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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갈라디아서 4장 21절~3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세계는 경제적인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경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 문제는 경제 문제 이전에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또 알아야 합니다. 인간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성의 문제는 곧 가정의 문제요, 자녀 문제요, 그리고 후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파탄이 있기 전에 경제적 파탄이 있고, 경제적 파탄 이전에 인간성의 파괴가 있으며 그 이전에 가정 파탄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정은 인간성과 도덕과 종교,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세우게 하는 산실입니다. 가정 문제와 자녀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과 진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의 문제는 교육 문제도 아니요 심리학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오늘에 와서는 교육 제도나 시설의 문제가 아니요 교육 이론이나 철학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교육 이론도 많고, 교육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도 많습니다마는 사정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 시간에 자녀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문제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내 생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해결과 바른 믿음이 없으면 어떤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른아침입니다. 서울의 어느 시민아파트 동네를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스피커로 외칩니다. "지금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분은 주민등록증과 도장을 가지고 모처로 오라" 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이런 소리를 듣고도 깜짝놀라자빠지지 않는 것이 오늘의 우리네 심성(心性)입니다.
여러분, 정말 깜짝놀랄 일입니다. 인공 유산, 중절 수술을 하는 여자가 일년에 백만 내지 백오십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작년 한 해 사이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팔십이만이라고 합니다. 살아서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보다 죽여서 긁어내는 아이가 그 배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자유를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야기가 통하겠습니까?
1978년의 통계자료를 보면 결혼적령기에 있는 여자들을 기준으로 할 때, 1인당 인공유산이 2.9회요, 1984년의 통계로는 2.1회라고 합니다. 평균쳐서 한 여자가 두 번 내지 세 번의 인공유산을 했다는 계산이 됩니다.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저희 교회 상담실로 혼자 찾아왔습니다. "너 왜 왔니?" 물었더니 "상담하러 왔어요." "무슨 문제로?" "죽고 싶어요." "왜?" "외로워서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요. 내가 몹시도 귀찮은가봐요." "……" "우리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엄마구요.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은 동생이구요.
나는 제일 마지막이에요. 살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 이런 어린아이가 어찌 이 어린아이 하나뿐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도 강력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날로 사나워지고 끔찍해진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이 범법자들의 심리를 들여다보십시다. 이들은 남을 해치기에 앞서 정신적으로 이미 자신을 해치고 있습니다. 먼저 정신적으로 자살하고, 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생명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까짓것' 하고 스스로가 이미 죽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죽었습니다. 자살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남을 죽이는 살인이 있습니다. 한탕 해보고 죽자 ---- 이런 심리입니다.
그들은 전혀 반성의 빛조차 없이 태연합니다.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처음부터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먹지 못해서, 입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먹고살기가 어려워서일까요? 천만에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부터가 원치 않는 그런 생명으로 자학(自虐)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벤 랜들스라고 하는 학자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앙케트를 내보았습니다. "당신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총각 처녀라고 한다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겠습니까?" 그랬더니 가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60퍼센트였다고 합니다. 심각한 일입니다.
