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사도행전 27:27~37)

by 【고동엽】 2022. 11. 3.

 

목차로 돌아가기

이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사도행전 27:273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리리라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을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고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사도행전 강해도 어느덧 104회 째입니다. 그러니까 2년에 걸쳐서 지금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참 철저하게 공부하는 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34)"----얼핏 지나치기 쉬운 말씀입니다 마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간곡한 권유를 물리치고 미항이라는 안전한 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모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겨울을 나자, 하면서 모험을 해서라도 향락의 도시인 뵈닉스로 가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뵈닉스로도 못 가고 도중에 풍랑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합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애도 써봤습니다 마는 다 부질없었습니다. 이제는 배에 실었던 짐까지 다 버렸습니다. 생명만이라도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기술, 능력…… 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갈 뿐입니다. 그야말로 운명을 하늘에 맡겼습니다. 이렇게 열 나흘이나 쫓겨가다가 저들은 어느 육지에 접근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여기가 어디라는 것을 알고 앞과 뒤를 바라보면서 노를 저었다던가 혹은 돛을 달고 키를 움직였다던가 해서 방향을 정하여 육지로 가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이제는 노를 젓는 것도 아니고 키를 잡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갑니다. 이렇게 가다가 어떤 바위에 부딪히거나 혹은 그대로 육지에 다다른다면 배는 여지없이 깨질 것입니다. 뻔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사공입니다. 그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워진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아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캄캄한 밤이지만 우선 냄새로 압니다. 바람의 방향을 봐서 압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고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육지에 가까이 왔구나'하고 알아챕니다. 그러면 바다 깊이를 재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깊은가 재고, 또 재고…… 점점 깊이가 얕아집니다. 그래, 육지에 가까이 왔구나, 하고 확신하는 순간, 사공들은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이 배는 파손된다.' 왜요? 배를 사람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까 어디에든 그냥 가서 부딪힐 것이거든요. 이 나무배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보나마나 그대로 이 풍랑 속에서 깨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공들은 '배가 깨지기 전에 우리부터 먼저살아야겠다' 해서 몰래 거루를 내려 가지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게 사공들의 마음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지요. '이 배는 분명히 파손된다. 그러니 나만이라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 중에 우리말이지만 잘 쓰지 않는 말이라 아마도 여러분이 잘 모를 단어가 세 개 있어요. '거루'라는 말이 있지요. 이건 조그마한 배, 배 위에 싣고 가는 배입니다. 풍랑이 있을 때에 내려놓는 구명선입니다. 그리고 '고물' '이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고물이라는 것은 배 뒤쪽, 그러니까 돛대 바로 뒤쪽에 좀 평평한 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물에 베개하고 누우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또 이물이라는 것은 배 앞쪽을 말합니다. 뱃머리 쪽,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거기에 좀 평평한 데가 있지요? 그것이 이물입니다.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29,30)"------그러니까 배 뒷전에 닻 네 개를 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이물 쪽에서 닻을 내리는 것처럼 하면서 사공들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공들, 참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풍랑이 워낙 거세니까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 어떻게 자기들만 살겠다고 거루 몇 개를 내려 가지고 도망가려 합니까? 배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거든요. 육지에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또 육지에 이르면 무방비상태에서 부딪히기 때문에 배가 깨진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오직 사공들만 압니다. 경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한다, 붙들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이없게도 죄수가 백부장에게 명령하고 있어요. 평안할 때에는 백부장이 큰소리를 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죄수는 꼼짝도 못하고 배 밑창에 쇠사슬에 묶여 꿇어앉아 있습니다. 그 다음의 본문에 나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지금도 묶여 있어요.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 바울이 명령을 합니다. '사공들을 붙잡아라. 이 사람들을 놓아보내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거룻줄을 잘라버립니다. 그 작은 배들을 떠내려보내고 맙니다. 우리는 공동운명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이렇게 바울은 저들을 한 배에 전부 모여 앉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특별히 본문 31절을 보세요.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살아남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34절을 보세요.