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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 없는 원수(사도행전 22:22~30)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 다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사람이라 하니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난 군중 앞에서 신앙고백적이고 간증적인 설교를 하는 내용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생한 자기 경험입니다. 또 계시적인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한 바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바와 같이 "당신들도 나와 같소. 나도 본래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었소"―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나만을 위함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라고 기회를 주심입니다, 내게 주신 경험이 나를 위함이 아니고 온 백성을 위함이고, 만백성을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결론은 무엇이냐, 이것을 믿는 순간에 내가 받은 구원을 당신들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당신들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순간에 당신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와 같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바울은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으로 "당신들도 예수를 믿으시오. 나와 같이 이렇게 되십시오"라는 말을 해야 될 순간에 사람들이 바울의 말씀을 중단시켰어요.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참 유감스럽습니다.
워낙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이니까, 어쩌면 그 말씀은 하나마나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바울이 말씀하는 의도는 옛날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겪은 경험, 내가 예수를 만난 경험을 설명합니다. 이는 '이것을 믿는 순간에 당신들의 마음속에서도 성령이 감화하실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를 당신들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하고자 함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22절)"―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고, 고함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22절)"하고 달려듭니다. 참 놀라운 얘기입니다. 그리고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23절)"―저는 사람이 티끌 날리는 것을 못 봤습니다. 예루살렘에 살았더라면 볼 뻔했겠지요.
하지만 소가 티끌을 날리는 것은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은 그것도 못 봤을 것이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알 것입니다. 소 두 마리가 서로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힘겨루기를 하려고 "흐흥" 하고 콧김을 내뿜습니다. 그 때에 소가 티끌을 날립니다. 앞발로 흙을 몸에 뿌립니다. '내가 이만큼 세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당장에 달려갈 임전태세를 취함입니다. 저는 티끌을 날린다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그들이 소같은 놈들인가, 혹시 소한테 배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가 꼭 그렇게 하거든요. 서로 싸우려 할 때, 서로 힘을 자랑하느라고 티끌을 날립니다. 뽀얗게 먼지를 날립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사람들이 티끌을 날렸다 합니다. 악에 차서 지금 사도 바울을 돌로 쳐죽이려 합니다. 그 옛날 스데반을 죽일 때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티끌을 날리고 막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고마운 것은 천부장이 저를 호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인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에스코트해서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렇게 해서 이 어려운 고비를 면했다,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분명히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었는지,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을 열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꼭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사람들은 숨겨지고, 이 시간에는 악화가 양화를 물리치듯이 선한 사람, 감동을 받은 온유 겸손한 사람들은 조용하고, 반대로 극악한 사람들, 사나운 사람들만이 소리를 지릅니다. 똑같은 복음을 들었는데 한쪽에서는 조용히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복음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진리도 어떤 충고도 그렇습니다.
어떤 귀한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한쪽에서는 수용하고, 한쪽에서는 반대합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착하게 받아들이고, 반대하는 사람은 그 말씀으로 인해서 더 악해집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제 방에 들어갔을 때에 가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세요?"하고 문을 열었는데 제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욕부터 합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내 죄를 이렇게 공격하느냐고, 누가 고자질했느냐고, 어째서 내 아픈 데를 칼로 저미듯이 찌르느냐고 막 화를 내며 덤빕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하니까 아니라고, 분명히 그것은 알고 말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한 줄 알고 회개하면 되지요"하니까,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필시 어느 사람이 고자질을 한 것이라고, 때문에 그 사람을 꼭 알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보세요. 