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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소망을 인하여(사도행전 26:1~12)

by 【고동엽】 202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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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망을 인하여(사도행전 26:112)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나……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이 소망을 인하여(7)"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이 있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은 지 벌서 2년이나 되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간에 재판만 해도 네 번이나 한 셈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모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이 어찌 있을까 싶습니다. 재판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적어도 재판 맡은 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선뜻 석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연유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자기 처지와, 또 죄가 있건 없건 바울을 죽이겠다고 모의하고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 때문에 그를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형편이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고 저들도 죄 없는 줄 아는데 무죄 석방을 하지 못한 채 무려 2년 동안이나 이렇게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네 번의 재판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첫 번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폭도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 폭도들 앞에서 일단 천부장을 재판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정치권으로 넘겨져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총독이 바뀌어 이제는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 앞에서 또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네 번 재판을 받는데, 그 때마다 유대사람들은 원고가 되어서 갖은 말로 나름대로 그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죄목을 뚜렷하게 대지도 못하면서 판결의 결과만을 먼저 말합니다. "바울은 죽일 사람입니다"-왜 죽여야 된다는 이유도 변변치 않습니다. 전혀 납득이 가지 않고 말도 바로 안되면서 좌우간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이기 위해서 죄목을 말하는 것이지 죄목이 있어서 죽인다는 게 아니예요. 죽이겠다는 생각이 먼저 있는 것입니다. 결론이 먼저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저들은 열심히 고소를 했습니다. 또 재판장은 재판장대로 바울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심문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으며, 내가 왜 죄가 없으며, 저 사람들이 왜 나를 고소했으며…… 어쨌든 이렇게 자기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그는 변명할 때에 "나를 고소한 사람들이 이래서 나쁩니다. 저들이 나를 무고한 것입니다"라든가,"나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왜 나를 가두어두는 것입니까?"라든가 하는 얘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적어도 "왜 나를 석방하지 않느냐, 죄는 없다고 하면서 왜 석방하지 못하느냐"라는, 요새말로 하면 가장 정의로운 말입니다마는 이 말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입을 열어 말하라고 하는 기회를 줄 때마다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또다시 복음을 전하고, 또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 자기변명을 대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런 바울이 다섯 번째 재판을 받습니다. 오늘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또 자기변명을 하여야 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1)"--어디 말해보라, 이것입니다. 원고가 있고 재판장이 있는데, 원고가 고소하면 될 것을 피고에게 '네가 네 죄를 말하라'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아무튼 바울이 자기변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 그는 2년이나 여기 갇혀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섯 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아마 개인적으로나 혹은 작은 모임 같은 데서도 내내 이 모양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계속 자기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지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했습니다. 끝까지 그는 온유했습니다. 다섯 번이나 재판 받으면서 다섯 번이나 같은 말로 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 변명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변명 중 가장 긴 변명입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드릴 것도 계속해서 이 긴 변명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바울은 완벽한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침착합니다. 온유하게, 겸손하게 인내로, 사뭇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같은 말로 자꾸 물어보면 마지막에 짜증을 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장님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눈을 뜹니다. 눈을 뜬 다음에 사람들이 와서 자꾸 물어봅니다. "너를 눈뜨게 한 자가 누구냐? 그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죄인이라던데 그가 누구냐?" 마지막에는 눈을 뜬 사람이 아주 짜증을 냅니다. "왜 자꾸 물어보느냐?" 그도 그럴만해요. 정말입니다. 같은 얘기를 자꾸 해야 하는 것처럼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가 좋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앞서 변명할 때에 다 말했으니 기록도 있을 테고,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거기서 들으시오.

