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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영접하는 자의 경건(사도행전 28: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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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자의 경건(사도행전 28:16)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바울이 한 못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오늘의 본문에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이 풍랑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상륙하게 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76명이 탄 이 배는 로마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파손되었습니다. 저들은 당연히 죽어야 했겠지만 그러나 생명을 다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저들은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 계시기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저들은 욕심이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향락 지향적 성향을 가졌습니다. 풍랑을 만나 생명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족한 줄 알아야 하는데 이렇듯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순간 순간 향락을 추구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이 마침내 모험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행심은 신앙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행심을 신앙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요행을 바라는 마음, 마치 믿는다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마음, 위험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행심이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저들은 어리석은 불 신앙적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결국은 그 잘못 때문에 배는 난파합니다. 재산도 다 잃고, 소중히 여기던 것들마저 다 잃어버리고 간신히 생명만 보존하게 됩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바울이 이 배에 없었더라면 이 배는 난파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높은 경륜이 계셨기에 저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자기자신들의 행위로 볼 때에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도 작은 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기회에 바울을 존중했고 바울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풍랑을 겪는 가운데 바울의 인물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그 위상이 바로 세워진 것도 아닙니다마는 그 담대하고도 당당한 모습, 하나님의 사람된 권세…… 이것을 보면서 저들은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바울에게 높은 신앙적 외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저들의 신앙은 아직도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마는, 어쨌든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고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바울은 이미 저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먹어라'할 때에 고집불통으로 '난 안 먹어'했다던가, '준비하라'할 때에 '난 안 해'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그 사람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은 쇠고랑을 차고 있는, 인간적으로 볼 때에 가장 초라하게 보이는 이 바울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 마지막 순종이 믿음입니다. 그만큼이라도 믿음이 있었기에 저들은 이 어려운 지경에서 생명만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배도 잃었고 세상 부귀도 잃었습니다. 명예도 잃었습니다. 나아가서는 고집도 잃어버렸습니다. 의지도 꺾여버렸습니다. 이렇게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이르러 조난자로서 생명을 보전 받습니다.

여기서 큰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저들은 지금까지는 백부장이 제일이요, 선주가 제일인 줄 알았습니다. 선장과 군인들의 지시를 받으면서 그들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씀 앞에 꼼짝못하고 순종합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서라면 서고, 먹으라면 먹었습니다. 헤엄 치라 하면 헤엄칠 줄 알건 모르건, 과거에 헤엄을 쳐봤던 못 쳐봤든 그 말씀에 저들은 순종했습니다. 그야말로 순종형 인간, 온유 겸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작품입니다. 굉장한 성공입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이 순간에 바울이 그 어떤 말을 한들 누가 안 믿겠습니까? 무슨 말을 한들 누가 안 따르겠습니까? 일전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정말로 양들이 목자 뒤를 졸졸졸 따라가요. 100마리, 200마리나 되는 양들이 한 줄로 죽 따라가요. 목자는 양들이 힘들어할까 봐 언덕을 바로 올라가지 않고 비스듬히 올라갑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산에 꼭 오선지를 그려놓은 것 같아요. 목자가 가는 길 그대로 언덕에 줄이 생깁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교인들도 저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쪽으로 가도 따라가고, 저쪽으로 가도 따라가고, 달리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고 목자가 남긴 발자국 그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목을 맨 것도 아니고 매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한 줄로 죽 따라갑니다. 목자와 양---여러분, '목사(牧師)'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양이, 양이 아닐 때가 많아요. 가끔 염소가 있어서 걱정입니다. 누가 그럽디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는 법이니 목사님,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양이면 찾아가지만 염소라면 안 찾아가지요" 했어요. 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저들은 정말 양들이 되었어요. 275명이 바울 앞에서 완전히 양이 되었어요. 