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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누가복음 11장 45절~54절)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 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 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 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 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 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 라.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지성인에게, 가르치는 자들에게,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잠언입니다.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52절)." 교회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사람 사는 곳에는 지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등을 운위하고 또 말끝마다 평등해야 된다고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는 역시 먼저 된 자가 있고 나중 된 자가 있으며 가르치는 자가 있고 배우는 자가 있습니다. 우선 한 사람의 생애를 놓고 보더라도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께로부터 배웁니다. '아바이 동무'니 '오마니 동무'니 하는 변태적인 사회도 있는 모양이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동무일 수는 없습니다. 자식은 역시 어머니로부터 배웁니다. 아버지로부터 교훈을 받고 자랍니다. 혹 "나에게는 부모도 없다. 나는 누구한테서도 배운바가 없다"라고 교만한 강변을 일삼는 불량 자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그의 모든 것이 배워서 이루어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걸음마부터가 배워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두 발로 걷기를 배웠음으로 해서 두 발로 걷습니다. 짐승의 세계에서 자랐으면 속절없이 네 발로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의 틀(frame of reference : 지각적 또는 논리적 판단 따위의 기준이 되는 틀)이 배워서 형성된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의 입맛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사람들의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있다 없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의 입맛대로 먹는 음식인데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김치가 역시 최고야"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는 김치를 먹고 자랐으니 김치 입맛입니다. 이탈리아사람들은 이탈리아사람 나름으로 길들여진 입맛이 있고, 중국사람들은 중국사람 나름으로 길들여진 입맛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어렸을 적부터 배워온 바에 따라서 나름의 습관이 형성되는 것이요, 이런 습관이 집단습관이 되고 문화화하여 내 생각과 뜻을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다 불행이다 하는 것도 자신이 지니게 된 문화욕구에 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같이 목욕을 해야 하는가 하면 일생에 한번만 목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목욕하는 사람이 일생에 한번 목욕하는 사람보다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 나름으로 그렇게들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목욕 안 해도 불편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배워서 터득된 것이요 배워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배웠음으로 해서 내가 '나'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란 적어도 세 가지의 복을 타고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부모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다면 애 저녁부터 좋지 못한 것만 보고 들으니 불행해질 것이 아닙니까? 실제로 그런 청년을 보았습니다. 육이오 동란 전후의 어려운 때에 서울역 앞 남대문통에 창녀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길을 찾다가 포주(抱主) 노릇을 하게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포주가 무엇입니까? 창기(娼妓)를 두고 영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어린 아들은 자연히 창녀들 틈에서 자라게 되었고, 창녀들을 "언니, 언니"하고 따랐습니다. 그 아이가 보고 듣는 것이라고는 온통 창녀들의 세계였습니다. 애 저녁부터 좋지 못한 것만 견문하고 자랐던 것입니다. 자라나 철이 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고 각성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그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갈등이 너무도 심하여 말을 더듬기 시작하더니 끝내 아주 벙어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만나보았는데,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겠습디다.
자나깨나 그 때 생각이 자꾸 나서 마음을 흐려놓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글씨를 써서 말을 합디다. 이렇듯 사람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면서 자라느냐-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잘 만나는 복을 타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복의 또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에 선생 한번 잘못 만나는 바람에 일생을 망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덕 있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잘 교훈 해 주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잘못하는 것을 사랑으로 다스려주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잘하는 것을 칭찬하되 교만해지지 않도록 훈도 하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각했다고 덮어놓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추운데 헐레벌떡 달려오느라 꽁꽁 언 손을 어루만져줄 줄 아는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이끌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나야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역시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음악을 하면 나도 음악을 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수학을 하면 수학 과목을 싫어하지 않게 됩니다. 선생님을 잘 만난다는 것-부모 잘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복(福)이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타고나야 할복은 배필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하고 남자는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이거, 잘못 만나 살게 되면 일생을 두고 서로가 '웬수'입니다. 그런 원수가 없을 원수입니다. '웬수'도 그런 '웬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 잘 만나는 복, 스승 잘 만나는 복, 그리고 반려(伴侶)를 잘 만나는 복 - 사람이 제아무리 자유 하다고 하지만 이 세 가지 복은 본디부터 타고나는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발전을 하게 마련입니다. 스스로가 쉼 없이 변화를 하게 마련입니다. 몸이 변하고 생각이 변합니다. 행동이 변하고 철학이 변합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해갑니다. 변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곧 배운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배웁니다. 본받고 배웁니다. 배우고 또 배웁니다. 이렇듯 계속해서 바꾸어나가는데, 무작정이 아니라 거기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변화의 방향이 있습니다. 문화의 변화에도 그 지향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상향(上向)이냐 하향(下向)이냐, 고상하게냐 속되게냐--확실히 방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패턴(pattern)이 있습니다. 표준이 있습니다. 너무 급하게 변해도 안되고 너무 느리게 따라가도 안됩니다. 마치 여자들 옷차림의 유행과도 비슷합니다. 한때 미니스커트가 유행할 때에는 모두들 '저런! 저런!'하고 놀랐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유행하더니 다시 '맥시'로 유행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번에는 '맥시'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눈들이 어느덧 '미니'에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만 해도 이렇듯 변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변합니다. 