그러면 될 것 아니요? 왜 나한테 똑같은 말을 자꾸 하라는 거요?'-그렇잖아요? 수없이 이렇게 반복해서 말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참 짜증스러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백 번을 묻든 천 번을 묻든 물으면 대답해야 합니다. 오묘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똑같은 말을 물어도 똑같이 대답해야 합니다. 같은 자세로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내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페이스(pace)를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손님을 잘 대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번은, 사라도 어디 가고 없고 아브라함 혼자 있는데, 나이 100세는 넘은 웬 노인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먼 길 온 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마침 혼자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싶어서 자기 나름의 손님 대접하는 특유의 인간성을 발휘하여 노인을 앉혀놓고 음식을 만들어줄 테니 좀 기다리라 하고 딴에는 모처럼 좋은 일 한번 해볼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잘 마련해놓았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아브라함은 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이 귀한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손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하오며……" 그런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사이에 노인이 벌써 음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얻어먹는 주제에 적어도 기도하는 동안에는 참아야 될 것 아니예요? 그래 "당장 누구 없느냐?"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종이""하고 달려옵니다. "이놈을 잡아 끌어내라. 이 녀석은 하나님도 모를 뿐더러 기도하는 동안에 성급히 음식을 먹었다. 예의도 없고 체면도 없고 신앙도 없는 이런 나쁜 놈은 대접할 가치가 없다. 냉큼 내쫓아라!" 그래서 그 노인이 끌려나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아브라함아!" "?" "너 무슨 짓을 하느냐?" "저놈이 나쁜 놈이라서 내가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예절도 모르는, 이런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을 내가 왜 대접하겠습니까?" "이놈아, 나는 저 사람 회개하기를 백 년이나 기다렸다." 아차, 하고 아브라함은 황급히 "죄송합니다"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내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어요.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더구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저쪽은 맘에야 있건 없건 좌우간 듣겠다고 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원수라도 좋고, 미운 사람이든 고운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좌우간 내 말을 듣겠다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봉사 치고 밑천 안들이고 할 수 있는 봉사가 이것입니다. 들어주세요. 귀담아 들으세요.

지금 많은 사람 중에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기회를 줍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바울은 본래가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전도하는 사람이예요. 자기 사명적 입장에서 본다면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여기에 무슨 구구한 감정이 달리 있을 수 있습니까? 말하라면 해야지 "왜 또 같은 말을 하라느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이것을 새로운 기회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또 하나의 선교적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다시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실은 바울의 그 예리한 지식과 판단력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은 몹시도 기분 나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도 그렇고, 아그립바 왕이라는 형편없는 사람도 그렇고, 특별히 그 앞에 아내도 아니면서 아내 격으로 왕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버니게가 그렇습니다. 이세 사람이 높은 보좌에 죽 앉아 있고, 그리고 재판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죽 있으니, 생각하면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우선 도덕적으로 마땅치 않아요. 분위기가 마땅치 않아요. 요즘의 성급한 사람으로 말하면 정의감이 용납치 않아요. 저는 한번 이렇게 상상을 해봅니다. 이 자리에 세례 요한을 세워놓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독사의 종류들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욕먹어 마땅해요. 이것은 살로메의 얘기하고는 또 다른 거예요. 동생의 아내를 취한 얘기하고는 또 달라요. 그것보다 차원 높은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이런 분위기 속에 세례 요한이 있었더라면 눈을 부릅뜨고 사자소리를 토해냈을 것입니다. 있는 대로 욕을 했을 것 같습니다. 심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바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정직할 뿐입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 자된 자기페이스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돼먹지 않았고,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 순간에 내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상관없어요. 저가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아요.

