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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밀월에서 끝난 가정! (창 1:26-28)

by 【고동엽】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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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월에서 끝난 가정! (창 1:26-28)

 

세상은 날로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 거리가 너무도 많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매거(枚擧)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마는, 한 마디로 말해서 문제의 핵심은 인간성입니다. 허다
한 난제(難題)들이 바로 인간성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많은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술도 있고 재산도 있습니다. 그
러나 문제 거리는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은 몇 사람으로 말미암아 어떤 때에는 온 국민이, 온 세계가
고생을 해야 합니다.
머리는 좋습니다. 배운 것도 많습니다.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세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 되었습니다. 사람의 그 깊은 곳에 있는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사람 됨됨이---인간성은 어디에 연유하겠습니까? 공부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
다. 교양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성으로 본다면 공부 많이 한 사람이나 하지 않은 사
람이나 똑같습니다.
예컨대 대학교수들이라고 하면 남들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에서 보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성은 돈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지위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성의 문제 - 이것은 바로 가정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은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곧 "그 사람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라고 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여기, 결혼을 하신 분들은 본인한테야 이미 다 지나간 일이겠습니다 마는, 앞으로 자부(子
婦)를 맞던가 사위를 맞던가 할 때에는 유념해야 될 것입니다. 자부될 사람, 사위될 사람의
인간성을 알려면 그 부모를 먼저 보라고 했습니다.
자부를 맞아들일 때에는 그 친정 어머니를 보고 데려오면 됩니다. 사위를 맞이할 때에는
그쪽 아버지를 보면 사윗감의 인간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왔으니 똑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나와 그 슬하 그 분위기에 자라면서 형성된 것이 그 자녀의 인간
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의 인간성을 창조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인간성의 원산지(原
産地)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는 결국 가정의 문제로 귀착합니다.
보십시오. 가정이 자꾸 파괴되고 있습니다. 무사한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무사한 것이 아
닙니다.
제가 한번은 많은 부인들 앞에서 가정의 문제를 가지고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에 짓궂은 질문 하나를 일부러 해보았습니다. 비록 갈라서지 않고 살아왔지만 그 살아오는
동안에 혹 남편 죽기를 바랐던 적은 없느냐?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이혼하고 싶
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라 - 그랬더니 역시 반응은 예상한 대로
였습니다. 손드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자신이 없어서 - 그래서 갈라서지 못했을 뿐, 그런 마음을
한번도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무사하지 못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런가 하면 별일 없이, 시끄럽지 않게, 아무 탈없이 유지되어 나가는 가정이 있습니다.
이런 가정은 또 심심해서 탈입니다. 심심한 대로 문제가 되는 가정이 요사이는 의외로 많습
니다.
이모저모로 가정에 탈이 많은 세상이고 보니 가정교육이다 뭐다 하고 복잡하게 나오는 사
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가정교육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화평한 가정이라면 자녀들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좋은 인간성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
다. 이렇다하게 특별한 노력이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가정이 두루 화평하고 가치관이 바로 되어 있으면 거기서 자연스럽게 바람직한 인간성이
창조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가정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몇
가지를 생각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복 주어 세우신 것이요, 하나님께 주신 가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수하신 가정입니다. 가정이라는 제도는 사
람이 만든 게 아닙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정이라는 제도, 가정이라는 구조, 가정이라는 그릇 그 자체를 비난하거나
허술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러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뭐 좀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 해서 그 기본 원리부터 부정하는 사람을 흔히 봅니다. "
왜 가정이라는 게 있을까?" "왜 이런 일이 있어 가지고 이 괴로움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 이렇게 불만을 가지면서부터 일은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가정은 본디 행복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행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불행하
게 된다면 그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저런 여자를 만나 가지고……' '하필이면 저따위 남자를 만나 가지고' 어쩌고
푸념하면서 가슴을 치고 팔자타령이나 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중매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예쁘면 행복할 텐데, 상냥하면 행복할 텐데, 똑똑하면 행복할 텐데, 돈 잘 벌어 오
면 행복할 텐데 - 이런 조건 저런 여건을 따지고 들지만 행복은 그런 것과 상관없습니다.