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구원받기 위해서는 먹어야 함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하나는 이 사람들을 붙잡아라, 이 사공들을 놓아보내면 안 된다,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먹어라, 먹어서 기운을 차려라,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는 그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에 식사할 때에는 바울이 꼭 성찬만 예식을 행하는 것 같아요.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하고(감사기도를 드리고) 식사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경우, 이것은 아버지가 하는 일입니다. 음식을 차린 후 식구가 죽 둘러앉으면 아버지가 먼저 일어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고야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던 성만찬 예식처럼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떡을 떼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이렇게 하느냐? 우리들은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왜 예수 믿는 사람 취급하느냐? 바울, 제가 뭔데 우리더러 먹으라 마라냐?'----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야말로 바울은 이 시간에 엄청난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276명이 모두 그에게 순종합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 중에 아주 재미있는 신학적 상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분명히 22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 무사하겠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24절을 보세요.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 무사할 것입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풍랑도 있고 배도 깨지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으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모두가 무사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한 일은 매우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마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저들은 미항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떠났습니다. 그들이 한 짓을 보아서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사 27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모두를 무사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자신 있게 저들에게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야하고, 그러므로 바울이 탄 배는 무사해야 합니다.

다 죽고 바울 하나만 가도 안됩니다. 모두가 무사해야만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바울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자 하시는 경륜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저들이 말하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을 제외한 275명 모두가 이제 전도자가 되는 거예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살아야 합니다. 다 무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34절에서 확실하게 약속합니다.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 그러면 이제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또다시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따르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있어야 구원이 있겠다, 먹어야 구원받겠다'---왜 이런 말씀이 뒤따르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이 두 가지에 따라야 한다고 약속합니다.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사공들이 필요하다---하나님의 능력은 있어요. 약속도 있어요.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사공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공들에게는 바다에 대한 지식, 풍랑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또한 기술이 있어요.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는 경험이 있어요. 항해하다보면 여러 차례 이런 풍랑 저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배가 파손되기도 하는데 저들은 이를 다 겪어본 사람들이예요. 그런고로 이런 지식과 기술과 경험이 있는 사공들이 지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말고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하게 이들이 필요하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제한적 권한 안에서 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기술이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능력, 그 제한적 능력 속에서 저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주어진 권한이 있어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은 시간에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저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둘째는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은데 음식은 무슨 음식, 그것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나'하지만 안 그래요. 먹어라, 먹어야 구원받는다, 이것이 너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라고 사도 바울은 명령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마는 이 배가 결국에는 파손됩니다. 그럴 때에 육지가 앞에 바라보입니다. 