모두가 이제는 바울만 쳐다봅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마는 바울 한 사람 덕분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멜리데 섬에서 대접을 받아요. 대단치도 않은 저들을 왜 영접하겠습니까마는, 바울이 높임을 받는 덕분에 모두들 한겨울동안 이 섬에서 잘 지내게 됩니다. 아마 술집은 없었을 터라 향락은 못했지만 바울 덕에 후한 대접을 받고 후일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 이렇게 해서 바울 중심의 생활이 이루어지고, 저들은 그의 지시를 받으면서 지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저들은 이 어려운 가운데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지금 옷은 다 젖었지요, 비가 와서 견딜 수 없이 춥지요, 또 먹을 것도 없어요. 사실 저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후하게 도와주지 않는 한 저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아요?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니까 보따리 달라고 한다.' 빠졌을 때에야 생명이 중요하지만 일단 빠져 나오면 보따리가 있어야 산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들에게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때는 겨울이라 그 동안 지낼 집도 필요합니다. ,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이 섬에 사는 토인들이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토인'은 헬라어로 '바바로이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바'라고 하는 말이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로마사람들이나 헬라사람들이 볼 때에 이 사람들은 야만인입니다. 벌거벗은 데다 가죽 좀 걸친 것이 전부예요.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거든요. 그리고 말하는 것도 그저 '바바바바……'로만 들려요. 한마디도 못 알아듣습니다. '바바리안'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못 알아듣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 비문화인, 비문명인---이런 야만인을 지칭하는 조금 욕된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바로이스'를 때로는 '야만인'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토인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 이 사람들이 저들을 영접했습니다. 왜 영접했을까요? 그것은 하나의 인도주의적인 차원이었어요. 그러나 여기에 좀 animistic, 정령적이고 미신적인 철학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조난자에 대한 예우----죽을 뻔했으나 살아난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는, 큰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특별한 운명에 대한 호의로서 저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비행기가 이륙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타는 큰 비행기는 이륙한 다음 30분까지만 이상이 없으면 내릴 때까지 무사하다고 합니다. 처음에 뜰 때에 총속력을 다 내기 때문에 그 때가 제일 위험하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가 이륙한 지 15분만에 엔진 하나에 불이 붙었어요. 그래, 다시 활주로로 돌아옵니다. 거기에 탄 사람들 수백 명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초조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착륙하기 전에 날개가 타버리면 비행기는 그대로 곤두박질하게 됩니다. 모두가 벌벌 떨면서 무조건 생각나는 대로 다 기도했어요. 다행히도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공항 측에서는 승객들을 다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시 찾은 생명에 대하여 축하드립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죽을 뻔하고 살아났으니 당연히 축하할만하지요. 그래서 그 비행기 회사에서는 승객들에게 최대한의 후한 대접을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저들도 생명을 다시 찾았습니다. 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다시 찾은 생명에 대한 축하의 예우로서 토인들은 저들을 영접했습니다. 어렵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니 도와줘야 한다는 하나의 인심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니지만 토인들이 믿는 신에 대한 종교적 세계관이 나타납니다. 신을 두려워하는 자기들로서는 신이 살려준 사람, 신의 가호를 입은 사람을 존경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인데 신이 도와서 살아남았다, 이런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에 바울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기네 나름의 인도주의요, 신앙입니다. 그러나 결코 기독교적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세요. 이제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27 : 44)"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1)" 구원-----여기에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구원이 무엇인가를 이 상징적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실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에 걸렸다가 나을 때에, 병으로부터 자유 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대부분 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흔히들 그 병에 속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귀신에 붙들려 있다가 자유함을 얻어 온전해질 때에도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병에 걸린 사람은 자유가 없어요. 교회에 나오려고 해도 나올 수 없고,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고, 무엇을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고……그야말로 쇠사슬 없는 쇠사슬입니다. 몸과 마음이 다 붙들려요. 병에서 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자유 하게 됩니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가정생활도 다 자유 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에 붙들려 있고 사망에 붙들려 있다가 이로부터 자유 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자유로 풀이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구원을 받았다' 함은 생명을 보존했다는 뜻입니다. 