변하는데 마구 변하는 것이 아니라 패턴이 있고 표준이 있고 표본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그 싯점에 분명히 표준이 있고 표본이 있습니다. 이 표본을 바로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을 해야만 뒤떨어지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지도 않게 되어 시쳇말로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변화에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가 있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강력하게 명령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지금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강력한 지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요즘 청소년들, 그들의 생각과 그들 사이의 유행 감각을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많이 지도하고 있는 자의 하나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들입니다. 연예인, 배우들입니다. 그들에게서 배웁니다. 입는 옷을 본받습니다. 동작을 흉내냅니다. 표정을 흉내냅니다. 말을 배웁니다. 연예인들이 청소년들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있음입니다. 무엇을 보고 자라느냐, 무슨 소리를 듣고 자라느냐--표본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이를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사람이란 누구 할 것 없이 이렇듯 큰 물결에 휩쓸려 따라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문제도 그렇습니다. 당시의 종교계를 리드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요 바리새인들이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고난받던 당시의 이스라엘사람들을 이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리드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사람들의 억압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사람들이 믿고 따를 지도자란 저들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랍비를 따라야 했고,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들을 신뢰하고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을 걸고 추종하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본문말씀대로 지식의 열쇠를 움켜잡은 채 스스로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았습니다. 자신들도 바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못 가게 했습니다. 엄청나게 큰 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하고 말입니다. 율법사-lawyer입니다. '서기관(scriber)'이라 하지 않고 'lawyer'고 했습니다.「누가복음」이 이방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었기 때문에, '서기관'이라고 하면 행여 가만히 앉아서 성경 기록만 하는 사람으로 여길까 해서 '율법사'라 고쳐 번역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이란 성경 기록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해설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꾸짖으십니다. 저들의 그릇됨을 세 가지로 지적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저들의 허구성을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 여러분, 무릇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자칫 허구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온갖 규칙을 부과합니다. 율법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준수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것해라 저것 해라하고 쓸데없이 자꾸 부과합니다. 잔소리가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부터 지켜야 될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율법과 율법주의는 별개입니다. 저들은 사람을 율법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은 어디까지나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느냐 하십니다. 어디까지나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자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가 되면서 율법 지상(至上)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위하여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돌아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그 같은 현상을 흔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할 때에 교회에 나오는 것과 예수 믿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겠지요. 마는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다 믿는 사람이더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을 동일시해버리려고 할 때에 때로는 그로 말미암아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선한 일을 해야 하고 또 그리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 이야기합니다마는 교회가 구제를 할 것이나 구제하기 위하여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었고, 또 모든 사람을 율법 기준에서 평가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히 중심이 되는 것은 상실하고 주변적인 것, 지엽적인 문제가 너무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운데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요, 내 영혼이 중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일은 치지도외(置之度外)요 나가서 전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어느 결에 그만 전도가 율법화 하고 봉사가 율법화 하고 말아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실 때에도 반드시 중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심 사상이 중요한 것이지 지엽적인 것은 그 다음의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취급될 때에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저버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엽적인 문제가 너무 강조되면 중심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앙이 잘못되기 쉬운 것은 이같은 성향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들은 그렇게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져버린 나머지 가공하게도 저들 자신이 만든 규례를 신앙의 척도로 삼으려들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규례를 지켜서 교만하고, 못 지킨다고 멸시하고, 자기도 못 지킴으로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는 자기편의대로 해석을 해서 두 가지의 부정적인 국면으로 갈라집니다. 위선자가 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못 지키면서도 지키는 척하려고 합니다. 속으로는 지킨 바가 없어도 겉으로는 지키는 척합니다. 실제로는 선행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는 척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해서 음식대접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잔치를 벌였어요.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마을의 존경받는 유지인 만큼 이 마을에 찾아온 훌륭한 선생님은 의당 내가 모셔야지'-예수님을 대접할 마음에서가 아니라 자기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함으로 자기 위상을 격상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입니다. 오늘도 이런 형식주의, 이런 위선자는 득실득실합니다. 선행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함도 아니요 그리스도를 위함도 아닙니다. 선행합네 하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런 성향을 '도덕적 향락주의'라고도 말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사랑에서 행함도 아니고 하나님 생각을 해서도 아닙니다. 내 마음의 갈등에서, 어떤 심리적 보상을 위하여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사는 것을 즐겨요. 심리적 쾌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참으로 선이 있어서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문둥병자들과 일생을 같이 삽니다. 그 분에게 한번은 제가 진지하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참 대단하십니다.
