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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로 인한 소동(사도행전 19:21~4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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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로 인한 소동(사도행전 19:214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 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오늘의 본문 23절에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삼 년 동안에 얼마나 큰 핍박이 있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는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사도행전에는 없습니다. 비교적 큰 핍박은 없는 것처럼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2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시아에서나 아가야 근방, 한마디로 말하면 고린도와 에베소 일대에서 되어졌던 일을 총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보아서 많은 고난이 있었음을, 여러 번 감옥에 갇힌 일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지역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몇 곳을 거쳐서 로마로 가고자 합니다. 로마까지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계획하고 경영하려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큰 핍박의 사건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바울의 전도 여행이란길이 열리는 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큰 핍박이 있을 때에 그 도시를 떠나기까지도 하면서 전도 여행의 여정을 결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순리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핍박이 없이 복음의 문이 열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결정적인 큰 핍박이 있을 때에도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순경(順境)이건 역경(逆境)이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섬세하게 온유 겸손하게 따라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자주 보는바 주의 뜻이면 가리라, 주의 뜻이면 오리라, 한 말씀에서 '주의 뜻'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말씀은 그같이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벌써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간에 아직은 떠나지 못하고 있는 터에 결국은 떠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큰 핍박이 있었어요. 위험한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는 이것을 계기로 에베소를 떠나게 되고 결국은 여러 곳을 거쳐서 로마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여기서 도()란 곧 기독교의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호도스한문으로 쓰면 길 도()자입니다.

'이 말씀', '이 그리스도의 교리'라는 말씀입니다. 적지 않은 '소동'이라고 표현됩니다마는 쉽게 말하여 핍박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큰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모든 것이 무사하고 태평하고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마는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무사하고 핍박이 없는 때보다는 핍박이 있고 사건이 있을 때에 더 하나님의 역사는 활발하게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고 있습니다. 소동이 있었다이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말씀의 능력도 있고, 동시에 그 능력을 입증하는 많은 이적도 있었어요. 이렇게 됨으로써 복음의 역사가 흥왕 했다는 것입니다. 크게 부흥했습니다. 이 때문에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어느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소수 집단의 행동이라면 핍박이 없지요. 기독교로 말하더라도,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한번 중심으로 생각을 해봐도 그렇습니다. 저 갈릴리 한 해변이나 가버나움이나 가나 같은 데서 몇몇 사람이 모여 되어졌던 사건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죽어야 될 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고,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수십만 명의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일제히 예수를 따르게 되니까 사건이 커져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소수 집단으로 머물러 있으면 내버려둘 수 있어요. 굳이 핍박할 것 없지 않습니까? 핍박하는 자도 편안할 일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가 흥왕하고 부흥되기 때문에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수 집단, 소수 공동체로 머물러 있다면야 핍박이 없어요. 온 서아시아, 온 아가야 근방으로 기독교가 계속 크게 확장되어가고 있으니까, 이렇게 대집단으로 나타나게 되니까 핍박이 있었다 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복음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기독교가 나타난다면야 핍박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기독교를 전하면서 예수 믿어도 좋고, 불교 믿어도 좋고, 유교 믿어도 좋고, 조상 제사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하루는 절간에 갔다 하루는 교회 오고, 하루는 무당 굿하는데 갔다와도 괜찮다, 주일날 교회에만 나오면 된다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합시다. 무슨 핍박이 있겠어요? 그래서 가끔 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소의 지성인의 어리석은 비판을 들을 수가 있어요. 아주 다종교적, 다원종교적인 평판을 들을 수가 있어요.

참 이상하다, 종교라는 것은 다 같은 것인데, 불교를 하든 유교를 하든, 석가모니를 따르든 예수를 따르든 저마다 따르고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거지 어찌하여 기독교는 저희만 옳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무시하느냐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별나다는 것이지요. 종교적 대화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이런 것도 기독교가 핍박받는 이유가 됩니다. 기독교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는 종교가 아니예요. 오직 기독교만 종교이지요.