제가 한 30여 년 목회를 하면서 관찰해본 결과, 그 많은 사람의 얼굴이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심지어 쌍둥이끼리도 어느 구석이건 다른 데가 있어요.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저마다 예쁜 데가 있고 예쁘지 않은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객관적으로 보는 외모는 조금 더 예쁜 사람, 조금 덜 예
쁜 사람이 있는데, 사랑을 받는데는 절대로 그렇지 않더군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쁘고 똑똑하고, 학벌 좋겠다 재주 있겠다 - 그만하면 분명히 남
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에 겨울 것 같은데 오히려 일생을 불행하게 사는 여자가 있습
디다. 그런가 하면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좀 안됐다 싶을 정도로 못생긴 얼굴인데 부러울 것
없이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여자가 있습디다.
여러분, 복된 사람은 누구하고 살아도 행복합니다.
복된 사람은 어떤 여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조건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건이 달라져도 불행합니다. 누구와 만나도 불행합니다.
'이 사람하고는 아무래도 맞지 않아. 전에 사귀던 그 보이 프렌드와 결혼했더라면…… 팔
자가 사나워 이 사람을 만났지.' '내 어쩌다가 이따위 여자를 만났단 말인가. 그때 그 여자
하고 사는 건데……' 이래서 불행합니다. 뿌리부터 잘못된 이런 생각에서 불행은 비롯됩니
다.
'하나님이 중매하셔서 이 가정이 여기에 있다' - 이런 신앙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
런데 삐딱하게 주어진 길을 부정하면서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되어지
는 이 사건, 내가 이루어 나가는 이 가정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레이트 미스테이크(great
mistake)! ---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행의 씨앗입니다. 올해에도 5월 들어 '가정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일년 내내 날마다가 가정의 날이어야 하는데 굳이 가정 주간이 따로 있다는
것부터 우스운 일입니다 마는, 가정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한 반증(反
證)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가정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뜻 있다 하겠
습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있었던 가정이자 원리적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시
니(창 2:22)" ---- 하나님께서 이끌어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눈이 맞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가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요, 내 아내(내 남편)도 하나님께서 정
하신 바다'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I have no choice. 나
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아이들도 있
고 나이도 먹었고 ----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차피 이렇게 산다고 할 바에야 같
은 값이면 마음 흐뭇하게 살아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주어진 일을
두고 잘못되었다는 듯이 탄식이나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입니다. 모든 축복은 가정을 통해서 옵니다. 이 점을 꿈에도 잊
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慰勞)도 가정을 통해서요, 사랑도 가정을 통해서요, 신앙도 명예도
재산도 다 가정을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28
절)"고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 다시 말하면 '복되라, 행복하라' 하셨는데,
그 모든 복을 받는 길이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넘치게 복을 주시려 해도 그릇이 준비
되어 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복을 받아들일 그릇,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이
가정이므로, 이 가정은 언제나 소중하게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잘못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올시다.
제가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느라고 옛날에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펴보았더니 이런 이야
기가 나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이 과연 이혼
하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이혼하는 일이 없는가, 유럽 어느 곳에서 이것을 조사해 통계를
내보았는데 그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일년에 뜻밖에 2만 커플이나 이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혼한 그 사람들의 80%가 1년도 못 가서 그 헤어졌던 상대와 재결
합(remarriage)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입증하겠습니까? 헤어질 때에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습니
다마는, 막상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서 헤어지고 보니 별수가 없어요.
이리저리 새로운 길을 찾아보았지만 다 소용없는 일 ---- 처음 관계가 제일이었다, 처음
에 주어진 길을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정해주신 그 길을 통해
서만 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특별히 주의 깊게 명심해야 할 진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 :24)"
----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는 에베소서에 와서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 '하나'라고 합니다. 아담은 이 비의(秘義)를 더욱 강조해서 하와를 가리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 : 23)"고 갈파합니다.
