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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무너진 마음, 일으키시는 주님 행18:1~11

by 【고동엽】 2023. 1. 14.

무너진 마음, 일으키시는 주님       행18:1~11  


저는 로잔 대회를 섬기고, 이번 주일에 이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목요일 집회 때, 이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라고 하시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오늘 여러분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아주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일기를 써가면서 살기 시작한 것은 
따져보니까 한 15년 정도 됩니다. 
15년 동안 제게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사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권하는 거죠. 

그 중에 하나가, 제게 낙심이 굉장히 줄어든 거예요. 
그리고 제가 낙심하게 되는 정도(수치, 수준)도 많이 낮아졌고... 그건 굉장히 놀라운 변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수시로 낙심이 됩니다. 
자신에게 낙심하고, 가족들에게 낙심하고, 교회에 대해서 낙심하고, 
우리 앞에 굉장히 낙심스러운 일이 많아요. 

그 말은, 믿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믿는 것과 낙심은, 사실 전혀 같이 갈 수가 없는 성질입니다. 

믿으면.. 낙심이 안 되는 거고, 
낙심이 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그동안 저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정말 믿고, 성령의 역사를 믿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쁠 수가 있으며, 
언제나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으며, 
염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나?'

어떤 말씀이든지 '말씀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믿어져야, 그게 능력이 되는데, 
말씀은 참 귀한 말씀 같은데.. 믿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거든요. 
100% 믿어지지는 않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서, 
그리고 그런지/ 안 그런지 매일 일기로 하루하루를 점검해 보기를 
1년, 2년이 아니고, 15년을 살아 보니까 
어느 순간에 제 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그러니까 '낙심'보다는 '주님'이, 제게 더 커진 거예요. 
'문제'보다, '내 상황과 여건'보다,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시는' 게 더 확실해진 거예요. 

그러니까 뚜렷이 달라지는 것이,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문제 앞에서든지 낙심치 않게 되고 
오히려 기뻐하게 되는 일이 제 안에 일어났어요.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성경을 읽어보면, 낙심했던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우신 사도 바울도, 낙심했던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행18장에, 사도 바울의 낙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자 이런 본문을 읽으면, 일단 우리 마음에 위로가 돼요. 

'아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사도 바울도 그랬구나...' 그거 자체도 참 은혜긴 은혜예요. 
그런데  그게 사실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사도 바울도 낙심했음을 아는 게'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나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구나' 이런 정도로 위로를 받는 거죠.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정말 주목해 볼 것은,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낙심했다'는게 아니고, 
'그가 어떻게 그 낙심에서 벗어났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냥 오늘 본문에서 크게 낙심한 것으로 끝난게 아니에요. 
그는 낙심에서 뚜렷하게 회복합니다. 그게 놀라운 거예요. 

사실 그 은혜가,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이고, 
사실 예수동행집회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각자 섬기는 교회에 주일예배도 있고, 수요예배도 있고, 금요예배도 있고, 
새벽예배도 있는데, 왜 굳이 목요일에 또 목요집회를 하느냐 말입니다. 

예수동행 집회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실제로 동행하는 성도의 삶을 여기서 새롭게 도전 받고 
우리도 그렇게 되어 보자는 거죠.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은 대단히 두려웠고 떨리고 무너졌다고 
고린도전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사도바울도 그랬다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대략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기 전에, 앞서 빌립보에 갔을 때에 
그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무지하게 맞고... 그랬었던 적이 있었죠.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는 유대인들이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사도 바울이 그들로부터 아주 매를 맞고, 수모를 당하고, 겨우 피해서 베뢰아로 갔는데,
유대인 폭도들이 거기까지 좇아와서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또 아덴으로 옮겨갔죠. 그런데 거기서는 사역의 열매가 거의 없다고 느껴졌어요. 
그리고는 고린도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지칠만 했을 것 같아요. 

고린도에 왔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두렵고, 떨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고린도에 도착해서 매우 마음이 힘들었을 때, 
사도 바울이 겨우 회복된 것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일, 18:2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고린도로 와서 합류한 것 때문이었죠. 18:5

그 일로 인해 사도 바울이 마음에 좀 회복을 얻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이는 일이 참 중요한 것은, 
여기서 회복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려고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거기서 오는 놀라운 영적인 회복이 있거든요. 

