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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와서 우리를 도우라(사도행전 16:6~1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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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우리를 도우라(사도행전 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오늘의 본문은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몇 절 안되는 말씀이지마는 그러나 그 내용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엄청난 사간이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 사건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또 바울로 미루어볼 때에는 선교 전략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기(turning point)를 맞이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역사가 바뀌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제 조금 어려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려워도 우리가 알아야 하고, 알면 대단히 유익하여, 또 이렇게 알게 될 때에 신앙적으로나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에 더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 좀 전문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그 뿌리를 히브리적 종교에 두고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 유대사람들이라고 하면 철저하게 종교적인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셨고, 그 히브리 문화권 속에서 히브리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사람들이 겪는 일, 특별히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거니와 아브라함, 노아, 에녹, 모세 혹은 출애굽의 역사, 많은 전쟁, 다윗과 솔로몬…… 그 모든 이야기를 계시적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역사가 있었고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설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경륜적으로 이스라엘사람들을 통해서 인간 역사와 만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사건들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기보다 계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 종교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선택된 백성입니다.

선택과 구원이라는 말은 똑같은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히브리사람들을 선택하십니다. 히브리 문화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히브리 종교를 이루게 됩니다. 이 히브리 종교가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리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고, 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광야교회에 뿌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출애굽 역사로부터 모든 역사가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을 바로 찾는 길잡이가 되고, 표본이 되고, 또 상징적 진리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고, 좀더 우리의 성경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예표적 사건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어쨌든 히브리적 종교, 히브리사람들의 구약적 종교, 이것이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가지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히브리 종교가, 거기서 이루어진 기독교가 헬라로 전파됩니다.

헬라땅으로 넘어가서는 이제 헬라 철학의, 철학적인 옷을 입습니다.

히브리 종교, 헬라 철학, 로마 정치, 이 세 가지가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고, 또 만방에 전파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기독교를 담은,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담는 그릇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 종교, 헬라 철학--당시에 하나님께서 미리 이렇게 경륜 속에서 준비해놓으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신약 성경이 헬라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번역되어 우리말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헬라말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처음부터 영어로 기록되어 있다든다 우리말로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기독교 교리는 아마도 크게 잘못 소개되었을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의 글이지마는 이 헬라의 글과 말은 아주 논리적입니다. 철학적입니다. 체계적입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바로 이해하는 데 헬라말이 그렇듯 유효한 그릇으로 훌륭하게 쓰일 수가 없어요. 그 말이 그렇고, 그 철학이 그렇고, 논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연구해나간다 하고 전문적으로 평생을 두고 연구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 본래 전공이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을 연구해볼 것 같으면 신학이라는 것은 히브리 종교의 뜻을 헬라 철학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헬라 철학으로 볼 것 같으면 큰 조상이 둘 있는데, 하나는 플라톤이고,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플라톤의 초월적인 신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적 신관--이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신학자들을 다 계보로 쪼개보면 결국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사조의 흐름이 꼭 시계추 같아요. 한번은 이쪽으로 왔다가 한번은 저쪽으로 갔다가…… 그렇게 2천 년인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서양 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라 철학이 지닌 철학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참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미리 보내놓으시고, 그 헬라철학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나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어요. 그럼으로써 복음을 아주 체계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 대표가 바울입니다.