두 번째, 바울은 상대방의 자격을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누군데 나를 심판하느냐?"-이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관하지 않아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비난도 비방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이것 하나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입니까? 그가 누구든 어떤 분위기이든 어떻습니까? 나는 상관없어요. 내 신앙, 내 본분만 다하면 되는 거예요. 대개 보면 다른 사람 잘못되는 것을 꾸짖다가 자기가 더 나쁜 사람이 됩니다. 어느 사이에 자기 본분도 다 잊어버려요.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그는 환경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지냈으니 "아그립바 왕이여, 정상을 참작하소서" 할만하지 않아요?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어디에 이런 정치가 있고 이런 재판 있단 말입니까?"…… 할말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분위기에 대해서도, 자기가 받은 처우에 대해서도 전혀 감정도, 유감도, 말도 없습니다. 다만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얼마나 확실합니까? 대부분 여기서 우리가 빗나가는 거예요. 내가 들어야 할 음성,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상대방만 생각하고 나쁜 놈, 나쁜 세상, 망할 세상, 하다가 제가 더 형편없는 사람이 돼버리더란 말입니다. 자기 본분을 다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로 포착한 것입니다. 뒷날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씀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하나님 앞에서 네 본분을 다하라"-정말 자격 있는 충고입니다. '사람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그것은 묻지 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복음 전하는 자된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바울 자신이 지금 실천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언제나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금 자기변명을 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하는 전도가 가장 효과적입니까? 가끔 건강한 사람으로서 병자를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요새사람들은 옛날과 달라서 자존심이 굉장히 세거든요. 그래서 좀 미안하지만 어떤 여집사님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얼마든지 사람 방문할 수 있고 맞을 수 있는 처지인데도 "면회사절"이라고 딱 써 붙이고는 교역자 외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니까 자기 추한 얼굴 안 보이려고 그런답니다. 그 마음 이해할만하죠? 그런데 또 눈치 없는 사람들은 방문하겠다고, 그래 추한 꼴을 좀 구경하겠다는 거예요. 아무튼 요새사람들은 건강할 때의 모습만 보여주고 병든 모습은 안 보이고 죽고 싶은 거예요. 그만큼 자존심이 강해요. 이제 문병하는 것도 재고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보십시요. 건강한 자가 있고, 병든 자가 있습니다. 건강한자가 병든 자를 방문했습니다. 둘 중의 어느 쪽이 예수를 믿든지, 이제 좀 생각해봅시다. 건강한 자가 안 믿는 병든 사람에게 지금 전도할 수 있는 때입니까? 전도가 받아들여집니까? 물론 전도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숨넘어가기 직전쯤 돼야 합니다. 전도 안 받아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방문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고, 병든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 때는 전도 100% 효과가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 참 비참하게 되어서 보고 있는 사람이 마음이 아픈데, 오히려 웃으면서 "예수 믿으세요. 건강할 때에 회개하시고 건강할 때에 좋은 일 많이 하세요. 나는 먼저 갑니다.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한다면 효과 있습니다. 저에게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저와 동급 반이었던 학생 하나가 마지막 학기 딱 6개월을 남기고 병원에 들어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폐결핵이 3기가 넘어서 폐수술을 했습니다. 보기에 참 민망하고 괴로웠습니다. 공부도 참 잘하고 앞날도 유명한 청년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친구들과 그를 문병 갔습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가서 무슨 말을 해야 되나'하고 참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까 그 친구가 얼마나 명랑한지 우리 서 있는 사람에게 누워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병원을 나왔는지 모릅니다.

, 이제 재판정으로 돌아가 봅시다. 재판장이 있고, 원고가 있고, 피고가 있습니다. 누가 전도할 가장 좋은 기회에 있는 것입니까? 재판장이 피고에게 전도하면 들어 먹힐 것 같습니까? 원고가 피고에게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이없게도 가장 가능한 사람은 피고입니다.

가장 억울하고 억눌림을 당한 바로 그 사람이 전도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만이 전도할 수가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업에 성공한사람이 실패한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어요? 그것은 불가능해요. 오히려 실패해서 많은 사람의 동정을 받는 바로 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성공한사람에게 전도할 수가 있어요. 바울은 지금 피고입니다. 아주 억울한 피고입니다. 죄 없이 죄인의 모습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담대하게 저기에 앉아 있는 재판장과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때가 유일하게 가능한 선교적 기회라는 것입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장면이지요. 여기에는 대단히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피고만이 선교가 유효하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보면 "아그립바 왕이여(2)……" 하고 시작을 합니다. 아그립바 왕을 칭찬합니다. 그게 선교전략의 하나입니다. 보세요. "유대인이 모든 송사 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2)"-내가 당신 앞에서 말하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참 다행한 일입니다, 라고 합니다. 억울하고 분합니다, 가 아닙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전도가 안됩니다. 그러면 문이 막히고 맙니다. 바울은'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보고 가능한 면을 보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이 문제를, 이 처지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행한 것'-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당신은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지요. 이것, 말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래서 아그립바 왕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결론을 보게 되겠습니다.

