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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바 된 존재(빌립보서 3:7-16)

by 【고동엽】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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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바 된 존재(빌립보서 3:7-16)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러분은 스스로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 자유의 성격 만큼 고귀한 가치의 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유라 하면 흔히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교육적인 자유, 문화적인 자유…… 이러한 자유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식의 자유, 이성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자유를 어느 정도나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중력 인간은 없습니다. 진공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엔가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나깨나 돈생각만 하는 사람, 돈에 끌려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한 욕망에 끌려 헤어나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여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술에 끌려 사는 사람, 약물에 끌려 사는 사람, 출세에 매여 사는 사람, 하찮은 기분과 감상에 붙들려 사는 사람,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무서운 한에 맺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 불행한 사람이요 비참한 사람입니다. 어느새 내 자유를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내 자유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디엔가 매여서 헤어날 수 없는, 빠져나올래야 빠져나올 수 없는 부자유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양심도 인격도 도난당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내 자유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순간에 더욱 비참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여러분은 어느 정도나 의식하고 있습니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독서의 바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노예라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지금 어쩔수없이 무엇엔가 계속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존재의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12)"---자신은 예수님께 포로된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 나름대로의 생을 살아보고자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뵙고는 그 즉시 예수님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포로가 되는 순간에 그의 생이 180도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까지도 바꾸어진, 전혀 다른 운명의 생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1:15)"---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포로되고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간 것만이 아니라, 자신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주님의 포로로, 사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부터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 택정된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만이 아니라 인생 출발에서부터 자신에게는 자유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다만,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과거가 그렇고 현재가 그렇고, 미래도 응당 그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포로됨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사신 것이니(고전 7:23)"---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핏값으로 자신은 주님께 팔린 바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죄인된 바울은 노예가 팔리듯이 주님께 분명히 팔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팔린 존재---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쓰든지 그 서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나는 예수님의 노예'라는 깊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종으로, 이제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과 생활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자신의 중심과 사상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바쳐버립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을 기쁘게 하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을 택하고,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합니다. 자기 뜻은 아랑곳없이 그리스도의 뜻만을 좇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주님께 노예된 존재로, 철저하게 노예의식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이상, 그의 목적도 온전히 주님께 바칩니다. 미래의 운명까지도 주님께 맡겨버립니다. 그의 생 자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

이 고백에서 보듯이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도 내게 향한 하나님의 격려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해서만 살아갔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만이 내가 달려갈 곳이라는 믿음으로, 철저한 노예의식으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이 후배들에게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인생을 많이 살았소. 그런데 살면 살수록 아주 분명히 깨달아 가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장하신다는 것이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었을 때에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버리고, 내가 가고 내가 오고……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인생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내게는 진정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철이 난다는 것이겠지요.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Bon'haeffer)의 옥중서신 가운데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하지요.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울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도 나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을 어느 정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가는 길, 이것이 내가 선택한 것입니까? 오늘까지의 나의 운명,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나를 붙드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유가 없습니다. 생각하는 자유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세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여기에 사도 바울 나름의 독특한 철학이 있습니다. '잡혔다'라는 말은 포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피동적이요 불가피한 것입니다. 반면에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는 말은 능동적이요 자원적이요 선택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사도됨의 근본자세와 근본의식이 있습니다. 애초에 그는 잡혔습니다. 억지로 붙들린 사람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잡힌 바 된 그것을 역으로 솔선해서 잡으려 합니다. 온 정성을 다해서--그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비로소 자신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양이 목자를 따라갑니다. 코를 꿴 것도 아니요, 목을 매서 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백의 양이 목자를 그대로 좇아갑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곳이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지라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자갈밭일지라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우리를 알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어떤 길로 인도하든지 양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기꺼이 따라갑니다. 자원적으로 따라갑니다. 매를 맞으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코를 꿰여 아파서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양의 양됨의 선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는 부자유합니다. 환경과 현실이 우리를 억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자유할 줄 아는 비결을 나름대로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선택됨을 특권으로 알고, 사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본문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만을 즐거이 따라가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채봉 선생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인 코뚜레가 일을 한다를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어미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어느덧 코뚜레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을 합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 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곱절이나 일을 잘할 테니까요." 농부는 맏송아지의 말을 받아들여 동생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송아지는 자신의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도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송아지가 지쳐 쉴 때에도 맏송아지는 더욱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 송아지들은 자라서 어느덧 어른 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송아지는 차츰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코뚜레를 한 동생송아지가 들에서 돌아와보니 맏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방을 묻는 동생송아지에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도 안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코뚜레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방정(方正)하지 못한 인간을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 뼈아픈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코뚜레를 한 소가 일을 한다--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얻어맞아야만 일을 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코뚜레를 해서 끌어야만 끌려갈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 현실을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잡힌 바 된 것을 자발적으로 잡으려 쫓아가는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억지로 십자가는 졌습니다마는, 그는 뒤늦게 깨닫고 충실한 크리스찬이 됩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의 믿음의 어머니가 되고, 그 두 아들은 선교사가 됩니다. 보십시오.