소위 교부들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헬라 철학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키나스에 와서 소위Summa Theologia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쓰게 되는데, 철학의 금자탑입니다. 큰 책입니다 마는, 아무리 읽어보아도 지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그 책을 다 읽어보았느냐고 물어봅니다. 읽는 척했느냐 다 읽었느냐고 물어봅니다. 왜냐하면 지루하니까요. 이건 완전히 철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위 중세기 신학의 금자탑이라고 합니다. , 이제 한번 생각해보세요. 기독교 교리가 헬라로 건너가 거기서 철학화합니다. 철학적으로 각색이 됩니다. 다듬어집니다. 교리화합니다. 체계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사도신경이 헬라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위 니케아 신조라든가 하는 것들이 다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헬라 철학의 옷을 입고 교리가 구성됩니다. 그런고로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전파되다가 유럽으로 전파되어갔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헬라를 거쳐서 로마로 갑니다. 헬라 철학을 옷 입은 히브리적 종교가 이제 로마 정치를 타고 온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오묘한 일이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단시일에, 불과 몇백 년 간되어서 온 세계로 기독교가 전파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묘한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큰 역사를 앞에 놓고, 기독교는 지정학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와, 그리고 이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그 사이에 조그마한 해협밖에 없습니다. 배 타고 건너가면 헬라이고, 못건너가면 아시아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유대사람들, 아주 먼 곳에 있잖아요? 여기서 유대가 얼마나 멉니까? 그래도 유대는 아시아입니다. 사고방식이 아시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업하는 분들도 유대사람들하고 지내보면 역시 인정이 많고 생각이 가정적이고,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입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냉정해요. 부부간에 차 마시고도 따로 돈 내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내가 너를 초대한다" 해서 만난 경우에만 제 돈을 냅니다. 언젠가 한번 같이 공부하다가 영화구경 가자고 하기에 나는 그가 돈을 내는 줄 알고 갔지요. 갔더니 왠걸요. 따로따로 내는 거예요. 서양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거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합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네 것 내 것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압니다.