사랑은 곧 그 자신의 값을 평가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사랑받는 자만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압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에는 자기 생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자학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남의 생명까지 해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 근본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유형의 인간, 두 존재의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비유입니다.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아들 ---- 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서자(庶子)로 태어납니다. 육신으로는 엄연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혈통이 그렇달 뿐, 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향락의 부산물 허무와 정욕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노예의 몸에서 노예로 태어난 것이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유형입니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자녀입니다. 키우는 동안에도 원치 않았고, 그 뒤에도 너는 왜 태어났느냐고 했으며 내쫓아야 했습니다. 낳은 자도 그를 저주했고, 태어난 자도 평생을 저주하며 분하게 살아갑니다. 결국은 전쟁의 사람이 됩니다. 싸움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는 불신앙의 자녀입니다. 비도덕적이요 약속이 없습니다. 상속도 없습니다. 향락 중에 어쩌다가 원치 않는데 태어나서 저주하며 저주받으며 평생을 살고, 저주 속에 끝납니다. 이스마엘에게 남는 것은 악이요 힘이요, 포악일 뿐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또 하나는 약속의 자녀, 곧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삭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의 성취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사 그 창조적인 능력으로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무려 25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에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유인이요 합법적인 자녀입니다. 양심의 자유, 도덕적 자유 속에서 영광스럽게 태어납니다. 그 이름 자체가 웃음이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삭 ---- 로마서 9장과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을 따라 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상속이 있고, 권세가 있고, 명예가 있고, 신앙의 유산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기름이 있습니다. 이삭은 이런 유형의 자녀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우리 한국은 특별히 남자 선호(選好) 사상이 있어서 아들 하나 낳기 위해 딸을 자꾸 낳아놓습니다. 어느 장로님 보니까 딸 일곱을 연년생으로 낳아요. 여덟 번째가 아들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 일곱이 살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가만히 보니까 이름을 지을 때도 다시는 딸이지 말라고 말녀(末女), 또 딸이니까 '다음번에는 아들이다' 하고 그 딸의 이름을 복남(福男) 이라 짓고…… 이런 식입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딸의 이름을 신자(信子)라 지었는데, 다음번에는 아들 낳을 줄 믿는다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나요.
자, 소위 부산물로 태어난 격인 그 자녀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문제는 두고두고 부산물 취급을 받는 데 있습니다.
이래서야 공부인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인간성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애초부터 생명 자체의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위로 아들딸 삼남매를 두었는데, 멀찍이 칠 년 후에 다시 막내를 또 낳았어요. 늦게 낳아서 키우려니 귀찮았던지 툭하면 "저건 괜히 태어나가지고 말썽이야" 하고 푸념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보는 데서도 입버릇처럼 그런 소리를 예사로 하기에 한번은 충고를 했습니다. "아이가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소? 말조심하시오." 그랬더니 실수했다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해요. 그리고 얼마후에 다시 그 집에 들렀더니 그 아이를 늦게 얻어 그런지 세상에없이 소중하다고 하면서 애지중지합니다. "위의 아이들은 괜히 키웠어요. 요 아이가 진짜예요. 우리집에 이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무 재미도 없을 뻔했어요."
여러분, 도대체 자녀를 어떤 마음으로 키우는 것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 경우를 한번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무척 장난이 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보면 손가락 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고 걱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썽을 부릴 때마다 어머니께서 앞에 불러 앉히시고 꾸짖으시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꼼짝을 못하게 되는 한마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얻으려고 십 년을 기도했다, 알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는 제가 꼼짝을 못하고 빌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낳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아느냐, 얼마나 소중하게,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너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 여러분,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은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요, 교육학으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에 대한 외경(畏敬)으로 키웁니다.
60년대 초에 미국의 어느 가정에 가봤더니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어떻게나 많은지, 그 장난감을 모아둔 방이 마치 무슨 공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래 하도 좋아 보여서 그 집 아이들보고 "야, 너희들은 참 복도 많구나. 너희 아버지 어머니가 너희를 사랑해서 이렇게 좋은 것들을 다 사다주시니 얼마나 좋겠니?" 했더니 그 집 아이 하는 말이 "No, it doesn't!" ----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네끼리 놀러 가려고, 그래서 우리들을 떼어놓으려고 사다준 거라는 대답입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쳐다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엄마가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헌신적인가?' 하고요.
자기 희생 ---- 이것이 성경이요, 진리입니다. 소원을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욕구를 충족 시켜준다고 그게 사랑인 줄 아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이루어주지 아니하고,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자기 희생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것보다 더 확실한 자기 사랑의 계시는 없습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은 통하지 않습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느 집의 딸이 집을 나갔습니다. 방탕하다가 창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내어 찾아갔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볼 수가 없어서 도망쳐버렸습니다. 딸이 있던 방에 들어가 비통해하다가 나오면서 어머니는 사진 한 장을 남겨두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딸이 어머니의 사진을 봅니다. 자기를 걱정하면서 초췌해진 어머니의 그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울다가 그 딸은 결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온 세상이 다 능력대로 평가하고, 잘난 사람 우대하고, 사람 천대하고, 기술 있는 사람 높이고, 기술 없는 사람 낮추고 아이큐 높은 사람 우대하고, 낮은 사람 천대하고, 못 가진 자 천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정에서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도 내 자식이요 못해도 내 자식입니다. 인물이 잘나도 내 자식이요 못나도 내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우리 가정에 보내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입니다.
