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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사랑의 기쁨(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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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쁨(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언젠가 우리 교회가 아닌 예식장에서 우리 교인의 자녀들 결혼식을 주례한 일이 있습니다. 주례사가 끝난 다음에 피아노 5중주의 축하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 곡목이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조바니 마르티니의 유명한 곡입니다. 그러나 곡목은 '사랑의 기쁨'이지만 그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이 사실을 신랑 신부가 알았더라면 기절할 노릇이지요. 이런 때에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아무튼 그 노래가 나오자마자 저는 내심 '아이쿠, 큰일났구나, 어떻게 저런 곡을 연주할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또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가사의 뜻이 완전히 결혼 망치는 것일 때도 있습니다. 그저 멜로디만 생각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는 걱정을 해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한 편의 촌극이지요.

사랑은 행복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기쁨이어야만 합니다. 만일에 사랑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종은 울려서 종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소리가 안 나는 종은 종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기쁨과 행복이 있어야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의 기쁨은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남았다 운운하는 것입니까? 사랑의 슬픔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6)"라 말씀합니다. 사랑은 기뻐합니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의 개념에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결국에 사랑은 슬픔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구약의 호세아에 집중적으로 '하나님은 늘 사랑하신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다오'라고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자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4:6)"----여기서 말하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지식, 그것을 아는 지식, 그것을 아는 총명입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슬퍼하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하고 기막힌 얘기입니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사랑에 슬픔은 없습니다. 슬픔이 있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아픔은 있으나 슬픔은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전달됩니다. 몸이 저려옵니다. 가슴이 쓰려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슬픔이 아닙니다. 그 속에도 사랑의 기쁨은 신비롭게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슬픔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남을 속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고--언제 사랑했습니까? 사랑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줄로 알고 있고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순이 있고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랑의 미숙입니다. 사랑이 어립니다. 성숙되지 못해서, 유치해서 무능합니다. 그래서 마음 뿐이요, 생각뿐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고, 사랑의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슬픔과 미련으로만 남습니다. 여기에 또한 답답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처럼 흔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참사랑은 귀합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지는 말이 전부 사랑 타령입니다 마는 가장 슬픈 이야기는 사랑의 변질이요, 사랑의 질적 타락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슴아픈 것은 사랑 그 자체가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뱀에 물렸다고 상상해보십시다. 이제 독이 온 몸에 퍼집니다. 시간이 바쁩니다. 빨리 상처를 씻어서 싸매야 하고, 그 독을 빼내야 합니다.

그런데 뱀에 물린 사람이 자기 몸이 죽어 가는 것은 모르고, 자기를 문 뱀이 미워서 그 뱀을 죽이겠다고 몽둥이를 들고 따라다닙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죽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일생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생각해본 일도 없습니다. 내 원수, 나를 괴롭히고 나를 망친 사람, 그것을 미워하고, 그것을 증오하는 것으로만 가득 찼습니다. 내가 뱀에 물려서 이미 내 몸에 퍼지고 있는 독은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죽어 가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내 원수를 멸하겠다고 몽둥이를 들고 일생동안 따라다니고 증오합니다. 증오로 똘똘 뭉쳤어요.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이 사람들, 사랑은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사랑이 있더냐 합니다. 그저 미워하는 마음, 혹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 이것 하나만 가지고 한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사랑의 개념, 사랑의 뜻이 들어갈 만한 바늘구멍 만한 틈도 없어요. 가장 슬픈 얘기입니다.

, 그런데 사랑이 왜 기쁨이 아니고, 슬픔이라는 것입니까? 자기도 슬프고, 남도 괴롭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힙니까? 이럴 때에 사랑 받는 사람은 반갑지 않습니다. 제발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래저래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근본적으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결코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기쁨일 뿐입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예술이라는 저서에서 사랑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관심입니다.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항상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생각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때에는 남을 비판하는 법이 없어요. 잘못했느니 잘했느니 따지는 법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 책임이 내게 있으니까요.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같이 책임을 지는 것,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저 사람의 책임이라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내 잘못이요, 내 책임이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 사랑입니다. 또한 그러기에 사랑은 존경을 동반합니다. 언제나 내 의견보다 저 사람의 의견이 좋습니다. 웬일인지 크게 보입니다. 상대방이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잘났고 상대방은 영 못나게만 보이고 모두 다 잘못된 것으로만 보여지는 것,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로 사랑할 때에는 반드시 존경을 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 처지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절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거야'하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고로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해가 되고 마니까요. 그런고로 사랑은 마지막에는 내주는 것입니다. 마음도 주고, 물질도 주고, 명예도 주고, 의도 주고, 모든 것을 다 주려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이 다섯 가지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저는 이런 가정을 상담해본 일이 있습니다. 의과대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서 의사가 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못한 친구를 사귀어서 어느 날 맥주집에 한번 놀러갔다가 그 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어린애까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아가씨한테 반해 가지고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깜짝 놀라서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아들은 당당합니다.

