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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신앙(사도행전 23:11~26)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들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생을 합니다. 재판도 받지 못하고 죄명(罪名)이나 죄목(罪目)도 정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이 무작정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기 때문에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은 지금 억류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법을 어겨가면서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바울을 없이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 일은 전에도 가능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바로 그 재판정이고 자기네가 그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 때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이 사람들이 왜 예수를 죽였으며, 왜 스데반을 죽였으며, 이제 와서는 왜 바울까지 죽이려고 하는지를 모릅니다. 또 자기가 알 바도 아닙니다. 다만 소동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가 상황판단 하기로는, 바울을 내놓으면 분명히 그는 찢기어 죽습니다. 바울을 내놓기만 하면 좌우간 어디서든 그를 죽일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문에 그는 바울을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최선책입니다. 만약바울이 죽임을 당하게 되면 그를 죽인 자를 찾아야 하고, 죽인 이유를 알아야 하고, 일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그러므로 이곳의 질서를 맡고 있는 천부장의 입장에서는 바울을 무사하게 보호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문 안에 바울을 가두게 된 것입니다. 더우기 천부장은 유대사람들의 큰 소동도 보았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살기를 느꼈습니다. 꼭 죽이겠다는 결심을 눈빛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유대사람들의 난동을 통해서 바울을 꼭 죽이겠다고 결심한 모습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바울이 지금 당하는 고난은 부당한 것입니다. 불합리하고 불의한 것입니다. 특별히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바울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이방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를 전하다가 매를 맞은 때도 많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때도 많았고, 사자 굴에 들어간 일도 있었습니다.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그런고로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담대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숱한 곤욕을 고스란히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얘기가 다릅니다. 여기는 예루살렘입니다. 동족에게 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입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이 박해를 당할 때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동족에게, 그것도 같은 종교를 가졌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이니까요. 지난날, 그 역시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까? 옛날에는 다 동지들이었던 그 사람들에게 이런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빌립보 감옥에서 죽어도, 에베소에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동족에게 맞아죽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너무나도 슬픈 노릇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로마서 9장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내가 그리스에게서 끊어질지언정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지도자가 지금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려 합니다.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모순입니다. 이래서 그는 고민합니다. 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불편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그는 마음이 몹시 상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날 밤에(11절)"-이 어려운 소란이 있은 다음에 그날 밤으로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담대하라(11절)"-두려워하지 말아라, 떨지 말아라, 이상할 것 없다, 담대하라 하심입니다. 둘째는 네가 로마에 갈 것이다. 그토록 간절히 가기 바라는 로마에 무사히 갈 것이다, 하십니다. 셋째는"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11절)"-네가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게 되리라, 하십니다. 이것은 위로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왜 바울이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왜 죽이려고 한다는 말도 없어요. 그러나 바울은 알고 싶은 거예요. '왜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는 것입니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바울이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일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묻지 마세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실 테니까-우리는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시니까-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 다 알겠다고 그러지 마세요. 너무 알겠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네 곁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십니다.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로마에 갈 것이다. 하시면서도 '어느 달 어느 날에가는 것입니까, 어떤 길로 가는 것입니까, 무슨 배를 타고 갑니까,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로마로 가리라는 것입니까?-이에 대해서 일체 설명이 없어요. 사실은 이 말씀이 있은 2년 후에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가서,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게 될는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리라, 그런 줄 알고 그 이상은 묻지 말아라, 알려고도 하지 말아라-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궁금증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어요. 그의 이성 속에는 아직도 비판이 많고 의심이 많아요. 생각이 많아요. 질문도 많아요. 그러나 한마디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야, 그런 줄 알아라-참으로 확실한 말씀이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순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일차적으로 로마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로마로 가는 길이 보인다고 여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 표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로마로 가게 되는 과정(process)의 하나로, 바울은 더 큰 핍박을 받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실 오늘의 본문의 하나의 이야기처럼 되어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인하여 마침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는 길이 꽉 막혀 있으므로 로마로 통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릇 비스듬히 열려 있으면 세월이 오래가는 법입니다. 꽉 막혀야 다른 길로 가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당하는 이 일이 아주 꼬이고 도저히 펴지지 않고 아무리 애써봐도 꽉 막혀 있는 그 때에 다른 문이 열립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일이 잘되게 해주세요'-그러나 열심히 기도했는데 안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돼요. 그렇게 일이 뒤틀리다가 마지막에는 꼬여서 다 끝나고 맙니다. 이제 하늘을 쳐다보세요. 이스라엘사람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혔거든 이제는 위를 보라"-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막았느냐, 위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과정이 이렇게 복잡해요. 이렇게 해서 그가 로마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송별회하고, 환송회하고……그러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배에 실려서 로마까지 갑니다. 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리라 하셨지만, 바울이 로마의 원형극장에 서서 수만 명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요. 조용하게, 친위대원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삼백 년도 못 가서 대로마제국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분명히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해버리고 말았어요.