어떻게든 거기까지 헤엄쳐 가야 하는데,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쳐서, 헤엄 못치는 사람들은 헤엄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허우적거리면서라도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기력을 차려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열 나흘이나 굶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기력을 차려야 이제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으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은 얼마나 필요한가----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보충적 의미로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가'라고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의 수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 없이 하나님께서 좀 화끈하게 해주셨으면'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공부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학비도 마련되게 해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집중력도 주시고……,그래서 시험에 합격한다----이렇게 생각 안 해요. 그저 '내가 잘 때에 내 꿈속에 시험 답안지가 딱 보여야 돼' '시험 본 후에 밤중에 어떤 사람이 시험답안지를 확 바꿔놓았으면'합니다. 별걸 다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마음이 바로 도박꾼의 마음이예요. 여러분, 하나님과 맞서서 도박할 생각하지 마세요.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때에 이를테면 헬리콥터로 태워 나르듯이 확 옮겨놓으시면 안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이나 저들을 광야에 두셨어요. 그리고 매일같이 만나를 먹이셨어요. 고생을 시키심입니다.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나아가서는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기쁨, 그 소유하는 감격도 제대로 가지도록 하셨어요. 그래야 가나안이 저들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는 내 것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내 것이 아니거든요. 더구나 영적으로는 남의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같은 과정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굉장한 기적을 바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보면 분명히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안 먹어요. '나 약 안 먹으렵니다. 하나님께 맡기렵니다'---이러면 믿음이 있는 것 같고, 오히려 약을 먹겠다는 사람이나 수술을 받겠다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손을 모으고 가만히 있을 테니 하나님 다 해주세요'---이런 것은 얼마나 잘못된 신앙인지 모릅니다. 굉장한 것만을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평범한 가운데 혹은 순리성이 있는 기적을 생각해야 됩니다. 약을 먹었어요, 그래서 나았어요, 이것도 기적입니다.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그것을 알아야 해요. 약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니겠어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를 생각해보세요. 12세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딸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달리다 굼"--'딸아, 일어나라.' 모두가 깜짝 놀라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참 마음에 들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일어난 후에 이제 먹을 것을 주라, 하셨어요. 오래 앓는 동안에 허약해졌으니까요.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 부분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건강을 돋울 수 있거든요. 만일에 음식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또 죽는 거예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장면은 또 있어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그의 무덤을 찾아가셨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을 옮겨 놓으라"하셨어요. 무덤을 막는 돌은 무척 커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야 움직이거든요. 사람들이 끙끙대면서 옮겨놓습니다. 그때에 옆에서 마르다가 한마디합니다.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열어보나 마나 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했을 때는 안 오시더니 죽은 다음에 와서 열어보시면 뭘 하겠어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요.' 이 말일 것 같아요.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돌을 옮겨는 놓았어요.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소리치셨는데, 보세요. 나사로가 걸어나오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이런 짓궂은 생각을 해봅니다. 애초에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 것도 없이 그냥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소리치실 때에 바위가 ''하고 깨지면서 나사로가 나오고…… 이래야 좀 멋있을 것 같지 않아요? 또 그 다음에 보니 나사로의 몸을 쌌던 천을 '풀어 주라'하세요. 기왕에 살아났으니 천이 절로 뚝뚝 끊어진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때에 이렇듯 멋있게 하시지 않으셨을까? 기왕에 하실 바에야 한바탕 좀 근사하게 하시지…… 그러나 보세요. 돌을 옮겨놓는 것도 우리더러 하라 하셨고, 천을 풀어주는 것도 우리더러 하라 하셨고, 또 오랫동안 굶었으니 먹을것을 주는 것도 우리더러 하라 하셨어요. '나사로야, 나오라'---그것만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여기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분야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무슨 말을 듣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우연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이 모든 일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건강을 주실 때에는 우리의 절제를 통해서 주십니다. 나는 절제하지 않고 되는대로 먹고, 되는대로 자고, 되는대로 방탕하면서 '하나님이여, 건강 주세요'--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기도도 잘못됐거니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식도 있습니다.

아는 바도 있고 가르침 받는 바도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에 유익하다, 이것은 건강에 해롭다---그래서 유익한 것을 따라갑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지식을 주시고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를 건강케 하십니다.

