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행26:24~31
▲교만한 바울?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말씀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29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교만도 이런 교만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교만한 말이 아닌 것이 바울은 결박당한 죄인의 신분입니다.
교만하려고 해도, 교만할 것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이, 높임을 받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교만해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지금 재판받는 죄인이라는 처지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교만에서 나온 말은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딤전1:15,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도 했습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해서, 자기도취에 빠진 교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답) 자기가 복음의 능력, 곧 자신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놀라운 새 생명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정말 자기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만큼, 자기자신이 괴로웠지만,
자신은 정말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지고
정말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오시고,
자기 자신의 생명이 되시고, 주님이 되신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이 그런 새 생명의 삶을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완전히 새롭게 거듭난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랑한 ‘나와 같이 되는 삶’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행26:29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놀라운 담대함이 있습니다.
행21~26장까지 바울이 6차례에 걸쳐서 재판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상 깊은 것은 사도바울의 담대함입니다.
바울은 재판받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괴로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 받는 것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2절에서는 재판받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I think myself happy/KJV 26:2
지금 ‘다행히 여긴다(해피하다)’는 말을 할 상황입니까?
바울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순간입니다.
어떤 죄목인가가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행복하다/행운이다’ 뭐 이런 뜻인데, 제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어쨌든 바울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입니까? *happy/ fortune
재판을 받음으로써,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을 만날 수나 있었겠어요?
사도바울은 재판을 받을 때마다, 무죄를 입증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천부장에게 붙잡혀 갔을 때에도,
벨릭스 총독 앞에서도,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바울은 무죄를 입증하려하기 보다는
그 순간을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전도할 기회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자기는 지금 행복하고, 운이 좋다는 것입니다.
재판 받을 때 심문을 당하고, 증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내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 예수님을 만났다’고.
사도바울이 그런 마음이니까
재판 받는 것이 두렵고 힘들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조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태도를 가지니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 의아해 했습니다.
이런 사도바울에 대하여 베스도 총독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4
베스도 총독 눈에는 정말 미친 사람이지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체도 높은 사람이.
예수 안 믿겠다고만 하면 금방 풀려나고 존경받을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재판 받으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니
베스도 기준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감히 자기에게 전도하려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자기는 재판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듣다 보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너 나에게 전도하려고 하느냐?
나한테 그 몇 마디 말로 나 보고 예수 믿게 하려는 것이냐?’고 말합니다. 26:28
사도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순간조차도
그러니까 자기가 당한 모든 순간을.. 길흉을 불문하고..
복음을 전파할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열어준, 복음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재판의 판결로 인한)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사도바울의 담대함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이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도바울의 말과 태도에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30~32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어?’
그 동안 자기가 수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재판도 해보았지만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당당하게 그리고 평안하게 전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일 죄는 전혀 없고 당장 풀어줘도 됩니다.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장 풀어줘도 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석방되는 것을 사양하였습니다.
가이사에게도 가서 전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풀려나는 것보다 재판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영적 권위
본문에서 바울이 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무례함을 볼 수 있습니까?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습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당하는데,
흥분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롱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지위에 대하여 존중하는 말투로 평안 가운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담대하게 말합니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적용 : ‘나와 같이 되세요!’
여러분은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1. 옳은 말을.. 기분 좋게 말하는 사람
어느 분이 ‘아이들이 왜 엄마와 선생님을 싫어하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기 때문”이랍니다.
모두 다 크게 웃었습니다. 공감한다는 뜻이지요.
이 말을 곱씹어 볼 때,
아이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말은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옳은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옳은데.. 그런데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옳은 말을 하지만,
상대방을 폄하하거나, 모독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의 말에 성령의 권위가 있으려면, 주님의 영광이 위에 머물러 있으려면
자기가 아무리 억울하게 재판에 회부되어도, 감정이 격앙되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이 감정이 격앙되지 않은 것은,
재판을.. 하나님이 주신 전도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미리 예언하신 것이었습니다. 마10:18~19)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말에는, 잔잔한 영혼의 울림을 일으켰습니다.
성령의 권위가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도, 다윗 왕을 책망할 때.. 기분 나쁘게 대놓고 하지 않았습니다.
비유를 들어가면서, 무례함이 없이, 영적인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영적인 권위나, 은사가 강한 분들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의 영적 귄위나 강한 은사 때문에.. 평소 삶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무속인들도..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헌금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데,
만약 이런 특징들을 보인다면.. 경계해야 할 '은사자'입니다.)
▲2. 은퇴해도/안 해도 마음이 평안한 사람
저는 일이 너무 바빠지다 보니.. 은퇴하면 평안해 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은퇴하신 분들을 보니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더 힘든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미국에 살 때는 ‘한국이 좋았다’ 그러고
한국에 살게 되면 ‘미국이 그립다’ 그럽니다. 그게 계속 반복됩니다.
직장 일에 매여 있을 때는.. 은퇴를 그리워하게 되고
은퇴하고 나서는.. 직장 일을 그리워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보면.. 너무 신기하고, 의아합니다.
미국에 살아도 웃고, 방글라데시에 살아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직장 일에 바빠도 웃고 다니고, 은퇴를 해도.. 웃고 다닙니다.
(위에서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나는 해피하다’고 그랬잖아요!)
여러분이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은퇴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아니 더 괴롭습니다.
