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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에베소서 4장 11절~16절)

by 【고동엽】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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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그리스도인(에베소서 4111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노르웨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숲 속에서 놀다가 처음 보는 이상한 새알 하나를 주웠습니다. 소년은 이 알을 가져다가 자기 집 거위가 품고 있는 거위 알 틈에 넣었습니다. 얼마 후에 알은 다같이 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알에서 나온 새는 부리가 뾰족하게 생겼고, 깃털은 검은색입니다. 이 검은 새는 흰 거위새끼들을 따라 뒤뚱뒤뚱 걸으면서 함께 놀며 자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독수리가 나타나서 저들을 위협합니다. 어미거위는 빨리 피하라고 단리를 칩니다. 거위새끼들은 뒤뚱거리면서도 잘 도망가는데, 검은 새는 날갯죽지가 커서 빨리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뒤뚱거리다가 급한 김에 날개를 쑥 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횡하고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새는 독수리 새끼였던 것입니다. 독수리였으나 거위 속에서 거위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큰바람을 맞고, 또 위기에 들어서서는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훌쩍 시원하게 날아오르는 독수리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약한 것과 미숙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미숙은 미숙일 뿐입니다. 부족하다는 것과 미흡하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르다는 것과 이질적이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곱 살이고 하나는 다섯 살인데, 어머니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각자 어머니께 선물을 드린다고 부산을 떱니다. 저금통을 깨뜨려 그간에 모아 놓았던 돈을 가지고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나갑니다. 어머니는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큰아이는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어머니의 루즈를 하나 사들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바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둘째 아이는 장난감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게 제일 좋아 보이니까, 어머니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미숙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한다면 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제 시각에서, egocentric--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사랑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장난감을 가지고 어머니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미숙아로 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숙기에는 악에게 집니다. 갈라디아서 429절에 보면, 약속을 받은 자가 육체의 자녀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약속을 받은 이삭이 분명 가장 귀한 존재이지마는 어리기 때문에, 그보다 큰 이스마엘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미숙자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첫째는 유혹에 빠진다고 합니다. 성숙한 자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숙자에게는 항상 위험이 널려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다 그에게는 위험합니다. 유혹에 빠지고, 세상 풍조에 빠지고---빠져들어 간다는 그것이 위험합니다. 둘째는 풍조에 밀려간다고 합니다. 세상 풍조, 유행에 따릅니다. 그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미숙하기 때문에 그는 늘 세상 유행이 좋습니다. 놀러 다니는 게 좋고, 그저 장난하는 게 좋고, 오히려 그쪽에 항상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유행에 아직도 끝려 가고 있다, 그 매력에 취해 있다면 그는 미숙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동한다고 말씀합니다. 꾸준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분명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해서, 어리고 유치해서, 약속을 따라나가는 데에 있어서 휘청휘청합니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휘청거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책망도 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언제까지 휘청거릴 것이냐고 책망하십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네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리라'--이 귀중한 허락을 내려주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요동할 것입니까? 요동함이라는 것은, 휘청거린다는 것은 아직도 어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숙한 선은 선으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미숙한 의인은 의로 서지 못합니다. 미숙한 믿음은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미숙한 사랑은 그 개념이 있을 뿐이지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다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해야 합니다.