오늘의 본문에 크게 나타나고 있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그것은 사기치는 것이다이렇게 몰아붙이니 핍박이 없을 수 없잖아요? 다른 종교도 인정을 해야 되는데 인정 안 해요. 절대로 인정 안 해요. 오직 기독교만이 그 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것입니다. 절대성 때문이지요. 오늘도 생명력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적당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는 많은 박해 속에서 순교적 신앙을 지켜온 종교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기독교의 신앙, 성서적 신앙 외에는 절대로 어떤 것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예수께서 돌아가신 그 이후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그 교리와 신앙에 있어서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흔히 다원 종교니, 다원 시대니 이상한 말을 합니다마는 이것은 교회 안에 도전해오는 무서운 신학사조요 이단사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손으로 만든 것, 그게 무슨 신이냐, 그것은 아니다절대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생명력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누룩과 같아요. 지금 기독교인이 몇 사람 있는데, 여기서 머무르고 만다면 무엇 때문에 핍박을 하겠습니까? 핍박해야 될 이유가 뭔고 하니, 그대로 놔두면 온통 기독교인이 될 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 핍박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자신들이 기독교를 알고 있어요. 기독교라는 것은 놔두면 걷잡을 수없이 퍼져 나아가서 마침내는 공산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래저래 핍박하려고 애쓰는 것은 기독교의 폭발적인 생명력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막을 수 없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어온 세계가 다 복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핍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핍박이라는 것은 생명력과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핍박이 없다면 그 사람 멍청하게 믿는 사람입니다. 핍박을 안 받았다면 그 사람 적당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뒤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얘기합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으리라." 경건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손해보게 되어 있어요. 핍박당하게 되어 있어요. 핍박 없으면 이상한 일이지요. 핍박, 당연히 있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바른 신앙에 대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요한 웨슬리가 전도로 생명을 삼아 전도하는 사람인데 하루는 말을 타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 며칠 동안핍박을 받지 못했거든요. 그는 깜짝 놀라서 말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짓고 있나요? 왜 핍박이 없을까요? 제가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까?"하고 소리를 내서 기도했더니, 옆 사람이 시끄러웠던지 요한 웨슬리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을 맞고는 다시 우러러보면서 ",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젠 되었습니다"했습니다. 핍박은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무사태평하다면 뭔가 잘못된 거예요. 기독교인답지 않아요. 성서적이지 못해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개인적으로 받은 경험을 보아도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버려야 될 것이 있어요. 사회든 민족이든 국가든,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받는 대신에 버려야 될 부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옛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옛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옛 종교를 버려야 합니다. 특별히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수속을 버려야 됩니다. 잘못된 공동체에 속해 있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떠나야 합니다.

여전히 옛날 친구 그대로 만나 가지고는 신앙생활 바로 할 수가 없어요.