지금 여기서 here & now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행복을 누려갑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합시다.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3. 어려움을 당해도.. 웃는 사람
어떤 이들은 사고를 당했다고 원망과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음이 비탄해지고 원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고는 사고고.. 마음은 마음입니다.
어려움 중에도 얼마든지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사도바울에게서 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가 대학에 떨어져도,
우리 남편이 수술실에 들어가도,
우리 은행잔고가 아주 밑바닥이더라도..
성도는 그 순간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찬송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모르는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이런 복음성가가 있었죠?
‘나의 친구여, 내 말 들어보렴.. 너도 나처럼!’
▲4.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행자지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이따금 너무 기쁘고 좋은 일이 생길 때
십중팔구 믿음이 마구 흔들리는데요..
어떤 이는,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무척 기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면.. 패가망신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가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고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 자녀 때문에 골머리 썩는 일이 생깁니다.
좋은 일 때문에 너무 기뻐하다가.. 믿음이 식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대수롭게 여기고, 간절한 마음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이 성숙해지면,
너무 좋은 환경이 열려도..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자기는 무덤덤합니다.
사례①, 유명한 성경 강해 설교자인 척스미스 목사님께서 개척교회 시절에
정말 필요한 돈이 없어서 간절히 기도하였던 적이 있었답니다.
도무지 돈이 생길 가능성이 없는 중에, 어느 여 성도가 전화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목사님에게 돈을 송금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돈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필요한 금액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전화를 끊고 얼마나 좋고 흥분되는지,
사모님을 크게 부르며 달려가 사모님을 붙잡고 춤을 추었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들렸습니다.
‘척 스미스, (돈 생긴 것 때문에)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네가 나 때문에.. 네 아내의 손을 잡고 춤을 춰 본 적이 있었니?’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춤을 추던 목사님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보다 돈이 생긴 것을 더 좋아하는 마음을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로, 이 교훈을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척스미스 목사님께
계속하여 큰 은혜로 역사하신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좋을 때, 즐거울 때도..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사례②, 예수전도단 초창기에
로렌 커닝햄 목사님과 스탭들이 배 구입을 추진하였습니다.
선교선을 만들어 전 세계 항구마다 다니며 전도하는 엄청난 비전을 가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이었기에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전 세계에서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계획대로 배 구입이 추진되고
이제 잔금만 지급하면 배를 인수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모든 스테프들이 흥분하였습니다.
배 구입 후의 계획을 논하는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에서 나가는데,
로렌 커닝햄 목사님은, 회의장 구석 어두운 곳에 누가 서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예수님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대 이상의 헌금이 들어오고 일이 잘 진행되다 보니
회의 때마다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가장 중요한 분, 예수님을 소외시키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때부터 헌금이 끊어졌고, 그 배 구입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때 로렌 커닝햄 목사님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헌금으로 받은 돈은,
같은 비전을 가지고 배를 구입하려 하는 OM 선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두고 두고 교훈 삼았다고 했습니다.
일이 어려울 때나/ 잘 될 때나..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마음의 평안 가운데서 일하는 사람
여러분의 마음에 풍랑이 시작될 때 가능하면 아무 일도 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렸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평안의 상실과 함께 주님의 영도 동시에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도록 기도하십시오.
왜 마음의 풍랑이 왔는지 그 이유를 주께 물으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풍랑이 일면,
다시 말하면 마음이 두려움이 오고 분노가 생기고 마음이 조급해지면,
그때는,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어떤 결정도 하면 안 됩니다.
도장 찍으면 안 되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그때는 무엇보다 먼저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왜 내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되어 있는지 그것을 주님께 물어야 됩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시도록 주님께 구해야 됩니다.
먼저 주님의 평안을 구해야 됩니다.
(사례) 인도네시아에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 예배를 드리러 갔을 때 일입니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상황이 달랐습니다.
전도사님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그 마을에 있는 회교도들이
봉헌예배 때, 다 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못마땅해 하던 마을 회교도들이
봉헌 예배 때, 한국의 목사님(설교자)이 와서 설교하는 것을 듣고서
‘교회를 건축하더니, 이제는 한국 목사 모셔 와서 복음까지 전하려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그들이 격분할까봐.. 선교사 전도사님은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봉헌예배 때 다 참석하겠다’는 통보가.. 불안한 통첩으로 여겨졌습니다.
제가 말을 듣고 보니,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선교팀 안에도 두려움이 깔렸습니다.
워쉽하는 청년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데.. 두려움이 섞여있었습니다.
현지인 청년 교인들도..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설교 시간까지 3시간 남았는데,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국에서 멀리 여기까지 왔는데,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왜 온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이 예배당이 다 허물어지는 일이 생기면..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이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 마을에 있는 회교도들도 너무나 사랑한다. 너는 그것만 전하라.’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지고, 다시 말씀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워십팀이 십자가 복음을 워십으로 보여주고, 제가 강단에 서서 보니까,
머리에 모자를 쓴 회교도들이 상당히 많이 와 앉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기에, 우리가 온 것입니다.
예배당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한국에 있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셔서 여기까지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고백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사랑의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전하니까,
말씀을 전하는 중에, 그들의 얼굴이 다 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중 가운데 놀라운 기쁨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기도 받으실 분은 나오라고 했더니
회교도 모자를 쓰신 분들이 대부분 다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해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면,
마음에 평화가 생기고, 두려움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역사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놀라운 평안을 누리고 사시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같이 되세요. 여러분도 나같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전도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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