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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종 욥을 보았느냐(욥기 1장 6절~12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천 구백 팔십 년대를 마감하는 오늘, 1989년 12월 31일 주일입니다.
지난 1년, 아니 지난 10년을 생각하면서 그 10년 동안에 되어진 일들을 한데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그 심판의 저울에 달아보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두고 죽음에 대한 심리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던 퀴블러(Kubler, Ross) 등이 600~800 사례에 걸쳐 죽음에 대한 심리를 분석하여 발표한 것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 세상에는 며칠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사상태(假死狀態)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 죽기 직전의 심리와 죽은 직후의 경험을 이야기하게 하여 자세히 분석한 것입니다.
분석 결과를 보면 흥미롭게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 보기에는 잠든 것 같은 죽음의 그순간에, 망자(亡者)는 자신의 몸이 고무풍선 터지듯 펑하고 터지면서 붕 떠올라가는 체험을 하는데, 그 때에 자신은 자신의 몸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靈)과 육(肉)이 분리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누워 있는 자신의 주검을 자기 눈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런 순간에 하늘을 쳐다보면 환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밝은 빛과 그 빛이 비취는 넓은 광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눈앞에는 자기의 일생이 마치 한순간의 일인 양 압축되어서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면서 부끄럽고 두려워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10년 동안에 지내온 나의 생을 압축해서 한 장면으로, 한 사건으로 보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면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한순간의 사건인 양 압축시켜 한꺼번에 하나님의 빛 앞에 그대로 비추어 볼 때에 내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 같습니까? 시인 괴테는 만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삶은 고통과 짐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생각컨대 나는 75년 생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안락한 시간은 4주 정도밖에 가져보지 못했다.
나의 삶은 큰 바위를 영속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작업과도 같다.
나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법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면서 복잡한 문제가 여기에 엉켜 있으므로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은 일단 제쳐놓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만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 욥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욥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그지없이 따뜻하게 관심을 기울여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을 가이없이 사랑하시고 그로 해서 기뻐하시고, 그리고 자랑하고 계십니다. 욥을 퍽도 대견해하시고, 퍽도 귀한 존재로 보시고 스스로 기뻐하시는,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 '내 종 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은 종이로되 여기서는 자유의 종이요 사랑의 종입니다. 사랑스러워서 하시는 말씀이지 억압적으로 쓰시는 용어는 아닙니다. 지극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그 온 생을 위탁하여 경건하게 살아오는 욥이기에 사랑스러운 종입니다.
이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고, 천사들에게만이 아니라 사단에게까지 자랑을 하십니다. 욥은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은 정말로 기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믿었습니다.
욥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큰 기쁨을 얻으십니다.
기쁨에 넘쳐 자랑하십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자랑하십니다. 이미 1장 1절에서도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는 한마디로 욥의 인생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순전(純全)'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탐'이라고 하는데, 결백하다는 뜻입니다. 깨끗하다, 때묻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악 중에 살아가는데 욥은 예외입니다. 모든 사람이 때묻었지마는 욥은 무구(無垢)합니다. 깨끗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때묻지 않고 순결을 지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순전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다'는 히브리어로 '야샤'라고 하는 말인데, 일찍이 다윗 왕이 늘 이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야샤'는 다윗 왕의 별명과도 같습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윤리성을 띠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진실하게 바르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도덕성에서 정직한 사람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했다'라는 것은 경건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하나님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God-fearing'이라 했고 요즈음은 'Godliness'라고 하는 이런 삶은 바로 하나님 있는 생각, 하나님 있는 마음, 하나님 있는 행동,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삶입니다.
피조물에 집착하지 않고, 물질에 노예 되지 않고, 세상에 끌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순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정직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점을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욥같은 사람이 땅에 없느니라고 기뻐하시며 자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다. 내가 얼마나 순전했습니까? 내 마음에 깨끗함이 있었습니까? 지식과 양심, 인격, 도덕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순결했습니까? 나는 세상에 살면서 때묻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묻은 원인까지도 남에게 묻습니다. 누구 때문에 어떻게 되었다는 식으로 남을 탓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되거든 한번쯤 생각을 돌려서 "내가 가해자는 아닌가" 하고 반성해보도록 하십시다. 여러분, 순결해야 합니다. 자기 순결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맙시다. 내 순결은 내 책임입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나는 얼마나 더러워졌을까요? 얼마나 추해졌을까요? 얼마나 비뚤어지고 병든 존재가 되었을까요? 순전함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여러분, 정직하셨습니까? 자신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무릇 인간 관계에서 나는 얼마나 정직했습니까? 정직 하려고 애써 본 사람은 정직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내 자유를 위하여 남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았습니까? 내 소유가 과연 마땅한 소유입니까? 내가 과연 내 몫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남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내가 갈취해 있는 것입니까? 내가 먹고 있는 것이 과연 내가 땀흘린 대가입니까? 아니면 남의 것을 내가 먹고 있는 것입니까?