오늘 바울이 얘기하는 변명의 요점을 살펴봅시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나요?-먼저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6)"-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조상, 나와 당신의 조상, 곧 아그립바 왕과 나는 동족이라는 것입니다. 동질성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동질성을 기화로 변명하고 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나도(9)"라고 합니다. 이것도 동질성에 대한 얘기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당신과 똑같은 생각일 것입니다'라는 것이지요. "나도"-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이렇게 말하면 얘기가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나도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나 지금 나는 이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나, 내 지식이나, 내 전통이나, 내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오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보다도 더 극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광신적인 박해자였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을 뿐더러 다른 나라까지(다메섹은 당시에 다른 나라였습니다) 가서 도망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아예 다 끌어다가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이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무슨 말입니까? 나도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로부터는 아닙니다, 그런고로 내가 아는 대로 당신도 알고, 내가 믿는 대로 당신도 믿고, 내가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역사 한다면 당신도 나와 같아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귀중한 신학적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부활의 문제입니다. 8절을 보세요.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부활, 이 한 가지만 믿게 되면 당신도 나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니까. 예수의 부활, 이것 한 가지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소망에 대한 문제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게 무엇입니까? '베스도 각하'는 모릅니다. 무식합니다.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아그립바왕입니다. 그는 압니다. 유대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172절로4절이나 사무엘하 71절로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는 다윗 왕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시편과 모든 선지자들의 기록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리라"하십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에 대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은데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요. 뭐냐 하면 유대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신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유대 왕으로, 세속적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욕망을 채워준다는, 바로 그러한 협소한 민족주의적 소망입니다. 저들은 그런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바울이 말씀하는 이 소망은 해석이 다릅니다. 예수의 나심과, 예수의 사역과, 예수의 십자가와, 예수의 부활-예수사건 안에서 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소망의 성취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의견이 달라요.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같은데 소망의 질이 달라요. 예수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도 이 말씀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까지도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나이까(6)"-끈질기게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메시야관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인즉 이미 메시야는 왔고,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우주적 메시야로, 그리고 종말론적 메시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망은, 약속은 벌써 성취됐어요. 성취 안됐다고 믿는 사람하고 됐다고 믿는 사람, 세속적인 메시야로 기다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의 신앙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보았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고로 이 소망의 문제는 예수 부활 사건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같은 극악한 사람이, 나 같은 극단주의자가 이제 이렇게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됐고, 핍박을 받아도 나는 여전히 이 복음을 끝까지 전할 것입니다-여기에 숨어 있는 바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를 보시오. 내가 달라진 것을 보세요.

내 경험을 보세요. 이것을 이해하세요. 그러면 내가 왜 고난 당하는가를 알고 복음이 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믿음과 담력을 보세요. 내가 이렇게 담대하게, 이렇게 온유하게 오늘도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바울은 지금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형편이든지 바울 같은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회든지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로,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르쳐줍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그리고 나를 보세요, 내 변화를 보세요, 내 온유함을 보세요, 내 믿음을 보세요, 내 평화를 보세요, 주님께서 역사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을 당신도 믿으면 나와 같아질 것입니다, 라고.

