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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2

by 【고동엽】 2006. 6. 13.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2
(같은 제목 앞글의 보충 입니다)
신앙용어 중에 '말씀에 순종하라' '믿음을 의심하지 말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라'는 말은 지배하고, 통제하고, 독려하려는 악질적 의도를 가진 불순한 말 입니다.
많은 교회는 수익 사업을 합니다. 부동산 수익은 이제 흉도 아니고 주식, 사채, 건강식품 판매, 교육, 의료, 외국 근로자 보호 사업 등을 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기 때문에 돈 벌어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는 명분 입니다. 그런데 그 사업을 자기가 해야만 해서 부교역자를 성추행 누명 씌워 쫓아내고, 가스총 차고, 면도칼 들고 설칩니다. 정부 지원금도 자기가 받아야 하기 때문 입니다. 콩고물은 이후락에게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콩고물 만지는 사람 누구에게나 떨어지기 때문에 그 하나님나라 사업을 꼭 자기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하고 인간이 하지 않습니다. 유대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지금이 메시아 시대인데 그 하나님나라는 소리없이, 아주 부드럽게, 작은 돌멩이 하나 옆으로 치우는 것으로 오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워 인간이 하지 못하고 신이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가 가져온 영원을 맛보는 삶 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합니다.(에베소서2:6)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1.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6:20)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5:3)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8 복 중에 있는 말씀 입니다.
먼저 이 말씀의 배경을 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를 떠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절기에 맞춘 예배력에 따라 예배를 드렸습나다. 마태의 본문은 오순절에 읽히도록 씌여졌습니다.(스퐁)
오순절이 무엇인가를 말씀 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제안 합니다. 모세 혼자 통치하기엔 너무 힘드니 백성들을 천, 백, 십 명 단위로 구별하여 지도자를 뽑아서 각 단계별로 판단을 하고 모세는 최종판단하는 구조를 갖춥니다. 그런데 중구난방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옵니다.
이 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 오순절 입니다.
이른봄 니산월(우리의 정월)이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이고 이로부터 50 일 째되는 날이 오순절 입니다. 이들은 오순절에 24 시간 시편 119 편을 읽습니다. 3 시간 씩 그 시편을 8 연으로 나누어 읽습나다. 이 시편은 법에 대한 찬양과 그 법을 순종하라가 핵심 입니다.
마태그리스도인들도 오순절에 예배를 드리며 읽도록 8 복 말씀이 씌여 졌습니다. 시편 119 편의 첫 연이 8 절로 되어있고 마태복음도 8 복으로 되있습니다. 예수가 모세보다 훨씬 뛰어난 구원자임을 밝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시편 119 편은 법에 순종하라 이고 마태복음은 하나님나라에서 평화를 얻기 위한 우리의 어떤 삶의 상태 입니다. 예수가 옛법은 폐기하고 새법을 주었다고 순종하라고 하면 유대교로 돌아가는 꼴 입니다. 예수가 펼치고 시작한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게 구원 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에서 어떤 상태여야 한다고 말씀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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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한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전한 것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한 마태는 그 말씀을 해석 했습니다. 그런데 해석한 말씀이 예수의 의도에 더 적합 합니다.(E. 슈바이처) 왜냐하면
1. 너희 가난한 자는 가난 그 자체를 칭송할 염려가 있고(실제 가난을 칭송하여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 등의 위대한 신앙인이 배출되었습니다.)
2. 겸손을 가난이라 하며 사람들 앞에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사랑은 티가 나도 되지만 겸손은 티가 나면 안 됩니다. 그러한 자세는 또 하나의 바리새인이고 신앙적 교만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티를 안 내는 겸손한 사람 입니다.
개역개정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번역했고 다른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내면화 관념화의 길로 들어선 대표적 실례로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심령,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인데 '영' 혹은 '생명' 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생명이 가난한 사람' 또는 '가난한 생명으로 형성된 사람'이 적절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 하면 삶과는 상관 없이 생각이나 마음으로 가난하다는 것으로 읽히고요, 생명이 가난하다고 하면 그 사람 자체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입니다. 생명이 가난한 사람이란 한가지 예를 들자면 태생적으로 권력, 지배, 권위, 명예, 업적과 성과를 싫어하는 사람 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이 부분을 특히 주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가난이 생명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순종하라'와는 당연히 다르고 신플라톤주의의 '완전한 인간'과도 다른 기독교의 독특성 입니다. 그동안 기독교가 내면화의 길을 간 까닭에 예수말씀에서 삶의 활력과 평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완전한 인간'은 본인 스스로 선한 행위를 통해 이루어 가는 길 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가난이 생명인 사람은 내가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입니다. 그리고 덮어놓고 누구나 마술적으로 해주지도 않습니다. 갈망하며 믿음으로 살며 이룹니다. 이것이 구원 입니다. 섬은 정박하기 원치 않는 배에겐 닻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괴테)
기존 번역은 가난을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지만 나의 번역은 그 사람됨이고 가난한 상태에 있는 사람 입니다. 누가의 문자적 말씀과 다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 가난의 의미를 올바로 새기는 사람 입니다. 왜냐하면 가난이 생명이니까요.
마태가 생명의 가난이라고 해석한 배경 입니다.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수장으로 해서 가난한 사람들로 형성되었는데 야고보는 일찍 순교하고 주후 70 년 예루살렘 멸망시 요단강 동편으로 피신했다가 시리아에 정착했습니다. 이들을 에비온파라 불렀습니다.(타이센) 마태복음이 기록된 곳이 시리아 입니다.
유대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주전 5 세기에는 나라를 읽고 떠도는 사람을 지칭하다가 예수시대에는 정치, 종교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 입니다.(스퐁)
한편 히브리어에 '아나우'라는 말이 '가난한' '부드러운' 이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의 파생어인 '아나빔'이 헬라어 70 인 역으로 번역될 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praeis) 으로 번역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난은 1. 사회적 빈곤 2. 갑질하지 않는 의미 입니다.
가난이 생명인 사람은 자기의 힘을 판단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구원하는데 사용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업적, 성공에 목메지 않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 성과에 상관없이 그냥 합니다.
위의 성경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입니다. 가난을 생명으로 하는 삶을 사는 게 하나님나라 삶이므로 그렇게 해서 얻은 평화의 삶을 세상에 보이라는 예수의 당부 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은 사랑을 연습할 학교 입니다. 사랑은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 입니다.(갈5:6)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평화하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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