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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계6:1~17

by 【고동엽】 2023. 1. 14.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계6:1~17   

오늘 여러분 안에 고난을 이기는 믿음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제 오후에 "하늘꿈학교 감사의 밤"이 있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우리 탈북 청소년들의 학교입니다. 제가 참석해서, 
탈북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기뻤습니다. 
'한국 사회에 아주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잘 적응했구나.
그리고 또 예수님까지 잘 믿게 됐구나...'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서로 교사 간증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파송한 여자 목사님이, 
그동안 7년 동안 탈북 청소년들을 섬겼던 일을 간증하셨습니다. 

간증을 듣고서, 제가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탈북 청소년들을 품어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때때로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안타까움, 그런 어려움들을 
겪었던 이야기들을 쭉 간증하셨습니다. 

물론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 어려운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주신 것, 
그래서 결국은 그 학생들이 저렇게 훌륭하게 이렇게 성장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와 열매에는, 반드시 고난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믿음을 지키고 사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 일을 아십니다.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고난을 면제해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눈을 열어서 하늘나라가 있음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고난당하는 성도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시면서 
더 큰 소망에 눈이 뜨이게... 그렇게 하시면서 고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사도 요한에게도 동일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 제국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그때 당시 사회상의 성도들의 고난을 처절하게 겪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어린 양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계시록 6장~18장까지 계시록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 부분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환상이 이제 6장부터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한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보여주셨는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음을 지키고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늘이 있고, 
고난당한 성도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 계시록 6장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 일곱 개의 봉인으로 봉인되어진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인을 떼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봉인이 떼어질 때까지는   6:1~8
말을 탄 자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봉인이 떼어지고, 흰 말을 탄 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정복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또 싸우고 정복하고, 또 정복하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흰색 말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미혹의 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인이 떼어질 때는, 아주 붉은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는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세 번째 봉인이 떼어질 때는, 검은색 말을 탄 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온 세상에 기근이 오게 만드는 영입니다. (사람이 아사 직전에 검게 변한다고 하죠)

네 번째 인이 떼어질 때 청황색 말을 탄 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온 세상에 전염병 등의 어려움들로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의 4분의 1이 죽게 만드는 그런 재앙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흑사병 같은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게 될 때는, 얼굴이 푸르고 누렇게 변한다고 합니다)  

환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정확한 내용을 우리가 다 알기는 어렵지만 
전쟁, 기근, 또는 전염병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에 속해져 있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건 지금도 우리가, 그 심판의 어떤 흔적들을 보게 됩니다. 
그걸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종말인가? 종말일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만, 
계시록이 말씀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그 심판을 도대체 누가 주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 꼭 두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면 그 심판의 주관자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6장에서 우리가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두루마리에 봉인된 것을 하나하나 떼시는 분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 심판을 가져오는 그 영들에게, 
'어떻게, 어느 정도 이 땅을 심판하라'고 하는 기준을 정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심판의 주관자이시니까, 우리가 심판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습니다. 


다섯 번째 봉인이 떼어질 때, 순교자들이 큰 소리로 탄원하는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그 순교자들의 탄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언제쯤에서야 우리의 흘린 피의 이 원한을 풀어주시겠습니까?' 

그때 하늘에서 또 대답이 들립니다. 
6:11절에 보면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순교자의 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성도들은 답답함과 또 안타까움, 그 가운데에 살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고난보다도 하나님의 역사는 훨씬 강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에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톱에 켜서 죽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도 하고, 
사자밥이 되어 죽기도 하고, 재산을 다 뺏기고,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종으로 팔려가는 이런 일을 당했지만, 
2백 여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고난이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훨씬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내가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따돌림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것이다. 
나를 조롱할 것이다...'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례받을 때, 순교를 각오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죠.
 
지금도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 기독교인들, 지하교회 성도들'             주1)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는 
그들은 죽음을 각오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예수를 믿는 곳이 북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각오해야만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동안에 한국 교회가 성도들에게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그저 잘되기만 다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가 오늘날 이렇게 연약하게 된 이유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제대로 성도들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살다가.. 고난을 회피하고 살다가.. 잘되기만 바라다가.. 
그러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게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설교 제목

6:12절에 여섯 번째 봉인이 떼어지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6:12~14절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 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떨어졌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사라지고, 모든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일을 생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환상을 봅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충격이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았던 이 환상은, 그대로 예수님께서 
막13:24~26절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런 일이 이제 마지막에 벌어지게 될 겁니다. 
모든 산과 모든 섬이 다 옮겨지는... 
어느 정도의 지진이 일어나길래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그런 두렵고 무서운 일이 마지막 순간에 닥쳐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눈이 뜨인 것이,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런데 준비 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왕과, 고관과, 장군과, 부자는..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꿈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안달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는 순간에는, 그들의 지위나, 권력이나, 재산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두려운지... 그때 그 순간에는 회개도 못합니다. 벌써 때가 지났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되지만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그 마지막 순간에 뭐라고 하는지 오늘 여기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6:16~17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생기지만, 그건 실제로 두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될 것은, 그런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할까봐,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담대하게 고백하지 못하며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무서워해야 할 말이 있다면, 
'아휴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어!' 라는 말입니다. 

