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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욥기 31장1-22 / 욥의 의와 죄성

by 【고동엽】 2022. 11. 13.
■2021-11-20(토)■
 
(욥기 31장)
 
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7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8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9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10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11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1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
 
13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14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 내 팔이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묵상/욥 31:1-22)


◆ 욥의 의와 죄성


(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욥은 대단한 부자였으며, 존귀한 자로 여겨진 사람이다.
당시에는 그러한 사람은 아내와 첩을 여럿 거느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욥은 그러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 자신은  처녀에게 한눈 팔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어떤 여자에게도 음심을 품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자신이 벌을 받아도 싸다고 선언한다(11-12).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녀조차 자기와 쟁론하려고 하면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며 억누르곤 한다.  그런데 욥은 자기 종이 자기와 쟁론할 때도 그의 권리를 존중하고 들어주었다(13). 만일 그러하지 않았다면 욥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14).


욥은 종에 대해서 그들도 역시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라고 말한다(15). 즉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당시에 이런 사상을 가진 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욥은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고 들어주었으며, 아무 힘이 없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다. 그는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예외 없이 그에게 양털로 덮게 하고 자신을 위해 복을 빌게 했다(19-20).


21절에 나를 도와주는 자란 나를 편드는 사람이란 의미다. 사람들은 자기편이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방자해지고 함부로 힘을 구사하고 싶어 하며 약한 자를 멸시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욥은 일생에 단 한 번도 자기 편의 힘을 믿고 힘없는 고아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 적이 없다.  만일 그랬다면 주먹을 휘두른 그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부서지기를 바란다고 선언한다.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들이 따라하기 힘든 결심이며 실천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라고 하신 이유를 알만하다.


이런 자가 어디 있는가?
정말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욥의 자기 자랑을 듣고 있자니, 무언가 불편하다.
왜 그럴까?


욥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욥보다도 의롭지 못하신 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욥은 정당하건만 하나님은 부당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일까?


욥은 바늘구멍만 한 틈도 없이 완벽하다. 욥은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욥에게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할까?
만일 욥에게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면 욥이 믿을 필요를 느낄까?
대학 시절에 내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자 내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런 은총 없이도 잘 살아왔다. 앞으로도 잘 살 거다"
감사하게도 그 친구도 이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욥은 과연 완벽했을까?
아니다.
인간의 죄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다가 아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란,
살인, 간음, 도둑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그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이 자기가 되는 것.  자신이 건방지게 재판장이 되는 것,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의 본질이다.
 
그런데 욥이 고통을 당하자, 그 원죄의 본성이 나왔다.
욥은 하나님을 판단했다. 인간의 죄성을 드러낸 것이다.
죄성의 뿌리를 드러낸 것이다.  아마도 욥의 고통을 잠시 방치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회개란 이것저것 내가 행한 죄에 대한 자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넘어서서 죄의 뿌리인 원죄에까지 미쳐야 한다.
마귀가 아담에게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간 것은 아담만이 아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그 거짓말에 붙잡혀있다.
 
진정한 회개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
제가 얼마나 함부로 판단하곤 했습니까?
하나님조차도 판단하는 오만한 자리에 앉았었습니다.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게 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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