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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사도행전 28:23~3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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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사도행전 28:2331)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여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오늘의 본문은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자 동시에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로마까지 갔다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도행전의 기록 정신이, 또 사실도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라고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퍼지고 사마리아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다시 이 복음이 헬라로, 이제는 로마로 갑니다. 그 당시 저들의 세계관으로는 로마까지가 땅 끝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까지 가고자 소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서 로마까지 전해지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무려 2년 동안 감옥생황을 하게 됩니다. 비록 얼마간의 자유를 얻었지마는 여전히 그는 자유의 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재판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보내게 되는 이 2년의 감옥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미 그는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기다리느라 2년의 세월을 보낸 바 있습니다. 그 때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있던 그 2년 동안 그야말로 속이 답답하고, 괴롭고, 껄끄럽고, 또 초조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감옥에서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나, 분명히 로마까지 간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왜 이렇게 지연되는가'하고 상당한 의심과 고통, 혹은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아무리 궁리해봐도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재판을 받는 도중에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그래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본래는 자유의 몸으로 가서 그 옛날 고린도나 아덴이나 혹은 에베소에서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좀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아닌, 쇠사슬에 묶인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갑니다. 로마에 가서도 재판을 기다리느라 또 2년을 보냅니다. 그러나 똑같은 2년의 세월이지만 바울의 지금 심경은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그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을 뻔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살았고, 그 일행 전부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이제껏 가지고 왔던 짐과 재산, 그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린 채 간신히 생명만을 구제 받아서 로마에 오게 됩니다.

여기서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 고난 속에서 저 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화물과 온갖 짐들은 다 버리게 되고, 결국은 바울의 손에 매였던 쇠사슬이 풀리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이제 한층 더 높고 성숙한, 선교에 대한이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감옥에서는 답답하고 괴롭게 지냈지만 로마 감옥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감옥생활이요, 재판 없이 무료하게 지내는 고생스러운 생활이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현실 안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쩌면 로마에 오기까지 겪었던 모든 고난이 바울로 하여금 선교에 대한 이만큼 높고 성숙한 이해를 하게 했을 것이다, 라고 믿어집니다.

한편 로마정부도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대로 순탄하게 로마까지 왔더라면 로마정부가 그를 이렇듯 호의적으로 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사람이지만 로마의 속국인 유대에서 왔습니다. 그런고로 이렇게까지 바울을 후하게 대할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풍랑 속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오묘하게 나타나는지 역력히 보았습니다. 백부장과 선장, 선주, 그 모든 로마군인들이 일제히 이구동성으로 로마정부에 보고하고, 설득하고, 또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위험하지 않은 죄수로 인정을 받고, 또 특별한 호의를 받습니다. 그에 대한 특별한 재판이 없었으니 석방할 수는 없고, 그래서 성경에 보니 바울은 지금 가택연금 된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집에 갇혀 있는 채로 로마군인, 특별히 친위대 사람들이 하나씩 교대로 바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이만큼의 자유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많은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 마음대로 시내에 다닐 수도 없고, 어느 집에 갈 수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바울에게 찾아오는 것은 자유롭게 허용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보세요. 환난과 큰 고통을 통해서 바울은 얻은 바가 많고,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주변환경에 대해서는 더더욱 엄청 난 이득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네로 황제는 삼권(三權)을 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죄인들을 친히 재판합니다. 특별히 죽이고 살리는 문제가 걸린 죄인인 경우에는 반드시 네로가 재판을 합니다. 저가 '죽여'하면 죽이는 것이고, '살려' 하면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수는 너무너무 많고 네로 황제가 좀 교만하기도 해서 재판을 받아야 할 죄수가 자꾸 밀렸답니다. 그 당시 기록에 보면 죄수가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못 받고 몇 년씩 지내는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도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재판을 받지 못하고 기다립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드디어 로마까지 왔으니까 이제는 빨리 감옥 문이 열려서, 무죄석방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려는가보다, 합니다. 왜요? 분명히 주님께서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복음을 로마까지 전할 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옥에 와서 하릴없이 썩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는 반드시 석방되어서 복음을 로마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또 2년 동안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썩습니다. 그러나 그는 옛날의 바울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초청해서 전도했고 특별히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유대사람들을 불러서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사람들로 말미암아 30년 동안이나 핍박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대사람들을 자기 앞에 불러서 복음을 전하게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자기가 본래 생각했던 대로 넉넉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또 자기가 소원 했던 대로 환경이 전개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처한 현실 속에서 가능한 선교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여전히 그는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여전히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불만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길이 없다고 그대로 입을 닫은 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의 그 처지 그대로 선교의 문은 열린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고 열린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작은 문이라도 열렸다면 그리로 들어갈 일이지, 이것은 내 마음에 안 든다며 큰문이 열리기만 기다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이 만약 그러했다면 그 2년 동안 아무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새도 그런 경우가 많아요. 선교란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 좀더 넓게 열리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희망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좋고, 허락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당한 지금의 이 처지 이대로가 선교지요, 또한 선교의 가장 효과적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병들었으면 병든 대로 병원에서 전도하고, 여행 중이면 여행하면서 전도하고, 실패했다면 실패한대로 전도의 길이 있어요. 꼭 성공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부자라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꼭 지성인이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복음을 전한 것과 같은, 그런 선교적 자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런 이해만 있다면 누구든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그의 우거하는 집에(23)"-----자기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둘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23)"-----어느 때에든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가이 만나면서 꾸준히 전도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일자를 정하고(23)"------요샛말로 하면 스케줄을 잡아서 '당신은 아침에 오시오, 당신은 점심에, 당신은 저녁에 오시오'하고 사람들이 혼동하지 않게 날짜를 정해 가지고 차례로 하루종일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담대히"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30, 31)"-----이 담대함, 이 용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감옥에 처넣고 이렇게 2년 동안이나 썩힌다고 해서 불만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왜 나는 이래야 합니까, 라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담대하게,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현실 안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요, 자유인이 아닙니다. 얼마간의 자유가 주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목숨을 하나님께 다 바치고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는 로마까지 오면서 저 풍랑 속에서 이미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 어려운 고난을 다 겪었기에, 종래에도 복음적 담력이 있었지만 오늘의 담력은 보다 더 실제적인 것입니다. 누가 다시 체포할까봐 꺼릴 것도, 매맞을까봐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혹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죽었던 목숨입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순수하게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했어요.