믿음도 사랑도 성숙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네온 사울이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가정서적 성숙이라는 책에서 성숙한 인간의 생활 양식과 철학을 여덟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소개할까 합니다. 적어도 심리학자가 보는 성숙이란 이런 것입니다. 먼저, 독립적이고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요, 끌려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독립적 판단력을 가지고 특별히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내 책임은 내가 집니다. 남의 책임도 내가 집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설 때에 종종 이것을 권면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열두 살바기가 결혼을 해도 책임을 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이는 어리지만 아주 어른다운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나이 삼십이 넘어 가지고도 정신적으로는 아주 유치합니다. 그래서 자기 책임을 자기가 못 집니다. 그리고 자기 성격 나빠진 게 아내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멍청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뭐가 누구 때문입니까? 내 책임은 내가 지고, 남의 잘못도 내가 책임져야지요. 자식이 잘못된 게 내 책임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서로 책임 전가합니다. 자식 못된 점은 "너 닮았다"하며 싸우지 않습니까? 한심한 어린것들이 모이니까 티격태격하는 것이지요. 누구 하나라도 나아야겠는데 유치하기는 똑같거든요.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판 자체가 남에게 책임 전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최소한 침묵을 지킬 줄도 압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또한 성숙한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공유성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그린벨트에 걸린 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요? 그게 가만히 바라보는 땅이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거기에 가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뭘 할 수 있습니까? 나뭇가지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걸 '내 것이거니'하고 앉아 있는 사람,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소유라는 게 무엇입니까? 나 혼자 사용하라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가졌든지, 이 소유에는 공유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 함께 누리고 다 함께 사용해야되는 것입니다. 베풀 줄 아는 자가 바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나 혼자의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협력할 줄 아는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

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을 줄도 알고 도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도움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겠다는 사람, 유치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어찌 주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아닙니다. 협력을 해야 되고, 협력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사회성이 있어야 그게 바로 성숙한 인간입니다.

또한 자기 양심과 조화하며 느낌과 행동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 해야 될 말을 불쑥 해버리고, 거친 행동을 해버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일생을 두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련한 인간이지요. 감정 조절을 못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 하지 않습니까? 아주 높이 성숙한 것이지요.

또한 분노와 적개심을 구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분이 난다고 그것이 곧 미운 마음으로 바꾸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의와 불의를 함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현실을 파악하고, 그 미래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이 현재가 현재로 끝납니까? 그 후속이 있지요. 뒷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해버린다고 끝났다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다음에 저쪽에서 하는 말을 들을 생각도 해야지요. 반드시 후유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함부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것입니까? 적어도 어른이라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한 다음에, 즉 현재를 이렇게 파악하고 나면, 그 다음 일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래야 어른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을 진실하게 생각하며 그 조화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살지만,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융통성이 있고 적응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네온 사울은 성숙한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먼저 기본적으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과 목적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그것이 정해진 사람입니다. 질적 안정이 있고야 성장이 있습니다. 뿌리가 정해지고야 성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궤도 수정을 자주 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한 번 심어놓았으면 기다려야지, 이것을 자꾸 뽑아서 옮기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목적을 변경해서는 안됩니다. 비교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외길 인생을 산사람들입니다. 직업도 바꾸지 않고, 생각도 바꾸지 않고, 전공도 바꾸지 않고, 한번 시작한 것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런데 궤도 수정을 자주해서 이런 직업을 택했다가, 이런 전공을 택했다가,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몇 번 수정하고 나면 성숙할 겨를이 없습니다. 시간이 모자랍니다.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방향이 정해지고, 모텔이 정해지고,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목적 변경 없이 그대로 일생을 사는 것, 거기에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생활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안정이 없는 생활에는 경제고 정치고 무엇이고 간에 어떤 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13)"--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이라 그 목표를 분명히 하고 변함없이 직선적으로 살아야 비로소 성숙함이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성숙은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성숙이란 존재의 문제요 바로 그 인격의 문제입니다.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느냐, 그것에 대하여 바른 목표를 세우고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좋은 열매를 원하십니까? 열매를 서두르지 마세요. 좋은 나무가 되세요. 좋은 나무가 되면 언젠가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학생을 놓고도, 좋은 성적을 내라 하고 서두르지만 그래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자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부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기회도 얼마든지 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자세, 그 인격 자체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것이 없고, 계속적으로 겸손한 자세에 있어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런고로 항상 온유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바로 거기까지가 성장의 한계입니다. 언제라도, 계속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더 겸손하고 더 깊이 온유한 사람이 될 때, 그는 끝까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인격, 겸손한 인격으로, 더욱더 겸손하게 성장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장의 기초입니다.

이 성장의 비결에 대하여 오늘의 성경은 누누이 가르쳐줍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13)"--그래서 성장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따로따로 되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세요. 믿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은 없어요. 흔히들 이 날은 좋은 날이다, 저 날은 손 있는 날이다 그러는데, 이 날은 왜 좋고 저 날은 왜 나쁘냐, 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입니다. 이성은 전혀 없습니다.