로마에 가보면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의 굉장한 문화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 문화에, 기독교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거예요. 또 그곳에 유명한 그림이 있지 않습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왕관을 벗어서 베드로에게 바치는 그림입니다. 무릎을 꿇고 바칩니다. 곧 나라를 바치는 거예요 자, 이제 보세요. 한번의 전쟁도 없고, 한번도 충돌도 없이 대로마제국이 결국은 사도 바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난의길, 알 수 없는 엄청난 수난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는 로마로 가리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첫 단계가 뭐냐,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는 꼼짝못하고 죽게 생겼어요. 그래서 가이사랴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그를 자꾸 죽이겠다니까 아무리 기회를 봐서 놓아주어도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로마로 가게 됩니다. 자, 바울은 이렇게 해서로마로 갑니다. 참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신비로운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악과 하나님의 경륜, 사람의 음모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놀랍고도 신비로운 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벌과 꽃을 생각해봅니다.
벌이 날아다니면서 꽃에서 꿀을 빨아들입니다. 아마도 꽃에 입이 있다면 이렇게 한마디 할 것입니다. "이 나쁜 놈아, 너는 날강도로구나! 대낮에 남의 집에 들어와서 꿀을 다 훔쳐가다니……" 하지만 벌이 꽃에서 꽃으로 옮겨다니면서 꽃가루를 묻혀놓기에 꽃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농약을 너무 많이 뿌려서 벌이 다 죽는 바람에 사과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붓으로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에 발라서 과수원 농사를 했다는 얘기를 어느 기록에서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벌이 있어야 해요. 나비가 있어야 해요. 없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악이 왜 존재하는지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 왜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두고 보세요. 먼 훗날에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이 일이 왜 있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요., 신비로운 우주적 구원의 사역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악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야바와, 안나스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심지어는 헤롯당까지 몽땅 합세하여 만든 하나의 걸작품입니다. 악의 승리요, 악의 극치요, 불의의 최고조(peak), 절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 저들은 성공했다고 여겼을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겼다, 예수를 죽였다, 하고 만세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들은 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주적 진리입니다.