내 몫이라고 하지만 남에게 줘야 할 것을 아니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정직하셨습니까? 생각에서 판단에서, 그리고 행위에서 말에서, 과연 정직했습니까? 솔로몬 왕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죽기 전에 소원을 이루어 주십사고, 내 입에서 허탄한 말을 제거하여 주십사고, 다시 말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을 물어야 합니다.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정욕과 죄악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사람의 평판에 마음끌리지 않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만 목적을 두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왔습니까? 범사에 과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까? 순간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눈길도 잊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경건함에 온전함이 있었는지 엄숙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 ---- 여러분, 이 말씀을 유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사랑해서 읽을 때마다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욥에게는 재산도 많았지마는 일곱 아들과 딸 셋의 열 자녀를 두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습니다. 자식이 많다보면 착한 자식도 있고 못된 자식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 자식들로 인해서 속도 많이 썩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잔치를 하고 나면 욥은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의 경건을 위하여 애쓰는 것과 다름없이 자식들의 경건을 위하여 힘썼습니다. 혹 자식들이 죄를 짓지 않았을까, 걱정을 해서 그 책임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나의 죄를 자복하듯 하나님 앞에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잔치를 하고 나면 저도 모르게 흥에 겨워서 자칫 하나님 앞에 못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걱정을 하다니 얼마나 경건합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귀한 이야기올시다. 욥의 경건이 항상 그러했더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읽어 나가보면 한 쟁점이 떠오릅니다. 축복에 관한 논쟁입니다. 경건의 질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단이 한마디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고 따집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1:9~11)." 사단이 생각하고 있는 바는 조건부 축복입니다. 물질적이요 현세적입니다.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욥의 경건은 까닭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의 경건과 그의 순전함과 그의 정직함은 깊은 것이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간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의연히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 속에 던져질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겠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헤아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고 달리 무엇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랑은 조건부 사랑입니다. 까닭이 많습니다. 이러하면 좋고 저러하면 나쁘고, 이렇다고 좋아하고 저렇다고 싫어하고 ---- 이렇게 헤아리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올시다마는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늙도록 처녀로 지낸 분이 있는데, 이분이 나중에는 결국 결혼을 하더군요. 역시 나이많은 분과 결혼생활을 한다고 하기에 만나면 가끔 제가 물어 봅니다. 결혼 안한다고 하다가 결혼하니 어떠냐고요? 후회한다는 대답입니다. 괜히 결혼했다는 대답입니다. "영감쟁이가 자기만 알아서 이기적이고, 공연한 것으로 구박이나 하고" 어쩌고 하면서 투덜거립니다.
그렇게 십 년이나 지내면서 줄곧 불평이더니 하루는 보니까 아주 기색이 좋아 보여요. 웬일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곡절인즉 이러했습니다. 남편이 집을 샀습니다. "까짓, 제 집이지 내 집인가 뭐" 하고 심드렁했는데, 하루는 그 집문서를 몰래 훔쳐봤더니 내외 공동 명의로 돼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좋아진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치사하다 할 정도입니다. 이 몇푼 어치 안되는 사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은 어느 정도나 절대적입니까? 여러분의 경건은 어느 정도입니까? 뭐가 좀 되면 감사하다 하고 뭐가 좀 삐끗하면 원망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해서야 되겠습니까? 까닭도 많고 조건도 많습니다. 어차피 다 떠날 것인데, 왜 그렇게 말이 많고 왜 그렇게 생각이 복잡한지요.
하나님은 욥을 믿으셨습니다. 분명히 믿으셨습니다. 욥은 이제 그 많은 고난을 통하여 절대적인 사랑을 입증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물질도 빼앗고 건강도 빼앗고 자녀들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이 겪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어떤 상황도 인간에게는 없다." 저는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지 못할 어떤 상황도 인간에게는 없다고 말입니다.
어디서나 경건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욥이 가진 물질은 그가 경건히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것일 뿐입니다. 욥이 그 물질과 부귀 영화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소유와 축복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경건과 부귀도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고 바라고 계십니다. 까닭 없이 경건하고 어떤 요건에도 순전하고 정직한 신앙, 그런 성숙된 신앙, 그런 경건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믿고 기다리십니다.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심각한 과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욥기 1장 6절~12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천 구백 팔십 년대를 마감하는 오늘, 1989년 12월 31일 주일입니다.