믿는 것만 있습니다. 좌우간 믿는 것은 대단합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자주 서는데, 주례를 부탁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날짜 얻기가 힘든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한 달 동안 주례를 서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달은 소위 '손 있는' 달이거든요. 그것을 보면 참 한심한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요. 물론 결혼이라는 것이 양가가 합의해서 결정해야 되니까, 한쪽에서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있습니까? 그대로 따라야지요.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혼 주례서는 것에도 이렇듯 비 성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하냐 그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는 입장에서는 no problem, 비 안 오는 날이면 되지 무슨 상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믿음은 있는데 지식이 없으면 미신이요, 지식은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철학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믿는 것과 아는 것--신앙이 철학화하고, 지식과 믿음이 하나가 되어야 여기에서 능력이 발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의지라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될 때에 자연히 나는 그 길로 치닫게 됩니다. 밀어붙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적 의지입니다. 여기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오직 사랑 안에서(15)"입니다. 이 모든 것을 묶어서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행하고,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미쳐서, 높은 사랑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된 것을 하여(15)"입니다. 진실, 그것이 성장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진실하려고 노력해보았습니까? 지혜의 왕 솔로몬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죽기 전에 저의 두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시옵소서. 내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실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깨끗한 진실을 찾게 하여주시옵소서'--이렇게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무릇 진실이 있고야 성장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입니다. 범사에, 모든 환경에서, 역경은 역경대로, 순경은 순경대로, 성공은 성공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범사에 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기쁨이란 비 기독교인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도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괴로워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소원이 바로 내 소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바로 내 고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그것이 바로 내 영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생각하십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지체로, 이 지체의 분량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미숙아로 남아서 방황하고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높은 성장의 그리스도인의 인격, 그리스도인의 품격, 그리스도인의 의지로 이 세상의 잡다한 일들을 멀리 내려다보면서 사는, 초월적으로 초연하게, 넉넉히 이기는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에베소서 4111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노르웨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숲 속에서 놀다가 처음 보는 이상한 새알 하나를 주웠습니다. 소년은 이 알을 가져다가 자기 집 거위가 품고 있는 거위 알 틈에 넣었습니다. 얼마 후에 알은 다같이 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알에서 나온 새는 부리가 뾰족하게 생겼고, 깃털은 검은색입니다. 이 검은 새는 흰 거위새끼들을 따라 뒤뚱뒤뚱 걸으면서 함께 놀며 자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독수리가 나타나서 저들을 위협합니다. 어미거위는 빨리 피하라고 단리를 칩니다. 거위새끼들은 뒤뚱거리면서도 잘 도망가는데, 검은 새는 날갯죽지가 커서 빨리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뒤뚱거리다가 급한 김에 날개를 쑥 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횡하고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새는 독수리 새끼였던 것입니다. 독수리였으나 거위 속에서 거위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큰바람을 맞고, 또 위기에 들어서서는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훌쩍 시원하게 날아오르는 독수리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약한 것과 미숙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미숙은 미숙일 뿐입니다. 부족하다는 것과 미흡하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르다는 것과 이질적이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곱 살이고 하나는 다섯 살인데, 어머니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각자 어머니께 선물을 드린다고 부산을 떱니다. 저금통을 깨뜨려 그간에 모아 놓았던 돈을 가지고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나갑니다. 어머니는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큰아이는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어머니의 루즈를 하나 사들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바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둘째 아이는 장난감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게 제일 좋아 보이니까, 어머니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미숙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한다면 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제 시각에서, egocentric--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사랑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장난감을 가지고 어머니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미숙아로 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숙기에는 악에게 집니다. 갈라디아서 429절에 보면, 약속을 받은 자가 육체의 자녀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약속을 받은 이삭이 분명 가장 귀한 존재이지마는 어리기 때문에, 그보다 큰 이스마엘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미숙자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첫째는 유혹에 빠진다고 합니다. 성숙한 자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숙자에게는 항상 위험이 널려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다 그에게는 위험합니다. 유혹에 빠지고, 세상 풍조에 빠지고---빠져들어 간다는 그것이 위험합니다. 둘째는 풍조에 밀려간다고 합니다. 세상 풍조, 유행에 따릅니다. 그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미숙하기 때문에 그는 늘 세상 유행이 좋습니다. 놀러 다니는 게 좋고, 그저 장난하는 게 좋고, 오히려 그쪽에 항상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유행에 아직도 끝려 가고 있다, 그 매력에 취해 있다면 그는 미숙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동한다고 말씀합니다. 꾸준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분명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해서, 어리고 유치해서, 약속을 따라나가는 데에 있어서 휘청휘청합니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휘청거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책망도 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언제까지 휘청거릴 것이냐고 책망하십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네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리라'--이 귀중한 허락을 내려주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요동할 것입니까? 요동함이라는 것은, 휘청거린다는 것은 아직도 어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숙한 선은 선으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미숙한 의인은 의로 서지 못합니다. 미숙한 믿음은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미숙한 사랑은 그 개념이 있을 뿐이지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다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해야 합니다.