동양은 안 그렇습니다. 서양과는 사고방식이 틀리고, 문화가 틀리고, 생각이 틀리고, 철학이 틀립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서 기독교의 교리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사도 바울도 사실은 몰랐지요. 그런 차이와 어려움을 다 알고 한 것이 아니예요. 다만 성령에 이끌리어, 혹은 사도행전 185절의 말씀대로 "말씀에 붙들려서" 전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정학적으로 보면 이제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헬라는 아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갈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냥 바로 로마로, 세계의 수도 로마로 가야지…… 이런 생각만 안타깝게 하고 있었지 헬라를 거쳐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러나 먼저 헬라로 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제 바울이 헬라로 가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헬라로 가면 마게도냐 방면으로 들어가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그 다음이 데살로니가, 그 다음이 아덴, 고린도…… 보세요. 아덴이 헬라 철학의 본산지입니다. 바울은 이 중요한 곳을 떼 놓고 바로 로마로 가자고 했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셨습니다. 아직 멀었어요. 로마로 가기에는 아직도 멀다, 헬라를 거쳐라--그래서 헬라를 거쳐 로마로 가게 되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이 중간 지점으로 가는 전환점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선교학을 많이 연구한 사람들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는 그 전략상으로 볼 때 '전략 없는 것이 전략'이라고들 합니다. 바울은 어느 달 며칟날에 어디 가고…… 하면서 지도를 펴놓고, 작전 계획을 짜놓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계획이 없어요. 오직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이것이 그의 선교였어요. 요새는 너무나도 인본주의적인 계획이 많아요. 교회 부흥도 그래요. 여러분 지내보신 대로 소망교회에서는 언제 금년에 몇 명 전도, 내년은 몇 명 목표……하고 계획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게 바로 바울의 전도였습니다. 인본주의적인 데가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면 오고, 안 보내주시면 안 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버마에서 아웅산 사건이 있을 때, 꽝하고 터졌을 때, 온 민족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아마 예배당이 미어 터질 거라고요. 아니나다를까,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몰라요. 꽝하니까 우 모이더군요. 보세요. 이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이 안타깝게 금년에는 얼마, 내년에는 몇 명하고 야단해보아야 별로예요. 잊지 말 것입니다. 좀더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는 데 물량적인 것 생각하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계획을 세워놓고 Item도 짜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No Strategy is Strategy"--작전 계획이 없다는 것, 그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전적으로 생명을 바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얼마 가다 어디서 죽는다 해도 좋아요. 그런 것 상관 안 해요. 반드시 로마까지 꼭 가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못 가면 못 가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생각으로 전도했어요.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너무 그렇게 계획을 세우지 마세요. 그저 하루하루를 제대로만 사세요. 오늘 하루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한 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일 어떻게 하느냐 묻지 말고 한 시간 예배를 똑똑히 드리세요. 왜요?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뜰는지 못 뜰는지 어떻게 알아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목표는 영원 지향적으로 두고 살지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유 겸손하게 출발하고 그렇게 행하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두 단어가 있어요.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쓰되(7)"합니다. "애쓰되"--그러나 성령이 허락지 않으십니다.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쓰는데 갈이 막혀요. 이상하게도 막혀요. 애쓰는데 막혔어요. 성령이 허락지 않았다고 해요. 성령은 가게 하시는 성령인데 막았어요. 그 다음,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우리를 도우라"할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인정하고 마게도냐로 갑니다. 그러니까 이쪽 길을 막고 저쪽 길을 열어주십니다. 여기서 문제가 돼요. 바울은 사실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어요. 그게 소원입니다. 자신이 지닌 조그마한 소원입니다. 고집이 아닙니다. 그저 '이리 갔으면 좋겠다'하고 '옳지 않겠는가'했는데 길이 막혀요. 그럴 때에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이 막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다른 길을 찾아요. 결국 그는 드로아로 해서 헬라로 가게 됩니다. , 성령이 한 길을 막고 한 길을 열어주셨어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성령이 막았다--궁금하지 않아요? 어떻게 막았다는 이야기입니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2110절로 보면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예루살렘에 가면 이런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손을 묶으면서, 보여주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체포될 거요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와 같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언의 은사만 받았지 이 사람이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당신, 여기서 하지 말랍니다. 저기서 하랍니다'하고 말해주었는지 아니면 바울이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 아니면 그에게 내심 어떤 확신이 생겼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성령이 막았는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일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문제를 놓고 선택할 때에 어떻게 했는지를 미루어보아서 여기서 하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목숨을 그리스도께 바쳤어요. 절대로 핍박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더 살고, 오래 살고, 편안하고, 안일하고…… 그런 것을 구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리 가면 편안하다, 이쪽으로 가면 오래오래 좋은 일 많이 할 것 같다, 이쪽으로 가면 길이 꽉 막혀서 위험하다--이런 식으로 인간적인 타산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뜻밖의 큰 핍박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떠나라 하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핍박이 덜한 곳으로 옮겼어요. 그 같은 핍박을 통해서 노정을 잡기도 합니다. 한쪽은 닫히고, 한쪽은 열려요. 그러면 열린 쪽으로 갔어요. 그것이 바울의 겸손한 선택 기준이었어요. 그러나 그것만도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첫째로 생명을 주께 바치는 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핍박을 받는다던가, 고난 당하는 것을 조금도 기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심리적 현상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쪽으로 가야겠다, 이쪽으로 가지 말자---이렇게 그의 마음에 심리적 현상이 일어나서 '성령이 막았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바울의 생활 철학으로 짐작컨대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가 병자라는 사실입니다. 육체적으로 병이 있었습니다. 어떤 병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선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눈이 나빠요. 안질이 있었습니다. 또한, 말라리아를 앓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오는 말라리아였습니다. 열이 많이 나서 고생하는 병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결정적인 것은 간질병입니다. 이렇게 그는 환자입니다. 평생토록 병을 가지고 전도했습니다. 그가 '육체의 가시'라고 말한 병들이었습니다. 그 병들을 '사단의 사자'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되는 이런 것들이 그에게 있었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날짜를 정했어요. 그런데 그 날이 되면 병이 발작을 해요. 그래서 못 갑니다. 며칠 동안 앓아 누웠어요. 조금 나아서 이제는 가려고 정해놓으면 또 병이 발작을 해요. 계속 이렇게 되었다면 또 막혀요. 그래 기도하는 가운데 '도대체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왜 내가 이렇게 다른 일도 아닌, 핍박도 아닌 내 사사로운 병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는 것입니까? 어째서 막으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그는 생각한 것 같아요. 이런 때에 그는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하는 중에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본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짐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오는 느낌만이 아니라 사건이고, 사건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둘이 합쳐서 그는 '성령이나를 이 길로 가는 것을 막고 있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입증할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10)"--'우리'란 영어로 말하면 'We'입니다. ''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라고 했을까요? 바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그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어떻게 되어서 누가가 함께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 날 동안 아팠고, 아프니까 누가를 불렀던 것 같아요. 누가가 치료해서 나을만하면 또 아프고, 나을만하면 또 아프니까 누가가 결심을 합니다. "앞으로는 내가 동행을 해야 하겠습니다"하고는 로마까지 동행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병은 그대로 둔 채 의사를 동반하게 했어요. 하나님의 일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시고 건강은 주시지 않았어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바울은 이것을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게을러지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바쳐가며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 안에 머물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령이 막았다는 이야기는 그의 병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가지 말란다, 비두니아로 가지 말란다, 라고 생각하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저하는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9)"--답답하게 막아만 놓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열어주시는데 환상으로 보이십니다.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합니다. 중요한 것은, 도대체 마게도냐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생각을 해봅니다. 마게도냐사람이 누굴까? 이제 헬라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갔다고 했습니다. 드로아라는 말이 있는데, 드로아라는 지명은 땅으로 볼 때에 헬라와 접경하는 아시아 땅입니다. 거기서 배만 타고 가면 유럽으로 갑니다. 드로아는 원이름이 알렉산드로아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환산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본 것 같다고도 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말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배를 타고 드로아에서 건너가면 첫 성이 빌립보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이 빌립보입니다. 빌립입니다. 그 이름을 딴 지명입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을 딴 빌립보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라"하는 말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하게 됩니다. 환상에 나타난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생각하면서 생각해봅시다. '너는 많은 사람들을 도와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돕지 않느냐? 영혼의 의사로서 당연히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는 철학은 있지만 종교는 없다, 헬라 철학이 꽃피어 있다고 해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돼서는 안된다, 그러니 와서 우리를 도우라. 기도만 하지 말고 직접 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렇게 바울이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이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바울의 해석입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 인정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환상도 중요하지만 환상에 대한 해석도 중요합니다. 마게도냐에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것으로 바울은 해석합니다.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리로 가기로 힘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쓸 때에 바울의 몸은 건강했습니다. 여기에 요점이 있는 거예요. 이제 마게도냐로 가고자 계획하고 힘을 쓰니까 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셨노라, 저리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인정하게 됩니다. 인정한다는 게 중요해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이 구체적인 뜻을 우리가 알 수 없거든요. 인정을 해야 돼요.