은혜의 자녀입니다.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그 크신 능력과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의 뜻을 내가 누리고 저희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보이고 가르칠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 자녀로 해서 감사하는 마음, 자녀에 대한 사랑을 마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로, 그 뿌리도 그 미래도 영원한 가치도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그 의미로 자녀를 대할 때에야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비롯되는 것입니다.
벤 부렌의 유명한 기도문인 「부모의 기도」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로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제 자녀를 이해하는 부모가 되게 하시고
저들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듣는 부모가 되게 하시며 저들이 던지는 어떠한 질문에도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시고, 저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실수하였을 때에 비웃지 않도록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시옵소서.
어느 순간에나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통하여 정직한 것이 옳다는 것을 일러줄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제 기분이 언짢을 때에 제 입술을 지켜주시고
저들이 어리다는 것과
저들이 어른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들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하는 참을성을 제게 주시고, 저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로 정직하고 바르고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시옵소서.
저들이 존경하고 본받는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여러분, 생명이란 육신의 향락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의 도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뿌리도, 그리고 영원한 가치도 그 언약에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죽고 싶다고 투덜거리고 있다면 자녀들은 그 밑에서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저렇게 괴로운 세상에 무엇 하러 나까지 태어나서 말썽인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육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 잘 믿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교육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기만 하십시오. 자녀들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감사하고 생명의 축제를 벌이십시오. 산다는 문제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축제 ----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본령입니다.
언약의 자녀는 거기서 피어날 것입니다.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갈라디아서 4장 21절~3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세계는 경제적인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경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 문제는 경제 문제 이전에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또 알아야 합니다. 인간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성의 문제는 곧 가정의 문제요, 자녀 문제요, 그리고 후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파탄이 있기 전에 경제적 파탄이 있고, 경제적 파탄 이전에 인간성의 파괴가 있으며 그 이전에 가정 파탄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정은 인간성과 도덕과 종교,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세우게 하는 산실입니다. 가정 문제와 자녀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과 진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의 문제는 교육 문제도 아니요 심리학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오늘에 와서는 교육 제도나 시설의 문제가 아니요 교육 이론이나 철학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교육 이론도 많고, 교육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도 많습니다마는 사정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 시간에 자녀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문제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내 생명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른 해결과 바른 믿음이 없으면 어떤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른아침입니다. 서울의 어느 시민아파트 동네를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스피커로 외칩니다. "지금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분은 주민등록증과 도장을 가지고 모처로 오라" 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이런 소리를 듣고도 깜짝놀라자빠지지 않는 것이 오늘의 우리네 심성(心性)입니다.
여러분, 정말 깜짝놀랄 일입니다. 인공 유산, 중절 수술을 하는 여자가 일년에 백만 내지 백오십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작년 한 해 사이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팔십이만이라고 합니다. 살아서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보다 죽여서 긁어내는 아이가 그 배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자유를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야기가 통하겠습니까?
1978년의 통계자료를 보면 결혼적령기에 있는 여자들을 기준으로 할 때, 1인당 인공유산이 2.9회요, 1984년의 통계로는 2.1회라고 합니다. 평균쳐서 한 여자가 두 번 내지 세 번의 인공유산을 했다는 계산이 됩니다.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저희 교회 상담실로 혼자 찾아왔습니다. "너 왜 왔니?" 물었더니 "상담하러 왔어요." "무슨 문제로?" "죽고 싶어요." "왜?" "외로워서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요. 내가 몹시도 귀찮은가봐요." "……" "우리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엄마구요.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은 동생이구요.