오늘도 아마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를 받고 가게 될 거예요. 
사도 바울도 그런 은혜의 회복을 얻고, 담대하게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너무 쌀쌀맞은 겁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냉정하게 사도 바울을 내치고 
회당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마음에 격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너희들은 이제 스스로 복음을 거부했으니,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다. 왜 나는 복음을 전했으니까! 
다만 너희들이 안 받아들인 거지... 이제 이후로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나는 이방인에게로 갈 거야!' 그렇게 외쳤는데요.  18:6

사실이 이 말 속에, 사도 바울의 마음에 낙심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 그런가요? 
우리가 가족들과 또는 교회 안에서 갑자기 막 화를 낼 때, 
말은 옳은 말인데, 이렇게 화를내는 것 자체가 
이미 그의 마음이 영적으로는 무너졌음을 증상으로 나타내는 거죠. 

사도 바울이 꼭 그런 모습인 거예요. 
여러분도 실제로 그런 일을 많이 겪게 되니까, '사도 바울도 이랬다(낙심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조금 위로를 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도 바울도 이랬었구나(낙심하고 두려워했었구나)' 

그런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랬던 사도 바울의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그는 고린도에서의 사역이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그 사도 바울을 일으키십니다. 그게 본문의 핵심이자, 오늘 설교의 주제예요

환경과 여건과 사람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계속 힘든 마음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데, 
주님이 그 사도 바울을 일으키세요. 

18:9~10에 환상 중에 주님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세요.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 말은, 사도바울이 두려워하고 있고,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하고 있다는
상태를 반증해 줍니다.
'난 아무 말을 못 하겠어.. 아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이런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주님이 '두려워하지 마, 침묵하지 마, 담대하게 말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또 이 고린도 성 중에는 내 백성의 많음이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세요. :9~10

자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사도 바울은 갑자기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라는 그 말씀에서, 큰 힘을 얻었을 거예요.  :10  

'아 지금 내 눈엔 안 보이지만, 이 고린도에 예수 믿을 사람 많구나!' 
그래서 위로 받고, 힘을 얻을 수도 있었겠는데, 
사실 더 중요한 핵심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그 말씀이었을 거예요. :10a

이 말씀에 사도 바울은 그냥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주님이 지금 저와 함께 계시다면 그러면 충분합니다.' :9~10

사도 바울은 마음이 완전히 회복이 됩니다. 그 주님의 말씀에서! 
그래서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뭅니다. 
그리고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돼요. 

▲자 우리에게도 수시로 낙심이 일어납니다. 
사람 때문에도 그렇고.. 환경과 여건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낙심이 돼요.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도들은 성도대로 가정과, 교회 생활, 직장생활, 학교에서 
또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서... 이래저래 마음이 무너지는 일을 우리도 경험합니다. 

우리가 낙심하게 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속기 쉬운 거예요. 
'그것 때문에,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낙심을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어려운 문제 때문에 
-도무지 해결이 안 되는 답답한 여건, 환경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낙심하게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실제로 사도 바울도, 낙심하는 일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여요. 
고린도는, 아덴보다도 더 전도하기가 어려운 여건의 도시입니다. 

아덴에서 열매가 없었어요. 사도 바울이 느끼기에 그랬습니다. 
(실제로 아덴 선교는 실패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느낀 것 뿐이에요.) 

20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덴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는 매우 훌륭했어요. 
정말 놀라운 변증의 설교였어요. 

그리고 그 결실은,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판단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이루세요. 
근데 당장 눈앞에 예수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덴에서 사도 바울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던 거예요. 
그리고 고린도에 온 겁니다. *남서쪽으로 90Km

아덴에서는 핍박이 없었어요. 
'네가 말하고 싶은 거를 마음껏 다 말해 봐!' 오히려 장도 만들어 줬어요. 
아덴 사람들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여튼 누가 무슨 새로운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다 귀 기울여 듣기는 했습니다. 

그랬던 곳이 아덴인데, 거기서는 열매가 없었어요. 
근데 고린도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도시입니다. 
여기는 상업도시에요. 그리고 굉장히 타락한 도시에요. 

'고린도 사람 같다'는, 그런 당시에 속담도 있을 정도예요. 
아주 사람이 음란하고 타락한 사람을 '고린도 사람 같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고린도 라는 도시가 어느 정도의 분위기인지 대략 짐작이 되실 거예요. 
'아덴에서도 전도가 잘 안 됐는데.. 고린도에서 될까?'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고린도 여기는 더 안 되겠구나. 여기는 예수 믿을 사람이 거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만 한 도시가 고린도 예요.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있으면서 많은 열매가 맺어져요. 
실제로 낙심할 문제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가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런 거죠. 

고린도가 아덴과 달랐던 점이, 사도 바울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이 사도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분명하게 말씀하세요. 

'두려워하지 마라. 침묵하지 마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 :9~10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엄청난 힘을 얻게 된 거예요. 
그래서 완전히 아덴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장기 사역을 거기서 할 수 있었던 거죠. 