교회에 가서 일할 수도 있는데 이 문둥병자들에게 와서 이렇듯 여러 해를 수고하고 계시는군요." 존경하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려보았는데 그분은 진실하게도 오히려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 사는 것이 마음 편해서입니다." 그러더니 퍽 심각하게 말을 잇습니다. "사실은 제가 일정 때에 신사참배를 했었거든요. 그러면서 목사를 했어요.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보니 너무도 부끄러워서" 더는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다 싶어서, 어떻게 하면 내 여생을 이제 하나님의 일 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 끝에 문둥병자들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분의 이 선행은 진실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형식적인 선행을 보고 참선행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못 지켰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지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굉장하게 지켰어요. 지키는 척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일삼고 선행할 때에 나팔을 불면서 했습니다.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구제한다'라고 광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선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두고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이 여리고 가는 후미진 길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에 쓰러져 있었다면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을 리가 없다, 아무도 안보는 곳이니 선행을 해보았자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이렇게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니 그 모양이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한, 내용은 없습니다. 거짓, 위선에 빠지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선행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아주 비밀한 가운데에 하는 것이라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그렇듯 위선으로 율법을 거역했을 뿐 아니라 또한 탈법으로 율법을 거역했습니다. 율법 자체를 교묘하게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해버려요. 자기들에게 맞도록 해석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남들도 하라 하고 자기가 못하는 일은 숨긴 채 말도 없습니다. 율법 자체를 왜곡합니다. 탈법인 것입니다. 이래저래 저들은 일반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습니다. 율법의 문을 좁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좁히고 좁혀서 사람들로 지레 손들어버리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아주 쉽게 지키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 그러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길을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렵게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들었어요. 조금만 죄를 지어도 벌하시는 하나님으로,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하시는 하나님으로, 무서운 하나님으로, 폭군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 떠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천국 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옛 조상들에 대해서도 늘 비난을 합니다. 우리가 그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를 안 죽였을 것을, 아, 그 나쁜 사람들이 선지자를 죽였구먼 -- 이러면서 죽은 선지자들 무덤을 장식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하기는 잘하면서 오늘 찾아온 선지자를 핍박해요. 이런 위선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오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과거사가 아닙니다. 예언 그대로가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옛날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그 말씀이 주는 오늘의 의미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과의 사이를 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오늘도 보면 성경말씀을 해석해주되 나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와 닿도록 잘 해석해준다면 그 누가 성경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말씀을 옛날 이야기로만 치부한다면 나하고는 아주 멀어지는 말씀으로 되고 맙니다. 그래서 다시 읽을 마음이 없어집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저들은 결국 천국 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잘못 해석하면서 바른 해석을 멀리했습니다. 저들 나름대로 율법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해석을 저버렸습니다. 사람들로 예수 못 믿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본질은 버리고 외형적인 것만 취했습니다. 은혜적인 것은 빠뜨리고 율법적인 것만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을 먼 하나님이요, 무서운 하나님이요, 진노의 하나님이요, 쳐다볼 수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천국 문을 막은 것입니다. 기득권을 이용해서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대중의 신앙을 막았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게 되었으며 하나님 상(像)이, 하나님의 하나님된 모습은 왜곡되어 무서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탕자 비유를 보십시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돌아오는 그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 그러한 사랑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설명하시지 않습니까?