십자가를 질 때에는 억지로 졌지만 지고나서 보니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감옥에 갇힐 때에는 자신이 왜 감옥에 갇혀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삼사 년 후에 비로소 깨닫고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권한을 내 목에 채우노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자원적인 인간이 됩니다.

다시한번 본문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미 얻었다 함도아니요 취했다 함도 아닙니다. 다만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미완성의 완성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바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푯대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의 목적이요 가치의 기준이요 인생의 방향일 뿐입니다. 내 소원을 내가 다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저 푯대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뿐입니다. 완성이란 목표에 도달했다는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직선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4)"---사도 바울은 여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상은 무엇이며 소원은 무엇이며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까지도 잡힌 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확실하게 철저하게 포로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허황된 꿈같은 이상, 늘 나를 괴롭히는 그 이상을 훌훌 던져버리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 나를 향한 주님의 뜻, 주님께 잡힌 바 된 것을 내 이상으로 삼고 내 행복으로 삼고 내 생의 지표로 삼고 내 영광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믿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마음이 없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잡힌 바 된 존재로서 엉뚱한 길을 가다가 다시 매를 맞게 되지 마세요. 이제는 잡힌 바 된 그 길로 가세요. 그 진리안에서 자유하고, 그 경건함에서 자유하고, 그 크신 뜻 안에서야 행복하고도 능률적인 생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잡힌 바 된 존재(빌립보서 3:7-16)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러분은 스스로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 자유의 성격 만큼 고귀한 가치의 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유라 하면 흔히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교육적인 자유, 문화적인 자유…… 이러한 자유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식의 자유, 이성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자유를 어느 정도나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중력 인간은 없습니다. 진공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엔가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나깨나 돈생각만 하는 사람, 돈에 끌려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한 욕망에 끌려 헤어나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여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술에 끌려 사는 사람, 약물에 끌려 사는 사람, 출세에 매여 사는 사람, 하찮은 기분과 감상에 붙들려 사는 사람,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무서운 한에 맺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 불행한 사람이요 비참한 사람입니다. 어느새 내 자유를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내 자유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디엔가 매여서 헤어날 수 없는, 빠져나올래야 빠져나올 수 없는 부자유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양심도 인격도 도난당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내 자유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순간에 더욱 비참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여러분은 어느 정도나 의식하고 있습니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독서의 바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노예라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지금 어쩔수없이 무엇엔가 계속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존재의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12)"---자신은 예수님께 포로된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 나름대로의 생을 살아보고자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뵙고는 그 즉시 예수님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포로가 되는 순간에 그의 생이 180도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까지도 바꾸어진, 전혀 다른 운명의 생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1:15)"---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포로되고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간 것만이 아니라, 자신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주님의 포로로, 사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부터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 택정된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만이 아니라 인생 출발에서부터 자신에게는 자유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다만,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과거가 그렇고 현재가 그렇고, 미래도 응당 그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포로됨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사신 것이니(고전 7:23)"---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핏값으로 자신은 주님께 팔린 바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죄인된 바울은 노예가 팔리듯이 주님께 분명히 팔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팔린 존재---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쓰든지 그 서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나는 예수님의 노예'라는 깊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종으로, 이제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과 생활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자신의 중심과 사상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바쳐버립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을 기쁘게 하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을 택하고,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합니다. 자기 뜻은 아랑곳없이 그리스도의 뜻만을 좇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주님께 노예된 존재로, 철저하게 노예의식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이상, 그의 목적도 온전히 주님께 바칩니다. 미래의 운명까지도 주님께 맡겨버립니다. 그의 생 자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