자, 이렇게 우주적인 놀랍고 신비로운 경륜을 보고, 그 속에서, 그 빛 속에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보세요. 그러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13절에 보니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사람이 40여 명 있었답니다. 살리기로 맹세했다면 모르겠지만 죽이기로 맹세한 사람은 참 한심한 사람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극렬파요, 극단주의자요, 폭력배요, 깡패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고용된 것 같아 보입니다.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갑자기 무슨 열심이 생겼기에'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난 먹지 않겠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 이렇게 미루어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이들은 벌써 대제사장으로부터 바울을 죽이라고 하는 지령을 받은 것 같아요. 마치 가룟 유다가 제사장으로부터 은 30을 받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듯 몇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쳤어요. 소동하는 가운데 바울을 죽여야 했는데 못 죽였다는 말입니다. 이미 여러 번 기회를 놓쳤어요. 이에 제사장이 대노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하는 것들이야? 돈만 받아먹고!" 사정없이 책망을 하게 되니까 이제 이런 맹세까지 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번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물어볼 것이 있다 하고 바울을 불러내 주세요. 산헤드린 공의회까지 오는 동안에 숨어 있다가 틀림없이 없애버리겠습니다. 만일에 없애지 못한다면 저희가 죽겠습니다." 그래 본문에 보니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12절)"-과연 이 사람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저는 궁금해요. 맹세했으면 맹세한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바울을 못 죽였으니, 그가 로마까지 가버렸으니 그 사람들은 분명히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쓸데없는 맹세를 한 것입니다. 맹세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만일 내가 이 일에 실패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이것을 실천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시기를 원합니다'하고 손을 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게 맹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보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 하니 꼭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게 아니예요.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기"-좌우간 바울을 못 죽이면 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이요, 대단한 극단주의자들이요, 악당입니다. 아마도 대제사장과의 약속이 여러 번 빗나가고 실천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많은 추궁을 받았기에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이번에는 꼭 실천하겠습니다'하는 그런 의미의 맹세였던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이들은 하나님께 충성할 생각은 못하고 대제사장에게 충성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사람에게 충성하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에게 충성을 하고, 그의 교훈에 충성하고, 그의 교리에 충성했어요. 그가 설명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바울을 없애는 게 진리요,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함을 위하여 바울을 죽여야 한다-이 말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에게 충성하고 대제사장이 설명하고 있는 교리에 충성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자기만의 이득이 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에게 은 30이 주어진 것처럼 이 사람들에게도 얼마간의 돈이 주어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사대로서 맹세를 합니다.
자, 이제 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것을 신앙의 행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날에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이 선지자를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있어요.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입니까? 살인이라는 악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합니다. 무서운 생각입니다. 무릇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어떤 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충성된 행위라고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여기에 음모가 주어집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왜 정당하지 못하고, 왜 당당하게 행하지 못하고 음모를 꾸미는 것입니까? 천부장에게 '바울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한번 더 공회에 나오게 하라'라고 부탁을 하려 합니다. "알아볼 양으로(15절)"-알아보는 게 아니라 알아보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유도해서 천부장이 사는 곳, 즉 군인들이 사는 영내를 벗어나서 공의회로 가도록 하고, 그 노상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음모입니까? 이 얼마나 간사한 짓입니까? 오늘의 본문말씀 15절은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그럴듯한 이유를 빙자하여 꾸미는 음모, 이것이 얼마나 불신앙적입니까? 어디에나 이런 음모는 있습니다.
느헤미야서에 볼 것 같으면, 느헤미야가 퇴락한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고 있을 때에 많은 적(敵)이 있었습니다. 그 적들은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가 할 말이 있으니 오노 평지로 나와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매번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거절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바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너무 바쁘고 막중하기에, 지금어디 왔다 갔다 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듣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그래서 그가 죽음을 면합니다. 만일 저들이 부르는 대로 오노 평지에 나갔더라면 그는 암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음모가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좋은 얘기하는 것처럼 '조금 만납시다. 이리로 오십시오' 해놓고 중간에 엄청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음모 자체가 사실은 자살행위라는 것도 동시에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와 나귀가 함께 짝을 지어서 사냥을 나갔습니다. 여우는 이쪽에서, 나귀는 저쪽에서 사냥을 하고있었지요. 그런데 여우가 사자를 만났습니다. 