나는 제일 마지막이에요. 살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 이런 어린아이가 어찌 이 어린아이 하나뿐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도 강력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날로 사나워지고 끔찍해진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이 범법자들의 심리를 들여다보십시다. 이들은 남을 해치기에 앞서 정신적으로 이미 자신을 해치고 있습니다. 먼저 정신적으로 자살하고, 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생명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까짓것' 하고 스스로가 이미 죽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죽었습니다. 자살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남을 죽이는 살인이 있습니다. 한탕 해보고 죽자 ---- 이런 심리입니다.
그들은 전혀 반성의 빛조차 없이 태연합니다.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처음부터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먹지 못해서, 입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먹고살기가 어려워서일까요? 천만에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부터가 원치 않는 그런 생명으로 자학(自虐)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벤 랜들스라고 하는 학자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앙케트를 내보았습니다. "당신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총각 처녀라고 한다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겠습니까?" 그랬더니 가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60퍼센트였다고 합니다. 심각한 일입니다.
사랑은 곧 그 자신의 값을 평가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사랑받는 자만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압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에는 자기 생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자학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남의 생명까지 해하게 됩니다. 문제는 내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 근본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유형의 인간, 두 존재의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비유입니다.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아들 ---- 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서자(庶子)로 태어납니다. 육신으로는 엄연히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혈통이 그렇달 뿐, 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향락의 부산물 허무와 정욕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노예의 몸에서 노예로 태어난 것이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유형입니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자녀입니다. 키우는 동안에도 원치 않았고, 그 뒤에도 너는 왜 태어났느냐고 했으며 내쫓아야 했습니다. 낳은 자도 그를 저주했고, 태어난 자도 평생을 저주하며 분하게 살아갑니다. 결국은 전쟁의 사람이 됩니다. 싸움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는 불신앙의 자녀입니다. 비도덕적이요 약속이 없습니다. 상속도 없습니다. 향락 중에 어쩌다가 원치 않는데 태어나서 저주하며 저주받으며 평생을 살고, 저주 속에 끝납니다. 이스마엘에게 남는 것은 악이요 힘이요, 포악일 뿐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또 하나는 약속의 자녀, 곧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삭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의 성취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사 그 창조적인 능력으로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무려 25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에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유인이요 합법적인 자녀입니다. 양심의 자유, 도덕적 자유 속에서 영광스럽게 태어납니다. 그 이름 자체가 웃음이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삭 ---- 로마서 9장과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을 따라 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상속이 있고, 권세가 있고, 명예가 있고, 신앙의 유산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기름이 있습니다. 이삭은 이런 유형의 자녀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우리 한국은 특별히 남자 선호(選好) 사상이 있어서 아들 하나 낳기 위해 딸을 자꾸 낳아놓습니다. 어느 장로님 보니까 딸 일곱을 연년생으로 낳아요. 여덟 번째가 아들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 일곱이 살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가만히 보니까 이름을 지을 때도 다시는 딸이지 말라고 말녀(末女), 또 딸이니까 '다음번에는 아들이다' 하고 그 딸의 이름을 복남(福男) 이라 짓고…… 이런 식입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딸의 이름을 신자(信子)라 지었는데, 다음번에는 아들 낳을 줄 믿는다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나요.
자, 소위 부산물로 태어난 격인 그 자녀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문제는 두고두고 부산물 취급을 받는 데 있습니다.
이래서야 공부인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인간성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애초부터 생명 자체의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위로 아들딸 삼남매를 두었는데, 멀찍이 칠 년 후에 다시 막내를 또 낳았어요. 늦게 낳아서 키우려니 귀찮았던지 툭하면 "저건 괜히 태어나가지고 말썽이야" 하고 푸념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보는 데서도 입버릇처럼 그런 소리를 예사로 하기에 한번은 충고를 했습니다. "아이가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소? 말조심하시오." 그랬더니 실수했다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해요. 그리고 얼마후에 다시 그 집에 들렀더니 그 아이를 늦게 얻어 그런지 세상에없이 소중하다고 하면서 애지중지합니다. "위의 아이들은 괜히 키웠어요. 요 아이가 진짜예요. 우리집에 이 아이가 없었더라면 아무 재미도 없을 뻔했어요."