좀더 깊이 생각해볼까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십자가 지시기로 이미 결정하셨어요. 제자들에게 이야기도 하셨어요. 성만찬 예식도 치르셨어요.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라"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는 고민을 하시는 것입니까? 무슨 고민이 있다는 것입니까?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는 게 아니예요. 내일 아침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아닙니까?--이런 구체적인 문제가 있어요.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경 문맥대로 보면 응답 없는 것을 응답으로 받아요.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해주세요--응답이 없어요. 이제는 십자가를 지라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주님 하시는 말씀인즉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하심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얻은 결론입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오늘 아침 가야바 법정에 끌려가고, 빌라도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이라고 인정하심입니다. 인정하시는 것,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마찬가지로 바울은 지금 '이제 하나님께서 저 마게도냐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우리를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것'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힘씁니다. 힘쓸 때에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보게 됩니다마는,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서부터 활짝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 이리로 부르셨구나, 내가 왜 이것을 몰랐던가--이런 생각을 하면서 헬라를 부지런히 누빕니다. 데살로니가, 아덴, 고린도……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이 소아시아에 더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게 그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은 좌절되고, 낯선 곳 유럽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사람이란 자기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져서 있던 곳에 그대로 안주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안주심리를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 모험의 길, 더 어려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의 뜻이, 길이 여기에 있다고 인정하게 될 때에 내 뜻을 버리고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리빙스터은 중국으로 선교하러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아프리카로 가게 됩니다.

윌리엄 캐리는 남태평양에 있는 폴리네시아 섬에 가서 선교하려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로 가지 않고 중간에 방향을 돌려서 인도로 가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생각했던 대로, 내가 준비했던 대로되어져야만 하나님의 일이 되어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던 길 못 가도 좋고, 방향이 바뀌어도 좋아요. 다만 내가 전적으로 얼마나 헌신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얼마나 철저히 생명을 바쳤느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위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 거라고, 저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집착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애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마르틴 루터는 본래 법률가를 지망한 사람입니다.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150572, 에르푸르트교회에서 나와 친구와 같이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비를 맞습니다. 소나기가 와서 나무 밑에 피했는데 벼락이 떨어지면서 친구가 새까맣게 타서 죽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제는 두 번째로 사는 생입니다. 일생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겠나이다"--맹세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종교 교역자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어떤 계획을 세우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는지 몰라도 때로는 내 계획이 좌절되기도 합니다. 방향을 전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이 막고, 성령이 열고, 성령이 나를 멈추고, 성령이 다른 길로 인도합니다. 그 길이 어느 길이든 상관하지 말고, 온유, 겸손하게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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