믿음도 사랑도 성숙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네온 사울이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가정서적 성숙이라는 책에서 성숙한 인간의 생활 양식과 철학을 여덟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소개할까 합니다. 적어도 심리학자가 보는 성숙이란 이런 것입니다. 먼저, 독립적이고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요, 끌려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독립적 판단력을 가지고 특별히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내 책임은 내가 집니다. 남의 책임도 내가 집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설 때에 종종 이것을 권면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열두 살바기가 결혼을 해도 책임을 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이는 어리지만 아주 어른다운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나이 삼십이 넘어 가지고도 정신적으로는 아주 유치합니다. 그래서 자기 책임을 자기가 못 집니다. 그리고 자기 성격 나빠진 게 아내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멍청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뭐가 누구 때문입니까? 내 책임은 내가 지고, 남의 잘못도 내가 책임져야지요. 자식이 잘못된 게 내 책임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서로 책임 전가합니다. 자식 못된 점은 "너 닮았다"하며 싸우지 않습니까? 한심한 어린것들이 모이니까 티격태격하는 것이지요. 누구 하나라도 나아야겠는데 유치하기는 똑같거든요.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판 자체가 남에게 책임 전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최소한 침묵을 지킬 줄도 압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또한 성숙한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공유성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그린벨트에 걸린 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요? 그게 가만히 바라보는 땅이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거기에 가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뭘 할 수 있습니까? 나뭇가지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걸 '내 것이거니'하고 앉아 있는 사람,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소유라는 게 무엇입니까? 나 혼자 사용하라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가졌든지, 이 소유에는 공유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 함께 누리고 다 함께 사용해야되는 것입니다. 베풀 줄 아는 자가 바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나 혼자의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협력할 줄 아는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

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을 줄도 알고 도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도움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겠다는 사람, 유치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어찌 주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아닙니다. 협력을 해야 되고, 협력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사회성이 있어야 그게 바로 성숙한 인간입니다.

또한 자기 양심과 조화하며 느낌과 행동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 해야 될 말을 불쑥 해버리고, 거친 행동을 해버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일생을 두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련한 인간이지요. 감정 조절을 못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 하지 않습니까? 아주 높이 성숙한 것이지요.