여러분, 도대체 자녀를 어떤 마음으로 키우는 것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 경우를 한번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무척 장난이 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보면 손가락 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고 걱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썽을 부릴 때마다 어머니께서 앞에 불러 앉히시고 꾸짖으시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꼼짝을 못하게 되는 한마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얻으려고 십 년을 기도했다, 알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는 제가 꼼짝을 못하고 빌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낳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아느냐, 얼마나 소중하게,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너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 여러분, 이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은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요, 교육학으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에 대한 외경(畏敬)으로 키웁니다.
60년대 초에 미국의 어느 가정에 가봤더니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어떻게나 많은지, 그 장난감을 모아둔 방이 마치 무슨 공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래 하도 좋아 보여서 그 집 아이들보고 "야, 너희들은 참 복도 많구나. 너희 아버지 어머니가 너희를 사랑해서 이렇게 좋은 것들을 다 사다주시니 얼마나 좋겠니?" 했더니 그 집 아이 하는 말이 "No, it doesn't!" ----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네끼리 놀러 가려고, 그래서 우리들을 떼어놓으려고 사다준 거라는 대답입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쳐다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엄마가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헌신적인가?' 하고요.
자기 희생 ---- 이것이 성경이요, 진리입니다. 소원을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욕구를 충족 시켜준다고 그게 사랑인 줄 아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이루어주지 아니하고,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자기 희생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것보다 더 확실한 자기 사랑의 계시는 없습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은 통하지 않습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느 집의 딸이 집을 나갔습니다. 방탕하다가 창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내어 찾아갔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볼 수가 없어서 도망쳐버렸습니다. 딸이 있던 방에 들어가 비통해하다가 나오면서 어머니는 사진 한 장을 남겨두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딸이 어머니의 사진을 봅니다. 자기를 걱정하면서 초췌해진 어머니의 그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울다가 그 딸은 결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온 세상이 다 능력대로 평가하고, 잘난 사람 우대하고, 사람 천대하고, 기술 있는 사람 높이고, 기술 없는 사람 낮추고 아이큐 높은 사람 우대하고, 낮은 사람 천대하고, 못 가진 자 천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정에서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도 내 자식이요 못해도 내 자식입니다. 인물이 잘나도 내 자식이요 못나도 내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우리 가정에 보내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입니다.
은혜의 자녀입니다.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그 크신 능력과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의 뜻을 내가 누리고 저희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보이고 가르칠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 자녀로 해서 감사하는 마음, 자녀에 대한 사랑을 마땅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로, 그 뿌리도 그 미래도 영원한 가치도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그 의미로 자녀를 대할 때에야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비롯되는 것입니다.
벤 부렌의 유명한 기도문인 「부모의 기도」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로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제 자녀를 이해하는 부모가 되게 하시고
저들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듣는 부모가 되게 하시며 저들이 던지는 어떠한 질문에도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시고, 저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실수하였을 때에 비웃지 않도록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시옵소서.
어느 순간에나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통하여 정직한 것이 옳다는 것을 일러줄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제 기분이 언짢을 때에 제 입술을 지켜주시고
저들이 어리다는 것과
저들이 어른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들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하는 참을성을 제게 주시고, 저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로 정직하고 바르고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시옵소서.
저들이 존경하고 본받는 부모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여러분, 생명이란 육신의 향락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의 도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뿌리도, 그리고 영원한 가치도 그 언약에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죽고 싶다고 투덜거리고 있다면 자녀들은 그 밑에서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저렇게 괴로운 세상에 무엇 하러 나까지 태어나서 말썽인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육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 잘 믿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교육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기만 하십시오. 자녀들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감사하고 생명의 축제를 벌이십시오. 산다는 문제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축제 ----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본령입니다.
언약의 자녀는 거기서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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