이제 26장을 다 읽어내려 가느라면 끝 부분에서 심지어 이런 말도 합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참 대단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나 같은 믿음, 나 같은 은혜에, 나 같은 사람되기를 원합니다-사도 바울,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소망을 인하여(사도행전 26:112)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나……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이 소망을 인하여(7)"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이 있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은 지 벌서 2년이나 되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간에 재판만 해도 네 번이나 한 셈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모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이 어찌 있을까 싶습니다. 재판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적어도 재판 맡은 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선뜻 석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연유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자기 처지와, 또 죄가 있건 없건 바울을 죽이겠다고 모의하고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 때문에 그를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참 답답하고 괴로운 형편이었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고 저들도 죄 없는 줄 아는데 무죄 석방을 하지 못한 채 무려 2년 동안이나 이렇게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네 번의 재판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첫 번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폭도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 폭도들 앞에서 일단 천부장을 재판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정치권으로 넘겨져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총독이 바뀌어 이제는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 앞에서 또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네 번 재판을 받는데, 그 때마다 유대사람들은 원고가 되어서 갖은 말로 나름대로 그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죄목을 뚜렷하게 대지도 못하면서 판결의 결과만을 먼저 말합니다. "바울은 죽일 사람입니다"-왜 죽여야 된다는 이유도 변변치 않습니다. 전혀 납득이 가지 않고 말도 바로 안되면서 좌우간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이기 위해서 죄목을 말하는 것이지 죄목이 있어서 죽인다는 게 아니예요. 죽이겠다는 생각이 먼저 있는 것입니다. 결론이 먼저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저들은 열심히 고소를 했습니다. 또 재판장은 재판장대로 바울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심문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으며, 내가 왜 죄가 없으며, 저 사람들이 왜 나를 고소했으며…… 어쨌든 이렇게 자기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그는 변명할 때에 "나를 고소한 사람들이 이래서 나쁩니다. 저들이 나를 무고한 것입니다"라든가,"나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왜 나를 가두어두는 것입니까?"라든가 하는 얘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적어도 "왜 나를 석방하지 않느냐, 죄는 없다고 하면서 왜 석방하지 못하느냐"라는, 요새말로 하면 가장 정의로운 말입니다마는 이 말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입을 열어 말하라고 하는 기회를 줄 때마다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또다시 복음을 전하고, 또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 자기변명을 대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런 바울이 다섯 번째 재판을 받습니다. 오늘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또 자기변명을 하여야 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1)"--어디 말해보라, 이것입니다. 원고가 있고 재판장이 있는데, 원고가 고소하면 될 것을 피고에게 '네가 네 죄를 말하라'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아무튼 바울이 자기변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 그는 2년이나 여기 갇혀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섯 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아마 개인적으로나 혹은 작은 모임 같은 데서도 내내 이 모양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계속 자기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지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했습니다. 끝까지 그는 온유했습니다. 다섯 번이나 재판 받으면서 다섯 번이나 같은 말로 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 변명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변명 중 가장 긴 변명입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드릴 것도 계속해서 이 긴 변명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바울은 완벽한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침착합니다. 온유하게, 겸손하게 인내로, 사뭇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같은 말로 자꾸 물어보면 마지막에 짜증을 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장님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눈을 뜹니다. 눈을 뜬 다음에 사람들이 와서 자꾸 물어봅니다. "너를 눈뜨게 한 자가 누구냐? 그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죄인이라던데 그가 누구냐?" 마지막에는 눈을 뜬 사람이 아주 짜증을 냅니다. "왜 자꾸 물어보느냐?" 그도 그럴만해요. 정말입니다. 같은 얘기를 자꾸 해야 하는 것처럼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가 좋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앞서 변명할 때에 다 말했으니 기록도 있을 테고,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거기서 들으시오.