매우 굶주린 이 사자는 여우를 잡아먹겠다고 덤빕니다. 여우는 간사하게 말을 합니다. "사자님, 몸집이 작은 나를 먹어보았자 배가 차겠습니까? 저쪽에 나귀가 있는데, 그놈을 내가 잡아드릴 테니 나를 놓아주십시오." 사자는 "그래라"하고 인심을 썼어요. 이에 여우가 나귀를 부르고는 살살 괴어서 깊은 함정에 빠뜨렸어요. 그 다음에 사자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 함정에 나귀를 빠뜨려놓았으니 이제 가서 잡수시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가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여우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귀는 다음날 아침에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래 오늘은 너를 먹겠다' 이것입니다. 여우가 먼저 죽었습니다. 이 우화를 왜 말씀드리는고 하니, 사람들이 음모해서 누구를 죽이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음모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보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나타납니다. 하필이면 바울의 생질이 이 음모를 알게 됩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 비밀이 누설됩니다. 노상에 매복했다가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는 곧바로 바울에게 갑니다. 가서 얘기를 다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듣고 그를 백부장에게 청하여 천부장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이 음모를, 이 정보를 알려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내가 들은 한마디 소문, 내가 아는 정보, 내가 아는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그게 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운데서 듣고, 보고, 만나는 사건들입니다.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어요.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때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나가는 얘기 한마디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로 인해서 역사가 바뀝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알게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의 생질이 어디서 어떻게 듣게 되었건 간에 그 음모를 들었어요. 그리고 바울이 죽지 않도록 일을 처리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주님께서 바울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는 로마까지 무사히 가리라-로마까지 무사히 가려면 바울이 죽지 않아야 갈 것이 아닙니까? 바울의 생질이 한마디 소문을 들었다는 것, 그가 용기 있게 처리한 것, 이 하나 하나가 다 오묘한 것입니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들어서 감동이 되나 안되나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 천부장이 40여 명이 매복한다는 데도 470명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해서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64킬로미터입니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밤 제삼 시에(23절)"-밤중에, 새벽에 그를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이 무사히 가이사랴 총독에게까지 보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분명히 주님께서는 바울이 로마까지 무사히 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곳이 없어야 로마에 갑니다. 있지 못하도록 되어야 갑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로마로 가게 하기 위한 과정에 오묘한 일이 하나씩 둘씩 이루어집니다. 한 문이 닫히면서 다른 문이 열려요. 한 길이 막히면서 다른 길이 열려요. 이렇게 해서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에 바울에게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로마에 가리라-그러나 그 경로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언제 가리라는 것도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가기는 갈 것입니다.
사적인 이야기라서 실례되는 것 같습니다마는 요새 남북회담을 한다니까 더더욱 이런 생각이 납니다. 제가 고향을 떠날 때가 1951년 정월 13일이었습니다. 1․4후퇴 훨씬 더 뒤에 고향을 떠났지요. 그날, 새벽기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저를 딱 붙드시더니 "안되겠다. 집을 떠나라"하시고는 성경책을 하나 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장 저녁부터 어디 가서 먹으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튼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저를 무릎꿇게 해놓고 기도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은 먼길일 것이다. 너는 목사가 되어라." 어디 가서 뭘 먹고 어떻게 공부해서 목사가 되라는 것도 없어요. 그저 "너는 목사가 되어라. 틀림없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마"하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평양에 가서 알아보니 어머니는 94세까지 사셨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첫마디 기도가 나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시려고 어머니는 너무 오래 고생하셨습니다."-그 어려운 세상에 좀 일찍 돌아가시지 무엇 하러 그렇게 오래 사셨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저를 위해 기도하시려고 그렇게 사신 것으로 느껴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노정을 통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제 그 약속을 믿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잠시도 이 약속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풍랑이 일어나든, 일이 겹치든, 내가 매를 맞든, 내게 비난이 있든, 어떤 격동이 있어도 분명히 나에게 주신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기왕에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남한으로 내려와 군대에 있을 때에도 저는 목사가 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첩보대 같은, 열두 사람 나가면 여덟 사람이 돌아오고 네 사람이 죽을 만큼 늘 그렇게 위험한 곳에 있었습니다마는 그러면서도 영한사전인 concise를 구해 가지고 외었습니다. 다 외우면 찢어버리고, 또 다 외우면 찢어버리고…… 이렇게 해서 concise 네 권을 없앴습니다. 물론 내용을 잊어버리면 또 외우고, 잊어버리면 또 외우고…… 보초서면서도, 아무리 바쁠 때에도 외었습니다. 그러니까 동료들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외어서 뭐하냐" 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목사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군인생활 하는 그 와중에도 시간시간 성경과 영어성경 읽는 일과 영어 단어 외우는 것을 계속했어요. 그랬더니 유학 가게 됩니다. 동전 한푼 없었지만 유학의 길이 열렸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를 통하여, 언제 이루어지는지는 묻지 마세요. 다만 믿고 순종하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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