우리도 환경이나 여건이 어려워서, 우리 마음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현재 여러분 중에, 만약에 마음에 낙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속지 마세요.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환경과 여건이 어려워서도 그런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 
주님이 여러분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을 여러분이 듣지 못하니까 
여러분이 그 어려움을 이길 힘, 믿음의 힘을 얻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 힘들고 답답해 보이는 겁니다. 

형편이 좋아서, 신앙생활 잘하고
형편이 어려워서, 마음이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속으면 안 돼요. 

▲요즘 제가 계속 받는 질문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나는 죽고 예수를 사는' 게 십자가 복음인 것도 내가 알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도 믿는데,
'자기가 낙심에 무너지고, 은밀한 죄에 또 빠져드는 이유가 뭘까?' 그런 분들이 많아요.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것을 정말 알기만 하면, 누가 죄 지을 사람이 있겠어?'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알면, 낙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처음에는 그게 믿어졌는데... 

자기가 분명히 복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데도... 무너지는 거예요. 
'그럼 이건 도대체 왜 그런가?' 하는 거죠. 

제가 예수동행운동을 하고, 예수동행집회를 이렇게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아는 것으로만 해결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예수동행집회로 목요일 저녁에 함께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이 있어요. 

여러분,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이 처음에 마음이 힘들고 두려워하는 것을 
여러분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떠세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었어요. 
만약 여러분이 2000년을 건너서, 시간 여행을 해서 사도 바울에게 갈 수 있다면, 
아마 여러분은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이렇게 말할 거예요.

'낙심하지 마세요. 제가 2000년이 지난 시점에 그 한국에서 왔어요. 
사도 바울 당신은 지금 못 보지만, 지난 2000년 동안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이제는 뭐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그런 걸 따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어요... 
지금 고린도에서 쉽지 않으시겠지만, 사도 바울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은 다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우리 눈에 보기에, 사도 바울의 낙심은 사실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인 거죠. 

근데 여러분 아십니까? 
똑같이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돼요. 

히12:1절에 '우리에게 허다한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랬어요.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보다 먼저 믿음으로 살았던 그런 증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지금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사는 일에 대해서 좌절을 느끼고, 
여러분이 뭔가 답답한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안타까워할 때, 
그 허다하게 많은 증인들이 

2000년이 지난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가서 그렇게 말해주는 것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예요. 
'OOO야, 낙심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절대로 여기서 포기하지 마!'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허다하게 많은 증인들이 정말 지금 우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예수님께서 밤에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나에게도 말씀하시는 역사가 똑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기적적인 역사가 한순간에 나에게 
어떤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기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정말 목사님 말씀이 100번 옳습니다. 
저도 바울처럼, 오늘 그 음성을 좀 들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 밤에 주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주님이 밤에 나타나셔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그런 사건을, 
나도 체험했으면 좋겠어요' 

'사도 바울에게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마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 
나도 그런 말씀을 좀 들으면 좋겠어요.' 아마 그런 분들이 오늘 여기 많이 있을 거예요. 

실제로 2000년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서, 그런 역사들이 끊임 없이 계속 일어났어요. 
많은 간증이 있어요. 
주님을 만난 체험, 주님의 직접 음성을 들은 체험, 
그래서 사람의 인생이 바뀐 놀라운 체험들이, 실제로 2천년 기독교 역사 중에 계속 일어났어요. 

근데 여러분 한 가지 아셔야 돼요. 그런 사람보다, 
그런 경험을 한 번도 못해본 사람이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거예요. 99%이상으로 많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한순간에 기적과 같은 체험을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분명히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실 수도 있어요. 
환상 중에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눈에도 보이게 하시고, 
말씀도 들리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여러분에게 만나 주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꼭 그런 방법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믿음으로 주님이 내 속에 계셔서,

끊임 없이 말씀하시고, 마치 나타나신 것처럼 나와 함께 해 주심을 믿으시면 됩니다.  

▲오덕호 목사님이라는 분이 <교회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책을 쓰셨는데 
그 책 속에서 이런 재미있는 질문이 나옵니다. 

'여러분,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 더 교만할까요,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 더 교만할까요?'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주로 더 교만해요. 
'너 언제부터 교회에 나왔어? 너 언제부터 예수 믿었어?' 하는 거죠.

'여러분, 교회 헌금 많이 한 사람이 교만할까요, 헌금 못한 사람이 교만할까요?'
헌금 많이 낸 사람이 교만해요. 
'어휴, 헌금도 못 내는 인간들...' 뭐 그런 마음이 슬쩍슬쩍 들 수 있죠.