지난 1년, 아니 지난 10년을 생각하면서 그 10년 동안에 되어진 일들을 한데 뭉뚱그려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그 심판의 저울에 달아보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두고 죽음에 대한 심리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던 퀴블러(Kubler, Ross) 등이 600~800 사례에 걸쳐 죽음에 대한 심리를 분석하여 발표한 것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 세상에는 며칠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말하자면 가사상태(假死狀態)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 죽기 직전의 심리와 죽은 직후의 경험을 이야기하게 하여 자세히 분석한 것입니다.
분석 결과를 보면 흥미롭게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 보기에는 잠든 것 같은 죽음의 그순간에, 망자(亡者)는 자신의 몸이 고무풍선 터지듯 펑하고 터지면서 붕 떠올라가는 체험을 하는데, 그 때에 자신은 자신의 몸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靈)과 육(肉)이 분리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누워 있는 자신의 주검을 자기 눈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런 순간에 하늘을 쳐다보면 환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밝은 빛과 그 빛이 비취는 넓은 광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눈앞에는 자기의 일생이 마치 한순간의 일인 양 압축되어서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면서 부끄럽고 두려워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10년 동안에 지내온 나의 생을 압축해서 한 장면으로, 한 사건으로 보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면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한순간의 사건인 양 압축시켜 한꺼번에 하나님의 빛 앞에 그대로 비추어 볼 때에 내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 같습니까? 시인 괴테는 만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삶은 고통과 짐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생각컨대 나는 75년 생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안락한 시간은 4주 정도밖에 가져보지 못했다.
나의 삶은 큰 바위를 영속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작업과도 같다.
나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법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면서 복잡한 문제가 여기에 엉켜 있으므로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은 일단 제쳐놓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만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 욥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욥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그지없이 따뜻하게 관심을 기울여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을 가이없이 사랑하시고 그로 해서 기뻐하시고, 그리고 자랑하고 계십니다. 욥을 퍽도 대견해하시고, 퍽도 귀한 존재로 보시고 스스로 기뻐하시는,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 '내 종 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은 종이로되 여기서는 자유의 종이요 사랑의 종입니다. 사랑스러워서 하시는 말씀이지 억압적으로 쓰시는 용어는 아닙니다. 지극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그 온 생을 위탁하여 경건하게 살아오는 욥이기에 사랑스러운 종입니다.
이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고, 천사들에게만이 아니라 사단에게까지 자랑을 하십니다. 욥은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은 정말로 기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믿었습니다.
욥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큰 기쁨을 얻으십니다.
기쁨에 넘쳐 자랑하십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자랑하십니다. 이미 1장 1절에서도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는 한마디로 욥의 인생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순전(純全)'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탐'이라고 하는데, 결백하다는 뜻입니다. 깨끗하다, 때묻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악 중에 살아가는데 욥은 예외입니다. 모든 사람이 때묻었지마는 욥은 무구(無垢)합니다. 깨끗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때묻지 않고 순결을 지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순전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다'는 히브리어로 '야샤'라고 하는 말인데, 일찍이 다윗 왕이 늘 이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야샤'는 다윗 왕의 별명과도 같습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윤리성을 띠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진실하게 바르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도덕성에서 정직한 사람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했다'라는 것은 경건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하나님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God-fearing'이라 했고 요즈음은 'Godliness'라고 하는 이런 삶은 바로 하나님 있는 생각, 하나님 있는 마음, 하나님 있는 행동,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삶입니다.
피조물에 집착하지 않고, 물질에 노예 되지 않고, 세상에 끌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순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정직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점을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욥같은 사람이 땅에 없느니라고 기뻐하시며 자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다. 내가 얼마나 순전했습니까? 내 마음에 깨끗함이 있었습니까? 지식과 양심, 인격, 도덕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순결했습니까? 나는 세상에 살면서 때묻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묻은 원인까지도 남에게 묻습니다. 누구 때문에 어떻게 되었다는 식으로 남을 탓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되거든 한번쯤 생각을 돌려서 "내가 가해자는 아닌가" 하고 반성해보도록 하십시다. 여러분, 순결해야 합니다. 자기 순결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맙시다. 내 순결은 내 책임입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나는 얼마나 더러워졌을까요? 얼마나 추해졌을까요? 얼마나 비뚤어지고 병든 존재가 되었을까요? 순전함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여러분, 정직하셨습니까? 자신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무릇 인간 관계에서 나는 얼마나 정직했습니까? 정직 하려고 애써 본 사람은 정직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내 자유를 위하여 남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았습니까? 내 소유가 과연 마땅한 소유입니까? 내가 과연 내 몫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남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내가 갈취해 있는 것입니까? 내가 먹고 있는 것이 과연 내가 땀흘린 대가입니까? 아니면 남의 것을 내가 먹고 있는 것입니까?
