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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 있는 사람(사도행전 18:12~23)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자리로 데리고 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갈라와 아굴라도 함께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오늘의 본문 중에는 특별히 사도 바울이 서원 하는 바가 있어서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원이 있는 사도 바울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선교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거기서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고린도 선교는 아주 난산이었습니다. 특별한 핍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많은 핍박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니까요. 문제는 다만 바울 자신의 심경에 있었습니다. 나약함이랄까 시험이랄까, 그런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서 상당히 어려운 가운데 1년 반 동안이나 유하면서 고린도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1년 반이 지나 고린도를 떠나기 직전쯤에 있었던 일인 것 같습니다.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이 지방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모든 나라가 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 일대가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었던 것처럼 고린도를 포함한 이 아가야 전 지역을 관장하는 총독으로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유대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나옵니다. 유대사람들은 항상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이 지방 저 지방에서 아마도 1년 반 내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갈리오가 총독으로 부임하자 이를 계기로 해서 이제는 바울을 고소해서 가능하면 없애버리려고 까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갈리오가 왜 이렇게 이용되고 있느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갈리오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의 형입니다. 세네카가 써놓은 글에 보면 '우리 형님처럼 착한 사람은 없다'라고 합니다. 온 세상 친구를 다 만나도 형 같은 좋은 친구는 없다고 찬양하는 시를 써놓은 것이 지금도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세네카는 그만큼 갈리오를 사랑했습니다. 또 갈리오를 형으로 둔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갈리오는 인품이 온화하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학자이자 로마 원로원의 회원이었습니다. 주후 51년 6월에 아가야 지방 총독으로 파견됩니다. 그래서 이 지방에 왔습니다. 유대사람들은 그의 그런 성품을 알고 그 점을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의 요구를 갈리오가 잘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간교합니까? 로마총독이란 원래 하나의 군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처지가 아닙니다. 또 재판하고 안하고가 없습니다. 생사를 가름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사람 하나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사람이 로마총독이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갈리오라는 착한 사람을 이용해서 이번 기회에 바울을 제거해버리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이 지방은 로마가 강하게 다스리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로마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바울을 제거할 수가 없었거든요. 가만히 보면, 때때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이용합니다. 착한 사람 이용해서 그 자리에 앉히고, 그 사람의 명예와 착한 마음씨를 빌어 악한 계책을 꾸미는 일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얼마든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철저하게 로마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로마가 온 세계를 다스리고, 총독을 내보내서 자기네 왕은 허깨비로 만들고 다스리는 판인데 왜 좋아하겠습니까? 로마군인들이 와서 지배하고 있고, 또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는 빌라도를 이용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고소할 때에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마치자기들이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아첨하고 계책을 꾸며서 빌라도로 하여금 꼼짝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언제부터 빌라도의 충신이었고 가이사의 충신이었습니까? 그러나 자기네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빌라도의 권세를 이용해서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사도신경을 욀 때마다 참 어이없게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그실 가야바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어디나 악한 사람이 취하는 방법은 거의 비슷합니다. 악의 수단이 꼭 같습니다. 착한 사람을 이용합니다. 유대사람들은 갈리오가 온 것을 계기로 해서, 이 착한 사람을 통해서 바울을 없애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고소당한 바울의 죄를 기각하고 맙니다. 죄목 이렇습니다.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라고. 유대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지만 로마사람이 볼 때에는 이 무슨 중요한 일입니까? 율법이니 뭐니…… 로마인에게는 전혀 흥미거리가 못되었습니다. 전혀 죄목이 될 수 없습니다. 로마총독으로서는 관심거리가 못됩니다. 