본문말씀을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해봅시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나 하나가 예수를 바로 믿고 은혜에 충만할 때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천국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 교인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십니다. 같은 아파트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 자기보고 예수 믿으라고 열심히 권하더랍니다. 하도 간곡하게 권하기에 '거 참 이상도 하다. 내게는 예수 믿는 친구가 그렇게 많은데도 어느 하나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친구는 없었는데 이웃집의 이분이 날보고 예수 믿으라 하는구나' 생각하고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 한 번 못 들어주랴!' 싶어서 "한번 나왔다 붙들렸어요"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해주었어요. "그 실수는 잘한 실수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한번은 신실한 기독교인을 만나고야 예수 믿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은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아직 예수 믿지 않았을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을 늘 만나고 살았는데 그들이 하나같이 못돼먹었다면 예수 믿을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이 신통찮아 보였어도 그 중의 한 사람이 참 좋아서 나도 저런 사람처럼 되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면 결국은 그 사람 따라서 예수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어디로 변하느냐 하는 것은 나를 인도하는 그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한 집에 오래 못산다고 합니다. 자주 이사를 다닙니다. 강남 갔다가 강북 가고 개포동 갔다가 압구정 왔다가 후조(候鳥)처럼 나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집에서 3대를 눌러 사는 집안은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 안 믿을 가능성이 85퍼센트라는 이야깁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라서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대요. 그에 비하여 3년이 멀다하고 이사를 다니는 사람은 전도하면 예수 믿을 가능성이 90퍼센트라고 합니다. 이사를 합니다. 새 집으로 왔으니 도배도 깨끗이 하고 분위기도 바꾸고 이제부터는 이웃들과도 좀 기분 좋게 살아보자-이렇게 새로운 기분이 생깁니다. 이렇게 막 변하려고 하는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니 잘 먹혀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moving people'이니 'moving area'니 하는 말이 생겼습니다. 움직이는 사람, 움직이는 지역이 전도가 잘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새 같은 사회에서는 더구나 사람의 마음이 잘 변하지 않습니까? 쉼 없이 변하는데, 어디로 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opinion leader'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잘 믿는 사람이 인도하면 그 사람 따라 잘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디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천국에 들어가면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들어가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성경을 보면서 "당신도 성경을 봅시다", 내가 교회에 나가면서 "당신도 교회에 나가십시다"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런 사람을 안 믿는 사람이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소문은 났는데, 나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합니다. 남들이 "나 저 사람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언젠가 한번 제가 상점에 들어가 보고 목도한 일입니다. 물건을 사는 사람이 주인과 서로 아는 사이인가본데 물건을 있는 종류대로 다 꺼내놓고는 이것 만졌다 저것 만졌다 하는가 하면 이건 얼마요? 저건 얼마요? 깎읍시다, 더 깎읍시다, 비싸다 좋잖다 하고 지겹게도 왈가왈부 흥정을 하더니 끝내는 안 사고 나가버리는 거예요. 주인은 내가 목사인줄을 모르고 방금 나간 그 사람을 두고 한바탕 욕을 하는데 왈, "저런 게 다 집사네 뭐네 하는 판인데 내가 미쳤다고 교회 나가?"---저는 호되게 한대 얻어맞는 것만 같았습니다. 낯이 화끈거려 애먹었습니다. 여러분, 그까짓 돈 몇푼 손해 좀 보십시다. 내가 못 들어가면서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자녀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특별히 주일날은 절대로 자녀를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아이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하더라도, 싸우고 터지고 하더라도, "내가 오늘은 참는다. 너희들을 되게 혼낼 일이다마는 주일날이니까 참는다" --- 이렇게 좀 해주십시오. 그래야 "아! 주일날은 좋은 날이구나"하고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오늘은 예배당에 갔다왔기 때문에 너희들을 용서하겠다" 해보십시오.
그러면 "아! 예배당이란 그런 곳이구나" 할 것이 아닙니까? 예배당 가는 날에 여느 때나 다름없이 무섭게 군다면 자녀들에게 천국 문 닫아주는 꼴이 됩니다.
여러분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 문간에 딱 막고 서서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런 부모, 이런 이웃, 이런 선생, 이런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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