이 시간에 덕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제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간증 삼아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에 제가 감기에 걸려서 음성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런 가운데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 방송을 저 부여에 있는 어는 목사님이 들었어요. 제가 가르치고 사랑하는 제자 목사님이었어요. 그 분이 방송을 들으면서 '아이구, 목사님이 감기에 걸리셨구나' 생각하고는 차를 타고 부여에서 여기까지 저를 만나러 왔어요. 마침 제가 자리에 있어서 만날 수 있었지요. 저를 보고하는 말이 "목사님, 감기에 걸리셨더군요"합니다. "좀 좋지 않아." 그랬더니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갑상선에 탈이 나서 굉장히 고생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술도 받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암으로 커져서 이제 안되겠다는 선고를 받았어요. 그래 저는 꼭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건강에 관한 책을 주기에 보니 '냉온욕을 열심히 하라' 하데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보자'하고는 3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아침저녁 냉온욕을 했어요. 바로 사택 옆에 공중목욕탕도 있었지요. , 그랬더니 어느 결에 병이 나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기적을 경험했는데 목사님, 기침이나 하고 계셔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이상하게도 빨리 가서 목사님한테 이 얘기를 하고 싶더군요. 저만 알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제가 다 말씀드렸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는 책을 한 권 주고 갔어요. 그래 그 책을 제가 읽어봤지요. 그런데 제가 오래 전부터 알레르기가 있었거든요. cold and dust, 찬 기운이나 먼지가 있으면 잘 못 견뎌요. 그래서 차가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것 때문에 늘 아침이면기침이 나고, 목이 자꾸 상하고, 또 코와 눈도 좀 나쁘고 해요. 아무튼 이 알레르기 체질 때문에 아주 고생을 하는데 저는 이게 평생의 십자가인 줄 알았어요. '이것은 육체의 가시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지내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책에 '알레르기는 거뜬하게 고칠 수 있다'라고 씌어 있는 거예요. 냉온욕을 부지런히, 책에 있는 대로하라는 거예요. 그대로 제가 실천했지요. 3년 동안 하루도 안 빠졌어요. 주일날도 예배 마치고 바로 가서 했어요. 그렇게 했더니 나았습니다. 지금은 알레르기를 몰라요. 이것을 제가 직접 겪어보니까 하나님께 어찌 감사한지 모릅니다. , 하나님께서 설교하는 데 필요한 음성이나 건강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져 주셨습니까? 제가 이 냉온욕을 만 10년 동안이나 하고 있습니다. 공짜가 아니예요. 보세요. 이런 소식을 통해서, 저런 책을 통해서, 또는 어떤 것이든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그저 손바닥만 벌리고 앉아 '주여'만 하지 마세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일러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보고 하라고 하시는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 하시는 거예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좌우간 게으르고는 건강할 수 없어요.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 없이는 건강할 수 없어요. 총명도 그렇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분명히 약속은 있어요.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살 것이다. 안심하라. 틀림없이 머리털 하나라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사공들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먹어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는 거예요. 분명히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은 이루어질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우리가 순종해야 될 부분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어요. '저 땅을 네게 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 그런데 이 길을 통해서 이 율법을 지키라. 이 모든 율법을 지키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앞에 있고 확실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능력대로 별도로 나타난 일도 있지만, 혹은 대자연을 움직이고 천지개벽적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평범하게, 순리성 기적을 통해서, 혹은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병자를 고치셨는데, 멀리 집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일이 없어요. 환자가 집에 있더라도 예수님께 찾아와서 구했을 때에 고치셨어요. 주님과 만나는 환자들을 고치셨어요. 심지어는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릴 때에 그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어요. 그대로 멀리 계셔서 '유대 땅에 있는 모든 문둥병자들아, 나을지어다'-이렇게 호령하시지 않았어요. 이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 사공들이 필요하다. 저들의 경험, 저들의 지식이 필요하다. , 먹어라. 기운을 차려라.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큰 소리로 명령을 합니다. 이 많은 고난 속에서,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다 무효로 돌아가는 바로 이 절박한 시간, 이 위기에 있어서는 바로 주의 종만이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 하는 사람만이 강하게,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모두는 그 영적 권세 앞에 온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떡을 들고 축사할 때에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젓는다거나 거부할 사람이 없어요. 받아 벅어라 할 때에 안 먹을 사람이 없어요. 영적 권세-이런 위기의 때에만이 아니라, 죽을 때에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에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주의 종이 지닌 영적 권세를 높이 인정하고 사는 데에 생명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그저 "목사님, 목사님"하고 찾아요. 지금 제가 밖에 나가도 저 붙들고 기도해달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예비고사 바로 전날쯤 되면 그저 모든 이들이 저를 붙들고'제 아들을 위해' '제 딸을 위해'하면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여느 때에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이렇듯 간절함이 없어요.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풍랑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서서 명령을 할 때에 모두가 순종하는 그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로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바울의 말씀에 순종해야 삽니다. 그래야 삽니다.