그래서 갈리오는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악한 일도 아니요, 부정한 일도 아니라면, 그리고 언어와 명칭 즉 문화에 관한 것이요 종교에 관한 것이요 율법에 관한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나와 관계하지 말아라, 나와는 상관이 없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 하고 내버려둡니다. 문화의 문제나 종교의 문제라면, 특별히 갈리오 같은 뜻이 깊고 생각이 있는 학자형의 정치가라면 더더욱 취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각하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기각이 된 다음에 된 이야기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기각한 다음에 갈리오는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하고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를 상관치 아니하니라"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회당장 소스데네를 현장에서 때렸습니다. 일종의 분풀이입니다. 때리고 싶은 것은 바울입니다. 그러나 무죄 선언을 한 이 마당에 바울을 때릴 수는 없습니다. 이젠 로마법이 일단 바울을 보호하는 것이 됩니다. 죄 없는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에서 뺨맞고 서에서 분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람이 분풀이를 하기 시작하면, 화가 치밀면 이치는 따지지 않습니다. 화풀이 그 자체만이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저들이 왜 소스데네를 때렸느냐입니다.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렇게들 추리를 합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을 고소한 장본인이 바로 소스데네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 틀림없이 처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많은 군중과 같이 데모하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끌고 왔는데 막상 기각되고 나니까 격분한 사람들이, 특히 헬라사람들이 이렇게 죄도 없는 사람을 왜 끌고 왔느냐, 또 우리를 왜 여기 동원했느냐 하면서 분풀이를 한 것 같다는 추리입니다. 또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유대사람들 입장에서는 소스데네가 바울을 갈리오에게 고발해서 틀림없이 처형하겠다고 장담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각되고 보니 분풀이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추리할 수 있는 것인즉, 소스데네가 이미 크리스찬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미루어볼 수 있는 근거로 8절말씀을 봅시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합니다. 회당장 중의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소스데네라는 사람도 아마 자기네 회당에 와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마침내 저도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는 추리도 가능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동정해서"여보시오, 죽을 사람인데 왜 때리기까지 하오?" 했는지 어땠는지 그 때문에 로마군인들이 "그럼 네가 져라"해서 원치도 않은 십자가를 대신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소스데네가 어떤 말로 바울을 변명했는지 모르겠어요. 한번 추리해 볼까요? 갈리오가 사도 바울은 무죄요, 종교 문제는 취급을 안 하겠소, 하고 기각할 때에 옆에 있던 소스데네가 "거 보라니까"하고 한마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스데네를 때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조심해야 돼요.
아무튼 갈리오 앞에서, 총독 앞에서 군중들이 소스데네를 쳤는데, 갈리오가 말리지 않았어요. 그만큼 소스데네는 매를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군중의 분풀이입니다. 요새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데모하는 사람들이 버스도 불지르고 쇠파이프도 휘두르지요? 버스가 무슨 죄 있어요? 왜 부수는 것입니까? 그것도 나라 재산인데요.
분풀이라는 게 이런 것입니다. 따질 게 없어요. 그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성을 잃어버렸으니까요. 이래서 군중심리라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좀더 냉정해야 합니다. 결국 이런 결과가 되고 맙니다. 가만히 보니 드라마 할 때도 부부싸움 하는 것을 보면 뭘 마구 때려부수고 내던지고 합니다. 자기네 재산이 아닙니다. 왜 쓸데없이 때려부수는 것입니까? 분풀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좀더 냉정해야만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보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다시 기록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도 바울을 따라나섭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갈 때에 저들은 따라갑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앞으로 로마로 간다는 말을 듣고 먼저 로마로 갑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선교하고 있을 때에 아마도 심부름을 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에베소로 다시 온 일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이 두 사람은 사도 바울을 위해서 평생을 바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는 일의 구체성을 모르고 있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해요. 자녀 사랑할 때도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입니까? 때때로 보면 사랑한다고 하면서 대개 괴롭혀요. 그렇지 않아요? 혹은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요. 그래서 사랑한다고 자꾸 잔소리만 해서 괴롭히고요. 오늘 아침에도 어떤 모임이 있었는데, 한 목사님이 실수를 합니다. 패배(敗北)라는 말 있지 않아요? 한문으로는 '패북'이라고 쓰지요. 패북이라고 써놓고 패배라고 읽는데, 그 목사님이 어디서 생각이 잘못 들어갔는지 항상 패북, 패북 한답니다. 누가 이것을 바로잡아줘야 하겠는데 "충고를 할까요 말까요?" 합니다. 그래서 제가 딱 일대 일로 만나서 충고하시라 했습니다.