때때로 예수 믿고서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자꾸 만나다 보면, 
'아휴 나도 좀 이제 편하게 살고 싶어...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좀 살고 싶어... 
할 말도 하고, 싸울 때는 싸우고, 뭐 죄 지을 때는 죄 짓고, 나도 좀 그렇게 살고 싶어...'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왜냐면 어느 인생도, 편안한 인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믿는 자라도 삼켜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겠냐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죽했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사람들은 다 편안한 길을 원하지요. 
다른 사람들처럼 어울려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때때로는 가질 것도 가지고, 누릴 건 누리고, 싸울 건 싸우고... 그렇게 다 살고 싶지요. 

그런데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그 결국을 보았기 때문에!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에요.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나라이에요. 
이걸 보고 나면, 그러면 가지 말라고 해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눈이 열려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고난당한 성도들이 마지막에 받을 영광에.. 내 눈이 뜨이고 나면, 그러면 다 그렇게 갑니다. 
그게 열쇠인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얼굴이 천사 같고, 
돌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위하여 오히려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이 열려서 하늘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서서 내려다 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그 눈이 뜨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청년들에게 집회를 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존 파이퍼 설교모음
「여러분, 세상이 추구하는 풍요한 삶을 동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비극적인 삶을 쫓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가족, 좋은 직장, 즐거운 은퇴, 등의 조개껍질 모으기가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당신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창조주 앞에서 "하나님, 이것을 보십시오, 제 집을 보십시오, 제 차를 보십시오, 
제가 모은 이 조개껍질들을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여러분 삶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조개껍질 들

여러분도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사고, 좋은 옷 입고, 
사람들 앞에서 잘 산다는 소리 듣고 싶고, 그렇게 편안하게 즐기는... 
조개껍질이나 모으는 취미생활을 하는 그런 꿈을 혹시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게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눈을 떠보니까, 하나님 앞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았던 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 줄 아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내가 대접받고, 높아지고,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그렇게 편안하게 살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고난을 각오해야 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그러면 반드시 어려움이 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순교의 세상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순교에 못지않는 어려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겪습니다. 

그걸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그걸 피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게 두려운 거지, 
내가 세상 사는 동안 고난당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닙니다. 

6:9절에 보면 순교자들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면, 하나님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그러면 순교한다면.. 예수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있어요. 있는 정도가 아니고 많아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순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이에요.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순교하는 게 아닙니다. 얼마든지 순교 안 할 수 있어요. 
예수만 안 믿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순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 배반하지 않고, 그리고 죽임을 당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믿음이길래,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거죠? 

하늘을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에요.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결국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눈이 뜨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길을 가는 거죠. 

여러분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순교자를 많이 내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북한은 말할 수 없는 기독교 박해 국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성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주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그런 성도들이 있다는 거예요. 

질문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순교가 복이라고 정말 믿어지십니까?' 
저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해 보았습니다. '나는 순교가 복이라고 정말 믿고 있나?' 
분명히 이제는 제 눈이 뜨였어요. '아~ 순교가 복이구나, 고난이 복이구나!' 

그 자체는 놀라운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기 때문에요. 

제가 목사의 아들이고, 3대째 목사지만, 
처음부터 고난이 복이고, 순교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명의 길이라도 편안한 길, 옥토밭만 찾아다니던 자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버렸어요. 

그러면서도 제 속에는 여전히 편안한 게 좋고, 
고통과 고난당하는 것은 너무 싫고, 
대접받는 거는 너무 좋고... 그런 제 마음이 여전하다는 것을 또 깨달았어요

설교를 준비하다가, 더 이상 설교 준비가 진척이 안 돼요. 
'내가 과연 이 설교할 자격이 있나?' 
성도들에게 '예수 믿었으면 고난 당할 준비를 하라. 고난의 길을 가시라!' 
'이렇게 설교할 자격이 있나? 나는 진짜 그럴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정말 답답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설교해도 됩니까?' 