같은 복음을 듣고, 같은 설교를 듣고도 내게 주신 은혜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완악해지고, 더 굳어지고, 더 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작심하고 저렇듯 악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정말 죽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정도도 아니고 숫제 '너 죽고 나 죽자'합니다. 이것은 그저 저 사람이 미우니까 저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겠다는 얘기입니다. 참 미련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저 때에는 사형 집행이나 사형 판결은 반드시 로마법에 의하여 시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만일에 바울을 돌로 쳐죽이면 저들도 로마법을 어기게 되므로 살인죄로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죽이겠다는 이 완악한 순간은 '저 사람 죽이고 우리도 죽겠다'라는 것이 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서 파손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서로 미워하는 사람 둘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뱃머리에 탔고, 하나는 배 뒤쪽에 탔어요. 배는 점점 가라앉습니다. 그 때에 배 뒤쪽에 앉은 사람이 선장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장님. 이 배가 가라앉을 때에 앞에부터 가라앉습니까, 뒤에부터 가라앉습니까?" "앞에부터 가라앉습니다." "됐습니다. 저 놈 죽는 것을 보고 내가 죽으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다 보면 이 지경에 이릅니다. 저 죽는 것도 생각 밖이예요. 미운 마음이 죽음에 대한 생각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할 만큼 미련스러워집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지금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그런 악랄한 마음에서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들은 왜 바울을 없애고자 할까요? 일찍이 예수님을 그렇게 했듯이 오늘에 와서는 바울도 왜 없애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야고보를 죽이고, 이제 다시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들과 바울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유대사람으로서 동질적인 게 많습니다. 같은 율법을 숭상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같은 선민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꼭 죽여야겠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귀중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이방사람을 유대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통 못마땅한 것입니다. 이 상대적 가치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사실상 유대사람은 이방사람을 별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문으로 연구한 사상가들에 의하면 특별히 유대사람들이 쓴 많은 문학작품 중에 이방사람에 대한 미움을 주제로 다룬 것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독일의 나치당들이 무려 육백만의 유대사람을 죽였는데도 그들은 독일사람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또 유대사람들은 바벨론 포로로도 있었습니다. 그 밖의 많은 경우에도 그들은 이방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곤욕을 치렀습니다. 수난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문학이나 저들의 사상에 이방사람들을 미워하는 구석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방사람을 멀리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십니다. 이런 면에 그들은 아주 여유가 있습니다. 장사도 같이 하고, 거래도 같이 합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구원 문제에서만은 그렇지 않아요.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저들은 에누리가 없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집이 있어요. 이 선민 사상만은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선민으로서 이방사람을 불쌍히 여겨 함께 사는 것이지, 이방사람이 선민과 같다는 얘기는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어요. 자기네를 이방사람 취급하는 것은 절대로 참지 못합니다―이것이 유대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사람들의 구전(口傳)입니다. 어떤 사람이 풀을 베는 낫을 빌리러 옆집에 갔어요. "낫 좀 빌려주세요"했는데 그 집에서는 "못 빌려주겠는데" 합니다. 분명히 낫이 있는데도 안 빌려주는 것입니다. 낫을 빌리러 갔던 사람은 당연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낫을 빌려주지 않았던 그 사람이 며칠 뒤에 낫을 빌리러 갔던 이 사람한테 와서 부탁을 합니다. "일전에 낫을 못 빌려준 것은 미안하오. 그렇더라도 나는 지금 말이 필요하니 말 좀 빌려주시오." 이럴 때, "내가 낫을 빌리러 갔을 때에는 안 빌려주었으면서 나한테는 우리말을 빌려달라고 해? 못 빌려줘"한다면 이것은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장군, 멍군한 것이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낫을 안 빌려줬으니 나도 말 못 빌려준다―당연한 것 같지만 이것은 복수를 한 것입니다. 이빨에 이빨로 복수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을 빌려주겠소"하고 내줍니다. 이것은 미움입니다. 사랑이 아니예요. 이것이 선민임을 자부하는 저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유대사람들의 고집이예요. 사람들이 다 우리를 핍박해도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어떻습니까? 알아들을 것 같습니까? 네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봐라, 나는 이 정도 수준에서 이런 말 듣고 너를 미워할 사람이 아니다, 너는 낫을 안 빌려주었지만 나는 말을 빌려줄 것이다―여러분, 말을 빌려 가지고 간 사람이 좋아해야 합니까, 불쾌해야 합니까? 수준이 낮은 사람은 좋아할 거예요 그러나 알고 보면 말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굉장한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높은 위치에서, 사람 같지 않은 것을 내가 이렇게 사람으로 대한다, 하 교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분 나쁜 거예요. 