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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어야 할까3(누가복음 7:43-50)

by 【고동엽】 2022. 11. 13.

예수 믿고 교회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느라면 사람 생긴 모습이 각양인 것처럼 각 각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마태등 함께 예수 님의 제자였습니다만 선생님을 따르고 섬기는 태도나 방법은 각각 달랐습니다.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씩 씩거리며 과속을 일 삼고 끼여들고 추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격이 불 같이 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마치 사나운 짐승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차를 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런 사람들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운전도 세상사는 것도 습관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추월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추월해야 직성이 풀리고 앞서가는 차가 있으면 그 차를 돌려야 안심이 됩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모든 사람을 경쟁 상대로 설정하고 좌충우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 다. 그런 사람들은 말이나 행동이 공격적이고 저항적입니다. 합창음악의 기본 요소 가운데 화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음과 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음과 낮은 음, 굵은 음과 가는 음, 큰소리와 작은 소리 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음악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불협화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화음의 반대 개념입니 다. 정상적 화음을 파괴한 채 제멋대로 어우러지는 음을 불협화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에서 불협화음은 화음을 돕는 일시적 도입이어야지 시작부터 끝까지 불 협화음만 계속되면 그 음악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나 신앙 생활 속에서 계속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류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바울 당시에도 있었고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있습니다. 나쁜 것일수록 전염성이 강합니다. 볼협화음을 만들고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 의 언행은 그 전염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지난주간 2000년 세계 선교대회 최종 마무리를 앞두고 교계 언론 기자 회견을 가졌 습니다. 각 언론사의 기자 32명이 회견에 참석했습니다. 거기 모인 기자들은 한국 교회 언론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질문시간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은 두 종류의 질문으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 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질문입니다. "왜 하느냐, 무엇하러 하느냐, 목적이 뭐냐, 그건 틀리지 않았느냐?" 다른 하나는 긍정적 질문입니다. "성공하길 바란다,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다. 이런 점들이 보완이 됐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어 쪽이 바람직하고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기본인격과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따르고 배우는 모델 이 좋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그 바람직한 모델로 이름 없는 한 여인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26:6-3과 마가복음14:3-9, 요한복음 12:1-8과 누 가복음 7:26-50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신분은 37절이 지적한대로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였다는 것 외에는 밝 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모시고잔치를 벌였는 데 그 집에 초대되지 않은 불청객이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은 과거를 가진 죄 많은 여인이 잔치 집에 초대되었을 까 닭이 없습니다. 주경가 벵겔(Bangel)이나 메이어(meyer)는 그녀의 과거는 창녀였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둡고 추했던 지난날의 삶을 청산하고 그년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믿고 변환된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변했고, 사케오도 변했고, 사마리 아 여자도 변했고 본문의 여인도 변했습니다. 변해야 정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0년 30년 드나들고 목사 되고 장 로 되고 권사 되고 집사 되고 성가대하고 교사하는데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 다. 생각도 그대로고 습관도 그대로고 사는 것도 그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구원받고 성령 받으면 변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변해야 정상입니다. 본문의 여인도 변했습니다. 변해도 보통 변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본질적으로 변했습니다. 1.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본문 37절에서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했고 요한 복음 12:3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근"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그 향유 값은 300테나 리온이었습니다. 300테나리온은 노동자가 1년 간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엄청난 값을 줘야 살 수 있는 향유를 왜 드렸을까요? 협박한일도 없었고 누가 사주한 일도 없었습니다. 38절을 보면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라고 했 습니다. 그녀에게는 남다른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죄에 파묻혀 영혼과 육체가 병들어가 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날 죄사함 받고 구원의 기쁨을 깨닫 게 되었습니다. 그녀로써는 잠을 자도, 잠에서 깨어도 길을 가도 집안에 있어도 그 감동과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이 계시는 시몬의 집을 찾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자신의 사랑을 눈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크면 감동가 감사도 큰 법입니다. 저는 제 남은 생애 동안 두 가지 감격과 감사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죄에서 구속해 주신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려 주신 은혜입니다. 만일 제가 이 은혜를 잊는다면 저는 사람도 목사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뭔가를 드리고 싶고 하고 싶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힘들 때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 생각나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곁에 있었 으면 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기쁘고 즐거울 때, 좋은 일이 있고 좋은 것을 보았을 때 함께 나누고 싶은 사 람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와 주님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까?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습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이 생각납니까? 그렇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 나와 앉아 있어도 주님은 떠오르지 않고 세상생각, 돈 생각, 여자 생 각, 남자 생각만 오락가락 한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단 돈 10만원도 벌벌 떨지만 자신을 위해선 물퍼쓰듯 쓰는 사람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림으로 주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했습니 다. 2.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39절 이하를 보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집 주인이 마음속으로 어쩌자고 예 수는 천박한 여인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가"라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마태복음 26:8을 보면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라고 호통 쳤고 마가복음 14:4을보면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 를 허비하였는가"라며 비난 했습니다. 한마다로 칭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비난만 빗발쳤습니다. 남이 하는 좋은 일을 비난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악한 행동입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을 비난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사단의 공작입니다. 내가 안 하는 것은 자유의사 일 수 있지만 남이 하는 일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비난하 는 것은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녀는 제자가 뭐라 든, 집주인이 뭐라 든, 사람들이 비난하든 상관하지 않았습니 다. 자기 할 일을 했고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귀한 일이 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가 낳은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칼윙(carl stau jung)의 저택 현관문에는 "우리 가 불러 보았든지 불러 보지 않았든지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 다. 무신론자들이 발악을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도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십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일이라면 남의 이목이나 비난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이라면 비난을 겁내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 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워싱턴이 일생동안 지킨 삶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가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 었습니다. 사석이건 공석이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신사적 행동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늘 불평과 불만과 비난으로 사는 한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문채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 었습니다. 듣고 있던 천사가 물었습니다. "누굴 그토록 호되게 비판합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누군 데요?" "이름은 잘 모르지만 얼굴은 아는 사람입니다. 저 거울을 보십시오. 거울 속으로 걸 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저 사람이 꼴도 보기 싫습니다. 탐욕스런 저 입, 독사 같 은 저 눈, 거들먹거리는 저 태도, 툭 불거진 저 배, 도둑고양이처럼 걷는 저 걸음걸 이, 풍기는 저 입냄새,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때 천사는 "잘 보시오 저기 저 거울 속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지 않 소"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맙시다. 비난을 받더 라도 겁내거나 주저하지 맙시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일을 계속합시다. 3. 평안하리라 그 날 그 여인이 받은 은총은 "평안"이었습니다. 50절을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을 행해 가라"는 것과 "평안과 같이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평안을 준다. 그 평안과 함께 영원한 평안을 향해 가도록 하라는 것입 니다. 어떻게 믿었느냐, 어떻게 일했느냐, 어떻게 살었느냐 하는 것은 결과가 대답해 줍니 다. 정말로 예수님을 바로 믿고 사랑했다면 이 여인처럼 평안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 다. 그것이 정말로 주님을 위한 일이 였다면 하고 난 다음, 심령이 평안 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하고 그 은총의 감격 때문에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쳤다면 그 이후 그 마음이 평안으로 충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맡고 일을 해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 할 것입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수 없는 세상이 알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 을 네게 주노라" 이 노래는 요한복음 14:27을 가사로 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평안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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