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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세세토록 있는 말씀(베드로서 1장 20절~2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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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토록 있는 말씀(베드로서 12025)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과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제는 옛날 얘기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시골 양반이 서울에 있는 딸네집에 왔습니다. 1년 전에 오고 다시 1년만에 찾아왔습니다.

그 골목까지는 들어섰는데 이 집도 저 집 같고 저 집도 이 집 같고 해서 딸네집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어느 집을 찾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좀 도와드릴 양으로 말입니다. 그러자 이 시골 양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담장 위에 검은 고양이가 앉아 있는 집을 찾습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다릅니까? 결국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무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걸 모르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아름다움도 변하고, 젊음도 변하고, 지식도 변하고, 명예도, 권세도, 다 지나갑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지나가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가치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변하는 것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다 변하고 만다---그렇게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 변하는 것을 무슨 대단한 것인 줄 알고 추구해나가다가 끝에 가서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수고합니다마는 되돌아보건대 요새는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제일 수고하는 것 같아요.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참 놀고 싶겠습니까? 마음껏 뛰놀고 싶은데도 하릴없이 엎드려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가장 어려운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시험 준비해 가지고 가령 일류대학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통계에 따르면 일류대학 입학자의 60퍼센트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것을 위해서 내가 오늘까지 살았던가, 생각해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타격을 받습니다. 인생 무상입니다. 정말 부질없습니다. 이제 깨닫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변할 것은 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사람은 변할 것은 변화시킵니다. 버릴 것은 버립니다. 무가치한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버립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보다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추구해나갑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기초적인 상식과 원리를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귀한 말씀입니다. 인생이 그와 같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남자는 26세부터 늙고, 여자는 24세부터 늙는다'---생각해 보세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보아하니 젊은 사람들은 청바지다 핫팬츠다 하며 되는대로 사는데, 돈푼이나 있는 할머니들 보면 목걸이다 귀걸이다 해서 주렁주렁 달고 있어요. 굉장히 비싼 보석 귀걸이가 늙은 귀에 축 늘어져 있는데 귓밥에 뚫어놓은 구멍이 징그럽게 벌어져 있어요. 차라리 아니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측은해보여요. 이런 점에서는 우리 한국의 어른들이 좋아요. 비교적 곱게 늙었어요. 늙으려면 곱게 늙어야지 주책스럽게 늙는 것도 문제이지요.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지나가려는 것을 붙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지나가도록 두세요. 가는대로 버려두세요. 꽃은 마르고,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고, 풀은 마릅니다. 그걸 아쉽게 여길 것 없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여기서 보다 큰 것, 보다 위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보세요, 다 잃어버렸지요. 건강도 젊음도 다 잃어버렸는데 모처럼 진실을 찾았습니다. 모처럼 겸손을 찾았습니다. 나이 팔십에 이제 처음으로 사람다운 말 한마디 합니다. 그만하면 괜찮은 것이지요. 잃어버린 세상이 아닙니다. 아주 소중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육체는 무상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영원합니다. 영광은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합니다.

가끔 우리네 교인 가정에 가보면 유달리 그런 집이 있어요. 여기저기서 받은 표창패, 상패 등속이 온 집에 가득해요. 저는 그런 것 볼 때마다 '쓸데없는 짓하고 있구만'하고 속으로 혀를 찹니다. 그런 것, 성서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선 둘 데가 없어요. 그런 것 다 뭘 하겠어요? 공해입니다. 공해도 보통 공해가 아닙니다. 실로 무상한 것들입니다.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다 치워버리세요. 별것도 아닌 것,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것들 붙들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여러분, 홀가분하게 사세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은 것입니다.