가만히 보면 예수를 믿으려고 애쓰면서도 술친구가 있어요. 이 사람하고 관계를 끊어야 신앙생활이 되겠는데, 여전히 만나고 있거든요. 그래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바로 설 수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아까운 것이라도, 아무리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라도, 아무리 소중히 여기던 것이라도 이젠 냉정하게 끊어야 돼요. 이것이 없이는 안돼요. 여기에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얼마간의 손해를 보아야 돼요. 이런 의미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본문을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라는 신이 있어요. 신상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의 이름입니다. 헬라사람의 이름으로는 아데미신이고, 지금도 그 신상이 있어요. 라틴어로는 '다이아나'입니다.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 신화상 족보를 살펴보면 제우스 신과 레토 신 사이에 태어난 아폴로와 쌍둥이인 딸입니다. 그리고 주전 560년 때부터 건립된 엄청난 신전이 있어 뒤에도 몇 번 복구해놓았습니다. 나무로 만들어놓은 엄청난 신상이 있었는데 이 신상은 저들이 생각하기로는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둥실둥실 내려와서 머물렀다그렇게 전해지는, 자기네 눈으로 볼 때에는 엄청나게 큰 신상인 것입니다. 지금의 신전의 돌기둥만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신상을 작게 모형으로 만든 것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신전에 와서 경배를 하고 제물을 바치고 돌아갈 때에는 이 작은 모형을 사 가지고 가요. 그것을 자기 집에 갖다놓고 섬기는 거예요. 이 모형 상자가 제법 짭짤해서 '전매특허'를 냈어요.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은장색 신상 모형이며 부적을 은으로 만들어서 파는데 관광객들에게도 팔고 경배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팔아요. 큰 돈벌이가 되었어요. 본문에 보니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은장색 총 책임자예요. 이 일은 대영박물관에 있는 고전 문서에도 나옵니다. 이름이 있어요. 데메드리오라는 이름이 그만큼 역사적인 인물이예요. 데메드리오 밑에 은장색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이 다 그 업으로 인해서 잘살았거든요.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25)"하고 데메드리오는 말합니다. 사실이 그랬거든요. 그런데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장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당연히 신상에게 경배를 드리지도 않고, 그 물건도 사지 않고…… 그러니까 장사가 안 되는 거예요. 이래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입니다. 종교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아데미 신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던가 경홀히 여김이 아니냐 하지만 문제는 돈이예요.

또한 도덕성도 안중에 없어요. 자기네한테 돌아오는 이득만 생각했지, 이것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얼마나 우매해지고 어리석어지고 우상을 섬기면서 바보가 되는지, 백성에게 끼치는 좋지 못한 영향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기네가 돈버는 것, 그것만 생각하다가 이제 손해나게 되니까 소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냉정함이 없어요. 아무리 과거에 그랬다 하더라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때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만들고 있는 자기들은 알고 있잖아요.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떠들고 있고, 그렇게도 우매한 사람들이 믿고, 절하고, 경배 드리고, 제물 드리고 있지마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잖아요? 만든 사람은 알고 있잖아요? 자신들이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이 일을 고집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냉정을 찾아야지요.

맞아, 사람이 만든 것이지,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가짜지, 이것은 신이 아니지이제는 사도 바울의 말을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해야 옳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끝까지 신이라고 강변하고, 위엄이 어떻고 능력이 어떻고 권세가 어떻고, 쓸데없는 소리를 합니까? 가만히 보면 냉정함이 없어요.

우스운 얘기입니다 마는 제가 한번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어떤 집에 보니까 제사를 지내는데, 일 년 동안에 22번 드린다고 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예수 믿으면서도, 그만둘까 하다가도 안 하면 뭐가 잘못될 것 같아서 계속하는 거예요. 제가 한번 찾아갔어요. 얘기를 해봤습니다.

일단 이렇게 유도했어요. "그것 22번하지 말고 한 번만 합시다. 그래야 귀신들이 서로 만나서 인사도 하고 할 것 아닙니까? 그것 따로따로 하니까 왔다갔다하느라고 귀신들도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그러네요. 그 참 그러네요." "그럼 한 번만 합시다." 그러고 나오는데 "아예 그만둘 랍니다"합니다. 사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냉정한 사람은 아니예요. 제사그게 어떻게 효도의 길입니까? 도대체 20세기를 사는 사람의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저들도 다 듣고 있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맞는 얘기지요. 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맞는 얘기임을 압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본인들부터가 알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무리 오랫동안 어리석은 일을 해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했어요. 오히려 이일로 인해서 소동을 일으켰어요.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로 인해서 2시간동안을 얼마나 소동했는지 아주 데모대가 되어 가지고 연회장으로 갔다 합니다. 25천 명이 들어가는 연회장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 큰 연회장에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시끌댑니다. "크다 에베소사람의 아데미여(28)"하고 외치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재미있게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32절에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 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군중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왜 모였는지 모르고 떠드는 것입니다. 떠드니까 떠드는 거예요.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일본사람들 정치할 때에 외아들을 군대에 내보낸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이 어머니는 까막눈이라 편지를 읽을 줄 몰라요. 그래 길거리에 나가 멀끔하게 생긴 청년을 붙들고, "이 편지 좀 읽어주오. 내 아들에게서 온 거라오"하고 부탁했더니 그 청년이 편지를 펴들고는 보는 척하더니 자꾸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 생각에 '아들이 죽었나? 무슨 어려움을 당했나?' 싶어 어머니도 자꾸 웁니다. 청년도 자꾸 울어요. 지나가는 사람도 그 옆에 멈춰서서 울어요. 몇 사람이 울게 됐어요.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왜들 웁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그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사연을 털어놓는데, 부모가 공부하라고 할 때에 공부를 안 했어요. 편지를 읽으려고 하니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 부모님 말씀 안들은 것이 생각나서 지금 회개하느라고 울었어요. 어머니는 편지 내용도 모르고 아들 죽은 줄 알고 울었고, 또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부터는 울어야 되는 줄 알고, 우는 장소인 줄 알고 울었대요.