그래 용하게 일대 일로 만나서, "사실은 패배인데요, 목사님 습관이 잘못됐는지 자꾸 패북이라고 하시니 앞으로는 패배라고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충고하시라 해놓고 "웬만하면 그러지 마시지요"했습니다.
기를 죽이는 것은 생명을 뺏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위한다고 해서, 이래라 저래라 해 가지고 기를 죽여놓으면 안 하는 것만 못하지요. 차라리 실수도 하는 것을 두고 보는 게 낫습니다.
자녀들을 향해서도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지만 그것도 지나쳐서 기가 죽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예수를 믿었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어요. 하늘나라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어요. 그럼 내가하나님의 일 하는 게 뭐냐, 사도 바울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자비량하면서, 천막 치는 업을 하면서, 밥을 벌어 먹어가면서 전도하는 것을 보았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저들은 밥은 내가 벌겠소, 당신은 전도나 하세요,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딜 가나 사도 바울 따라다니면서 경제적인 후원자가 됐어요. 물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여러 면으로 도왔겠지마는 요새말로 말하면 우선 경제적 후원자(supporter)가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로 하여금 전도만 열심히 하도록 했고, 그것이 바로 자기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새 보면 가끔 그런 경우가 많아요. 여기 전도하는 분들 많이 있지요? 평생 장사하던 분들, 내 생각 같아서는 장사해서 돈벌어 전도하는 분들 도와서, 그들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걱정하지 않고 선교하고 전도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도 들었는데 신학하겠다는 경우는 질색입니다. 신학해서 목사 되겠다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참 괴로워요. 신학하겠다는 것 누가 말리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이사장이요 교수이지만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신학공부 해서 목사 되겠다는 데 말릴 수야 없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어요. 모든 학문에는 전공이 있고, 전공이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만일에 나이 50, 60이 되어 가지고 신학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전공학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50이 넘은 사람이 그제서야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나서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 웃기는 것 아닙니까? 피아노는 아무나 치는 것인 줄 압니까? 안 그래요? 돋보기 안경 써 가지고 의학공부 해서 수술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50, 60 돼 가지고 신학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신학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물론 신학공부 해서 나는 평신도로서 일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좋겠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그것은 신학이라는 학문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잘못된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저 할 짓 다하고 이제 와서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끝물에 와서 시원치 않은 기억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업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업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요? 장사하는 사람이면 돈 많이 버십시오.
열심히, 정직하게, 부지런히 돈 많이 벌어서 선교하는 사람을 도우세요.
'이제부터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일하십시오'―이런 의미에서 열심히 도우세요.