죽을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마는 생명은 건졌습니다. 구원은 생명 위주의 개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오직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헤엄을 잘 쳐서 산 것도 아니고, 노를 잘 저어서 산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선원들의 기술에 의해서, 자기들의 노력에 의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써 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은 생명을 보전 받았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1)"-----저들은 사실 이 방향으로 오려고 했던 게 아니예요. 알고 보면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미항을 떠나 얼마동안 헤매다보니까 지금 여기까지 왔어요. 오히려 풍랑 때문에 더 로마 가까이로 온 것입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흘러왔어요. 욥기 23장을 보세요.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나는 모릅니다. 내 길은 여호와께서 아십니다'하는 욥의 이 고백처럼 저들은 정말 자기들의 길을 몰랐어요. 그뿐 아니라 미지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 하셨을 따름입니다. 저들이 이 섬으로 오려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물리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마음의 구원이 이루어졌어요. 심령적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보세요. 저들은 그 많은 고집, 그 많은 욕심, 이제는 다 버렸습니다. 아주 허심탄회, 빈 마음이 되었어요. 그리고 바울의 말씀만 조용히 듣는 사람들로 구원받았어요. 이것이 정녕 구원받는 모습입니다. 저들이 정식으로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들의 심령상태로는 정말로 구원에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실 저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 물리적 현상은 영적인 의미로서의 구원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교훈이 됩니다. 아마도 저들의 마음속에는 경건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바울을 통해서 들은 그 말씀에 때라 순종할, 그런 각오가 있는 경건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2)"---참 고마운 일이지요. 추워서 벌벌 떠는 저들을 위해 토인들이 모닥불을 피워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3)"-----불을 피우려고 모아두었던 나뭇더미 속에 뱀이 들어 있다가 사도 바울을 물었습니다. 지금 바울의 손에 뱀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본 토인들이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공의가 용납하지 않는구나. 공의의 신이 바울을 살지 못하게 한다.'"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4)"------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토인들은 뱀을 공의의 신의 상징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아프리카의 북부 리비아 해안에 아주 완악하고 포악한 해적들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바람을 만나서 배가 파손되어 이들이 이 멜리데 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신히 헤엄쳐서 '이제 살았다'하고 쉬고 있는데 이상한 뱀이 나타나 가지고 이들을 다 물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다에서는 배가 파손되어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공의의 신이 뱀으로 나타나서 이들을 물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해적은 죽어야 하니까 죽었다, 라고 토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 이런 속설이 전해지고 있었기에 상식적으로 바울한테 뱀이 딱 매달리는 것을 보고 '아이쿠, 이 사람은 살인자구나. 천하에 악한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이 어려운 가운데서 모처럼 살아남았는데도 결국은 죽게 되는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본문에 보니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바울이이 뱀을 털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일단은 뱀이 물었으니까 독이 들어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내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6)"----토인들은 바울이 퉁퉁 붓거나 독이 올라 눈이 빨개져 가지고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잔뜩 기다렸는데 웬걸, 바울은 안 죽는 것입니다. 안 죽으니까 토인들의 생각이 달라졌어요.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6)"-살인자가 신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적이란 죽었다가 살아야만 기적이 아니예요. 안 죽는 것도 기적입니다. 무슨 굉장한 일이 있어야만 기적이 아니예요. 무사하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만 이게 보통 어려운 걸음입니까? 저도 어제 우리 교회 수양관에 두 번 갔다왔어요. 아침에 가서 강의하고 또 신학대학에 가서 강의하고 다시 저녁에 수양관으로 가서 강의하고 밤중에 돌아왔어요. 이렇게 두 번 왔다갔다하면 아무래도 조금씩 위험한 일이 많아요. 그러고 보면 하루하루 무사한 게 기적이지요. 여러분, 기적이라는 것을 무슨 굉장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본문의 이 사건을 이렇게 보고 싶어요. 물렸다가 무사한 것도 무사한 것이지만 안 물린 것도 무사한 거이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꼭 물렸다가 무사해야만 무사한 것입니까? 그런고로 이렇게 생각합시다. 건강한 것이 기적이고, 무사한 것이 기적이고, 평안한 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토인들이 바울을 향해서 신이라고 말합니다. 왜요? 바울이 평안하니까요. 분명히 뱀이 물었는데도 무사하니까요. 여러분, 조금 더 영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 꼭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걱정 안 해요. 죽을 지경인데도 평안해요. 생각하면 잠시도 평안할 수 없을만한 형편인 것 같은데 아주 평안해요. 여전합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신앙의 위력입니다. '이상이 없음을 보고 모두가 놀라더라'-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고요해야 합니다.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레슬레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스스로의 경건을 점검해보라.' 