또한 분노와 적개심을 구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분이 난다고 그것이 곧 미운 마음으로 바꾸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의와 불의를 함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현실을 파악하고, 그 미래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이 현재가 현재로 끝납니까? 그 후속이 있지요. 뒷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해버린다고 끝났다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다음에 저쪽에서 하는 말을 들을 생각도 해야지요. 반드시 후유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함부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것입니까? 적어도 어른이라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한 다음에, 즉 현재를 이렇게 파악하고 나면, 그 다음 일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래야 어른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을 진실하게 생각하며 그 조화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살지만,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융통성이 있고 적응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네온 사울은 성숙한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먼저 기본적으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과 목적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그것이 정해진 사람입니다. 질적 안정이 있고야 성장이 있습니다. 뿌리가 정해지고야 성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궤도 수정을 자주 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한 번 심어놓았으면 기다려야지, 이것을 자꾸 뽑아서 옮기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목적을 변경해서는 안됩니다. 비교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외길 인생을 산사람들입니다. 직업도 바꾸지 않고, 생각도 바꾸지 않고, 전공도 바꾸지 않고, 한번 시작한 것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런데 궤도 수정을 자주해서 이런 직업을 택했다가, 이런 전공을 택했다가,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몇 번 수정하고 나면 성숙할 겨를이 없습니다. 시간이 모자랍니다.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방향이 정해지고, 모텔이 정해지고,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목적 변경 없이 그대로 일생을 사는 것, 거기에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생활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안정이 없는 생활에는 경제고 정치고 무엇이고 간에 어떤 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13)"--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이라 그 목표를 분명히 하고 변함없이 직선적으로 살아야 비로소 성숙함이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성숙은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성숙이란 존재의 문제요 바로 그 인격의 문제입니다.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느냐, 그것에 대하여 바른 목표를 세우고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좋은 열매를 원하십니까? 열매를 서두르지 마세요. 좋은 나무가 되세요. 좋은 나무가 되면 언젠가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학생을 놓고도, 좋은 성적을 내라 하고 서두르지만 그래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자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부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기회도 얼마든지 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자세, 그 인격 자체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것이 없고, 계속적으로 겸손한 자세에 있어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그런고로 항상 온유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바로 거기까지가 성장의 한계입니다. 언제라도, 계속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더 겸손하고 더 깊이 온유한 사람이 될 때, 그는 끝까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인격, 겸손한 인격으로, 더욱더 겸손하게 성장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장의 기초입니다.

이 성장의 비결에 대하여 오늘의 성경은 누누이 가르쳐줍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13)"--그래서 성장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따로따로 되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세요. 믿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은 없어요. 흔히들 이 날은 좋은 날이다, 저 날은 손 있는 날이다 그러는데, 이 날은 왜 좋고 저 날은 왜 나쁘냐, 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입니다. 이성은 전혀 없습니다.

믿는 것만 있습니다. 좌우간 믿는 것은 대단합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자주 서는데, 주례를 부탁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날짜 얻기가 힘든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한 달 동안 주례를 서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달은 소위 '손 있는' 달이거든요. 그것을 보면 참 한심한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요. 물론 결혼이라는 것이 양가가 합의해서 결정해야 되니까, 한쪽에서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있습니까? 그대로 따라야지요.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혼 주례서는 것에도 이렇듯 비 성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하냐 그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는 입장에서는 no problem, 비 안 오는 날이면 되지 무슨 상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고, 믿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믿음은 있는데 지식이 없으면 미신이요, 지식은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철학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믿는 것과 아는 것--신앙이 철학화하고, 지식과 믿음이 하나가 되어야 여기에서 능력이 발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의지라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될 때에 자연히 나는 그 길로 치닫게 됩니다. 밀어붙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적 의지입니다. 여기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오직 사랑 안에서(15)"입니다. 이 모든 것을 묶어서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행하고,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미쳐서, 높은 사랑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된 것을 하여(15)"입니다. 진실, 그것이 성장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진실하려고 노력해보았습니까? 지혜의 왕 솔로몬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죽기 전에 저의 두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시옵소서. 내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실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깨끗한 진실을 찾게 하여주시옵소서'--이렇게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무릇 진실이 있고야 성장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입니다. 범사에, 모든 환경에서, 역경은 역경대로, 순경은 순경대로, 성공은 성공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범사에 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기쁨이란 비 기독교인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도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괴로워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소원이 바로 내 소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바로 내 고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그것이 바로 내 영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생각하십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지체로, 이 지체의 분량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미숙아로 남아서 방황하고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높은 성장의 그리스도인의 인격, 그리스도인의 품격, 그리스도인의 의지로 이 세상의 잡다한 일들을 멀리 내려다보면서 사는, 초월적으로 초연하게, 넉넉히 이기는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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