약속은 있어요. 그러나 순종할 때에만 그 약속이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사도행전 27:273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리리라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을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고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사도행전 강해도 어느덧 104회 째입니다. 그러니까 2년에 걸쳐서 지금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참 철저하게 공부하는 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34)"----얼핏 지나치기 쉬운 말씀입니다 마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간곡한 권유를 물리치고 미항이라는 안전한 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모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겨울을 나자, 하면서 모험을 해서라도 향락의 도시인 뵈닉스로 가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저들은 뵈닉스로도 못 가고 도중에 풍랑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합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애도 써봤습니다 마는 다 부질없었습니다. 이제는 배에 실었던 짐까지 다 버렸습니다. 생명만이라도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기술, 능력…… 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갈 뿐입니다. 그야말로 운명을 하늘에 맡겼습니다. 이렇게 열 나흘이나 쫓겨가다가 저들은 어느 육지에 접근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여기가 어디라는 것을 알고 앞과 뒤를 바라보면서 노를 저었다던가 혹은 돛을 달고 키를 움직였다던가 해서 방향을 정하여 육지로 가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이제는 노를 젓는 것도 아니고 키를 잡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갑니다. 이렇게 가다가 어떤 바위에 부딪히거나 혹은 그대로 육지에 다다른다면 배는 여지없이 깨질 것입니다. 뻔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사공입니다. 그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워진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아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캄캄한 밤이지만 우선 냄새로 압니다. 바람의 방향을 봐서 압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고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육지에 가까이 왔구나'하고 알아챕니다. 그러면 바다 깊이를 재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깊은가 재고, 또 재고…… 점점 깊이가 얕아집니다. 그래, 육지에 가까이 왔구나, 하고 확신하는 순간, 사공들은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이 배는 파손된다.' 왜요? 배를 사람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까 어디에든 그냥 가서 부딪힐 것이거든요. 이 나무배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보나마나 그대로 이 풍랑 속에서 깨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공들은 '배가 깨지기 전에 우리부터 먼저살아야겠다' 해서 몰래 거루를 내려 가지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게 사공들의 마음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지요. '이 배는 분명히 파손된다. 그러니 나만이라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 중에 우리말이지만 잘 쓰지 않는 말이라 아마도 여러분이 잘 모를 단어가 세 개 있어요. '거루'라는 말이 있지요. 이건 조그마한 배, 배 위에 싣고 가는 배입니다. 풍랑이 있을 때에 내려놓는 구명선입니다. 그리고 '고물' '이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고물이라는 것은 배 뒤쪽, 그러니까 돛대 바로 뒤쪽에 좀 평평한 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물에 베개하고 누우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또 이물이라는 것은 배 앞쪽을 말합니다. 뱃머리 쪽,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거기에 좀 평평한 데가 있지요? 그것이 이물입니다.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29,30)"------그러니까 배 뒷전에 닻 네 개를 두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이물 쪽에서 닻을 내리는 것처럼 하면서 사공들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공들, 참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풍랑이 워낙 거세니까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 어떻게 자기들만 살겠다고 거루 몇 개를 내려 가지고 도망가려 합니까? 배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거든요. 육지에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또 육지에 이르면 무방비상태에서 부딪히기 때문에 배가 깨진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오직 사공들만 압니다. 경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한다, 붙들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이없게도 죄수가 백부장에게 명령하고 있어요. 평안할 때에는 백부장이 큰소리를 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죄수는 꼼짝도 못하고 배 밑창에 쇠사슬에 묶여 꿇어앉아 있습니다. 그 다음의 본문에 나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지금도 묶여 있어요.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 바울이 명령을 합니다. '사공들을 붙잡아라. 이 사람들을 놓아보내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거룻줄을 잘라버립니다. 그 작은 배들을 떠내려보내고 맙니다. 우리는 공동운명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이렇게 바울은 저들을 한 배에 전부 모여 앉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특별히 본문 31절을 보세요.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살아남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34절을 보세요.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구원받기 위해서는 먹어야 함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하나는 이 사람들을 붙잡아라, 이 사공들을 놓아보내면 안 된다,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먹어라, 먹어서 기운을 차려라,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는 그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에 식사할 때에는 바울이 꼭 성찬만 예식을 행하는 것 같아요.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하고(감사기도를 드리고) 식사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경우, 이것은 아버지가 하는 일입니다. 음식을 차린 후 식구가 죽 둘러앉으면 아버지가 먼저 일어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고야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던 성만찬 예식처럼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떡을 떼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이렇게 하느냐? 우리들은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왜 예수 믿는 사람 취급하느냐? 바울, 제가 뭔데 우리더러 먹으라 마라냐?'----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야말로 바울은 이 시간에 엄청난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276명이 모두 그에게 순종합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 중에 아주 재미있는 신학적 상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분명히 22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 무사하겠다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24절을 보세요.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세요, 내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 무사할 것입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풍랑도 있고 배도 깨지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으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모두가 무사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한 일은 매우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마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저들은 미항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떠났습니다. 그들이 한 짓을 보아서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사 276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모두를 무사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자신 있게 저들에게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야하고, 그러므로 바울이 탄 배는 무사해야 합니다.

