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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개혁신앙의 뿌리! (창 15:1-7)

by 【고동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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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뿌리! (창 15:1-7)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기도와 명상과 고행을 통해서 그 영혼을 깨끗케 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봉사하는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로 살아가는 동안 어째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죄를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는 '리얼 신(Real Sin)' 사실적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고 사유재산이 없으니 도적질 할 것도 없고 가족도 없고 또 나아가서 출세니 명예니 하는 그것도 없으니까 인간적 욕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기도, 명상하는 그것인데 그러나 그는 수도원에서 죄로 고민했습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오직 하나 죄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죄, 내 죄, 내 죄, my sin, my sin, my sin 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죄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참회하고 고행을 해도 이것으로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걸 느꼈어요. 그는 당시의 수도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참회했습니다. 명상했습니다. 고해했습니다. 그래 마침내 고해성사라는 게 있지요. 그것은 고해성사 하는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잠시 후에 신부가 나와서 옆으로 비스듬히 앉고 이제 그 귀에다 대고 자기 죄를 자복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고해하는 일을 하루에 스무번도 더 했답니다. 가서 죄를 고하고 돌아와서 또 고민돼서 또 가서 고하고 또 고하고……. 마지막엔 신부가 너무 귀찮아 가지고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그랬다고 그런 전해지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그랬을 거 같아요. 그는 죄로 인하여 많이 고민했으니까요. 아무리 참회하고 고해해도 그 마음속에 진정한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은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회개하고 뉘우치고 뭐 이제부터는 그런 일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가 어디로 갑니까? 자 우리가 빚을 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빚으로 죄를 상징해서, 비유로 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빚을 졌어요. 내가 이 시간에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바로 산다고 한다고 그 빚이 없어집니까?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회개하고 빠르게 고행, 한 평생 내가 의롭게 산다고 몸부림을 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죄를 소홀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미 지은 죄는 죄 대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뭐 어떤 사람이 좀 잘못해 가지고 쫓겨다니다가 10년만에 이제 자수했다면서요? 바로 살겠다고 자수했지만 덜커덕 감옥에 들어가던데요. 이미 지은 죄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죄가 나를 타락시켜서 죄의 결과로 내 속에 타락성이 있다는 것을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지금 바르게 한다 뭘 한다고 몸부림쳐봐야 그건 벌써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의를 논해도 그게 의가 될 수가 없고 공로를 논해도 공로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벌써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성이 무서운 것이에요. 그래서 정욕의 노예가 되고 불신앙의 노예가 되고 때로는 사악한 마음이 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거든요. 아직 큰 죄는 짓지 않는 거 같아도 죄로 인한 변질된 타락한 내 심령 이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죄요. 그런가 하면 미래로 지향하면서 우리는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불신이 있고 불안이 있고 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병이요 그 의심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나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서, 내게 주어진 미래에 대하여 의심이 많습니다. 이것이 곧 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행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수도원의 계율을 지켜 가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루터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답니다. 지금 같이 교통이 편리할 때가 아닙니다. 로마에 한 번 간다는 건 일생의 한 번 큰 순례의 길입니다. 가서 '산타 스칼라'라고 하는 이 성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에 올라가셨다고 하는 그 계단이 있습니다. 28계단이 있는 그 나무로 된 계단, 그것을 콘스탄친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뜯어다가 로마에 갖다 놓고 이 스칼라 산타 성당 안에다가 딱 갔다 놓았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있는데 그 예배당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예배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건물을 지어 놓고는 한 가운데에 그 계단이 이렇게 놓여있습니다. 이천년 된 계단이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계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 사함 받는다, 심지어는 연옥에 있는 죄인도 여기서 기도하면은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당시에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터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계단마다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다 올라가서 보니 아무 해결될 것도 없어요. 이게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더라고. 그 때에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어떤 전광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것 무릎으로 기어오른다고 죄사함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져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이 자체, 이 중요한 교리를 그는 발견하게 되고 벌떡 일어나서 신앙을 조정하게 되고 마침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내 의를 세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는 지난날의 죄 때문에 내가 오늘 공로를 세운다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나 자신의 과거의 죄나 타락된 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디카이오'라고 하는 말,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영어로 '져스티파이(Justify)', '져스티파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고 사회가 잘 되고, 못 되고, 안 되고, 출세하고 못 하고, 오래 살고 못 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 오래 살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잘 살면 뭣하고 못 살면 뭣합니까?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합시다. 적어도 이 고민은 이 고민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입니다. 죄 문제, 이것은 내 죄 문제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그리 애써서 민주화 해 놓고 보니까 소용 있습니까? 그래 요새 어떤 사람들은 글을 씁니다. 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 그럽니다. 왜? 죄 문제가 이렇게 남아 있는 동안 아무 소용없어요. 죄와 부정이 있는데 제도하나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거라고요. 점점 더 혼란의 구덩이로 빠질 뿐이요. 문제는 의! 자 보세요. 그 많은 의! 뭐 정화, 개혁 해봐도 까딱도 하지 않아요. 뭐 3배나 더 한다면서요. 문제는 의의 문제가 남았어요. 우리가 잘 살고 못 살고도 의의 문제요, 죄와 의의 문제란 말입니다. 나라가 견고하게 스는 것은 의(義)지, 사람 바꾸고 제도 바꾼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이제쯤은 깨달아야죠. 문제는 내 마음속에 있는 죄, 자 이 문제요. 죄의 문제는 곧 하나님 앞에 의뢰의 문제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느냐? 하나님의 법 앞에 그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냐? 의의 문제가 있고. 자 이제 이에 대한 해결은 오직 하나, 의롭다함을 얻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나 칼뱅이나 간에 이 분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전승이나 어느 교황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또 얻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었어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성경 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이 '이름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져스티피케이션 바이 페이드(Justification by faith)', 이 문제에 대한 깊은 해답을 바울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것을 흔히 '칭의', '득의' 이런 말로 우리가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내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입니다. 이 의로운 계시를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함으로써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종교 개혁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래 바울에게서 칭의(稱義)의 의를 배웁니다. 루터와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서 또 받아 들였느냐 하면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그 말씀,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치 사도 바울은. 다시 또 하박국 2장 4절에 가서 보면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두 말씀, 두 요절 이 말씀에다가 뿌리를 두고 의롭다함을 얻는 교리를 전제합니다. 이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죄와 저주로부터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게 됩니다. 이 신앙을 그대로 받아서 바울로부터 받아들여서 종교 개혁자의 신앙이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하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동으로 가랍니까? 서로 가랍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전혀 묻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익숙한 곳, 죄악의 도시, 과거, 옛날 생활……떠나라" 믿음으로 떠납니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면 지시하겠다 또 내가 네게 아들을 주겠다 그래서 자자손손 이 축복이 이어지도록 해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나이 75세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납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그래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익숙한 혹은 평안히 살아오던 고향을 그 옛날 생활을 다 버렸어요. 그리고 대모험을 강행합니다.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은 그의 믿음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지만은 일단은 떠났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흉년이 들 때 그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피난을 가버립니다. 그 믿음없는 짓입니다. 아 흉년이 들던, 살던 죽던 이 땅에 머물러야지 왜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떠납니까? 그는 그만큼 나약한 사람입니다. 일단 떠났는데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도 죽을 뻔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마" 했으면 기다려야지. 좌우간 몇 십년이라도 기다려야지. 그는 또, 또 실수를 합니다. 십년 쯤 기다려 보고는 '아 이게 어쨌든 내 종자면 되지 꼭 그 마누라여야만 될 건 없잖아?' 해석이 좋아요. 그래가지고 또 제 멋대로 이스마엘을 또 낳아 놓았거든요. 하나님이 당장 책망하십니다. "그건 아니다 이거야. 그런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네 아내 사라가 낳을 것이다."이거예요.