이 고백에서 보듯이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도 내게 향한 하나님의 격려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해서만 살아갔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만이 내가 달려갈 곳이라는 믿음으로, 철저한 노예의식으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이 후배들에게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인생을 많이 살았소. 그런데 살면 살수록 아주 분명히 깨달아 가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장하신다는 것이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었을 때에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버리고, 내가 가고 내가 오고……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껴지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인생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내게는 진정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철이 난다는 것이겠지요.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Bon'haeffer)의 옥중서신 가운데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하지요.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울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도 나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을 어느 정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가는 길, 이것이 내가 선택한 것입니까? 오늘까지의 나의 운명,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나를 붙드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유가 없습니다. 생각하는 자유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세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여기에 사도 바울 나름의 독특한 철학이 있습니다. '잡혔다'라는 말은 포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피동적이요 불가피한 것입니다. 반면에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는 말은 능동적이요 자원적이요 선택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사도됨의 근본자세와 근본의식이 있습니다. 애초에 그는 잡혔습니다. 억지로 붙들린 사람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잡힌 바 된 그것을 역으로 솔선해서 잡으려 합니다. 온 정성을 다해서--그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비로소 자신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양이 목자를 따라갑니다. 코를 꿴 것도 아니요, 목을 매서 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백의 양이 목자를 그대로 좇아갑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곳이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지라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자갈밭일지라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우리를 알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어떤 길로 인도하든지 양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기꺼이 따라갑니다. 자원적으로 따라갑니다. 매를 맞으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코를 꿰여 아파서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양의 양됨의 선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는 부자유합니다. 환경과 현실이 우리를 억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자유할 줄 아는 비결을 나름대로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선택됨을 특권으로 알고, 사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본문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만을 즐거이 따라가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채봉 선생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인 코뚜레가 일을 한다를 여기서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어미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어느덧 코뚜레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을 합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 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곱절이나 일을 잘할 테니까요." 농부는 맏송아지의 말을 받아들여 동생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송아지는 자신의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도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송아지가 지쳐 쉴 때에도 맏송아지는 더욱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 송아지들은 자라서 어느덧 어른 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송아지는 차츰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코뚜레를 한 동생송아지가 들에서 돌아와보니 맏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방을 묻는 동생송아지에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도 안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코뚜레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방정(方正)하지 못한 인간을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 뼈아픈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코뚜레를 한 소가 일을 한다--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얻어맞아야만 일을 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코뚜레를 해서 끌어야만 끌려갈 것입니까? 언제까지 이 현실을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잡힌 바 된 것을 자발적으로 잡으려 쫓아가는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억지로 십자가는 졌습니다마는, 그는 뒤늦게 깨닫고 충실한 크리스찬이 됩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의 믿음의 어머니가 되고, 그 두 아들은 선교사가 됩니다. 보십시오.

십자가를 질 때에는 억지로 졌지만 지고나서 보니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감옥에 갇힐 때에는 자신이 왜 감옥에 갇혀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삼사 년 후에 비로소 깨닫고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권한을 내 목에 채우노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자원적인 인간이 됩니다.

다시한번 본문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미 얻었다 함도아니요 취했다 함도 아닙니다. 다만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미완성의 완성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바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푯대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의 목적이요 가치의 기준이요 인생의 방향일 뿐입니다. 내 소원을 내가 다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저 푯대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뿐입니다. 완성이란 목표에 도달했다는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직선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4)"---사도 바울은 여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상은 무엇이며 소원은 무엇이며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까지도 잡힌 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확실하게 철저하게 포로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허황된 꿈같은 이상, 늘 나를 괴롭히는 그 이상을 훌훌 던져버리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 나를 향한 주님의 뜻, 주님께 잡힌 바 된 것을 내 이상으로 삼고 내 행복으로 삼고 내 생의 지표로 삼고 내 영광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믿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마음이 없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잡힌 바 된 존재로서 엉뚱한 길을 가다가 다시 매를 맞게 되지 마세요. 이제는 잡힌 바 된 그 길로 가세요. 그 진리안에서 자유하고, 그 경건함에서 자유하고, 그 크신 뜻 안에서야 행복하고도 능률적인 생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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