자기는 자꾸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남은 자꾸 못된 사람으로 만들 때, 이것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유대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네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핍박해도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선민이니까, 우리는 이 수준에 있으니까―이것이 미움이예요. 그러니까 자기들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것이지요. 동등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릇 더불어 행복할 줄 하는 사람만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아지는 것을 축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우리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와 수준이 같아질 때에는 그것을 못 참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어요. 어떤 아가씨가 어디 가서 아주 마음에 드는 옷을 사 입었어요. 그런데 그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면 그 옷을 다시는 입지 않아요. 왜요? 기분 나빠 서지요. 나는 특별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영 못 참은 거예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이나 다른 백인들 사회에 가서 보면 우리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에 어렵게 생활하면 잘 도와줍니다. 그러면 이 민족은 인도주의적이고 인심 좋은가보다 하지요? 천만에요. 그들과 비슷해지기 시작하면 어림없어요.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 못 참아요. 거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고로 참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 빵 하나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나와 같아지는 것, 오히려 나보다 높아지는 것, 이것을 사랑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해요. 더불어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새도 장사하는 분들을 보면 별것도 아닌데 아주 비싸게 팝니다. 왜요? 똑같은 물건인데 비싸게 값을 매기면 사간다는 거예요. 나는 이만큼 비싼 물건을 가졌다, 그 마음이지요. 값이 싸야 팔릴 것 같지만 그것은 서민의 생각입니다. 그렇지를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집에 있고, 한 아들은 집을 나갑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아버지 유산을 받아 가지고 허랑방탕하다가 거지가 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며 반가이 맞이해 주지만 형은 싫어합니다. 내가 이 집에서 이렇게 수고하면서 아들의 본분을 지키느라 고생했는데, 저렇게 방탕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들이면 저는 종이고, 내가 선민이라면 저는 이방인이지, 어떻게 내가 저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느냐, 그게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율법을 지킵니다. 십계명을 알고, 또 천사가 계시해주었다는 613가지 계율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엔 이렇게 해야 되고, 이것은 먹지 말아야 되고, 이것은 먹어야 되고…… 많은 계율을 지키느라 애쓰고, 그것으로 인해 유대인의 긍지를 지니고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처럼 깨끗하게 정결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람된 높은 위상을 지니고 살고, 구원받는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것을 보니까 이방사람들―개처럼 살고, 돼지처럼 살고, 짐승처럼 형편없이 살던 사람들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하며 웃습니다만 그실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자기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이 화해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당신도 천당 갈 것이고 저 사람도 천당 갈 것인데, 그래 천당 가서도 싸우겠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당도 분명히 윗자리, 아랫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는 저 사람하고는 천당 가서도 안 만나겠다는 거예요. 참 맹랑하지요. 이런 마음이 바로 유대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것을 전하는 바울, 저 사람을 죽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유대사람이 이방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지적을 저들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성경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저들이 듣지 아니하리라, 그런고로 너는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바로 이런 큰 소란이 나기 전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절)."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엑사포스텔로 세'라고 하는 이 말은 '아포스톨로스'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사도로 보내겠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인즉, 유대사람들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강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너는 이방인에게로 가라'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의 내용은 완악함입니다. 유대사람이 이방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거예요.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교만하다는 거예요. 이 지적이, 이 비판이 저들의 마음에 못마땅했습니다. 이스라엘사람과 이방사람이 같다고만 해도 기분이 나쁜데, 이방사람이 더 낫고, 이스라엘사람은 복음에 관한 한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저들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찔림을 받을 때에 회개하지 않고, 반항하면서 완악해집니다. 더 마음이 굳어집니다.