원래 군중이라는 것이 그런 데가 있습니다. 2시간을 열심히 떠들고 했지마는 왜 모였는지, 왜 떠들었는지, 자신들도 몰랐더라는 거예요.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소란을 떨다가 마지막에 서기관들이 이럴 필요가 없지 않느냐, 무엇이 잘못됐느냐, 냉정해보라, 이렇게 되면 로마사람들에게 보고를 해야 되는데, 로마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소동이 아니냐, 질서를 지켜야 한다, 이러다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인즉 이러지 말자, 해서 흩어지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바울 대신에 끌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들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14절이나 로마서 1623, 골로새서 410절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다 사도 바울을 따라 일한 동역자요 소중한 분들입니다. 결국은 이분들이 바울 대신에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왜 바울을 잡아가지 않고 이 사람들을 잡아갔는지 추측컨대 바울은 로마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바울의 수종자를 먼저 잡아가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아무튼 본문에서 생각해야 될 문제가 뭐냐 하면 이렇게 핍박을 받는 때에 침묵했다는 것입니다. 아무 말이 없어요. 때리면 맞고, 끌어가면 끌려가고그뿐이에요. 사도 바울이 미안해서, 자기가 가만히 있으면 배신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연회장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를 말리는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분들은 말없이 온유 겸손하게 그 핍박을 다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모니카라는 여선교사가 중국 어느 마을에 가서 선교를 했는데, 그 마을에는 유달리 점쟁이가 많았대요. 점쟁이들, 돈을 많이 벌다가 선교사가 설교하면서 점은 가짜다, 사기치는 것이다 하고 가르치니까 점쟁이 영업이 안됐어요. 그 점쟁이들이 분노해 가지고 감자를 가지고 오더니 설교하고 있는 선교사를 향하여 집어던졌어요. 돌로 때리면 피가 날까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게들 핍박을 가했어요. "양돼지는 너희 나라로 꺼져"하고 소리치면서 던졌습니다. 그 버려진 감자를 다 주워 가지고 선교사는 머물고 있는 집 마당에 심었어요. 그랬더니 감자가 많이 거두어졌어요. 이걸 다 모아 가지고 점쟁이네 집에 갔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던져준 것을 심었더니 이렇게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선교사의 얼굴이 너무도 깨끗하고 티가 없어서 그 점쟁이들이 오히려 돌이켜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핍박을 당할 때에는 어떤 곤욕을 당하든지 이유야 있건 없건 따질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말미암았고, 또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더 크게 이루어질 것이고, 이런 소동이 있음으로 해서 사실은 복음이 더 크게 전파되게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어요. 복음의 절대성도 나타나고 그 참됨도 여기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초연했던 것처럼 모든 핍박 속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을 초연하게 잘 극복하고 이기고 참고 견디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른 신앙을 찾아가는 길에 반드시 핍박은 있다는 것입니다. 손해도 있고요. 손해보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부득이 그러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하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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