그러면 될 것 아니요? 왜 나한테 똑같은 말을 자꾸 하라는 거요?'-그렇잖아요? 수없이 이렇게 반복해서 말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말입니다. 참 짜증스러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백 번을 묻든 천 번을 묻든 물으면 대답해야 합니다. 오묘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똑같은 말을 물어도 똑같이 대답해야 합니다. 같은 자세로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내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페이스(pace)를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손님을 잘 대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번은, 사라도 어디 가고 없고 아브라함 혼자 있는데, 나이 100세는 넘은 웬 노인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먼 길 온 것을 알고 아브라함은 마침 혼자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싶어서 자기 나름의 손님 대접하는 특유의 인간성을 발휘하여 노인을 앉혀놓고 음식을 만들어줄 테니 좀 기다리라 하고 딴에는 모처럼 좋은 일 한번 해볼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잘 마련해놓았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아브라함은 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이 귀한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손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하오며……" 그런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사이에 노인이 벌써 음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얻어먹는 주제에 적어도 기도하는 동안에는 참아야 될 것 아니예요? 그래 "당장 누구 없느냐?"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종이""하고 달려옵니다. "이놈을 잡아 끌어내라. 이 녀석은 하나님도 모를 뿐더러 기도하는 동안에 성급히 음식을 먹었다. 예의도 없고 체면도 없고 신앙도 없는 이런 나쁜 놈은 대접할 가치가 없다. 냉큼 내쫓아라!" 그래서 그 노인이 끌려나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아브라함아!" "?" "너 무슨 짓을 하느냐?" "저놈이 나쁜 놈이라서 내가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예절도 모르는, 이런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을 내가 왜 대접하겠습니까?" "이놈아, 나는 저 사람 회개하기를 백 년이나 기다렸다." 아차, 하고 아브라함은 황급히 "죄송합니다"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내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어요.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더구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저쪽은 맘에야 있건 없건 좌우간 듣겠다고 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원수라도 좋고, 미운 사람이든 고운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좌우간 내 말을 듣겠다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봉사 치고 밑천 안들이고 할 수 있는 봉사가 이것입니다. 들어주세요. 귀담아 들으세요.

지금 많은 사람 중에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기회를 줍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바울은 본래가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전도하는 사람이예요. 자기 사명적 입장에서 본다면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여기에 무슨 구구한 감정이 달리 있을 수 있습니까? 말하라면 해야지 "왜 또 같은 말을 하라느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이것을 새로운 기회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또 하나의 선교적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다시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실은 바울의 그 예리한 지식과 판단력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은 몹시도 기분 나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베스도라고 하는 총독도 그렇고, 아그립바 왕이라는 형편없는 사람도 그렇고, 특별히 그 앞에 아내도 아니면서 아내 격으로 왕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버니게가 그렇습니다. 이세 사람이 높은 보좌에 죽 앉아 있고, 그리고 재판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죽 있으니, 생각하면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우선 도덕적으로 마땅치 않아요. 분위기가 마땅치 않아요. 요즘의 성급한 사람으로 말하면 정의감이 용납치 않아요. 저는 한번 이렇게 상상을 해봅니다. 이 자리에 세례 요한을 세워놓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독사의 종류들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욕먹어 마땅해요. 이것은 살로메의 얘기하고는 또 다른 거예요. 동생의 아내를 취한 얘기하고는 또 달라요. 그것보다 차원 높은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이런 분위기 속에 세례 요한이 있었더라면 눈을 부릅뜨고 사자소리를 토해냈을 것입니다. 있는 대로 욕을 했을 것 같습니다. 심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바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정직할 뿐입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 자된 자기페이스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돼먹지 않았고,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 순간에 내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상관없어요. 저가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아요.

