깨달음과 함께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조화성이 있어서, 오랜 세기를 걸쳐서 많은 저자들에 의해 씌어 졌지만 이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이해는 그의 목회 사역에서 폭넓은 성경 해석과 성경강해를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깊은 성경 연구를 통해 나온 그의 식견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제네바시의 정서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유럽의 전 개혁교회로 퍼져 나가게 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에서 하나님 중심적 신학, 교회 중심적 활동, 천상에 대한 경건한 명상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관심들이 시대와 환경에 매이지 않는 구원(久遠)의 사상을 형성하는 동인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한 목회자상은 무엇보다 먼저는 설교자였다. 칼빈은 교회의 두 표지로 말씀과 성례를 들었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minister verbidivini)였다.
칼빈은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이 성례를 집행할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큰 소리로 선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선포의 말씀이 성례를 성례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를 집례할 때 성례에 관한 설교를 할 것을 권고했다.
예언이란 성경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성찬과 세례문제에 있어서는 기독자의 공중이 회집할 때마다 이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신자가 수찬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규정이었으나 이 규정 대신에 한 사람이 대표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중세교회가 도입한 성찬의 규정이었다.
그리고 성찬의 근본 뜻이 경시되는 일이 없도록 자주 베풀던 것을 매월 한번 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성찬에 대해서도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지체인 신자가 성령에 의해 하나로 되는고로 만약 악하고 불미한 생활에 의해서 전혀 예수그리스도와 만나고 싶지 않은 자까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것은 성찬의 모독이므로 여기서 수찬정지라는 징계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이야기되었던 것이다.
은혜는 말씀의 선포로 성령께서 직접 은혜를 주신다. 종교개혁의 근본원리는 하나님이 직접 개인 영혼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말씀의 선포로 은혜의 역사가 완전한데도 주 예수는 성례를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셨음을 주의 해야 한다고 서철원교수는 강조한다.
성례는 구원을 성취하신 구주를 기념하고 그 의 구원의 방식을 믿고 기념하므로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구원 은혜는 바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므로 그 구원자와 그 구원성취의 방식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은혜를 기념하는 것은 바로 은혜를 가져오고 그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례는 은혜의 필수적인 방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가 구원론의 중심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과의 신비적 연합과 지속적인 교제가 성도들의 영성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믿음을 통한 구원이란 자체가 신비로서 우리에게 신비스로운 체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되게 함으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죄와 의의 교환이 있고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이 하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곳에 성찬의 신비함이 있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이러한 신비를 너무 강조하고 또 여러 가지에다가 이 신비적 의미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화체설을 주장하게 되고 기타 견신례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를 추가하여 성례를 일곱가지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결혼은 일반은총의 영역이지 특별은총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결혼례나 다른 례들은 주께서 주께서 적극적으로 명하신 바가 없으므로 행할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말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감하게 된다. 세례에 대해서, 여기에는 침수례와 약식세레의 논쟁이 있기는 하나 초대교회는 침수례를 사용한 것이 사실 이므로 이것도 성경적 근거가 있고 사도들은 행적에서는 약식셰례도 보임으로 이것도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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