 


자 그런데 창세기를 자세히 보면은 이제 마지막으로 25년만에, 말씀하신 지 25년, 그가 백세가 되었을 때에 이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그 때 나이, 벌써 자기 부인의 나이는 단산한 지 이미 오랬어요. 90세요. 그것이 생리학적으로는 불가능해요. 생산적으로 볼 때는 로마서 4장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도……."그래요. 죽은 자와 방불한, 생식 능력에 대해서는 내외가 다 죽은 자와 같아요. 이미 끝난 지 오랬어요. 인간의 지식으로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또 믿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시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이미 너무나 많이 실패했잖아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패했고, 믿음 생활에 대해서 실패했고, 너무나 많은 낙심한 잘못된 흔적이 있어요. 이 허물, "하나님, 이미 나는 너무너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믿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가책이 있건만 하나님이 "네게 아들을 주리라"하면 또 "예"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 여기에 훌륭한 데가 있어요.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나 허물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더불어 그가 이 본문 무려 15장을 보았습니다만은 14장에 보면은 그가 나가서 전쟁을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전쟁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단은 승리했습니다만은 그 후속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요. 이제 저들이 다시 동맹해 가지고 쳐들어오면 꼼짝 못하고 몰살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또 믿었습니다. "예, 말씀대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가진 것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또 믿습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그 뿐 아닙니다. 이렇게 믿고 그는 순종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클라이막스적인 얘기가 있지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라" 그럴 때에 그걸 바칩니다. 한 번쯤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이제 이 아들 장가도 가기 전에 이걸 바치라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대답할 만도 한데 그는 하나님께서 "바치라" "그러죠" 그냥 바치려고 듭니다. 그때에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 큰복을 주시고 네가 메시아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을 그 때 말씀하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대단한 믿음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에 그 많은 허물, 그 많은 잘못, 많은 실수 다 덮어 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이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일단 도덕적 의가 있습니다. 내가 선하게 살아서, 진실하게 살아서 의를 이룹니다 만은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어요. 내가 스스로 회개하고 뉘우치고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몸부림쳐도 사실은 지난날의 죄가 그냥 남아 있습니다. 내 회개라는 것,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고로 오직 의롭다함을 얻는 길, 이것밖에는 없는 거예요. 오직 은혜, 오직 긍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요, 전적인 헌신입니다. 순종입니다. 여기에 용기가 있는 것이올시다.

 


인도에서 한 평생을 선교사로 산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라고 유명한 분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69세 때 중풍에 걸려서 보스턴 병원에 입원하고 5개월 동안 있는 동안에 이 책을 썼습니다. 디바인 예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 하는 것이죠,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예" 가 있을 뿐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간호원에게 부탁했답니다. "내가 잠에서 깰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렇게 나에게 말해달라"고. 그는 언제든지 "일어나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어요. 들려져야 된다는 거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는 말씀이 귀에 확실하게 들려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실로 그는 그렇게 듣고 그는 일어났고 그 후 20년 동안을 계속해서 선교사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부하든 가난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게 중요한 거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죄, 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믿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살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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