두 번째, 바울은 상대방의 자격을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누군데 나를 심판하느냐?"-이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관하지 않아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비난도 비방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이것 하나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입니까? 그가 누구든 어떤 분위기이든 어떻습니까? 나는 상관없어요. 내 신앙, 내 본분만 다하면 되는 거예요. 대개 보면 다른 사람 잘못되는 것을 꾸짖다가 자기가 더 나쁜 사람이 됩니다. 어느 사이에 자기 본분도 다 잊어버려요.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그는 환경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지냈으니 "아그립바 왕이여, 정상을 참작하소서" 할만하지 않아요?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어디에 이런 정치가 있고 이런 재판 있단 말입니까?"…… 할말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분위기에 대해서도, 자기가 받은 처우에 대해서도 전혀 감정도, 유감도, 말도 없습니다. 다만 전도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얼마나 확실합니까? 대부분 여기서 우리가 빗나가는 거예요. 내가 들어야 할 음성,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상대방만 생각하고 나쁜 놈, 나쁜 세상, 망할 세상, 하다가 제가 더 형편없는 사람이 돼버리더란 말입니다. 자기 본분을 다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로 포착한 것입니다. 뒷날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씀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하나님 앞에서 네 본분을 다하라"-정말 자격 있는 충고입니다. '사람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그것은 묻지 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복음 전하는 자된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바울 자신이 지금 실천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언제나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금 자기변명을 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하는 전도가 가장 효과적입니까? 가끔 건강한 사람으로서 병자를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요새사람들은 옛날과 달라서 자존심이 굉장히 세거든요. 그래서 좀 미안하지만 어떤 여집사님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얼마든지 사람 방문할 수 있고 맞을 수 있는 처지인데도 "면회사절"이라고 딱 써 붙이고는 교역자 외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니까 자기 추한 얼굴 안 보이려고 그런답니다. 그 마음 이해할만하죠? 그런데 또 눈치 없는 사람들은 방문하겠다고, 그래 추한 꼴을 좀 구경하겠다는 거예요. 아무튼 요새사람들은 건강할 때의 모습만 보여주고 병든 모습은 안 보이고 죽고 싶은 거예요. 그만큼 자존심이 강해요. 이제 문병하는 것도 재고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보십시요. 건강한 자가 있고, 병든 자가 있습니다. 건강한자가 병든 자를 방문했습니다. 둘 중의 어느 쪽이 예수를 믿든지, 이제 좀 생각해봅시다. 건강한 자가 안 믿는 병든 사람에게 지금 전도할 수 있는 때입니까? 전도가 받아들여집니까? 물론 전도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숨넘어가기 직전쯤 돼야 합니다. 전도 안 받아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방문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고, 병든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 때는 전도 100% 효과가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 참 비참하게 되어서 보고 있는 사람이 마음이 아픈데, 오히려 웃으면서 "예수 믿으세요. 건강할 때에 회개하시고 건강할 때에 좋은 일 많이 하세요. 나는 먼저 갑니다.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한다면 효과 있습니다. 저에게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저와 동급 반이었던 학생 하나가 마지막 학기 딱 6개월을 남기고 병원에 들어가 수술을 받았습니다. 폐결핵이 3기가 넘어서 폐수술을 했습니다. 보기에 참 민망하고 괴로웠습니다. 공부도 참 잘하고 앞날도 유명한 청년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친구들과 그를 문병 갔습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가서 무슨 말을 해야 되나'하고 참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까 그 친구가 얼마나 명랑한지 우리 서 있는 사람에게 누워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병원을 나왔는지 모릅니다.

, 이제 재판정으로 돌아가 봅시다. 재판장이 있고, 원고가 있고, 피고가 있습니다. 누가 전도할 가장 좋은 기회에 있는 것입니까? 재판장이 피고에게 전도하면 들어 먹힐 것 같습니까? 원고가 피고에게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이없게도 가장 가능한 사람은 피고입니다.

가장 억울하고 억눌림을 당한 바로 그 사람이 전도할 수가 있어요. 그 사람만이 전도할 수가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업에 성공한사람이 실패한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어요? 그것은 불가능해요. 오히려 실패해서 많은 사람의 동정을 받는 바로 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성공한사람에게 전도할 수가 있어요. 바울은 지금 피고입니다. 아주 억울한 피고입니다. 죄 없이 죄인의 모습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담대하게 저기에 앉아 있는 재판장과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때가 유일하게 가능한 선교적 기회라는 것입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장면이지요. 여기에는 대단히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피고만이 선교가 유효하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보면 "아그립바 왕이여(2)……" 하고 시작을 합니다. 아그립바 왕을 칭찬합니다. 그게 선교전략의 하나입니다. 보세요. "유대인이 모든 송사 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2)"-내가 당신 앞에서 말하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참 다행한 일입니다, 라고 합니다. 억울하고 분합니다, 가 아닙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전도가 안됩니다. 그러면 문이 막히고 맙니다. 바울은'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보고 가능한 면을 보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이 문제를, 이 처지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행한 것'-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당신은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지요. 이것, 말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래서 아그립바 왕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결론을 보게 되겠습니다.