대신에 그저 '오늘 제가 설교 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성경 본문 읽고 같이 기도하고 마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던 중 하나님이 어제 토요일 저에게 답을 주셨어요. 
제가 아직도 '순교가 정말 복이다. 나는 틀림없이 그런 상황이 오면 
담대하게 순교의 길을 갈 거야!'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저 자신을 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이제 내가 너에게 줄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또 있다는 것을 네가 알라!'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라워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에게 예비하신 은혜의 세계는 
너무나도 크고 놀라울 게 앞으로 더 있다는 거예요

그게 어떤 세계지요? 
죽음도 두렵지 않고, 순교도 복이라고 정말 믿어지는 그 은혜의 세계! 
하늘을 보는 눈이 온전히 더 열리고, 
주를 바라보는 눈이 더 분명하게 뜨여지는 그때, 

그때를 향하여 제가 기도하고, 제 믿음의 목표를 두고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나는 순교는 너무 무서워.. 난 도무지 순교는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런 분들이 혹시 있으십니까? 그러면 생각을 조금 바꿔보세요. 

지금 현재 여러분이 그렇다는 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나는 아직도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나는 순교의 길을 도무지 갈 자신이 없어...'

지금 여러분의 수준이 그 수준인 것은, 그냥 여러분들이 겸허히 받아들이면 돼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10년 전과 지금의 여러분의 모습이 같습니까? 
믿음이 달라졌잖아요. 보는 눈도 뜨였잖아요. 주님과의 관계도 달라졌잖아요. 
여기서 끝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은혜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열려져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다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중앙연회(총회) 감독님께서 갑자기 심장 이상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목사님들이 계셔서, 급히 병원으로 가서 
응급 심장 수술을 받으시고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제가 최근에 감독님을 뵈었는데, 이분이 변하신 것을 느꼈어요. 
몸은 많이 약해져 계셨지만, 그렇게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시더라요. 
죽음의 문턱을 갔다 오고 나니까, 모든 사람, 모든 상황이 다 달리 보이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확 바꾸시는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죽음의 문턱까지 한번 갔다가 돌아오게 해주는 겁니다. 넘어가지는 않고요!

그 경험을 한 번 진하고 하고 나면, 
내 하루의 생활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이 다 달리 보이고.. 
힘들고 어려웠다는 일들도, 다 기쁘고 감사하게 그렇게 바뀌어요. 

근데 여러분, 우리가 꼭 죽음의 문턱에 갔다 와야만 깨닫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 드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주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눈이 열리게 돼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메일을 보내셨는데 
최근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시험들, 
거짓과 모함, 목사님이 설교하다가 그냥 통곡을 하고 우셨을 정도로 
그렇게 힘든 어려움을 겪으셨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 눈물밖에 안 납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이 교회로 가라고 해서, 제가 여기로 오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까닭입니까?'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고난의 비밀'을 깨우쳐 주셨다는 거예요. 
저에게 메일을 보내시면서 

「목사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고난의 비밀을 알려주셨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가? 
거기에는, 성경에 분명한 패턴이 있더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과정을 그대로 밟으셨고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이 다 그 과정을 겪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고난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죽음이 있고, 
그 다음에 비로소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잖아요. 
예수님을 구주로 생명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도 똑같다는 거예요.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 그 목사님은 
'하나님, 제가 너무 힘들어요' 하며 울면서 하는 기도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오히려 마음속에 너무나 엄청난 소망이 넘치게 됐다는 거예요. 
왜요? 고난을 당하고, 그 다음 단계가 뭔지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죽음이구나!' 
내가 지금 이 고난이 힘들다고, 울고 불고 할 문제가 아니구나. 
빨리 그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내가 정말 받아들여야 하는 거구나!' 
'그 다음에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거구나' 

목사님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셨어요. 
'목사님, 제가 완전한 답을 얻었어요. 정말 바보같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저를 다듬어서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고, 
그리고 나를 죽음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니... 제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요. 