"아버지는 장로님 아니세요? 어머니는 권사님 아니세요? 불쌍한 사람을 사랑해야지요.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러십니까?"라고 합니다. 이것, 야단났습니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저를 불러놓고 자기들의 얘기를 좀 들어보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부모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런데요." "그러면 아들이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들도 사랑하면 될 것 아닙니까?" ", 그것은 아니지요." 아니긴 무엇이 아닙니까? 다시 묻습니다. 사랑합니까?---그것에서 모든 해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당당한 성인입니다. 그가 판단하고 그가 자기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존경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고, 이해가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성숙 구도에 대해 원리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치할 때에는 내가 사랑 받으니까 남을 사랑한다. 그러나 성숙하게 되면 내가 사랑하여 비로소 사랑을 받는다."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사랑 받는 것이 뒤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원인이요, 사랑 받는 것이 결과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 유치한 사람은 그 사랑하는 동기가 이렇습니다. 'I love you, because I need you.'---내가 너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필요가 사랑의 근거로 나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I need you, because I love you.'---"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수준에서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 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불평이 많습니까? 높은 차원에서 보세요. 사랑해서, 끝까지 사랑해서 사랑 받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해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성격을 15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마는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나, 자기 중심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중심이 옮겨갑니다. 원심적입니다. 이래서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인 것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사랑이 아닙니다. 나는 저를 사랑합니다. 그런고로 나는 기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인이라고 하는 믿음이 좋은 학장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그를 높이 존경해서 이렇게 별명을 붙였답니다. '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같이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은혜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듯 늘 화평하게, 늘 기쁨으로 사십니까?" 학장님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깃발과 같다. 어느 성에 깃발이 올라가 있으면 그곳에 임금님이 와 계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리스도가 나와 계시고, 내 안에 은혜가 있으니 나는 기쁠 수밖에. 내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덕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마음이 기쁘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있으니까, 내게 기쁨이라고 하는 깃발이 휘날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숨길 수 없습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어요. 항상 기쁠 수밖에 없어요. 사랑은 동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사랑은 의지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소위 후진국에서 나오는 예술작품들은 사랑을 감정으로 묘사한다고 합니다. 그 모든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국의 예술작품에서는 사랑을 의지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사랑을 행동적 의지로 그립니다. 거기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어떻고, 사랑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이런 얘기는 주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그 다음에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기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랑의 행동과 사랑의 의지와 함께 기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진리와 함께'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사랑이 변질되고, 사랑이 사랑 아닐 때에 사랑은 슬픔이라는 것으로 그 뜻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만찬 그림은 아마도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 성만찬 그림이 그려질 때의 에피소드가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하나의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상상으로만 그리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모델로 놓고 그립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그림에서 예수님을 포함한 열세 사람 중 가룟 유다를 맨 먼저 그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모델이 어디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는데, 문득 며칠전에 한 친구와 심하게 싸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싸워서 화가 났던 그놈의 얼굴을 그리면 되겠구나, 하고 당장에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요한, 안드레…… 이렇게 나머지 열 한 명의 제자를 다 그렸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가 막막했습니다. 떠오르지 않아요. 몇 달을 두고 기도하고 회개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의 얼굴이 안 떠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친구를 가룟 유다로 그려놓다니, 이래서야 되겠느냐.' 그는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자기 마음이 열리면서 예수님의 얼굴이 떠올라 그 분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 미워하는 자가 있고, 아직도 그런 마음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 모든 행동은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느낄 수도, 사랑을 깨달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엉뚱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사랑의 슬픔으로 소화되고 맙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에는 기쁨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알기까지는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하기까지는 행복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랑하기에 인내도 가능합니다. 참아서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면 참게 되는 것입니다. 참는 게 어렵지 않아요. 사랑하면 희생할 수 있어요. 남보기에는 비참한 희생이지만 나에게는 즐거움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절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겸손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유행가 가사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왜 작아질까? 나한테 물으세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작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커지고, 상대방은 줄어들고 조그마해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그는 커지고, 나는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쁨이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희생에 있고, 스스로 겸손해지는 데에 있습니다. 겸손해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능력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로마서 828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런 일 저런 일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 사랑으로 선을 이룹니다. 이게 사랑의 능력입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본질이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어이없게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갈릴리로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 때에 이 실패한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마디를 물으시고 계십니다. '아가파스 메'--'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네가 왜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느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형편없는 존재가 되어서 허우적거리고 있느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앞으로 네가 이 중책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 사랑뿐이다, 하심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기쁨이 없거든 사랑 자체를 물으세요. 내가 무능해지거든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를 물으세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충만해 있을 때에 참으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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