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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으므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대체로 미래 지향적인 대망에 관계합니다. 오늘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일 어떻게 사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 있느냐, 약속이 있느냐, 즉 미래에 대한 보증이 있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약속이 있기는 하나 진실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허무한 일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지적하는 용어로 말한다면 성취라고 합니다. 약속에는 성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에는 현실로 나타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성취 없는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절망과 낙심을 안겨 줄 뿐입니다. 비없는 구름 같고, 어린아이들이 무지개를 따라가는 것처럼 무한히 미래적으로 멀어지기만 한다면 그 약속과 기대와 대망과 소망은 무효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더 허탈하게 되고 더 큰 낙심만이 있을 것입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약속이 성취되고 축복이 현실로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취와 축복이 내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에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허탈과 절망 중에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내게 주신 약속이 오늘 여기서 성취된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의미가 없고 여전히 좌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대망 사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대망 사상 즉, 메시아와 메시아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들이 경험한 모진 고난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인내는 소망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지금 유대 땅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선 좌절합니다. 또 어떤 때는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때로는 믿었습니다. 큰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아! 굉장하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다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그 믿음을 저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여기에 큰 유감이 있는 것입니다. 왜 메시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를 알 수가 없었느냐 하면 그들은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교만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었다가도 곧 그 믿음을 저버립니다. 기뻐하다가도 절망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으로 감격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곧 어떤 사건을 만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면 나를 버리셨는가 하며 믿음을 저버리며 원망을 합니다. 꼭 종이장을 뒤집듯이 변덕이 심합니다. 왜 이렇게 시원찮은, 휘청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 해답을 얻었으면 합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이 나타납니다. 그는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왔고, 들에서 자랐으며, 양떼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기에 별명이「광야의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정의와 회개를 외치며 산 사람입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여기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32절 이하에 보면, "요한이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사도 요한이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거나 명패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휘황 찬란한 빛을 가진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그 분의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그 분이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이제 알고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이렇게 증거하고, 심지어는 요한과 안드레를 비롯해서 자기 제자 서너 명을 예수님께 양보까지 합니다.(요 1장)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처럼 기쁘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최고로 큰 자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는 예수를 직접 만나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이토록 분명하게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이 흔들리는 장면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는 정의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의 왕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동생이 로마로 여행하는 동안에, 동생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불륜이요, 부도덕한 일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도한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 교인들이 아무 말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대표적으로 이 불의의 일로 헤롯왕을 책망합니다.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감옥에 갇힙니다. 전설에 의하면 왕의 궁전 지하실에 돌로 된 감옥에 갇혀 캄캄한 곳에서 심한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기약도 없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비참한 죽음을 죽어 가게 됩니다. 이 때 그에게 흔들림이 왔습니다. 메시아가 오셨는데 세상이 왜 이렇게 되느냐 말입니다. 그는 한편으로 기대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의를 위해서 수고하는 자기에게 최소한 한 번쯤은 메시아가 방문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적을 나타내시어 옥문을 열고 세례 요한을 끌어안으며 위로해 주실 것을 믿었는지 모릅니다. 메시아가 오셨으면 뭔가가 달라져야 메시아의 나라가 아니겠느냐는 기대가 세례 요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종내 무소식이라 참다못해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하게 됩니다.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정말 섭섭한 질문입니다.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라고 묻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니까?" 라고 묻는 것은 도대체 지금까지 사도 요한이 무엇을 외치고 다녔는지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 주석가들은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메시아를 잘 본 것인지 아닌지 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세례 요한을 좀 두둔해서 좋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틀림없는데 그의 제자들이 많은 불평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메시아는 어디 계시며 우리 선생님은 왜 감옥에서 저러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는 제자들의 불평 때문에, 그러면 너희들이 직접 찾아 뵙고 여쭈어 보라고 그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보냈다는 좋은 해석입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질문 자체는 한심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세례 요한에게 직선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네가 나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실족하는 자는 불행하다고 책망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 어떤 형편에 처하든 예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사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흔들림이 없는 사람, 즉 신앙에 흔들림이 없는 사람,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찌해야 옳았습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보았고, 메시아가 오신 것을 분명히 보았으면, 그것으로서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나의 처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현재에 내가 어떻게 살든 간에 메시아가 오셨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이것만 가지고 그는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본 사람입니다. 들었습니다.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왜 흔들리는 것입니까? 가만히 보면 어떤 이는 보는 것,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꼭 먹어야만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입니다. 또 보기만 해도 좋을텐데 꼭 내 것으로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잘 생각해 봅시다. 내 것은 아니지만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듣고 그리고 좋아해야 하는데, 남이 잘 되는 것 보면 배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무엇이든 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좁은 생각이 바로 이러한 문제를 낳게 합니다. 누가 복음 2:29 이하에 보면 시몬이라는 나이 많은 선지자가 오래 동안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메시아를 보게 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찬송을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보았고 품에 안았던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 즉,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기뻐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고 들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나의 처지가 감옥이냐 아니냐는 잊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면,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무슨 뜻입니까? 세례 요한이 이 소식을 듣고, 알고, 그리고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감옥에 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메시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것을 듣고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적은 있었지만 세례 요한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저쪽에서 있었지만 감옥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다 있는데 나에게는 없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있는데 내게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은혜가 있는데 내겐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요한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목 베임을 당해서 죽어갔습니다. 그가 이미 고백한 대로 그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한 문자 그대로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이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내가 잘 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안 되면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까? 내 소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날 사랑하는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유황불로 죽는다고 해도 세례 요한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나라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부조리한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응답은 늦어지기도 하고 내 생각과 내 방법과는 다를 때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네가 아이를 낳으리라." "나는 남자를 모릅니다" "성령이 너를 덮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네가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이 때 마리아는 마음속으로 "저는 약혼자가 있습니다."라고 혼자 되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듣고 곧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순종으로 대답했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의 뜻은, '이제는 약혼자와 멀어지고 맙니다. 파혼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오해가 되면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하는 각오의 대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메시아가 오시는데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주저가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마음이 마리아의 헌신이요,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내게 주신 현실 이대로가 당신이 내게 주시는 축복입니까? 우린 물어야겠습니다. 기대에만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현실 이대로가 주의 축복이 실현되어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이 있어야 겠습니다. 내 정욕, 나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 때문에 주님의 약속도 믿을 수 없고, 복된 생활 속에서도 간증이 없고, 감사가 없는 생활은 비참한 생활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과거의 주님은 믿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와 부활 저쪽에 있는 십자가와, 부활 저쪽에 있는 영광의 메시아를 바로 볼 수가 없었기에 그는 이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우리는 때로 텔레비젼 프로를 통해서 서커스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맹수를 길들여 가지고 서커스에 나오는 아가씨를 볼 때 그 얼굴은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 저 편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부활의 아침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얼굴이 천사의 얼굴같은 장렬한 죽음을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현재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고 충만한 은혜에 만족하여 살 때에 승리의 생활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흔들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다가도 때로는 주를 원망하는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하오니 우리에게 놀랍고 위대한 신앙을 주시사 고난의 메시아 그 뒤에 있는 영광의 메시아를 바라보며, 십자가와 그 뒤에 있는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항상 오늘 현재 내 생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귀한 축복과 그 역사를 보고, 믿고 간증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심을 간구하옵나이다. 날마다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나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그 영광의 뜻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그 같은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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