여러분, 세 가지 걱정을 안 하면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첫째는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둘째는 실패할까 하는 걱정입니다. '이게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보세요. 앞으로 어떻게 되든 바울에게는 상관이 없어요. 길 열리면 가고 안 열리면 말고, 감옥에서 이대로 있다가 죽으면 죽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아무 미련도, 걱정도 없어요. 그런고로 그는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오늘 여기서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특별히 친위대사람들을 만나면서 복음이 조용하게,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로마 세계를 향하여 퍼져 들어갑니다. 이것을 보면서 그는 감사했어요. 비록 눈앞에 굉장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히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줄기차게 전도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일본에 가서 그곳의 교역자님들과 만나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있어요. 일본 교인은 수는 적지만 예수는 잘 믿는다고 하는데, 그 생각을 버리기 전에는 당신들의 교회가 부흥하지 않습니다." 계란을 낳지 못하는 닭도 닭입니까? 전도하지 않는 교인이 교인입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금년 1년 동안에 나로 인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봉사하느니 뭐니 했습니다마는 정말로 내가 전도해서 예수 믿게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완전히 공친 거예요. 헛산 거예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산적 신앙이라야 합니다. 나로 인해서 불화한 사람들이 화해하고, 나로 인해서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게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생겨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마는 전도합니다.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어요. 왜요? 그가 받은 복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그립바왕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하는 간절한 마음이 그에게 있어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목사가 자기 아이들보고도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종교는 자유라고. 그래서 내가 정면으로 얘기했어요.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것이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입니까? 여기에 답답함이 없다면 잘못된 것이지요.

일본교회가 부흥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들이 근본적으로 잘못 믿으면서도 잘 믿거니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리우기 파라시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을 때에 이상하게 그 얼굴이 이지러지고 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바이올린 수집가였다고 합니다. 한평생246개나 되는 바이올린을 세계 도처에서 수집했습니다. 그저 진기한 것이라면 사다가 자기 집 천정에 감춰놓고서 그 비싼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쳐다보고 쓰다듬으면서 즐겼다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바이올린을 즐길 것 같으나 바이올린의 선율을 즐길 줄 몰랐어요. 아니, 어쩌면 아름다운 선율을 강탈하는 죄를 지었어요. 바이올린으로 좋은 음악을 연주해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하겠는데, 전부 사들여서 꽁꽁 묶어놓으니 바이올린은 소리가 없어요. 그 좋은 바이올린이 썩고 있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인----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남달리 어려운 여건에 있으면서도 자기불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운명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았어요. 자나깨나 생각하는 것은 오직 전도였어요.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는 복음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이해했어요. 그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나라의 회복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이고 세계적인고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 그것을 의식했어요. 지금 눈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오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야겠다-----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agent로서 서둘러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왔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전파되고, 주의 재림과 함께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입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구약에 있는 성경적 맥락에서 설명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23)"---사실 '율법''선지'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별명, 즉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의 성경은 신약, 구약으로 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의 성경은 율법과 선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의 맥락에 따라,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를 우주적인 메시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메시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 문제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듯 수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상상해보세요. 바울이 얼마나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종입니까?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쳤지요, 30년 동안이나 많은 핍박을 당했지요, 박학다식하지요…… 체험으로나 지식으로나 능력으로나 영역으로나 확실한 주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두 갈래로 나뉘었어요. 오늘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24)"-----'믿는 사람이 많더라'라고만 했으면 좋을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전도했을 때에 "그럼요, 꼭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갈게요"하는 대답만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전도했다고 해서 다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오늘 믿고, 어떤 사람은 10년 후에 믿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예요. 어떤 사람은 영영 안 믿어요.