게다가 이방사람과 자기네를 비교하는 논리, 그것이 더욱 더 마음에 안 들었어요. 사실 그렇습니다. 형제를 충고할 때에도 형과 동생을 따로 놓고 충고하면 잘 들어요. 그러나 형 앞에서 동생 나무라고, 동생 보는 데서 형을 때리면 형제가 다 못마땅해합니다. 기분이 나쁜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방사람들 있는 데서, 더구나 로마사람 있는 데서 유대사람은 완악하다, 차라리 이방사람이 낫다는 비판을 하면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제는 무슨 말도 필요 없어요.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씀마다 그를 꼭 죽일 수밖에 없는 소리로 들려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늑대가 숲 속에서 물을 마시려다가 조그마한 양 새끼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오라, 저것을 잡아먹어야겠다'라고 늑대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늑대가 체면이 있어서인지 그냥 잡아먹을 수는 없고 해서 양에게 말을 겁니다.
시비를 벌이는 것이지요. "어째서 너는 내가 먹을 물을 흐리고 다니느냐? 물을 흐리는 너같이 나쁜 놈은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까 어린양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늑대님, 당신은 냇물 상류에서 마셨고, 저는 하류에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늑대님이 마시는 물을 흐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말이 됩니다. 그러나 늑대는 이에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네가 일 년 전에 나에 대해서 못된 소문을 퍼뜨린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 오늘 너를 잡아먹겠다." 그랬더니 양은 "일 년 전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늑대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나를 못됐다고 헐뜯고 다녔다. 그런고로 너를 잡아먹겠다." 이것이 무슨 소립니까? 잡아먹기로 작심했으니까 이젠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을 죽이기로 생각했기 때문에 저들에게 이제는 무슨 말도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변명도, 어떠한 논리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없애버림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참으로 엄청납니다. 다시 말하면 더 큰 죄를 지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죄를 지어서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죽여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 시간에 바울이 말씀하는 복음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이것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게 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저 놈이 살아 있으면 내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이것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주관적이요, 실리적입니다. 결국은 의를 짓밟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보니, 천부장이 저를 보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권력의 남용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으로 끌어들이고는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바울을 가죽 줄로 묶고 때리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군중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으니까 응당 그 이유를 군중에게 물어야 될 것입니다. 왜 죽이려고 하느냐고, 무슨 죽일 죄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군중에게 묻지 아니하고 바울을 치려고 합니다. 또 바울에게 먼저 물어봐도 됩니다.
바울이 충분히 대답할 수가 있는데, 먼저 저를 때려서 물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때린다는 것은 벌써 체형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문입니다. 사실을 떠날 때, 거짓될 때에 고문이 있는 것이지, 사실을 말하는 사람에게 고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죄를 정하고 벌을 주어야지, 벌부터 주고 죄를 묻는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득불 마지막 카드를 내놓습니다. "나는 로마시민이오"라고 말합니다. 로마시민, 로마시민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런 말까지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시민권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일 안하고도 먹고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많은 로마군인들이 전쟁에 나가서 노예를 잡아다가 자기 선거구의 사람들에게 하나씩 배급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노예가 일을 하니까 주인은 아무 일 안하고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또 로마사람에게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에게는 절대로 체형을 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어떤 죄를 지어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로마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이 유대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사람이기에 같은 처형이라도 목베임을 당했고, 십자가에 죽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시민을 군중 앞에서 매질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고 합니다. 왜인고하니, 로마 사람된 체면 때문입니다. 그만큼 로마사람에게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또, 로마시민의 자격에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군인으로 나가서 공로를 많이 세웁니다. 심지어 군인으로 7년, 10년 이상 공로를 세우게 되면 이방사람이라도 제대할 때에 로마시민권이 주어집니다. 둘째로, 돈을 많이 내면 로마시민권을 살 수 있습니다. 요샛말로 투자 이민 같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로마시민의 자녀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출생적으로 로마시민이 됩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지금 당장 큰 체형을 치를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시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여기서 생명을 보전하게 됩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이 군중들은 완악해져야 합니까? 바울은 왜 매를 맞아야 합니까? 아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바울은 먼 훗날에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억울한 고생을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생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유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으로 오늘의 모순적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욥은 말씀합니다. "내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고,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될 앞날의 약속을 믿고, 오늘의 이 고통을 겸손하게 온유하게 믿음으로 잘 참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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