다 죽고 바울 하나만 가도 안됩니다. 모두가 무사해야만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바울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자 하시는 경륜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저들이 말하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을 제외한 275명 모두가 이제 전도자가 되는 거예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살아야 합니다. 다 무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34절에서 확실하게 약속합니다. "너희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 그러면 이제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또다시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따르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있어야 구원이 있겠다, 먹어야 구원받겠다'---왜 이런 말씀이 뒤따르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이 두 가지에 따라야 한다고 약속합니다.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사공들이 필요하다---하나님의 능력은 있어요. 약속도 있어요.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사공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공들에게는 바다에 대한 지식, 풍랑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또한 기술이 있어요.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에게는 경험이 있어요. 항해하다보면 여러 차례 이런 풍랑 저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배가 파손되기도 하는데 저들은 이를 다 겪어본 사람들이예요. 그런고로 이런 지식과 기술과 경험이 있는 사공들이 지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말고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하게 이들이 필요하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제한적 권한 안에서 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기술이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나님의 능력, 그 제한적 능력 속에서 저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주어진 권한이 있어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남은 시간에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저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둘째는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은데 음식은 무슨 음식, 그것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나'하지만 안 그래요. 먹어라, 먹어야 구원받는다, 이것이 너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라고 사도 바울은 명령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마는 이 배가 결국에는 파손됩니다. 그럴 때에 육지가 앞에 바라보입니다. 어떻게든 거기까지 헤엄쳐 가야 하는데,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쳐서, 헤엄 못치는 사람들은 헤엄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허우적거리면서라도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기력을 차려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열 나흘이나 굶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기력을 차려야 이제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으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은 얼마나 필요한가----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보충적 의미로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가'라고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의 수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 없이 하나님께서 좀 화끈하게 해주셨으면'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공부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학비도 마련되게 해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집중력도 주시고……,그래서 시험에 합격한다----이렇게 생각 안 해요. 그저 '내가 잘 때에 내 꿈속에 시험 답안지가 딱 보여야 돼' '시험 본 후에 밤중에 어떤 사람이 시험답안지를 확 바꿔놓았으면'합니다. 별걸 다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마음이 바로 도박꾼의 마음이예요. 여러분, 하나님과 맞서서 도박할 생각하지 마세요.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때에 이를테면 헬리콥터로 태워 나르듯이 확 옮겨놓으시면 안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이나 저들을 광야에 두셨어요. 그리고 매일같이 만나를 먹이셨어요. 고생을 시키심입니다.