가끔 이런 얘기가 오고갑니다. 예수 믿는 예쁜 아가씨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신랑감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게 마땅치 않아서 저한테 물어옵니다. "목사님, 믿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해도 좋을까요?" 저는 대답을 이렇게 합니다. "그래, 예수 믿게 할 자신이 없느냐?" "잘 꼬셔봐야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다른 일은 내가 수고한대로 다 된다고 하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수 믿는 일만큼은 마음대로 못한다. 예수께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 행여라도 네 남편이 하필이면 가룟 유다가 되면 어떻게 하는냐? 그러면 일생동안 한 남자를 위해서 전도하다가 끝날 것이 아니냐? 이런 불행이 어디에 있겠느냐? 정말 그렇게 될는지도 몰라."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믿는 일만은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을 보세요. 사도 바울, 그 위대한 종이 복음을 전했는데 전부가 믿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안 그래요.

'믿는 자도 있고 안 믿는 자도 있더라'---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사람들이 다 믿으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저 나는 내 할 일을 다할 뿐입니다. 믿는 자는 믿고, 안 믿는 자는 안 믿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열 명에게 전도했는데 그 중 아홉 사람은 믿었어요 그런데 나머지 사람이 안 믿었어요. 이에 대하여 내가 계속 마음을 씁니다. '내가 불친절하게 대했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내가 설명을 제대로 못했나, 내 사랑이 부족했나'…… 이렇게, 믿지 않고 부정적 반응을 보인 그 사람에 대해서 자꾸 신경을 쓰다보면 그것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려요. 전도 못하게 돼요.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가지는 고민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부분까지는 우리가 할 도리를 하지만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안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께도, 바울에게도 어찌 우리에게 없겠습니까?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가 30년 동안 설교학을 가르치는데 학생들에게 가끔 이런 주의를 줍니다. 설교할 때에는 열심히 듣는 사람만 보고 설교하라, 조는 사람이 눈에 띄거든 빨리 다른 데로 눈을 돌려라----조는 사람을 보고 그쪽으로 신경을 써서 자꾸 소리를 치고, 책상을 치고, 이러면 큰일나는 거예요. 또 더욱 거슬리는 사람은 장난하는 사람입니다. 요새도 가만히 보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그것도맨 앞에 와 앉아서 둘이서 손잡고 서로 주물주물 만집니다. 설교는 듣는 것 같아요. "사랑하라" 하면 '너나 사랑하라'라는 식으로 옆을 쿡 찌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앞에 앉아 있으면 저는 '아이고, 이것 시험에 들겠구만'하고 다른 쪽을 보고 설교합니다. 그런 모습을 자꾸 보면 안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인격에서 나쁜 점이 보이거든 거기에서 빨리 눈을 돌려야 합니다. 보지 말아야 되는 것처럼, 기억하지 말아야 되는 것처럼. 특별히 전도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보면 이렇게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것, 신경 쓰지 마세요. 교회에 나오면서도 좋은 교인이 굉장히 많은데 그들을 사귀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좋지 않은 사람하고 사귀어서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그리고는 전체를 바쁘게 봅니다. 교회도 그렇더라, 교인도 그렇더라…… 참 잘못된 일입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와서 전도 받은 사람 가운데 안 믿는 사람에 대해서 자꾸 신경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내가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했는데 그래도 안 믿어?'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다시는 전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의욕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믿지 않는 사람, 유감스러운 사람, 부정적 반응을 가지는 사람에 대해서 마음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는 곧 성경 안에서 이것을 소화해냈어요. 성경 안에서 해석해버리고 말았어요.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납니다. 그는 성경을 보았어요.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26)"------그런 줄 알고 전도하라고 합니다. 이사야 69절 이하에 있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이 사람들은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미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어두워져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함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10, 20년을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안 믿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에 있는 말씀을 다 외우고 명상하면서 이런 것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어요. 그러므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꾸 생각하기 시작하면 담력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내가 뭐가 부족했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끝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성경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깨끗이 해석하고 풀이하고서 다시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높은 차원에서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28)"-----사도 바울은 이렇게 유대사람들이 잘 안 믿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이 이방에게로 가고 있구나'하고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이방인에게로 보냄을 받는구나, 합니다. 한 문이 닫힌다는 것은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핍박과 환난을 통해서 선교 전략을 보았습니다. 소위God's strategy of mission, 하나님의 선교 전략을 핍박 속에서 보았어요. 유대사람들이 이렇게 끝까지 안 믿는 것을 보면서 '복음이 이방에게로 가고 있구나'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28)"----내가 이방인의 사도요,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 저희는 들으리라,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합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기 있게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31절을 끝으로 그 후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맨 마지막에 있는 이 31절의 말씀을 보세요.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왜 누가가 그 다음의 얘기는 쓰지 않았을까요? 이 다음부터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을만한 전설에 따르면 그 다음 얘기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바울이 2년 후에 석방되었다가 곧 다시 체포되어서 순교했다는 얘기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2년 후에, 바로 네로 황제의 핍박 때에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잠깐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는 얘기나 그대로 순교했다는 얘기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마는 어쨌든 바울은 이 로마감옥에서 순교합니다. 순교 이야기를 누가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죽었다---이렇게 사도행전을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도 그만한 자가 없었더라---이렇게 마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이렇게 사도행전을 마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요 소망의 복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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