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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비유(요한복음 1 : 1 -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호칭들이 복음서를 비롯하여 성서의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한 목자라든지, 포도나무, 생명의 떡, 그리고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라고 할 때의 그 상징적 표현 등등, 참으로 많은 각기 다른 비유와 상징적 호칭들이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좀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야다 선지자다, 혹은 인자다 하는 이 말들까지도 결국은 비유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그 지칭이 의미하는 바는 언제나 따로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대함에 있어서 먼저 기억할 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유라고 하는 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말씀 그대로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는 목자라고 했다하여 우리가 표현 그대로를 받아들여 예수님을 양치는 목자로 이해해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그 목자라는 말이 주고자하는 의미를 아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도 그 아들이라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이지, 조금 죄송스러운 표현입니다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누구란 말인가 하는 식으로 생각을 엮어나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비유란 어디까지나 비유이기에 표현과 꼭 같은 바로 그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라이크(like;유사한)이지 세임(same;동일한)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비유적인 호칭들이 갖는 그 독특한 성격과 개념들을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여러 가지의 비유를 사용했을까하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런 저런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보면서 나아가서는 종합적인 이해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대상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들 앞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하시는가 하면 양을 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해도 목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목자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대상에 따라 문화권이 다르고 여러 가지 생활 형태가 있기 때문에 각각 다른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맞는 비유를 들게 됨으로 이렇게 많은 비유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는 각각 독특한 개념과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본문에 기록된 이 "말씀"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이라는 말이 예수를 어떻게 소개하고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말씀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로고스'라고 하는 독특한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이 일상 주고받는 언어인 말을 두고는 '레마'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로고스라고 하는 말은 말이라는 같은 표현을 쓰는 말이기는 하지만 매우 차원 높은 의미를 가진 신비로운 말입니다. 그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이 로고스를 도(道)라고 번역하였으며 그 결과 중국 성경을 번역해 사용하던 우리 나라 초기의 구역성경에는 "태초의 도가 계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로고스라고 하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몇 가지의 특징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 로고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만 사용된 말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다른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이 로고스라는 말이 없습니다. 바울 서신에는 쓰여진 경우가 있습니다 마는 특별히 예수님을 가리켜서 로고스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로고스라고 표현한 것은 요한만이 사용한독특한 전문용어인 것입니다. 이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요한 계시록 19:13 말씀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표현을 사용한 요한복음은 성경이 기록되는 시대적 과정에 있어서 가장 후기에 쓰여진 책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사도 요한에 대해서는 베드로의 물음을 받은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2)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그는 가장 나이 어린 제자로서 가장 늦게까지 살면서 맨 마지막에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독교의 교리가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 기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예수님을 의사로, 이적기사를 행하는 분으로, 혹은 정치적인 메시야 또는 인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던 것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주라는 말로 바뀌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 요한복음에 가서는 예수를 로고스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표현은 지극히 변증적이며 설교적인 용어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분명히 그에 해당하는 대상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 때문에 사도 요한은 당시에 이미 예수님을 지칭하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여러 가지 표현이 있고 더욱이 예수님 자신이 쓰지도 않으신 이 로고스를 유독 사도 요한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할 때 거기에는 그만한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 소위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라고 하는 이단 사상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간단히 말하여 헬라 철학의 한 양상이 종교성을 가지고 기독교에 도전해 온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신도 인간도 아닌 피조물 중의 가장 으뜸인 그 어떤 존재를 설명하는 독특한 개념의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저들이 사용하는 로고스라는 말을 빌어서 당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로고스는 잘못된 것이며 예수가 로고스 됨은 이런 것이라고 하는 변증적 입장과 선교적 이유에서 이 로고스라는 말을 쓰게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는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로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피조물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고스라는 말은 빌어왔으나 그 개념과 뜻은 완전히 기독교적인것으로 다시 정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로고스와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는 전혀 다른 개념의 로고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 요한이 예수를 로고스, 곧 말씀이라고 했을 때에 그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선재하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우리 인간으로 오시긴 했으나 인간 이전에 처음부터 계셨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님은 말 구유에 오신 분이지 말 구유에서 시작된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인간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나는 날이 생일이요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역사 이전에 계셨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크리스마스가 있다고 하여 예수님의 생애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되는 줄로 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사람이 되시기 전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로고스의 개념입니다. 사 도요한이 오늘 본문의 시작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한 것은 창세기 1:1의 "태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비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두 성경은 "태초"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태초라는 것은 천지 창조 이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라는 이름을 두고 굳이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만으로 이해 한다면 그것은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로고스로 부르게 되면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본 것은 예수이지만 그 예수의 존재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뜻에서 예수라는 이름 대신 로고스라는 말을 쓰게된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본래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우리가 만난 예수이전의 예수, 하나님 되신 예수를 먼저 생각함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기독론이라고도 말하는 빌립보 2:6-7에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예수는 결코 이 땅에 오셨을그 때의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된 말씀으로서의 예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밝혀 말하고 있는 가장 귀중한 교리는 예수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예수에서부터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의 본래성을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그의 신성을 설명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할 때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흔히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할때 쓰는 그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 원어상으로 보면 정관사가 있는 '호 데오스'가 아닌 정관사 없는 '데오스' 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다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합친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예수를 설명함에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말 대신에 하나의 비유로서 '예수는 로고스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들 초대 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으며 그리고 그 예수가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며 지금도 함께 계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우리소망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고 나갈 때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말씀을 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 기억 속에 내가 있으리라"는 말은 할 수가 있겠으나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말은 하나님 외에는 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마디가 바로 예수가 하나님 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계시는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설명할 때만이 쓰시는 자기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어디에나 항상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사자의 이빨이나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알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18:21-19:7)을 볼 것 같으면 아볼로 같은 사람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성령을 몰랐으며,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를 이야기하면서도 크리스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후에 성령을 받음으로 비로소 이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튼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현재성과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그분께서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종합하여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이요, 예수가 로고스다 하고 믿는 것이 바로 초대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말씀"이란 곧 계시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할 때 그것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마음과 뜻을 나타내고 전하는 수단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비유 중에 꿀먹은 벙어리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꿀을 먹긴 먹었지만 말을 못하니 그 맛을 표현할 길이 없고 따라서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란 말입니다.