부부(夫婦)는 절대로 둘일 수가 없습니다. 몸은 둘이로되 하나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
다. 생활이 하나입니다. 명예가 하나입니다. 운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야 한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흔히 부모로부터 떠나지 못한 데서, 또 부모가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빚
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이제는 슬하를 떠나 아내와 합쳐 한 몸이 된 자식을 바라볼 때, 부모
는 모름지기 멀찍이서 마음으로 기뻐할 일이지 내가 다시 간섭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더러는 아들이 자기 아내 사랑하는 것을 질투하는 어머니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식
은 결혼과 함께 부모인 자신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나
라에는 부모로부터 떠나지 못한 데서 불행해지는 가정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다 끊어 버리
고 둘만이 살았더라면 달라졌을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을 봅니다. 처음부터 둘만의 생활을
시작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 부모님들께 늘 이야기합니다마는, 자식들이 결혼을 하거든 얼마 동안만이라도
둘이 살게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처음 몇 년 데리고 있다가 내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리엔테이션이 잘못됩니다.
시작할 때에 거칠 것 없이 둘이서 시작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애초에 남남입니다. 남남끼리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하나가 되기까지는 적어도
3년이 걸립니다.
오늘 결혼했다고 해서 오늘로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데는 적어도 3년은 필요합니다. 아니, 20년을 함께 살아
오면서도 상대의 속을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끼여들어 간섭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눈치 살피랴 시아버지 생각하랴 시누이 신경 쓰랴 하다보니 정작
한 몸인 둘 사이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을 보면 세월이 쌓여 자녀들까지 둔 두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도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더군요. 따라서 두고두고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생을 살
아가는 부부가 상상 밖으로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주위에서는 마땅히 두 사람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어
야 하겠습니다. 신혼여행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필요합니다.
멀쩡한 내 집 놔두고 잠자리도 개운치 않은 낯선 객지로 굳이 신혼여행을 왜 갑니까? 거
치는 것 없이 둘만이 있는 기회 -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니문(honeymoon), 밀월여행(蜜月旅行)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시어머니도, 가깝던 친구도 곁에 없이,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 쓸 일없이
단둘만이 오붓하게 비밀스럽게 시작하라 - 이래서 신혼여행을 보내고 또 가는 것입니다.
이 신혼여행과 같은 분위기가 적어도 1년은 갔어야 되겠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처음부터
긴장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좋은 며느리는 되었지만 마침내 좋은 아내는 되지 못했습니
다.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부모님들은 결코 짝지은 자식을 데
리고 있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로 나가 살다가 아이 낳거든 들어 오라 - 이 정도라
면 괜찮겠습니다.
자식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둘 사이가 자연스레 처음과는 같지 않아집니다. 마음 한쪽이
자식한테로 쏠리게 되니까요. 이때부터는 시어머니든 누구든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도 괜찮
아집니다.
신명기 24장 5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보내
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 결혼하고 처음 1년간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딴사람이 끼여들면 결혼생활의 오리엔테이션이 처음부터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창 2 : 24)"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뿐입니까. "벌
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 : 25)"라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관계입니까?
정신적으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자기의 도리를 다 못했을 때에 생기는 반사작용입니다.
부끄러워 아니하는 관계에는 의무감이 없고 부자유함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한 몸이지요.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는 관계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이것이 본디 가정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는 문제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나니, 일찍이 "내 뼈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창 2:23)"고
하며 한 몸이 되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고 맙니다.
그토록 예쁘게 여겼던 아내 하와를 두고 아담이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
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하고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스스로는 회피하려 듭니다.
보십시오. 가정의 화목은 서로 마주 쳐다보며 "아이 러브 유"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을 때에야 바로 될 수 있는 것이 가정입니다.
아담과 하와 - 이 두 사람, 얼마나 좋습니까? 두 사람뿐이니 곁눈팔아 바람날 염려가 없
습니다. 먹을 걱정이 있습니까, 입을 걱정이 있습니까? 그런 에덴동산에서도 일단 하나님과
의 관계가 빗나가니까 두 사람 사이가 그처럼 원망의 관계로 바뀝니다.
 서로 성격이 맞는다느니 어긋난다느니, 이해성(理解性)이 있느니 없느니, 취미가 맞고 안
맞고 ---- 이런 것은 모두가 난외(欄外)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
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심령으로는 서로가 절대로 바른 관계를 이루어 나
갈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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