돈걱정은 일절 하지 말고 복음만 열심히 전하세요. 돈은 내가 대겠소―이것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마음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까지 정했어요. 사도 바울, 이 사람을 생전 따라다니면서 일하겠다, 이 사람을 돕는 것이 예수를 위하는것이요, 이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확실했습니다. 분명하게 자기 길을 찾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하루종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명상해보세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말씀합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4절)"―그들은 자기목숨이라도 대신 내놓을 수 있다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했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이사도 하면서, 옮겨다니면서 전적으로 바울을 도왔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선교 이후에는 바울이 다시 자비량하고 전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를 도왔으니까요.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니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18절)"라고 말씀합니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왜 깎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분명히 한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원이 있으므로(18절)"―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심중은 아무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심각한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니 가끔 삭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디다. 대개 원한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도 합니다. 원한 관계가 있거나 한이 맺혀 있을 때, 원통함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상당히 부정적인 면모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히브리사람들의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얘기가 좀 달라요.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축복을 받았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셨구나, 꼭 죽은 사람인 나를 구해주셨구나, 그렇게 감격스러울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왜요?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만 살겠다'하는, 마치 나실인과 같은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감사,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특별한 감격, 그리고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다 생각을 할 때에 이제는 나를 위해 살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니 이제부터 사는 생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정도의 결심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또 한 가지는 서원이 있기에 머리를 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기로, 원망하지 않기로, 오직 감사하기로, 앞으로 이런 일이 있든 저런 일이 있든 개의치 않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은 이런 연유일 것입니다. 그동안 너무 핍박이 많았어요.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했고, 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보우해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보우해 주시기 바랍니다.'―더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이제는 더 보우해 주시지 않고, 어디서 어떻게 끝난다 하더라도,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에서 죽든지 로마로 가서 죽든지,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간에 저를 보우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주님께서 보우해 주시든 안 해주시든, 모두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생명을 미리 바쳐버리고 맙니다. 그런 의미의 서원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서원 기간도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사람들은 8일간이나 30일간, 혹은 일평생의 기간을 두고 그 기간이 끝나면 번제를 드리고, 그 때에 자른 머리카락도 번제물과 함께 태운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입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죽고 사는 것도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의 얘기입니다만, 미국으로 망명한 스탈린의 딸을 보고 기자들이 물어보았습니다. "미국 생활에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 때 스탈린의 딸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많습니다. 많은 것 중에서 내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 운명을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택할 게 없습니다. 정부에서 다결정해서 밀어붙이니 그저 따라만 가면 됩니다, 북한에 가서보니, 라디오도 채널이 하나밖에 없어요. 딱 틀면 그것만 나와요. 선택할 것도 없습니다. 텔레비전도 채널이 하나입니다. 그러니 채널 가지고 부부 싸움할 것도 없잖아요? 이것 보겠다 저것 보겠다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채널이 많아서 이것 볼까 저것 볼까 하다가 흔히들 싸우잖아요? 머리가 복잡하지요.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는 모노 채널입니다. 선택에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은 죽음을 선택했음입니다. 순교를 선택했음입니다.
이제는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때에 어디서, 어떻게 끝나더라도, 그대로 주님 앞에 가기로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순교를 선택하는 서원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19절에 대단히 은혜스러운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 자리에다 머무르게 했을까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또 핍박이 있거든요. 핍박이 있으면 소스데네처럼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여기에 계시오, 나 혼자 들어가서 전도하겠소, 하는 배려였던 것입니다. 핍박이 있으면 나 혼자 당하겠소, 당신들은 같이 당할 것 없소―얼마나 아름다운 대목입니까? 지도자 된 미덕입니다. 나는 앞에서 순교를 하는 한이 있어도 그대들은 여기에 머물러 있어 수난을 피하시오―아름다운 마음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만날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는지 모르는 것이니 만일에 이번에 순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한다면, 한마디로, 살아남는다면, 하나님께서 살아남도록 해주신다면 다시 돌아와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나를 불러서 순교하게 하시는 것이라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요, 내 각오는 이미 서있습니다―이런 얘기입니다. 흔히들 곧잘 '주의 뜻이면' '주의 뜻대로'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가끔 보면 잘되는 일에는 '내 주의 뜻대로'하고, 안 되는 일에는 '아니오'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 주여 뜻대로'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맨 마지막 3절의 "살든지 죽든지"하는 부분은 안 불러요.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살든지'는 좋은데'죽든지'는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뜻이면'하는 말은 순교의 각오를 내포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만날 것이고, 주께서 나를 순교자로 부르신다면 그대로 갈 것입니다.―얼마나 깨끗한 마음입니까? 얼마나 여유 있는 마음입니까? 생명 문제까지 깨끗이 해결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같은 모습이야말로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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