그는 일곱 가지로 경건에 관해서 묻습니다. '너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너는 항상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는가,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고 있는가, 너는 어떤 것을 봐도 욕심 내지 않고 있는가, 어떤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가, 너는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이렇게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사실 요즘 세상에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아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뱀이 물든 호랑이가 물든 상관없어요.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됨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매일 증인되리라"이어야 합니다. 매일 증인이 무엇입니까? 남우는 대로 다 울고, 남 놀라는 대로 다 놀라고, 남 떠드는 대로 다 떠들고, 남 걱정하는 일에 다 걱정하고, 나 미움 받는다고 남 미워하고, 나 맞았다고 남 때리고…… 이러고야 어떻게 신앙을 운위합니까? 그런고로 믿음의 사람은 항상 이상이 없어요. 평안하고 고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바울을 가리켜 "신이라 하더라" 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사도 바울이 벌떡 일으켰을 때에 루스드라사람들이"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4:11)"라고 합니다. 그래,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 드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리느라 아주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런 경우는 좀 지나치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이만큼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하는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지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분명히 뱀이 바울을 물었어요. 저들의 상식으로는 독이 퍼져서 바울이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무사해요. 그것을 보고 저들이 깜짝 놀라고 사도 바울을 우러러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네 한국교회도 이렇게 해서 오늘에까지 발전해온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런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신당동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1959년의 일이니까 오래 전의 얘기입니다. 그 교회에서 어느 시골에다가 지교회(支敎會)를 하나 세우려고 했는데 땅을 마련할 수가 없었어요. 땅만 마련되면 예배당을 짓겠다고들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시골동네에 큰 구렁이가 있는 밭이 하나 있었어요. 동네 어른들이 먹을 것을 갖다바치고 제사를 드리는 등 지성껏 구렁이를 섬깁니다. 신앙이 있거나 또 신앙이 없는 청년들도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동네에 저런 구렁이가 있다니, 저 놈을 반드시 쳐죽여야겠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그러나 저들도 용기가 없었어요. 만일에 구렁이를 쳐죽였다가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벼락 맞으면 어떡하나, 병 걸리면 어떡하나, 또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서 꼭 없애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못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네사람들과 의논해본즉 구렁이만 없애주면 그 밭을 거저 주겠다고 합디다. 저는 '옳지, 잘됐구나' 생각하고는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 그 뱀을 잡아먹었습니다. 까짓 것, 아예 먹어버렸어요. 이제 동네사람들이 크게 걱정합니다. 다 죽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청년들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안 죽어야 한다. 만일 감기에라도 걸리면 일은 다 틀어지는 줄 알아라.' 당연히 모두가 무사했지요. 그 밭에 예배당도 지었습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얘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참 많았습니다. 요새는 제가 심방을 안 하니까 못합니다마는, 제가 소망교회에 와서도 몇몇 집에 있는 부적들을 다 떼어 불태웠어요. 그리고 나서 제가 감기 걸리면 큰일나는 거예요.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거뜬하게 지나가야 됩니다. 아마 그 집사람들은 저를 쳐다보고 생각할 거예요. '저렇게 했는데 아무래도 무사하기 어렵겠지?' 그러니 제가 무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이 비로소 안심하고 예수를 믿어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초대교회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렇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귀신 등속을 다 불에 태우고도 거뜬하고 무사해야 비로소 사람들이 '무사할 수가 없는데 저렇게 무사하다니, 과연 예수가 세구나' 하지요.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power encounter, 힘의 대결이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대결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은 더 센 쪽으로 붙게 마련입니다. 어느 쪽이 더 힘이 세냐,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강하고 담대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상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귀신을 배신하면 무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귀신 다 불태워버리고도 우리가 거뜬해야 합니다.

, 뱀에 물리는 사건도 그실 알고 보면 하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물리는 것도 은혜요, 물리고 무사한 것도 은혜입니다. 다 기적입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들려오는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다 복음 선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참으로 그 역사가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오묘하게 복음의 문이 열어지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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