꽃은 무상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만은 영원합니다.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말씀, 그것만이 영원하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1차세계대전 이후에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말씀의 신학을 수립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을 세 형태로 구별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말씀은 성육되신 말씀(incarnated word)입니다. 이것은 육신을 입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입니다. 계시로 우리 손에 들리어진 성경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선포되는 말씀(preached word)입니다. 이것은 곧 설교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을 들을 수 없는 자는 구제불능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바로 듣고, 말씀을 바로 만나고, 말씀을 향하여 그 말씀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여기에 영원함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림해오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 오시고 계십니다. 조만 간에 오실 것입니다. 여기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가 있습니다. 천군 천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오십니다. 그를 맞을 준비를 하며 오늘을 사는 데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4절에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입니다. 세상에 재난이 있고, 전쟁이 있고, 핍박이 있고, 또 죄악이 있고, 배신이 있고, 배교가 있겠다, 갖은 환난과 고통이 있겠다, 우주적인 고통이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떤 소식을 듣습니까? 깜짝 놀랄 소식을 듣습니까? 그 모두가 주님께서 문 앞에 서서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땅끝까지, 땅끝까지 전해집니다. 이 길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때 잘살아보자고 외쳤습니다. 거기까지 도달은 못했어도 어느 정도 잘살아보았습니다. 보니 어떻습디까? 남는 게 무엇입니까? 이제야말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잘사는 것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이성은 악마의 역사입니다. 말씀이 없는 지혜는 도둑놈의 지혜입니다. 중생이 없는 믿음---여기에 문제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악마를 만듭니다. 하나님 없는, 말씀을 떠난 부()가 결과로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정 깨지고, 자녀 망치고, 나라 망치고, 자기 망치고…… 이렇게 되지 않았어요?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온 귀순자 하나가 남한을 다 돌아보고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아주 shocking한 얘기입니다. "북한 사회는 한 마디로 말해서 미친 사회요, 남한이라고 하는 사회는 썩은 사회다."---섬뜩한 얘기이지만 사실입니다. 요만큼 살기가 다행이지 좀더 잘살았다 가는 끝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합시다. 북한 땅에는 물질이 없어서 괴롭고 남한 땅에는 물질이 넘쳐서 문제입니다. 못사는 사람은 못살아서 하나님 원망이요, 잘사는 사람은 잘살아서 타락의 길로 치닫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사십 일을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십니다. 사십 일을 굶어서 지금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사십 일을 굶으신 그 시간에도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상한 꿈을 한번 꾸고 그 꿈으로 받은 충격을 일생동안 잊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날, 꿈에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줄서서 쭉 들어가는데, 들어가면서 보니 자기가 큰 수레를 가지고 그 수레에 자기가 쓴 책을 가득 싣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베드로가 "네가 누구뇨?" 묻습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온 칼 바르트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들어가라." 그래 수레를 끌고 들어가려 하니까 "안된다, 이건 안된다" 합니다. "이건 내가 복음 전하기 위해서 쓴 책인데요." "그래도 안돼. 오직 말씀만 가지고 들어가는 거다. 만일에 정히 이 책을 가지고 들어가겠다면 너도 못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깜짝 놀라 꿈을 깼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일생을 두고 이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에 의지할 때에만 생명이 있고, 길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봅시다. 지금 여러분은 지난 주간에 있은 사건으로, 특별히 '지존파'니 뭐니 하는 것들이 저지른 일로 해서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잔인무도한 사람들도 두 얼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만일에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하고 묻자 "저요?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필이면 왜 검사냐?" "내가 잡혀왔을 때, 체포당하면서 매를 맞으면서 고생을 할 줄 알았는데 검사님이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점심을 사주었어요. 잡채밥을 먹었는데 얼마나 맛이 있던지 내 일생 처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았습니다. 내가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밥 한 그릇의 얘기입니까? 밥을 못먹어서의 얘기입니까? 강탈한 돈으로 수 천만 원을 마음대로 뿌리며 다녀봤지만 거기서는 입맛이 없어요. 죄인으로 쫓기며 사는 생활에는 배부르지도 않아요. 차라리 지금 체포돼서 체념하고 마음을 비우고보니 칠천 원짜리 잡채밥 한 그릇이 그렇게 맛이 있으며, 이 한 그릇의 밥을 통하여 와닿는 인간미가 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의 문제입니까?

일찍이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흉악한 절도범 하나가 지명수배되어 쫓기다가 어디엔지 숨어 있습니다. 지하실에 숨어 있는 것을 형사가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문을 확 여는 순간에 양쪽이 다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제 어느 쪽이든 일단 먼저 쏘는 저쪽도 쏘게 되어 있어요.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듯 긴박한 시간인데, 한참 벼르고 있다보니 컴컴하던 실내가 윤곽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니 거기에 성경책이 놓여 있어요. 이걸 보고 형사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총을 버리고 성경책을 펴들었습니다. 로마서 818절을 읽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형사는 "자네는 이제 한동안 감옥생활을 하겠지만 그 고통은 장차 받을 자유와 영광에 비교할 수가 없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범인의 총을 버리고 무릎을 끓더랍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소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한마디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복음의 시간을 한번 가졌더라면, 그 어느 때에 한번 하나님 얘기를 들었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될 문제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줘도 안됩니다. 돈을 가져도 안됩니다. 아무리 진리가 있어도 안됩니다. 사람이 사람되려면 그 영이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어렸을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4세 때 계모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갖은 고생, 천신만고 끝에 백악관의 주인까지 됩니다. 그는 평생토록 낡아빠진 조그마한 성경책을 항상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도 이 성경을 높이 들고 선서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이었습니다. 그 성경으로 인해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유산은 없어도 됩니다. 쓸데없이 돈 주려고 애쓰지 마세요. 명예를 줄 것도 없고, 권세를 줄 것도 없습니다. 오직 말씀 하나만 주면 사는 것입니다. 만일에 말씀을 못주었다면 다른 아무 것을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를 죽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도 아울러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 믿어서 내가 영원한 사람이 되고, 오직 그에게만 소망을 두고 삶으로써 현재의 삶의 의미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거듭나는 길 외에 달리 삶의 길은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민족에게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하던 나라들을 방문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 헐어버리고, 교회를 다 박물관 만들어버리고, 교회를 공장 만들어버렸더니 그 사십 년의 암흑기간에 어떻게 됐어요? 문화도, 인간도, 사회도, 나라도 다 없어졌어요. 다 비참해졌어요. 지난주간에 저는 러시아 사람들이 하는 무슨 연예프로가 있어서 한번 참석해보았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잘하는 그 무용을 보면서 저는 나름으로 다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너무 어렵고 괴로워서 그 돈 몇 푼 벌자고 우리 앞에서 춤을 춥니다. 어쩌다가 하나님 없는 암흑기를 보냄으로써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막지 못합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생만이 산 생이요, 말씀을 따라 가는 길만이 지혜의 길이요, 말씀으로 행하는 데에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 없는 문명, 말씀 없는 문화는 병든 것입니다. 말씀 없는 빈곤은 절망입니다.

말씀 없는 부()는 파멸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가 무엇입니까?내가 말씀을 바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리고 말씀에 따라 순종할 뿐더러 오직 말씀을 전하는 그 일에 전심전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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