내 몫이라고 하지만 남에게 줘야 할 것을 아니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정직하셨습니까? 생각에서 판단에서, 그리고 행위에서 말에서, 과연 정직했습니까? 솔로몬 왕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죽기 전에 소원을 이루어 주십사고, 내 입에서 허탄한 말을 제거하여 주십사고, 다시 말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을 물어야 합니다.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정욕과 죄악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사람의 평판에 마음끌리지 않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만 목적을 두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왔습니까? 범사에 과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까? 순간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눈길도 잊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경건함에 온전함이 있었는지 엄숙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 ---- 여러분, 이 말씀을 유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사랑해서 읽을 때마다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욥에게는 재산도 많았지마는 일곱 아들과 딸 셋의 열 자녀를 두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습니다. 자식이 많다보면 착한 자식도 있고 못된 자식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 자식들로 인해서 속도 많이 썩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잔치를 하고 나면 욥은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의 경건을 위하여 애쓰는 것과 다름없이 자식들의 경건을 위하여 힘썼습니다. 혹 자식들이 죄를 짓지 않았을까, 걱정을 해서 그 책임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나의 죄를 자복하듯 하나님 앞에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잔치를 하고 나면 저도 모르게 흥에 겨워서 자칫 하나님 앞에 못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걱정을 하다니 얼마나 경건합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귀한 이야기올시다. 욥의 경건이 항상 그러했더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읽어 나가보면 한 쟁점이 떠오릅니다. 축복에 관한 논쟁입니다. 경건의 질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단이 한마디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고 따집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1:9~11)." 사단이 생각하고 있는 바는 조건부 축복입니다. 물질적이요 현세적입니다.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욥의 경건은 까닭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의 경건과 그의 순전함과 그의 정직함은 깊은 것이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간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의연히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 속에 던져질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겠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헤아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고 달리 무엇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랑은 조건부 사랑입니다. 까닭이 많습니다. 이러하면 좋고 저러하면 나쁘고, 이렇다고 좋아하고 저렇다고 싫어하고 ---- 이렇게 헤아리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올시다마는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늙도록 처녀로 지낸 분이 있는데, 이분이 나중에는 결국 결혼을 하더군요. 역시 나이많은 분과 결혼생활을 한다고 하기에 만나면 가끔 제가 물어 봅니다. 결혼 안한다고 하다가 결혼하니 어떠냐고요? 후회한다는 대답입니다. 괜히 결혼했다는 대답입니다. "영감쟁이가 자기만 알아서 이기적이고, 공연한 것으로 구박이나 하고" 어쩌고 하면서 투덜거립니다.
그렇게 십 년이나 지내면서 줄곧 불평이더니 하루는 보니까 아주 기색이 좋아 보여요. 웬일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곡절인즉 이러했습니다. 남편이 집을 샀습니다. "까짓, 제 집이지 내 집인가 뭐" 하고 심드렁했는데, 하루는 그 집문서를 몰래 훔쳐봤더니 내외 공동 명의로 돼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좋아진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치사하다 할 정도입니다. 이 몇푼 어치 안되는 사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은 어느 정도나 절대적입니까? 여러분의 경건은 어느 정도입니까? 뭐가 좀 되면 감사하다 하고 뭐가 좀 삐끗하면 원망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해서야 되겠습니까? 까닭도 많고 조건도 많습니다. 어차피 다 떠날 것인데, 왜 그렇게 말이 많고 왜 그렇게 생각이 복잡한지요.
하나님은 욥을 믿으셨습니다. 분명히 믿으셨습니다. 욥은 이제 그 많은 고난을 통하여 절대적인 사랑을 입증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물질도 빼앗고 건강도 빼앗고 자녀들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이 겪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어떤 상황도 인간에게는 없다." 저는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지 못할 어떤 상황도 인간에게는 없다고 말입니다.
어디서나 경건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욥이 가진 물질은 그가 경건히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것일 뿐입니다. 욥이 그 물질과 부귀 영화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소유와 축복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경건과 부귀도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고 바라고 계십니다. 까닭 없이 경건하고 어떤 요건에도 순전하고 정직한 신앙, 그런 성숙된 신앙, 그런 경건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믿고 기다리십니다.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심각한 과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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