오늘 바울이 얘기하는 변명의 요점을 살펴봅시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나요?-먼저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6)"-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조상, 나와 당신의 조상, 곧 아그립바 왕과 나는 동족이라는 것입니다. 동질성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동질성을 기화로 변명하고 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나도(9)"라고 합니다. 이것도 동질성에 대한 얘기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당신과 똑같은 생각일 것입니다'라는 것이지요. "나도"-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나는 당신과 다릅니다"-이렇게 말하면 얘기가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나도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나 지금 나는 이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나, 내 지식이나, 내 전통이나, 내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오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보다도 더 극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광신적인 박해자였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을 뿐더러 다른 나라까지(다메섹은 당시에 다른 나라였습니다) 가서 도망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아예 다 끌어다가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이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무슨 말입니까? 나도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로부터는 아닙니다, 그런고로 내가 아는 대로 당신도 알고, 내가 믿는 대로 당신도 믿고, 내가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역사 한다면 당신도 나와 같아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귀중한 신학적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부활의 문제입니다. 8절을 보세요.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부활, 이 한 가지만 믿게 되면 당신도 나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니까. 예수의 부활, 이것 한 가지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소망에 대한 문제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게 무엇입니까? '베스도 각하'는 모릅니다. 무식합니다.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아그립바왕입니다. 그는 압니다. 유대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172절로4절이나 사무엘하 71절로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는 다윗 왕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시편과 모든 선지자들의 기록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리라"하십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사람들은 메시야가 올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망에 대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은 똑같은데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요. 뭐냐 하면 유대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신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유대 왕으로, 세속적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욕망을 채워준다는, 바로 그러한 협소한 민족주의적 소망입니다. 저들은 그런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바울이 말씀하는 이 소망은 해석이 다릅니다. 예수의 나심과, 예수의 사역과, 예수의 십자가와, 예수의 부활-예수사건 안에서 이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소망의 성취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의견이 달라요.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같은데 소망의 질이 달라요. 예수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도 이 말씀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까지도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나이까(6)"-끈질기게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메시야관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인즉 이미 메시야는 왔고,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우주적 메시야로, 그리고 종말론적 메시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망은, 약속은 벌써 성취됐어요. 성취 안됐다고 믿는 사람하고 됐다고 믿는 사람, 세속적인 메시야로 기다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의 신앙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보았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고로 이 소망의 문제는 예수 부활 사건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같은 극악한 사람이, 나 같은 극단주의자가 이제 이렇게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됐고, 핍박을 받아도 나는 여전히 이 복음을 끝까지 전할 것입니다-여기에 숨어 있는 바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를 보시오. 내가 달라진 것을 보세요.

내 경험을 보세요. 이것을 이해하세요. 그러면 내가 왜 고난 당하는가를 알고 복음이 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믿음과 담력을 보세요. 내가 이렇게 담대하게, 이렇게 온유하게 오늘도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바울은 지금 이렇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형편이든지 바울 같은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회든지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로,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르쳐줍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그리고 나를 보세요, 내 변화를 보세요, 내 온유함을 보세요, 내 믿음을 보세요, 내 평화를 보세요, 주님께서 역사 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을 당신도 믿으면 나와 같아질 것입니다, 라고.

이제 26장을 다 읽어내려 가느라면 끝 부분에서 심지어 이런 말도 합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참 대단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원합니다, 나 같은 믿음, 나 같은 은혜에, 나 같은 사람되기를 원합니다-사도 바울,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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