자 그러면 참 이상하잖아요. 
신앙생활 오래 할수록 영적으로는 더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헌신을 많이 한 사람이, 오히려 영적으로 더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잖아요. 
이게 안타까운 거예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교회는 오래 나왔는데, 헌금도 많이 했었는데, 
실제로 주님이 함께 하시고, 그렇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 주님을 알고, 
계속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듣는 삶은 없었다는 거예요. 

그냥 교회 나온 연수가 길어진 거고, 또 헌금할 기회가 있어서 헌금도 많이 했었던 거지,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런 생생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아니었기 때문에, 
신앙생활 오래한 것이, 그만 교만의 이유가 되어버린 거죠.
오히려 영적으로 굳어져 버린 거예요.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계속 어떤 놀라운 체험을 기대하고, 
'사도 바울처럼 밤에 나도 그렇게 주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하신 것과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과연 다르실까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목사님, 달라요!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너무나 자주, 너무나 구체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네요.

근데 저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바울에게 딱 4번 나타나셨죠. 9장 다메섹 길에, 18장 본문 고린도에서,

23장 예루살렘 안토니아 요새에서, 27장 유라굴로 광풍 때... 일생에 네 번이면, 약 10년에 한 번꼴!

바울에게도 그렇게 자주 나타나신게 아니죠. 그보다는 내적 음성으로, 임재와 동행으로 늘 나타나셨죠)  

그래서 신자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한순간에 놀라운 사건을 자꾸 기다리는 거죠. 

2천년 전에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거나,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동일해요. 전혀 다르지 않아요.

요10: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주님은 당신의 양인 성도를, 음성으로, 말씀으로 인도하세요.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도 그렇게 하신 거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고 계신 거예요. 

'이방인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야 당연하겠지...' 

맞아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신 거예요. 
본인이 그것을 분별을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어요. 
오늘 여러분을 여기에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거든요. 
주님의 인도를 안 받고서야, 오늘 여기 이 집회에 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말씀하시고, 내게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건 완전히 속는 거예요. 
사도 바울과 우리 사이에는 그러면 뭐가 차이가 있는 거죠? 
믿음이 다른 거예요. 믿음이! 

사도 바울이 갈2: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음을 알았어요. 
그리고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을, 그가 알았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거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정확한 인도하심을 계속 그렇게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에게, '성경을 많이 읽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생각해라' 
그러면 오늘 여기서 상당히 많은 수는, 떨어져 나가야 될 거예요. 

'너희가 적어도 40일 금식기도는 한번 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을 기대 해!' 
그러면 아마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신학 지식이 필요하다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 거룩한 헌신을 필요로 한다든지,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셨다면, 
아마 우리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은, 아마 주님의 음성 듣는 일을 포기할 거예요.

근데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는 거 하나예요. 
할렐루야! 믿는 거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나와 동행하심을 믿는 것)

아니 주님이 사도 바울이나 우리에게나 역사하심은 동일하세요. 
그래도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사도 바울의 믿음과, 우리 믿음이 다른 거예요. 

근데 그 믿음 하나만 요구하셨다는게,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지 몰라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믿기만 하면! 

▲근데 여러분 정말 기억하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믿으라는 것은 
주님이 해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고린도에서 낙심한 사도 바울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마음이 낙심이 됐어요. 두려워요. 
'여기서는 안 되겠어.. 예수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사도 바울은 그러고 있었다니까요. 

근데 그 사도 바울을 회복시키신 분은 주님이신 거예요.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분도 주님이세요.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여러분을 은밀한 죄에서 이기게 하실 분, 
다시 기도를 회복시키실 분, 
여러분 안에 영적인 충만함을 다시 일으키실 분은.. 주님이시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동행집회 때마다 보혈찬송을 부르고 
우리의 죄의 정결함, 그리고 내 영적인 회복을, 
그리고 육신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 모든 일들...
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을!
이게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이건 정말 놀라운 구원이잖아요! 
믿기만 하는 것, 오직 믿음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회복시키실거다. 
-주님이 나를 일으키실거다. 

그러나 막연하게 믿으라는 거 아닙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근거해서 믿는 거예요. 

이미 주님은 여러분 안에 오셨고,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신데, 
왜 '또 말씀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해야 됩니까? 

▲여러분, 이 믿음이 정말 우리에게 일어나려면 한 가지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예수님이 좋아해야 되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솔직히 스스로 부담스럽게 생각해요. 이건 참 마음 아픈 일이에요. 