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나아가서는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기쁨, 그 소유하는 감격도 제대로 가지도록 하셨어요. 그래야 가나안이 저들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는 내 것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내 것이 아니거든요. 더구나 영적으로는 남의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같은 과정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굉장한 기적을 바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보면 분명히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안 먹어요. '나 약 안 먹으렵니다. 하나님께 맡기렵니다'---이러면 믿음이 있는 것 같고, 오히려 약을 먹겠다는 사람이나 수술을 받겠다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손을 모으고 가만히 있을 테니 하나님 다 해주세요'---이런 것은 얼마나 잘못된 신앙인지 모릅니다. 굉장한 것만을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평범한 가운데 혹은 순리성이 있는 기적을 생각해야 됩니다. 약을 먹었어요, 그래서 나았어요, 이것도 기적입니다.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그것을 알아야 해요. 약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니겠어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를 생각해보세요. 12세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딸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달리다 굼"--'딸아, 일어나라.' 모두가 깜짝 놀라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참 마음에 들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일어난 후에 이제 먹을 것을 주라, 하셨어요. 오래 앓는 동안에 허약해졌으니까요.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 부분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건강을 돋울 수 있거든요. 만일에 음식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또 죽는 거예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장면은 또 있어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그의 무덤을 찾아가셨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을 옮겨 놓으라"하셨어요. 무덤을 막는 돌은 무척 커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야 움직이거든요. 사람들이 끙끙대면서 옮겨놓습니다. 그때에 옆에서 마르다가 한마디합니다.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열어보나 마나 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했을 때는 안 오시더니 죽은 다음에 와서 열어보시면 뭘 하겠어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요.' 이 말일 것 같아요.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돌을 옮겨는 놓았어요.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소리치셨는데, 보세요. 나사로가 걸어나오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이런 짓궂은 생각을 해봅니다. 애초에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 것도 없이 그냥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소리치실 때에 바위가 ''하고 깨지면서 나사로가 나오고…… 이래야 좀 멋있을 것 같지 않아요? 또 그 다음에 보니 나사로의 몸을 쌌던 천을 '풀어 주라'하세요. 기왕에 살아났으니 천이 절로 뚝뚝 끊어진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때에 이렇듯 멋있게 하시지 않으셨을까? 기왕에 하실 바에야 한바탕 좀 근사하게 하시지…… 그러나 보세요. 돌을 옮겨놓는 것도 우리더러 하라 하셨고, 천을 풀어주는 것도 우리더러 하라 하셨고, 또 오랫동안 굶었으니 먹을것을 주는 것도 우리더러 하라 하셨어요. '나사로야, 나오라'---그것만 예수님께서 하셨어요. 여기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분야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무슨 말을 듣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우연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이 모든 일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건강을 주실 때에는 우리의 절제를 통해서 주십니다. 나는 절제하지 않고 되는대로 먹고, 되는대로 자고, 되는대로 방탕하면서 '하나님이여, 건강 주세요'--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기도도 잘못됐거니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식도 있습니다.

아는 바도 있고 가르침 받는 바도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에 유익하다, 이것은 건강에 해롭다---그래서 유익한 것을 따라갑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지식을 주시고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를 건강케 하십니다.