저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부활의 그 놀라운 기쁨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께 너무 감사했어요. 
그 분이 정말 너무나 놀라운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베드로 사도가 '불시험을 만났을 때 즐거워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비밀에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벧전4:12~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도 똑같이 말했어요. 
'현재 고난은 장차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롬8:18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핍박을 당하면 즐거워하라' 마5:10~12
오늘 이 시간에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 눈이 열리게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싫지만 유익한 것이 있잖아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영적인 눈이 뜨여서 하늘을 보고, 
그리고 '고난당하는 자가 결국은 어떻게 되는지를 보는 눈이 뜨였느냐/ 안 뜨였냐?'는 문제이지, 
'고난이냐/ 편안한 삶이냐?'가 아닙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최근에 책을 하나 쓰셨는데 
제목이 <우리의 이름은 모두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입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61세 되신 엘리자베스 라는 여자 노인 성도님이 
간증을 하셨대요. 그분은 참 가난한 쓰레기 마을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살며, 먹여살리는 지극히 가난한 사람인데, 
그런데 그가 간증을 시작하면서 자기소개를 이렇게 하셨답니다.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가 아닙니다. 내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을 알게 된 순간, 저는 더 이상 쓰레기 마을에서 사는 가난한 노인도 아니고, 
손자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고달픈 노인도 아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

그 고백에 크게 감동을 받고, 그리고 책 제목을 그렇게 붙이셨어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름이 다 있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이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아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은 한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이름인지 아십니까? 
행11:26에 '시리아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됐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빈정거리면서 했던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완전히 예수에게 미쳤네!' 그런 뜻이에요. 
'저 사람 완전히 예수에게 미쳤어, 자기가 그리스도인줄 아나 봐!' 
그게 '그리스도인' 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받으려면,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으셔야, 그 이름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이름을 얻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게 고난을 이기는 승리의 길입니다. 

여러분 삼손 아시죠? 머리 다 깎이고, 힘을 다 잃어버리고 
자기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을 위해서 맷돌을 돌리는 그런 처량한 신세에 있을 때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했잖아요.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삼손은 그렇게 기도 안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이 블레셋 무리들과 함께 죽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그가 그렇게 기도하여서,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임했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비밀이 뭡니까? 죽기 살기로 예수님만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사는 게 힘들다...' 완전히 속는 이야기예요. 

철저하게 말씀을 붙잡지 않고 사니까 힘든 거예요. 
말씀대로 사는 게 힘든 거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살아납니다. 

일제시대 때, 6.25 전쟁 때 얼마나 끔찍하고 어려웠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어렵다는 형편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 예수님만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유산을 우리가 물려받은 거지요. 

지금 우리도 똑같습니다. 살 길은 오직 주 예수님만 붙잡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삶에,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고난받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보좌에 좌정하심, 다스리심을 보게 하시면서 
다시 힘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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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북한에 기독교 신자가 존재한다는 탈북자들의 증언

우리나라 통일부에서는 6년 전부터 매년 <북한 인권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2024년도에도 발간되었고, 인터넷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그 가운데서 신앙의 자유에 대한 항목은 18쪽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목이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 
그건 우리가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으니까, 여러분 꼭 한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그 보고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지하교회에 대한 증언입니다. 

"북한에 지하교회는 없다. 그런 체제 속에서 지하교회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특별히 탈북민들 가운데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아닙니다. 북한의 지하교회가 엄연하게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 탈북민이 3만5천 명 정도 있다는데,
그 중에, 북한에서부터 신앙을 가졌다고 증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탈북민이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시흥에 있는 탈북민 보호센터라고 조사기관이 있잖아요.
거기서 조사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네"

"그러면 언제부터 신앙을 가졌습니까?
1) 두만강이나 압록강 건너서 중국에 갔을 때부터입니까?, 
2) 한국에 들어와서부터 입니까?" 
3) 혹은 "북한에 거기 있을 때입니까?" 
그렇게 묻는 문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2%의 탈북민이 "나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이 실제적인 조사를 거쳐서 이렇게 집계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1%는 "나는 북한에서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봤습니다." 
그렇게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2024년 보고서에도 이런 보고가 있어요. 
그걸 제가 그대로 옮겨드리니까 여러분 이런 보고를 들으면서 
북한에서 참 위험한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지하교회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더 뜨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친정 식구들은 성경책을 처음 접한 2009년, 2010년경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기도를 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지킬 수 없었지만 
기도를 하고, USB에 저장되어있는 중국에서 넘어온 목사님 설교 말씀을 이어폰으로 듣고 
(이건 그 USB가 중국에서 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찬송가도 따라 불렀습니다. 

중국에서 밀수 일을 하는 형부를 통해, 성경책과 USB를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성경책 두고는 적발될 것이 두려워 모두 태웠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게 그렇게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2024 북한인권보고서를 한번 찾아보시면서, 
북한이 명목상으로는 자유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탄압하고 있으나 

이것이 '명목상으로도 자유, 실제적으로 자유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이렇게 생생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참 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 힘써 기도하는 쥬빌리언들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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