사람으로서 듣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어쩌다 집안에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그를 위해서는 소리를 크게 질러야 함으로 온 식구가 싸움하듯 합니다. 농아 학교에 가보면 그들 중 90%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신체적인 구조로 보아서 혀와, 입, 성대 등은 완전한데 듣지를 못함으로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듣지 못할 경우에는 말할 수 있는 기능조차도 무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인간은 이 언어를 통해 서로를 알 수가 있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가정에 있어서도 가장 답답해하는 문제가 바로 대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가정에서의 대화 문제를 놓고"밥만 먹으면 되었지 대화는 무슨 대화냐?"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은 그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화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므로 이 대화가 없고서는 좋은 가정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란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또한 창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개념의 배경에는 헬라적인 것과 히브리적인 각기 다른 성향의 개념이 있습니다. 따라서 헬라적인 개념에서의 말은 일단 주술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마술사들이 주문을 외우면 어떤 변화가 오는 것과도 같은 마술적 능력이 동반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쁜 말을 계속하면 나빠지고 좋은 말을 계속하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그렇게 하므로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특별히 주술적으로 이해했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히브리 사람들은 말에 대한 개념을 신학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하여 말은 곧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축복도 저주도 그리고 기도도 말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말은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신명기 14:28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고받는 말로서 한 것까지도 다 들으시고 그 들으신 대로 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망할 놈이라고 하였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저주가 되고 축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란 결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창조도, 구원도 그리고 심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서 예수님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실 때도 있었지만 일어나라 하심으로 일어나고 에바다 하심으로 눈이 열리며, 죽은 자를 향해서 나오라 하심으로 나사로가 살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말씀을 곧 능력이요 역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마치 태양을 이해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여기 태양이 있다고 할 때 태양이라는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가 태양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태양에서 전달되어지는 빛이 지구에까지 이르고 또한 우리 시야에 들어옴으로 비로소 태양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태양이 거대하다 하더라도 빛이 발산되지 않으면 모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통해서 본체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본체가 있으면 거기로부터 말씀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의 표현 곧, 본체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명의 본체로부터 온 것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생명으로부터 들려지는 말씀, 보여지는 말씀, 사건으로 나타나는 말씀, 이 모두가 다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 나타난 대로 말하자면 로고스가 말씀이요, 선지자들의 예언이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생애로 나타난 사건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제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읽혀집니다. 뿐만 아니라 상징으로 주어진 말씀인 성찬식이 있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입으로 먹는 말씀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내용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곧 말씀이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가 우리에게로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뜻을 전달받아 우리 안에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바꾸어 말해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말씀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사람이 되셨다'는 말 대신에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쓰고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영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단 사상인 노스틱주의자, 곧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저들은 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육에 대한 생각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오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도깨비나 귀신이 출현하듯이 잠시 잠깐 보였다가 가신 분이지 우리들처럼 이 더러운 죄악 세상의 몸이 되어 살았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는 도깨비 같은 그런분이 아니라 진짜 몸을 입으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며, 그 말 대신에 육신이 되셨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그만큼 변증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장면을 증거 하는 데에도 사도 요한 만이 "내가 목마르다"(19:28) 그리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라고 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장면을 담은 남다른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요한이 다른 복음서에 없는 표현을 굳이 써야 했던 것은 예수는 결코 도깨비 같은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짜사람이었음을 변증하려는 사도 요한의 논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예수가 말씀이라고 하는 거기에는 하나님이면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 다미안(Damian, St.)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다미안은 오모로카의 섬에서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살기로 맹세를 하고 저들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모로카의 환자들은 다미안을 향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와서 이러느냐며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는 병들었고 당신은 손이 있으며, 우리는 장님인데 당신은 눈을 뜬 처지에서 괜히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니 복음을 받아드릴 리도 없습니다. 마침내 다미안은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문둥병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리하여 다미안이 문둥병자가 되자 비로소 그 환자들이 저 사람은 진정 우리를 위하여 온 사람이라며 그의 말을 듣고 복음을 받아드리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듭니다. 말은 있으나 통하지 않고 마음에 와서 부딪치는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역사가 이루어져야하는가 할 때 바로 그 역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써 사람이 되어오셨고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언제나 듣는 자의 자세는 말하는 자의 의도를 향해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겸손히 100퍼센트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말씀하시는 분의 뜻이 내게 와서 역사 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능력과 그 지혜와 그 생명력이 나에게 작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 때에 그 본체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하여 그 분을 사람으로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오셨다하여 말씀뿐인 것으로 생각해서도 아니 됩니다. 어디까지나 말씀하시는 본체로,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을 향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십니다. 내가 계시자요 내가 말씀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았으면 곧 하나님을 만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또 아버지를 보자는 것이냔 말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결론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요한은 말씀으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말씀으로 보았으며 독생자의 영광으로 보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를 바로 보는 믿음의 눈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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