이 시간에 덕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제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간증 삼아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에 제가 감기에 걸려서 음성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런 가운데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 방송을 저 부여에 있는 어는 목사님이 들었어요. 제가 가르치고 사랑하는 제자 목사님이었어요. 그 분이 방송을 들으면서 '아이구, 목사님이 감기에 걸리셨구나' 생각하고는 차를 타고 부여에서 여기까지 저를 만나러 왔어요. 마침 제가 자리에 있어서 만날 수 있었지요. 저를 보고하는 말이 "목사님, 감기에 걸리셨더군요"합니다. "좀 좋지 않아." 그랬더니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갑상선에 탈이 나서 굉장히 고생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술도 받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암으로 커져서 이제 안되겠다는 선고를 받았어요. 그래 저는 꼭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건강에 관한 책을 주기에 보니 '냉온욕을 열심히 하라' 하데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보자'하고는 3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아침저녁 냉온욕을 했어요. 바로 사택 옆에 공중목욕탕도 있었지요. , 그랬더니 어느 결에 병이 나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기적을 경험했는데 목사님, 기침이나 하고 계셔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이상하게도 빨리 가서 목사님한테 이 얘기를 하고 싶더군요. 저만 알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제가 다 말씀드렸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는 책을 한 권 주고 갔어요. 그래 그 책을 제가 읽어봤지요. 그런데 제가 오래 전부터 알레르기가 있었거든요. cold and dust, 찬 기운이나 먼지가 있으면 잘 못 견뎌요. 그래서 차가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것 때문에 늘 아침이면기침이 나고, 목이 자꾸 상하고, 또 코와 눈도 좀 나쁘고 해요. 아무튼 이 알레르기 체질 때문에 아주 고생을 하는데 저는 이게 평생의 십자가인 줄 알았어요. '이것은 육체의 가시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지내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책에 '알레르기는 거뜬하게 고칠 수 있다'라고 씌어 있는 거예요. 냉온욕을 부지런히, 책에 있는 대로하라는 거예요. 그대로 제가 실천했지요. 3년 동안 하루도 안 빠졌어요. 주일날도 예배 마치고 바로 가서 했어요. 그렇게 했더니 나았습니다. 지금은 알레르기를 몰라요. 이것을 제가 직접 겪어보니까 하나님께 어찌 감사한지 모릅니다. , 하나님께서 설교하는 데 필요한 음성이나 건강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져 주셨습니까? 제가 이 냉온욕을 만 10년 동안이나 하고 있습니다. 공짜가 아니예요. 보세요. 이런 소식을 통해서, 저런 책을 통해서, 또는 어떤 것이든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그저 손바닥만 벌리고 앉아 '주여'만 하지 마세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일러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보고 하라고 하시는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 하시는 거예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좌우간 게으르고는 건강할 수 없어요.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 없이는 건강할 수 없어요. 총명도 그렇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분명히 약속은 있어요.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살 것이다. 안심하라. 틀림없이 머리털 하나라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 사공들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먹어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는 거예요. 분명히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은 이루어질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우리가 순종해야 될 부분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어요. '저 땅을 네게 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 그런데 이 길을 통해서 이 율법을 지키라. 이 모든 율법을 지키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앞에 있고 확실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능력대로 별도로 나타난 일도 있지만, 혹은 대자연을 움직이고 천지개벽적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평범하게, 순리성 기적을 통해서, 혹은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병자를 고치셨는데, 멀리 집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일이 없어요. 환자가 집에 있더라도 예수님께 찾아와서 구했을 때에 고치셨어요. 주님과 만나는 환자들을 고치셨어요. 심지어는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릴 때에 그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어요. 그대로 멀리 계셔서 '유대 땅에 있는 모든 문둥병자들아, 나을지어다'-이렇게 호령하시지 않았어요. 이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 사공들이 필요하다. 저들의 경험, 저들의 지식이 필요하다. , 먹어라. 기운을 차려라.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큰 소리로 명령을 합니다. 이 많은 고난 속에서,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다 무효로 돌아가는 바로 이 절박한 시간, 이 위기에 있어서는 바로 주의 종만이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 하는 사람만이 강하게,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모두는 그 영적 권세 앞에 온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떡을 들고 축사할 때에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젓는다거나 거부할 사람이 없어요. 받아 벅어라 할 때에 안 먹을 사람이 없어요. 영적 권세-이런 위기의 때에만이 아니라, 죽을 때에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에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주의 종이 지닌 영적 권세를 높이 인정하고 사는 데에 생명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그저 "목사님, 목사님"하고 찾아요. 지금 제가 밖에 나가도 저 붙들고 기도해달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예비고사 바로 전날쯤 되면 그저 모든 이들이 저를 붙들고'제 아들을 위해' '제 딸을 위해'하면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여느 때에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이렇듯 간절함이 없어요.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풍랑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서서 명령을 할 때에 모두가 순종하는 그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로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바울의 말씀에 순종해야 삽니다. 그래야 삽니다.

약속은 있어요. 그러나 순종할 때에만 그 약속이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