예수님이 나와 24시간 함께 하시고, 
어떤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주님만 의지하고, 
그렇게 살려면... 예수님이 내게 좋은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근데 예수님이 때때로 내게 부담스러운 존재예요. 
주님이 나와 늘 같이 계시는 것 자체가 불편해요. 
그러면 이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이 어디서 생겨요? 
내가 솔직히 하나님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게 싫은데,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게 좋은 분이신 것을, 많은 분들이 모르세요. 
그렇게 '주님, 주님!' 부르짖으면서도 
예수님 그분이 '좋은 good' 분인 줄을 모르세요. 
두렵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 부담되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으로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왜요? 주님과 친하지 않으니까! 
제가 예수동행일기를 쓰라고 그렇게 권해드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친밀함은 어떻게 생기죠? 계속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생깁니다.
'내가 처음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니까, 
그냥 귀로 들어서는 알지만, 실제로 내가 체험한 분은 아니니까...' 
그런 분을 만나면 다 처음에는 어색하잖아요. 

누구든지 처음 만나는 사람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불편하잖아요. 
근데 언제 갑자기 친밀해져요? 
그분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고생도 같이 겪고, 좋은 일도 같이 하고, 
어려운 시간도 같이 지내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너무 친밀하게 되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친밀히 동행하는 것을 뜻하늗데.
그 친밀함은, 한순간에 경험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이미 우리 안에 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취하고, 
그리고 계속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 
주님이 어느 순간에는 너무 좋은 분이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계속 같이 살고 싶은 거예요.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의 음성이 더 분명하게 들려지는 거예요. 

▲4차로잔대회를 이제 잘 마쳤는데, 기도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근데 4차로잔대회를 섬기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 많이 있었어요. 

그중에 하나가 욕을 무지하게 많이 들었어요. 
하여튼 유튜브에 별의별 내용에, 온갖 악담 같은 그런 욕을 많이 들었어요.
네, 마귀의 괴수가 되기도 하고, 이단에 앞잡이도 되고... 
뭐 그런 욕을 많이 들었어요. 

로잔대회 열리는 그 대회장 앞에 시위하는 사람이, 끝날 때까지 시위를 했어요. 
근데 그들이 피켓을 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유기성은 한국 교회 앞에 석고대죄 하라' 참 읽기가 민망하더라고요.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앞에, 
그것도 해외에서 온 5천명이 넘는 전 세계 복음주의권 대표들 앞에, 

하여튼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유기성은 한국 교회 앞에 석고대죄 하라!' 
그렇게 쓴 피켓이 들려있는 앞을, 매일같이 제가 오고 가야 된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었어요. 

하루는 제가 서둘러 대회장으로 아침에 나오는데 
로잔대회를 반대하는 그 시위대 앞을 지나가게 됐어요. 

근데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제 안에 마음의 회복을 주셨어요. 
제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 심지어 해외에서 온 복음주의권의 대표들, 
그 5천 여명의 대표들 앞에, 
제가 한국교회 앞에 석고대죄 하라는 그런 팻말까지 이렇게 쓰여진 것을 
이렇게 제가 보게 되는 그 일이, 너무 감사한 거예요. 

주님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때 저도 주님 때문에 힘들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경험한 거죠. 주님도 아실 거잖아요. 
주님 때문에 저도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한 거죠. 
그래서 그 팻말을 사진 찍고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어요.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제가 지난 15년 동안 계속 주님을 바라보려고 했던 삶의 
결과 같아요. 

여전히 낙심스러운 일이 없어진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낙심스러운 일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오히려 감사한 제목이 됩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그러니까 주님 때문에 욕먹는 일도 감사한 조건이 돼 버리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꾸준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필요해요. 
한순간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를 구하지 마시고, 
그러면 여러분이 주님 앞에 가는 순간까지, 
여러분은 점점 더 영적으로 그냥 굳어지는 그런 답답함 속에 있게 될 거예요. 

근데 여러분 지금 현재 주님이 여러분에게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주님을 주목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훨씬 놀라웁게, 주님이 여러분 안에 주의 역사를 계속 보여주시고 
계속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분이 생생히 듣게 돼요. 

여러분이 문제를 겪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그 문제 속에서, 주님의 답을 얻게 돼요. 

그러면 문제는 완전히 달리 보이는 거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의 사람들과의 연합이에요. 
꾸준히 주님을 계속 바라보는 삶을 살려면, 믿음의 사람들과 연합이 필요해요. 

바울이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연합하고 교제한 것처럼,
또한 마게도냐에서 내려온 실라와 디모데와 연합하고 교제한 것처럼,
그래서 연합해서 주님을 함께 더 열심히 섬기는 시너지가 나온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과 동행하고, 
주위의 동역자들, 주의 백성들과도 함께 동역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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